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7화 – 눈물의 부자 상봉
눈물의 부자 상봉
집무실로 들어오는 로체스터 공작의 안색이 밝은 것을 보고 레티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되신 모양이옵니다, 전하.”
“응, 모든 일이 잘 해결됐어. 이제 수도를 옮길 필요는 없으니 철수 작업을 중지하라고 전하게.”
“축하드리옵니다, 전하.”
“허허헛, 다 경의 덕분이야. 경의 아그립파 1세를 뇌물로 건네자는 말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어.”
“과찬이시옵니다. 그럼, 아그립파 1세 두 상자가 케락스시를 구한 셈이군요. 아무리 귀한 포도주라고 하지만 수도가 파괴되는 것에 비할 수 있겠사옵니까?” 레티안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핫! 두 상자가 아니라 단 세 병일세. 왠지 상자째로 준다고 하면 가치가 떨어질 것 같아서 전 대륙에 단 세 병만이 남아 있다고 했거든. 그랬더니 그 드래곤 이 은근히 협박을 하며 한 병 더 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아주 크게 인심 쓰는 척하면서 한 병 더 줬지. 그랬더니 입이 쭉 찢어지더구먼.”
레티안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코린티아시가지가 유성 공격 마법으로 파괴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모든 시민들이 철수할 만한 시간 여유가 있었을 정도였는데, 황실에서 애지중지하는 포도주들을 피난시키지 못했다면 말이 안 된다. 코린티아시는 파괴되었지만, 황실의 물품은 모두 다 무사히 안전한 곳으로 옮겼기에 아그립파 1세 또한 전량 다 무사히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상태였다.
“역시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대단하시옵니다.”
이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경비병이 들어오며 말했다.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고 하게.”
“옛.”
곧이어 제임스가 들어왔다. 로체스터 공작은 미소 띤 얼굴로 제임스의 공을 치하했다.
“역시 처음에 경을 보내기를 잘했어. 거물급 드래곤이 왔다는 것에 대해서 경이 전해 주지 않았다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거든. 그리고 그 드래곤이 포도주를 아 주 좋아한다는 정보를 빨리 보내줬기에 대책을 세울 수 있었어. 하하핫, 이제 모든 것이 잘된 것 같군. 적당히 달래서 보내면 끝이거든.”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곧이어 제임스는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드래곤이 베크렐 드 드루이드 후작을 잡아오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뭐? 베크렐? 그게 누구지?”
옆에서 레티안이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녀는 코린트 제국의 귀족 족보를 죄다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예. 케락스에서 1백 킬로미터쯤 남쪽으로 가다보면 드루이드라는 지방이 있사옵니다. 그곳을 다스리는 영주이온데, 그의 아버지 대부터 궁정에서 이렇다할 직위 를 얻지 못했기에 전하께서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이옵니다.”
“그런가? 그런데 그를 왜?”
“치레아 대공이 탈출했을 때 그의 딸과 관계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딸은 그녀를 아버지의 성노리개로 선물할 생각을 했던 모양이옵니다.”
“그래? 하지만 그 정도는 웬만한 놈들은 다 하는데, 그 죄를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것도 귀족을 말이야.”
“하지만 여기서 드래곤의 제의를 거절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드루이드 후작은 약간 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사옵니다. 너무 많 은 세금을 농노들에게서 거둬들이는 바람에, 농노들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하옵니다.”
“글쎄…, 하지만 지방 영주가 폐하께 30퍼센트의 세금만 제대로 납부한다면 그가 얼마를 거둬들이든지 상관할 수는 없지 않나? 폐하의 몫을 빼돌렸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드루이드는 농노들의 영지 이탈이 너무 심하옵니다. 거의 태반에 가까운 농노들이 탈출했고, 그 농노들을 잡아들인다고 인근의 군대까지 동원되었을 정도였사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직도 잡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그에게 영지를 맡긴다면 결국에는 단 한 명의 농노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 점을 생각하시옵소서,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러니까 경의 말은 영지의 관리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밀어붙이자는 말이군.”
