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6화 – 나도 여자라구요!

나도 여자라구요!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콰당 열리면서 기사 한 명이 새파래진 안색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저, 전하, 큰일 났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수많은 서류 뭉치들을 들여다보다가 귀찮다는 듯 외쳤다. 철수 작업이 진행된 이래 계속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그 의 신경은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던 것이다.

“또 뭐야?”

“크, 큰일 났사옵니다. 일전에 찾아왔던 그 드래곤이 다시 왔사옵니다.”

“뭣이?”

“예전에 동쪽 별궁을 초토화시켰던 그 드래곤 있지 않사옵니까? 그 드래곤이 치레아 대공과 함께 왔사옵니다.”

“그래, 지금 그들을 어디로 모셨는가?”

“예, 제1귀빈관으로 모셨사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경비병들이 실례를 저질렀던 것 같은데, 그들의 보고를 받고 출동한 근위대 기사들이 그들을 알아볼 수 있어 서 운이 좋았사옵니다.”

황궁 후원에 있는 제1귀빈관은 여타 다른 귀빈관들과 달리 각국의 황제를 접대하기 위해 건설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건설 후 30여 년이 흘렀지만, 겨우 10여 명이 들렀다 갔을 정도로 최고의 귀빈만을 모시는 곳이었다.

“그런가? 최대한의 예의를 다해서 극진히 모시라고 지시하라.”

“옛!”

이때 옆에서 레티안이 조언을 건넸다.

“전하, 제임스 각하에게 접대를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왜?”

“제임스 각하는 치레아 대공이 이곳에 있을 때 잘 보살펴 주지 않았사옵니까?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 에 그분이 적임자라고 생각하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빨리 그에게 전해라.”

“예, 전하.”

한참 철수 작업을 진두지휘하던 제임스는 부하의 보고에 깜짝 놀랐다.

“뭐라고? 그녀가 왔다고?”

“예, 각하. 로체스터 전하께옵서 각하께 그들의 접대를 명하셨사옵니다.”

“지금 어디에 계시나?”

“제1귀빈관에 모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알겠네. 그녀가, 그녀가 왔단 말이지?”

부하의 보고에 급히 달려가는 제임스의 마음은 마냥 설레기만 했다. 그는 이런 설레임이 자신이 이상적인 기사로서 존경하는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기쁨 때 문이라고 생각했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밖에 서 있는 시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치레아 대공 전하를 뵙기를 청하시옵니다.”

“들라고 해라.”

다크가 대답하자, 조용히 문이 열리며 제임스가 실내로 들어섰다. 실내에는 아르티어스와 다크, 그리고 또 다른 특이한 모습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서쪽 대륙에서 온 듯, 피부색이 색다른 이민족이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런 이민족에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실내로 들어선 제임스의 시 선은 곧장 다크에게로 가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사옵니까? 대공 전하.”

이곳에서 포로 생활을 할 때에 제임스가 상당히 깍듯이 대접해 주었기에 다크는 그에게 비교적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크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 며 짓궂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안녕해. 그런데 전에 만났을 때와는 사정이 많이 바뀐 것 같지?”

제임스도 같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상큼한 그녀의 미소에 가슴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그렇군요.”

제임스는 곧장 옆에 앉아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위대하신 분을 뵙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다크가 뭐라고 잘못을 지적하기도 전에 아르티어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봐, 내가 아니라 이분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지. 내 아버지시거든.”

아르티어스의 아버지라는 말에 제임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추며 정중하게 아르티엔에게 인사했다.

“몰라 뵈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이렇듯 위대하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코린트의 제1근위대를 맡고 있는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라고 합니 다.”

아르티엔은 제임스를 자세히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아주 젊은 것 같은데 대단한 호비트로구먼. 내 제법 오랜 세월을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이 정도 인물을 만난 것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 “과찬이십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아르티엔이 제임스를 너무 치켜세우는 것 같자, 심통이 난 아르티어스가 이죽거렸다.

“흥! 저 정도가 뭐 대단하다고 그래요. 저런 녀석을 마차에 하나 가득 실어와도 내 아들만 하겠습니까?”

“쯧쯧쯧!!”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말이 못마땅한지 혀를 찬 다음, 제임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아직 철딱서니가 없어서 그래.”

“아니, 저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치레아 대공 전하와 견주겠습니까? 저분은 저희 기사들의 이상형이기에, 저도 대공 전하와 같은 위대한 무인이 되 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허허, 참 겸손한 젊은이로군.”

