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5화 – 아비규환이 된 케락스
아비규환이 된 케락스
“이봐!”
아르티어스의 지명을 받은 팔시온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무 놀란 탓인지 대답조차 못하고 버벅거리며 서 있었다. 그것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어른이 부르면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냐? 아직 교육이 좀 덜 된 것 같아.”
교육이라는 말에 팔시온은 진저리를 치며 즉시 대답했다.
“그그극! 아, 아닙니다요, 어르신. 왜 그, 그러십니까?”
“우리 아들 못 봤어?”
“저, 정원으로 나가던데요.”
“그래?”
아르티어스가 정원에 나갔을 때, 다크는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상당히 높은 나무 위였기에 아르티어스는 기겁을 했다. 물론 거기서 떨어진다고 해도 별 탈이 없 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르티어스의 눈에 보이는 다크는 가냘픈 소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않아서 아르티어스는 발걸음을 멈췄다.
다크는 높직한 나무 위에 앉아서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바로 아르티엔이 기거하고 있는 방이었다. 그녀는 아르티어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아르티엔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오래전에 봤던 사부의 모 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푸근함과 함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정말 사부가 환생한 게 아닐까? 어쩌면 표정 하나하나가 똑같지?”
뭔가에 홀린 듯 중얼거리던 다크는 거칠게 머리를 흔든 후 투덜거렸다.
“젠장! 내 기억을 훔쳐봤을 테니 똑같은 것은 당연하겠지. 하, 하지만……. 빌어먹을! 근데도 보면 볼수록 왠지 마음이 편하단 말이야. 에이, 기분은 좀 그렇지만 사부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내가 참고 말지 뭐.”
다크는 다시금 시선을 여관 쪽으로 옮겨 아르티엔을 멍하니 훔쳐봤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곳에 아르티엔은 사라지고 유백과의 추억만이 남아 있었다. 다크의 눈은 조금씩 젖어 들었다. 저렇게 인자한 사부와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니…….
“사부님… 부디 용서해 주세요.”
다크의 말을 엿듣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들이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만약 상대가 아르티엔만 아니었다면 갈가리 찢어 버렸 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것도 도저히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존재인…….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호비트의 지능이 드래곤에 비해 떨어진다고 하지만 겉모습의 조그마한 변화가 이렇게까지 영향을 주다니……. 아버지 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일 때는 퉁명스럽게 대하더니 저 밥맛 떨어지는 모습으로 변하자, 그다음부터 아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아르티어스는 위기감을 느꼈다. 더 이상 가만히 놔뒀다가는 저 심술궂은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 둘을 떼어 놔야만 했다. 아르티어스는 다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얘야, 뭐 하고 있냐?”
다크는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렸다. 아르티어스가 밑에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가볍게 몸을 날렸다. 사뿐히 땅에 내려선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 다.
“그러는 아빠는 여기서 뭐 해요?”
“네가 보고 싶어서 나왔지. 나하고 산책이라도 할래? 너하고 산책해 본 게 언제인지 이제는 기억도 안 난다. 제발, 응?”
“산책하고 싶으시면 혼자 하시라니까요. 저는 바쁘다구요.”
“바쁘다고? 으으으.”
매몰차게 자신의 제의를 거절하는 다크를 보자, 아르티어스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잠시 안타까운 눈으로 다크를 바라보던 아르티 어스는 생각해뒀던 회심의 카드를 내밀었다.
“참, 바쁘겠구나. 이제는 코린트에 가야 할 테니까 말이야. 안 그래?”
“코린트요? 코린트에는 왜요?”
“아, 그거야 너를 잡아 뒀던 놈들이 코린트 놈들이었잖아. 불같은 네 성격에 그 얄미운 놈들을 그냥 놔두지는 않겠지? 안 그래?”
“글쎄요…….?”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미적거리는 듯 대답하자, 선수를 치듯 재빨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네가 코린트에 갈 거니까 그 애들한테 떠날 준비를 하라고 일러뒀다. 그러니까 너도 빨리 준비하거라. 그러고 보니 너하고 예전에 함께 여행하던 기억이 나는구 나. 그때는 둘이서만 단란하게 다녔기에 참 즐거웠었는데, 이제는 일행이 많아서 그런지 영 기분이 안 나지 않니? 그러지 말고 우리 둘이서만 갈까? 코린트 따위야 나 혼자서도 충분하지.”
