묵향 15권 4화 – 알카사스의 긴급 원로 회의

알카사스의 긴급 원로 회의

프루니아는 크루마 제국의 북부에 있는 고원 지대다. 그렇기에 여름에 비교적 시원하다는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크루마 황실에서는 그곳에 여름 궁 전을 제법 근사하게 만들어 놓았다. 여름 궁전 앞에 거대한 인공 호수까지 만들어서 황족들이 수영이나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대륙에서 손꼽히는 호화로운 궁전 이었다.

여름 궁전의 후원에 위치한 대규모 영구 이동 마법진들. 황제가 이곳에 행차할 때 거의 1개 사단급에 가까운 호위 병력과 수많은 시종들이나 고관대작들이 함께 움직이기에 그 마법진의 규모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 거대한 마법진들 중의 하나에서 빛이 번쩍 하더니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나타났다. 호위병은커녕 동행조차 없이 혼자 나타난 사내를 보고 마법진 주위에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이때, 마법진 주위에 한 시간 전부터 부동자 세로 꼿꼿하게 서 있던 기사가 날렵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그 사내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시옵소서, 황태자 전하.”

“무슨 일인가?”

“예, 의회 의장이신 어스무스 엘 그랜딜 공작께서 황태자 전하를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이쪽으로 가시옵소서.”

“알겠다, 안내하라.”

“갑자기 나를 소환한 이유가 뭔가? 그랜딜 경.”

의회 의장인 어스무스 엘 그랜딜 공작은 침착한 눈빛을 하고 있는 40대의 사내를 자부심 어린 눈길로 바라봤다. 황태자를 마법사로 교육시킨 것은 그린레이크 공 작을 비롯한 원로원이 군부를 밀어내고 이뤄 낸 최고의 성과였다.

총사령관인 미네르바의 권력이 더욱 강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황태자에게 손을 썼다. 일단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쪽이 다음 세대 크루마의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은 당연한 진리였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를 우두머리로 하는 군부는 황태자를 기사로서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린레이크를 우두머리로 하는 궁정 대신들 및 마법사들은 그를 마법사로서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 간에 치열한 신경전이 오갔고 결국은 그린레이크가 승리했다. 군사 쪽이 아닌 궁정 안에서 벌어지는 각종 크고 작은 일 을 관장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린레이크 쪽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폐하께옵서 갑자기 쓰러지셨기 때문입니다. 황실 주치의와 신관들은 아무래도 오늘 저녁이 고비가 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뭣이? 도대체 병명은 뭔가? 궁 안에는 수많은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있을 텐데, 어찌 치료를 할 수 없다는 말이냐?”

“그것이 정신적인 부분이기에 손을 쓸 여지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으셨기에…….”

황태자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요 근래 인근의 제국들이 몬스터들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지만, 오히려 크루마에는 여태껏 있어 왔던 몬스터들마저도 모습을 감 춘 상태였다. 그렇기에 크루마는 평온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어떤 전쟁에 대한 소문도 없는 상태였기에 황제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충격이라고?”

“예, 엘프리안이 골드 드래곤에게 파괴되는 영상을 보신 후 그렇게 되셨습니다.”

황태자는 그랜딜 공작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뭣이?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고?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인가?”

“예, 어제 오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시민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아직까지는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퍼지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골드 드래곤이 왜 엘프리안을 공격했단 말인가? 드래곤은 이쪽에서 건드리지 않는 한 평화를 지키는 종족이라고 마법 학교에서 배웠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말인 가?”

“황태자 전하께서 배우신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부분을 세밀하게 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쩌면…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엘프리안의 소멸에 켄타 로아 공작이 관여된 듯합니다.”

“아니, 켄타로아 공작이… 왜?”

“그것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엘프리안에서 돌아온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심문해 본 결과 켄타로아 공작은 골드 드래곤이 엘프리안을 공격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타이탄 생산 공장의 인부 및 주요 장비들을 시외로 급히 대피시켰고, 갖가지 명목을 붙여 수도에 주둔 중이던 군대 및 기사단도 시외로 빼돌렸습니다. 어쩌면 이번에 벌어진 대규모 사냥 대회도 황족과 귀족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꾸민 계략일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 “으음……. 알겠다. 일단 이 모든 것은 비밀리에 처리하되, 경이 책임지고 철저히 진상을 파악하도록 하라.”