아르티엔의 감탄에 이번에는 아르티어스도 토를 달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치켜세우는 말이었으니까.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식사 준비를 시킬까요? 아니면 그 전에 간단히 시원하게 마실 거라도 준비할까요.”

“오오, 좋아좋아. 우선 포도주를 한잔하기로 하지.”

“예, 당장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다크와 드래곤 두 마리가 제임스와 우아한 만남을 가지고 있을 때, 팔시온 일행은 옆방에서 열심히 얼굴에 계란을 문지르고 있었다. 팔시온은 얼굴에 열심히 계란 을 문지르다가 벽에다 신경질적으로 던져 버리며 씩씩거렸다.

“젠장! 열심히 문질러서 이제 겨우 멍이 옅어지나 했더니, 팬 데 또 패냐? 전보다 더 심해졌잖아!”

그런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미디아가 가스톤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미카엘 못 봤어?”

“아아, 밖에 나갔어.”

“밖에는 왜?”

“여기 도착한 다음에 나보고 혹시 마법으로 멍 자국을 없앨 수 있는지 묻잖아.”

“너는 치료 마법은 못 배웠잖아.”

“그렇지.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말해 줬거든. 내가 그거 알면 이러고 다니겠느냐고 말이야. 그랬더니 여기 신관을 불러 줄 수 있는지 알아 보러 갔어.”

잠시 후 미카엘이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말했다.

“으하하하, 역시 다크와 함께 다니면 편하단 말이야. 한마디만 하면 재까닥 되잖아.”

그 말에 팔시온이 발끈해서 외쳤다.

“뭐야? 두 번만 편했다가는 사람 잡겠다. 이제는 다크고 나발이고 징그럽다, 징그러워. 다크 따라다녀서 좋았던 일 있어?”

그 말에 가스톤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너희들은 다크 덕분에 무술이라도 배웠잖아. 그녀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이 언감생심 그래듀에이트를 꿈이라도 꿀 수 있었을 것 같아? 지금은 너희들 모두

다 당당한 그래듀에이트 아니냐.”

그 말에 팔시온은 더욱 열 받는다는 듯 외쳤다.

“웃기지 마. 그래듀에이트? 말이 좋아서 그래듀에이트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뭐 변한 거라도 있어?”

“변한 거 있지. 대륙을 떠돌던 말단 용병에서 이제는 타이탄까지 지급받은 치레아 기사단의 품위 있는 기사잖아.”

“기사? 허구한 날 쥐어 터지는 게 기사냐? 처음에 그 녀석 만났을 때, 그때 알아봤어야 했어. 멍청하게 그때 눈치 못 채고 함께 다니다가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냐? 그놈의 드래곤 하트인지 뭔지 찾으러 다닌다고 목숨 걸고 블루 드래곤까지 만나러 쫓아갔었지.

그뿐이냐? 토지에르에게 납치당해서 몇 날 며칠을 고문당했지. 그리고 이번에는 크루마에도 잡혀가서 죽을 고생을 했는데…, 뭐? 품위 있는 기사? 웃기고 있어. 내 얼굴을 보고 그딴 소리가 나오냐?”

확실히 팔시온의 얼굴은 처참했다. 전날 밤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떡이 된 것도 모자라서, 미친 드래곤이라는 말 한마디로 인해 오크조차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비 참하게 변해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다크를 원망하기는 좀 그렇잖아. 다크는 그래도 우리에게 얼마나 잘 대해줬냐?”

“젠장! 내가 다크 때문에 그래? 그 망할 드래곤 때문이잖아. 그런데 왜 우리가 드래곤하고 함께 다니다가 이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하긴…, 그 말이 맞아. 그런데 생각하면 참 신기하지? 남들은 평생을 가도 구경 한 번 하기 힘들다는 드래곤하고 우리는 맨날 같이 부대끼며 살고 있으니까 말이 야.”

똑똑똑.

방금 전까지 주고받던 말이 있었기에 모두는 당황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혹시나 밖에 있는 사람이 아르티어스라면? 하지만 곧이어 그들은 그럴 리가 없다 는 것에 무언중 의견일치를 봤다. 그것은 결코 노크 따위를 할 아르티어스가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누, 누구요?”

그러자 밖에서 상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하신 신관이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미카엘은 다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 시녀와 함께 서 있는 신관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나도 젊고 잘생긴 신관을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며 미카엘이 물 었다.