“예, 전하.”
“좋아, 폐하께는 내가 말하지.”
로체스터 공작은 결심을 한 듯 제임스를 향해 명령했다.
“그놈을 당장 잡아들이게.”
“옛, 전하.”
밖으로 나가려던 제임스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금 돌아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전하, 혹시 치레아 대공의 일행들 중에 섞여 있는 기사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셨사옵니까?”
“뭐? 글쎄…, 그 드래곤들한테 신경 쓴다고 미처 거기까지 여유가 없었네. 뭐 특이한 점이라도 있었나?”
“그게 말이옵니다, 저…, 제가 잘못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 중에 미카엘이 끼어 있는 것 같았사옵니다.”
“뭣? 미카엘이?”
“예, 전하. 식사 중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수행이 고되다고 도망친 놈이 치레아 대공 같은 거물급을 수행하는 기사가 되었다니, 말이 안 되지 않나?”
“예전의 미카엘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제가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르겠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필요 이상으로 딱딱한 어조로 힐책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경은 치레아 대공 일행을 잘 영접해서 보낼 궁리나 하게.”
“옛, 전하.”
제임스가 나가고 난 후, 로체스터 공작은 레티안에게 말했다.
“잠시 혼자 생각할 게 있네. 경은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예? 예, 전하.”
레티안이 나간 후 로체스터 공작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 에잉, 못난 놈 같으니라고.’
옛일을 회상하는지, 로체스터 공작의 두 눈이 아련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의 방해로 인해 리사의 사랑을 얻지 못하자 울분을 달래기 위 해 미친 듯이 무술을 익히는 것에만 전념했었다.
그러다가 메를리나라는 미모의 여인과 뒤늦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몄다. 자신의 마음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리사라는 존재를 잊는 데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달콤한 메를리나와의 사랑도 단 5년으로 막을 내려야만 했다. 몸이 약했던 그녀는 난산을 견디지 못하고 첫 아이를 낳다가 죽었기 때문 이다.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로체스터 공작은 태어난 아기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아주 잘생긴 사내아이였는데도 오히려 그 점이 로체스터 공작의 속을 뒤집어 놨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사랑스러웠던 메를리나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로체스터 공작은 아들로 인해 부인이 죽은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기에, 자연히 쌀쌀맞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전통적인 무가인 로체스터 가문의 적자로 태어났으면서도, 가문의 검술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로체스터 공작이 어쩌다가 한 번씩 직접 교육을 시 킬 때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짜증 섞인 꾸중으로 교육은 끝이 나곤 했다.
그래서 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로체스터 공작의 부하들에게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무술의 기초를 배워야 할 어린 시절을 어영부영 태평스럽게 보내 버렸던 것이다.
그 아이가 청년기에 들어섰을 때, 로체스터 공작은 그제야 가문의 검술을 전수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조금 강도 높은 수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수련은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아들의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다.
“못난 녀석, 그까짓 수련을 못 견디고 가출을 하다니……. 휴! 그나저나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내가 죽어서 그녀의 얼굴을 어찌 볼지 걱정이군. 그러고 보니, 메를리나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군.”
로체스터 공작은 잠시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급히 집무실을 나섰다. 처음에는 울적한 마음에 산책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로체스터 공작의 발길은 어느덧 제1귀빈 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치레아 대공을 수행하고 온 기사들은 어디에 묵고 있는가?”
로체스터 공작의 질문을 받은 시녀는 파랗게 질리며 황급히 대답했다.
“예, 저 앞방이옵니다,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막상 방문 앞에 섰지만 망설이기만 할 뿐,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다.
미카엘은 걱정스럽다는 듯 대신관에게 물었다.
“저, 흉터 없이 깔끔하게 될까요?”