“옛, 전하.”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후원에 있는 침실에 계십니다. 아무래도 그쪽이 조용하니까 말입니다.”

“잘했다. 수도까지 파괴된 마당에 폐하께서 쓰러지셨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좋을 게 없겠지. 나는 폐하께 가 볼 테니 뒷일은 경이 알아서 처리해 주기 바라네.” “옛, 전하.”

알카사스의 왕궁 지하 4층에 마련된 비밀회의실. 이곳은 튼튼한 강철과 벽돌로 이루어진 매우 튼튼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방의 외곽에는 다섯 겹의 마법 방어막 까지 쳐져 있어서, 사실상 이 안에 거주하는 한 타살당할 염려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곳은 알카사스의 최고 권력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이 회의실로 애용 하는 장소였다.

“모두들 바쁠 텐데 한 명도 빠짐없이 회의에 참석해 주어 고맙소.”

회의에 참석한 노인들을 쭉 훑어본 의장이 말을 이었다.

“그대들과 몇 가지 토의할 것이 있어서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소. 먼저, 정보에 의하면 크루마의 수도 엘프리안이 골드 드래곤에게 파괴되었다고 하오.”

의장의 말에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원로원 노인들이 경악한 어조로 외쳤다.

“오오, 그것이 사실입니까? 의장님.”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오. 몬스터들이 날뛰는 마당에 드래곤까지 가세해서 크루마 같은 거대 제국의 수도를 파괴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소.”

“그렇다면 최근 몬스터들이 갑자기 인간들이 그들의 적이라도 되는 양, 군대 규모의 조직력을 갖춰서 공격을 가해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드래곤까지 엘프리안을 공격했다면, 혹시나 몬스터들의 뒤에 바로 그 드래곤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의장님.”

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우려하는 것도 바로 그것일세. 바로 그 때문에 원로원을 소집한 것이야. 혹시 그 드래곤이 몬스터들을 사주하여 인간을 공격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하는 생 각이 든단 말이야. 드래곤이 뒤에 있다면 여태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몬스터들의 집단 난동도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하지. 안 그런가?”

드래곤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지목되자 그곳에 앉아 있던 원로들은 당혹한 듯 저마다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공포에 질려 얼굴빛이 하얗 게 질리고 있었다. 그들도 드래곤의 실체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 파괴력이 어떤 것인지 수많은 서적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의 진상을 정확히 밝히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시급히 그에 따른 대책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엘프리안 정도 되는, 방어 마법진 으로 싸여 있는 거대 도시를 브레스 한 방으로 초토화시킬 정도라면 최소한 웜급을 상회하는 드래곤일 가능성이 큽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드래곤에 대한 자료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웜급이 아니라 에인션트급일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브레스의 힘이 강하기로 이름나 있는 레 드 드래곤이나 실버 드래곤이라면 웜급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골드 드래곤이라면 에인션트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장은 손을 들어 일단 조용히 시킨 후 말을 이었다.

“나도 자네들의 의견에 찬성하네. 그리고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만, 에인션트급 드래곤이 이 사건을 일으켰다면 거의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사실이야. 일단 가 장 시급한 일은 그 드래곤이 엘프리안을 공격한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야. 그리고 이렇다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엘프리안을 공격했다면 그 드래곤이 몬스터들 을 조종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봐야 하겠지.”

의장은 원로들을 쭉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선에서 들어오는 보고도 썩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일세. 벨리아드, 자네가 좀 설명해 주겠나?”

“예.”

의장의 지시를 받은 벨리아드는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몬스터들의 집단 난동에 본국은 거의 대부분의 전력을 투입하고 있지만, 썩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 근래에는 근위 기사단을 제외한 4 개 기사단 모두를 투입했지만, 전선에서 이렇다 할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기에 저희 정보부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종합해 본 결과 한 가지 방 법을 도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벨리아드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것은 바로 용병 기사들을 대규모로 모집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원로들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원로들 중의 한 명이 벌떡 일어서서 차분한 어조로 주위를 조용히 시켰다. 그는 바로 알카사스의 대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카스피아였다.

“자자, 조용히들 하시오.”