“그럴 필요……”
다크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눈치 챈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빨리 가자. 모두 준비를 해 놨을 테니까 너도 준비하거라.”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총총히 여관으로 돌아가 버렸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다크는 투덜거리면서 아르티어스를 따라 여관으로 들어갔다.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곧바로 자신을 뒤따라 들어오자 기겁을 했다. 설마 곧바로 따라 들어올 거라고 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 날까 봐 식탁에 앉아서 계란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한담을 나누고 있던 팔시온 일행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 다.
“이봐! 준비는 끝났어? 이 새끼들 봐라. 떠날 준비하라고 한 게 언제인데 여기서 계란 마사지나 하고 앉아 있다니. 교육을 좀 더 시키든가 해야지, 원. 역시 호비트 란 족속들은 줘 패야 말을 듣는다니까.”
아르티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팔시온 일행은 화들짝 놀라 일어서며 말했다. 처음에는 아르티어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곧 은근히 자 신들을 향해 흔들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주먹을 보고 본능적으로 그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옛, 준비는 벌써 끝났습니다.”
사실 팔시온 일행이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가져온 짐이 없었으니 준비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케락스로 공간 이동한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다크 일행은 케락스 시내로 들어가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많은 인파들이 마차에 짐을 싣고, 혹은 짐을 이고 지고 이동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까지 섞여서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인파에 당황한 아르티어스를 보며 다크가 이죽거렸다.
“아빠, 혹시 잘못 온 거 아니에요?”
며칠 전에 다크를 찾기 위해 케락스로 공간 이동한 적이 있었던 아르티어스는 그때의 좌표를 기억하고 있었고, 바로 그리로 공간 이동한 것이다. 불과 며칠밖에 시 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때와 너무나도 상황이 다르자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좌표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왜냐하면 코린트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수많은 인파들이 피난이라도 가는 듯 크고 작은 짐을 허리에 지거나 들고, 부대끼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전쟁터가 바로 옆이라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자신의 품속에서 책자를 꺼내어 찾아봤다. 하지만 그곳에 기록된 좌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이상하네. 여기가 분명한데?”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팔시온이 겁에 질려 밀려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붙들고 말을 건넸다.
“무슨 일입니까?”
그 사람은 팔을 뿌리치려다가 팔시온의 떡이 되어 있는 험상궂은 얼굴을 보는 순간 순순히 말해 주었다. 그는 팔시온과 오랫동안 대화하고 싶지 않은지 빠른 어조 로 말했다.
“당신들도 살고 싶으면 빨리 도망가쇼.”
대충 말하고 도망치려는 그를 팔시온은 우악스럽게 잡고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상대의 대답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전쟁이라도 터졌습니까? 아니면 몬스터라도 쳐들어온답니까?”
“케락스시가 곧 박살 난다고 해요.”
“케락스시가 박살난다구요? 아니, 갑자기 왜 케락스시가 파괴된다는 말입니까? 코린트의 기사단은 대륙 최강이라고 들었는데, 누가 감히 케락스를 파괴한다는 말입니까?”
그 사람은 말을 하고 있을 시간도 아깝다는 듯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빨리 떠들었다.
“사악한 드래곤이 케락스시를 박살 내려고 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소. 어제 밤새도록 중요 시설을 시외로 대피시킨 것을 보면 뻔하지 않겠소? 병사들이 시내 에 쫙 깔려서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공개 처형까지 하고 있지만, 대낮에도 수많은 짐을 시외로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을 보면 뻔하지 않소? 자, 그만 나도 가 봐야겠으니 놔 주시오.”
사내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팔시온의 팔을 뿌리치며 서둘러서 피난 행렬에 합류해 버렸다. 팔시온은 사내의 말뜻을 이해하느라 잠시 멍한 상태였지만, 곧이어 대 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상대의 말은 팔시온이 알아듣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나왔다.