대신관은 빙긋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찢어진 상처가 없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약간 시간을 들여 천천히 치료하면 아주 깨끗하게 나을 수 있으니까요.”
이때 낮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그 소리에 미카엘이 신경질 난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또 뭐야? 왜 내가 치료받으려고만 하면 오는 거야?”
문이 쓱 열리면서 로체스터 공작이 들어서자, 팔시온과 가스톤은 화들짝 일어서서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적국이라고 하지만, 상대는 공작이라는 지고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미카엘은 두 눈이 왕방울만 해지더니, 대신관의 허리를 잡고 몸을 번쩍 들어다가 자신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관에게 손짓을 해 보이며 로체스터 공작이 말했다.
“자네가 여기에는 웬일인가? 환자가 있었나?”
“예, 전하. 여기 계신 분들이 아무래도 몸의 상태가 안 좋다고 치료를 요청해 오셔서 말이옵니다.”
“그런가?”
로체스터 공작이 휙 둘러보니 수행원들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어디서 패싸움이라도 벌였는지, 온 얼굴에 멍투성이였던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의아해할 수밖 에 없었다. 다크를 수행하는 기사들이 이토록 심하게 두들겨 맞을 이유가 없고, 또 맞았다고 하더라도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는 드래곤이 둘씩이나 있는데 저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치레아 대공은 보기보다 성격이 과격한 모양이군.’
자신의 아들을 찾을 수 없었던 로체스터 공작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방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군. 편히들 쉬게나.”
그런 다음 그가 방을 막 나서려고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전하. 대공 전하께서는 왼쪽 두 번째 방에 계시옵니다.”
그리고 대신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안녕히 가시옵소서, 전하.”
그런 다음 곧이어 대신관의 짜증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보시오, 이거 좀 놔 주시겠소? 그래야 치료를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무슨 말인가하여 로체스터 공작이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 대신관의 허리를 잡아 자신의 앞을 가리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로체스터 공작을 엿보고 있던 미카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헉!”
미카엘이 숨넘어가는 듯 괴상한 소리를 내지를 때, 로체스터 공작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감추기 어려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카엘, 진짜 너로구나.”
미카엘을 바라보는 로체스터 공작의 눈은 놀라움으로 부릅떠졌다. 오랜만에 만난 미카엘을 바라보는 로체스터 공작의 심경은 복잡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다시 보 는 아들로 인해 엄청 반가웠지만, 곧이어 엉망이 된 얼굴을 보며 그 마음은 점차 짜증스러움으로 바뀌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감정도 잠시,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는 아들의 상체에 나 있는 얼룩진 멍 자국을 보며 그의 마음은 안쓰러움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몸은 좀 괜찮으냐?”
로체스터 공작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미카엘은 감히 고개는 들지 못한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부자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팔시온과 가스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귀족인 척하는 줄만 알았었는데, 미카엘이 코린트 최고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로체스터 공작의 아들일 줄이야.. 속이 깊은 가스톤은 분위기를 살피다 가 팔시온과 대신관의 손을 이끌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 아버지.”
미카엘이 울먹이자, 로체스터 공작은 가만히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고생이 심했나 보구나.”
“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래, 네가 몸성히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나는 아레스신께 감사드린단다.”
생각 외로 부드러운 아버지의 반응에 감히 얼굴을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미카엘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두 눈은 차가웠던 과거와는 달리 슬픔으로 젖어 있었다. 아버지의 두 눈을 바라본 미카엘의 가슴은 더욱 미어지는 듯했다. 과거 자신이 떠날 때의 그 자신감 가득한 아버지 의 모습과는 달리, 아버지는 세월에 많이 퇴색된 듯 상당히 지쳐 보였다. 차라리 어렸을 때처럼 엄하면서도 차가웠던 그때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미카엘이었다. “많이 늙으셨군요, 아버지.”