“혹시 수련생은 아니시죠?”

“허헛, 안심하시지요. 저는 아레스 신전의 대신관인 브레드 에스타리아라고 합니다. 제가 너무 젊게 보여서 불안하신 모양인데, 원래 실력 있는 신관일수록 뛰어 난 신성 마법으로 젊음을 유지하여 신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대신관이라니! 아무리 신전에 수천 골드를 싸들고 간다고 해도 대신관으로부터 직접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만큼 대신관이라는 직책은 교단 측의 입장에서 봤을 때 지고하신 신분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그렇습니까? 자, 이쪽으로…….”

“예, 그러죠. 얼굴이 상당히 많이 다치셨네요. 그럼 곧바로 치료를…

대신관은 곧바로 미카엘을 치료하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내로 들어서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실내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상 태가 양호한 편이었던 것이다. 특히나 저쪽에서 계란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차마 보기조차 안타까울 정도였다. 대신관은 네 사람 중에서 가장 상태가 안 좋다고 생각되는 떡대 좋은 사내에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혹시 몸에도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팔시온이 연신 계란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대신관은 말했다.

“그렇다면 옷을 좀 벗으셔야겠는데요. 전체적으로 얼마나 심한 상처를 입었는지 확실하게 알아야 어떻게 치료를 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포션을 사용하려면 아무래도 벗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팔시온이 머뭇거리자 대신관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했다.

“허허, 다 같은 남자들 아닙니까? 그리고 저분들도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빨리 치료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옆에서 미디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나는 여자라구요.”

대신관은 놀랍다는 듯 그녀를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울퉁불퉁 잘 단련된 근육질로 이루어진 육체의 탓도 있었지만, 얼굴이 원체 망가진 탓에 차마 여자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너무 얼굴을 심하게 다치셔서 설마…..”

대신관은 황급히 말을 멈추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렇다면 무녀를 한 명 불러드리겠습니다. 옆방에서 따로 치료를 받으시는 것이 좋겠군요.”

미디아는 옆방으로 가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 내가 미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에는 봐줄 만한 얼굴이라고 다들 그랬는데……. 지금 내 꼴이 이게 뭐야, 흑흑.”

대신관은 미디아가 나간 후 한숨을 푹 내쉰 다음 팔시온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팔시온이 옷을 벗자, 온몸의 상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검상을 비롯한 수많은 크고 작은 상처도 있었지만, 신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그런 과거의 상처가 아니었다. 그의 몸은 온통 푸르죽죽한 멍으로 뒤덮여 있었 다.

“허어, 놀랍군.”

대신관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말했다.

“과연 기사님들의 몸은 다르신 것 같군요. 보통 사람이 이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면 벌써 관을 짜야 할 겁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무자비한 짓을 한 겁니까? 아주 교묘하게도 상대는 기사님이 견딜 수 있는 체력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합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

옆에서 말을 듣고 있던 가스톤과 미카엘은 새삼 진저리를 치며 그 처절했던 밤을 떠올렸다. 하지만 특히나 아르티어스에게 가장 많은 교육을 받았던 팔시온은 뿌 드득 이를 갈았다.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을 바에는 차라리 속 시원하게 개겨나 보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나도 과거에는 쾌남 팔시온으로 불린 사람이라구. 그런데 내가 왜 허구한 날 그딴 도마뱀 눈치까지 보면서 맞고 살아야 하냐 이거야. 나도 이제 더 이상은 못 참 아. 두고 보자구. 사나이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과연 제1귀빈관의 대접은 특별한 것이었다. 식탁 옆에서 다섯 명의 악사들이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거대한 탁자 위에는 수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평상시에 상류층의 물을 먹은 듯 행동해 왔던 미카엘마저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진귀한 음식들이었다. 그리고 각자의 앞에 놓여 있는 식기들마저도 모두 금은세공품들로, 드워프가 세공한 듯 예술품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제임스는 모두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뒤,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제임스는 한군데에 모여서 서 있던 시종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움직여 식사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귀빈들이 손짓으 로 먹고 싶은 음식을 가리키면 시종들은 그 음식을 작은 접시에 담아서 가져왔다. 그 작은 접시는 각자의 앞에 놓여 있던 순금 접시 위에 놓여졌다. 이때 한쪽 귀퉁 이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관의 치료를 받아서 얼굴의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팔시온이었다. 그는 입 안 가득히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젠장! 이거 감질나서 먹겠나. 가져오려면 좀 많이나 갖다 주지. 한 입 털어 넣으면 없잖아. 안 그래? 미카엘.”