“큰일 났는데요. 케락스 시내에는 다음에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르신.”
“왜?”
“엄청 사악한 드래곤이 케락스시를 가루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답니다. 지금 들어가 봐야 좋은 꼴 못 볼 것 같은데요.”
“뭐? 드래곤이라고?”
아르티어스가 시큰둥하게 물어 오자, 팔시온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사악한 드래곤이 날아온다는 시내로 들어가기는 싫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도 드래곤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가 얼마나 강한 드래곤인지 팔시온은 알지 못했다. 아르티어스가 현신한 모습을 본 적도 없었고, 오랜 기간 인간의 모습을 한 아르티어스와 어울리 다 보니 그가 절대자인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어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사악한 드래곤이 아르티어스보다 강한 드래곤이라고 생각했다. 그 렇다면 대답은 뻔하지 않은가? 살고 싶으면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어르신, 미쳐 날뛰는 드래곤이랍니다. 자고로 미친놈한테는 약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덩치도 엄청 클 뿐 아니라 성질도 더럽다고 하던데요. 케락스시 를 박살 낸다고 호언하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히 강한 드래곤인 모양이에요. 빨리 도망가죠, 예?”
아르티어스는 궁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자식인데 케락스를 부수겠다고 하는 거지? 나 같은 놈이 또 있었나?”
그것을 보며 아르티엔이 한심스럽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멍청한 녀석. 이런 것도 아들이라고 두었다니. 바로 너를 말하는 거잖아.”
“예? 덩치 크고 성질 더럽게 생기고 미쳐 날뛰는 드래곤이라잖아요. 나같이 몸매 좋고, 성질 좋고, 비교적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드래곤과 비교하시다니요. 에 이! 어떤 자식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꼴을 들어 보니 우리 드래곤 종족의 수치야, 수치.”
아르티엔은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머리야. 네가 얼마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벌써 까먹은 게냐?”
“그거하고 이거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맹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아르티어스. 하지만 곧이어 뭔가 떠오른 듯 분노한 표정으로 외쳤다.
“아니, 그럼 이 자식들이 잘못을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튀고 있는 겁니까?”
아르티어스는 피난 행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에 거품을 물고 외쳤다.
“이런, 쳐 죽일 놈들! 어르신이 훈계를 하러 온다는 말을 들었으면, 푸짐한 선물을 준비해서 아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내빼고 있다니!”
다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아르티어스의 푼수 짓을 보고 있다가, 피난 행렬 쪽으로 가려고 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빠, 빨리 가자구요.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배 안 고파요?”
한창 분노에 몸을 떨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자신의 손을 꼭 잡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함지박만 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래그래, 가자, 가. 그건 그렇고 여기에 헬파이어 한 방만 먹이고 가면 안 될까?”
그 말에 아르티엔이 기가 막힌다는 듯 아르티어스의 뒤통수를 갈기며 외쳤다.
“이 자식은 언제철들려고 이래? 이러니까 너보고 미친 드래곤이라고 그러잖아!”
“아야야야! 뭐라구요? 그러니까 미친…….”
그제야 아르티어스는 팔시온이 하던 얘기가 전체적으로 떠올랐다. 아르티어스는 손짓을 까딱거려 팔시온을 불러들이며 말했다.
“야, 너 이리 와 봐.”
“예?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놈 말이다.”
엉거주춤 다가오는 팔시온의 멱살을 그러쥔 후 아르티어스는 으르렁거렸다.
“뭐? 덩치 크고, 성질 더럽게 생기고, 미쳐 날뛰는 드래곤이라고?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이데? 응?”
그 말에 팔시온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설마하니 아까 자신이 뻥 튀겨서 얘기한 대상이 아르티어스일 줄이야……. 그 순간 모든 것을 체념하는 팔시온이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을 수가. 그래, 평탄했던 내 삶에 저 성질 더러운 드래곤을 만난 것 그 자체가 신의 저주였어. 이렇게 허구한 날 쥐어 맞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팔시온의 두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렸다.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