그런 다음 그는 의장과 벨리아드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용병 기사를 모집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디서 용병 기사를 뽑는다는 말입니까? 아르곤 제국이 대규모로 용병 기사들을 흡수했고, 또 제2차 제국 전쟁 때 코린트도 대규모로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방법으로 우수한 용병 기사를 모집한다 는 말입니까? 쓰레기 같은 것들을 모집하려고 해도 웃돈을 얹어 줘야 할 겁니다. 그런 만큼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카스피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벨리아드는 실례되지 않게 정중한 어조로 반론을 펼쳤다.

“카스피아 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동쪽 대륙에서 용병 기사들을 모집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모두들 웅성거리는 가운데, 벨리아드는 손을 들어 모두를 조용히 시킨 후 말을 이었다.

“자자, 모두들 조용히 들어 주십시오. 카스피아 경께서 말씀하신 대로 요 근래 계속되는 전쟁과 군비증강으로 인해 실력 있는 용병 기사를 동쪽 대륙에서 모집하 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 동쪽 대륙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직접 서쪽 대륙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약간씩 흘러 들어오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대략적으로나마 그곳의 사정을 파악할 수는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아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크로우(Crow)’라는 용병단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희들은 그들을 포섭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원로들 중의 한 명이 낮은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전쟁터를 떠도는 그 피에 젖은 까마귀들이라는 전설적인 용병단을 말하는 것인가?”

“예, 맞습니다.”

벨리아드가 수긍하자 여기저기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만큼 그들은 철의 장막을 치고 있는 타이렌 제국을 통과할 정도로 엄청난 소문을 몰고 다니는 존재들 이었던 것이다.

“오오, 바로 그 전설적인 용병단 말인가?”

“나도 숫자는 많지 않지만 서쪽 대륙 최강의 용병단이라는 소문을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소.”

하지만 카스피아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벨리아드에게 말했다.

“크로우 용병단이 막강하다는 것은 나도 소문을 통해 알고 있네. 하지만 그들을 고용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걸세. 좋아, 뭐 돈 문제는 제쳐 두고라도, 자네는 어떻게 서쪽 대륙에 가서 그들과 접촉한다는 말인가? 서방으로 가는 관문은 타이렌 제국이 꽉 틀어막고 있네. 그들은 동방과 서방의 무역을 아주 장기적으로 독점 하기 위해, 양쪽의 교류를 철저히 막고 있어.

자네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래전에 타이렌 제국에 가 본 적이 있네. 타이렌 제국 동쪽에는 작은 구획이 하나 있지. 나는 줄곧 거기에만 있다가 돌아왔다네. 그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사람에게 물으니까 동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곳에서만 생활할 수 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서방에서 온 사람들도 그것은 마찬가지가 아 니겠나?

거기에다가 그놈들은 공간 이동 마법을 왜곡하는 괴상한 마법까지 개발해 내지 않았나? 거대한 마법 탑을 건설하고, 그곳에서부터 괴이한 힘을 방출하여 공간 이 동 마법을 왜곡하도록 조작해 놨기에 설혹 저쪽의 좌표를 알고 있다고 해도 공간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타이렌 제국은 그런 식으로 양쪽을 완전히 분리시켜 놓고, 그사이에서 철저하게 단물을 빨아먹고 있지.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로 서방으로 가서 크로우 용병단과 교섭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일세. 혹시 타이렌 제국을 멸망이라도 시킨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꼭 서방으로 가야만 그들과 교섭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벨리아드는 주위를 쓱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물론 타이렌 제국이 철저하게 막고 있기에 서방으로 직접 들어가서 교섭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타이렌에 의뢰하면 어떨까요? 넉넉하게 수수료를 지급 한다면 그들도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이 분명합니다. 정보부에서는 만약 크로우 용병단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전세를 완전히 뒤집어엎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 고 있습니다.”

의장은 주위를 쭉 둘러본 후 말했다.

“혹시 반대하는 사람 있나?”

아무도 대답이 없자 의장은 벨리아드에게 말했다.

“벨리아드, 자네는 즉시 타이렌 제국으로 가게. 자네가 제안한 것이니만큼, 자네가 맡는 것이 좋지 않겠나?”

“예, 의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