그 말에 미카엘은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젠장! 치료나 끝난 후에 먹으러 오라고 하지. 하필이면 내가 치료받을 차례가 되니까 밥 먹으러 오래.”

팔시온은 미카엘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뭔가 중얼거리고 있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평상시에는 귀족물을 먹은 듯 갖은 폼을 다 잡았던 그였다. 미카엘에게 지금처럼 자신을 과시할 좋은 기회가 있겠는가? 마치 오랫동안 이런 생활을 했던 것처럼 우아한 폼을 잡으며 음식을 먹을 것이고, 또 자신들에게 이런 것은 이렇게 먹는 거라고 으스대고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저렇게 주위를 한 번씩 힐끔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까? 이리저리 궁리해 본 팔시온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야, 미카엘!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귀족물 먹었다고 거짓말한 게 들통 나서 그러는 거야? 짜식! 그렇게 의기소침하지 말고 나처럼 편하게 먹어. 뭐, 우리가 언제 주변 신경 쓰고 먹었냐? 그냥 입 안에 퍽퍽 집어넣으면 되는 거지 뭐.”

팔시온의 말을 들은 미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그래, 귀족처럼 먹을 줄 모른다고 기죽을 필요 없어. 넌 그렇게 안 먹어도 멋있잖아. 팔시온을 봐, 포크만 쓰고도 멋있게 먹고 있잖아.”

미디아의 칭찬에 입 안에 음식을 연신 퍼 넣고 있던 팔시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음식은 복스럽게 먹어야 한대.”

팔시온의 말에 미카엘은 인상을 벅벅 쓰며 말했다.

“이 자식들이, 닥치고 밥이나 처먹어.”

이때 시종이 들어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식당 문이 열리며 로체스터 공작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시종 한 명이 아주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술 한 병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로체스터 공작은 아르티엔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올린 후 말했다. 이미 제임스에게서 아르티엔의 존재에 대해 보고를 받았기에 그는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게 위대하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술은 황제 폐하께서 위대하신 분께서 왕림하셨다는 것을 아시고 특별히 하사하신 것입니다. 제가 직접 따라 드 리는 영광을 누려도 될는지요.”

아르티엔은 포도주병을 힐끗 본 후 경악했다.

“이, 이것은 대륙에 몇 병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는 아그립파 1세가 아닌가?”

로체스터 공작은 상대의 박식함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코린트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포도주라는 아그립파 1세가 맞습니다. 이 술은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황실에만 내려오는 진품이지요. 아마 현재 남아 있는 술은 단 세 병밖에 없을 겁니다. 나머지는 전에 코린티아시와 함께 파괴되었으니까요.”

오랫동안 레어에 있었기에 인간 세상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코린티아시가 왜 파괴되었지? 혹시 너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도시 파괴자가 아니라구요. 코린티아시는 몇 년 전에 크루마에서 유성 소환 마법으로 박살 내 버렸죠.”

아르티어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한 후 로체스터 공작에게 시선을 돌리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유성 소환 따위로 도시를 파괴한 것을 보면 크루마는 정말 나쁜 놈들이지? 유성 소환은 금지된 마법인데 말이야.”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로체스터 공작은 노회하게 대처했다.

“허허허, 어쩔 수가 없죠. 알고도 당한 저희들의 잘못이라고 봐야죠.”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엘프리안이 파괴된 걸 아느냐?”

“예.”

“내가 자네를 대신해서 원수를 갚아 줬는데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그거 한 병 더 얻을 수 없을까? 그때 힘을 너무 썼더니 목이 컬컬해서 말이지.” “예?”

로체스터 공작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위대하신 분의 부탁이신데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더욱이 저희들의 원수까지 갚아 주셨는데…….”

로체스터 공작은 뒤에 서 있던 시종에게 나직하게 지시했다.

“이거 한 병 더 가져와.”

거기까지 말한 후 로체스터 공작은 아르티엔을 힐끔 본 후 명령을 수정했다.

“두 분이 오셨는데 한 분께만 드리면 예의가 아니지. 내가 나중에 폐하께 말씀드릴 테니 두 병 다 가져오너라.”

“옛, 전하.”

로체스터 공작의 말을 들은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는 좋아서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