“허허헛, 나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 같구나. 이제는 미래보다는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을 보면 말이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못난 자식이 근심만 끼쳐 드렸습니다.”
“괜찮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네 어머니가 무척 기뻐할 테니까 말이다.”
“예?”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네 어머니의 묘지에 같이 가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방문이 쾅 열리며 팔시온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다크! 야, 굉장한 소식이 들어왔어.”
그것을 보고 아르티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니, 저 녀석! 손이 부러졌나? 노크는 왜 안 하는 거야?”
하지만 팔시온은 아르티어스의 말은 아예 무시한 채 다크에게 말했다.
‘싸나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그래,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겉으로는 아예 아르티어스를 무시하고 있었지만, 속으로까지 그럴 수 없었던 팔시온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바로잡으면서 다크에게 말했다. “미카엘이 진짜 굉장한 귀족 나으리였더라 이거야. 방금 전에 로체스터 공작이 찾아왔는데 말이야. 글쎄, 그분의 아들이라지 뭐냐.”
팔시온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넘어가자 아르티어스의 눈이 실쭉 가늘어졌다.
‘저게 미쳤나??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생각이 어떻게 돌아가던, 둘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다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팔시온에게 물었다.
“정말이야?”
“글쎄 말이야. 나도 놀랐다니까. 그놈 맨날 자기가 엄청난 귀족이었다고 할 때, 순 거짓말인 줄 알았었는데……. 하긴 그러고 보면 행동 하나하나가 왠지 우아하고 품격이 있긴 했지. 유달리 잘난 척을 해 대서 재수가 없기는 했지만 말이야.”
가스톤도 방금 전에 본 광경을 떠올리는지 초점을 흐리며 말했다.
“둘이서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데, 정말 가슴이 찡하더라구.”
“그래? 정말 축하할 만한 일이군.”
“그렇지?”
“내일 후작 녀석만 손봐 준 후 돌아가려고 했는데, 며칠 더 머물러야겠어. 미카엘에게도 시간을 줘야 할 것 아니겠어?”
“공작 전하, 아직도 집무실에 계셨사옵니까?”
레티안은 서둘러서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서며 말을 걸었다. 워낙 늦은 시간이었기에 그녀는 우선 공작의 침실로 갔다가 그곳에 없자 이쪽으로 와서 그런 지 약간 거친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으음, 생각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래, 밤도 깊었는데 무슨 일인가?”
“예, 공작 전하. 크루마의 첩자들에서 긴급 전문이 도착했사옵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전하께서 흥미로워하실 것 같아서 말이옵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레티안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 중에서 하나를 건네며 보고했다.
“예, 켄타로아 공작이 엘프리안이 파괴된 것의 책임을 지고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고 하옵니다.”
“뭣이! 미네르바가?”
경악했던 로체스터 공작은 곧이어 이성을 회복한 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설마…, 잘못 알았겠지. 그녀는 크루마 전력의 핵이 아닌가? 그런 그녀를 투옥시키다니 말도 안 되지.”
“그건 아닌 모양이옵니다. 첩자의 보고에 따르면, 그녀는 투옥된 것이 확실하옵고, 곧 그녀에 대한 군사 재판이 열릴 것이라고 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군 사재판의 책임자가 어스무스 그랜딜 공작이라는 것이옵니다.”
“사실인가?”
“예, 거의 정확한 정보인 모양이옵니다.”
“그렇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로군. 그랜딜 공작이라면 원로원파인데 말이야. 미네르바도 손쉽게 빠져나가기는 힘들겠군. 맞아, 아주 좋은 기회야.”
로체스터 공작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군사 재판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확실히 조사하라고 이르게.”
“예.”
“그리고, 그랜딜 공작하고 비밀리에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나?”
기대를 가지고 물어본 것이었지만, 레티안의 대답은 회의적이었다.
“그것은 힘들 것이옵니다. 아무리 그가 군부와 대치하는 반대파의 수장이라고 하지만, 자국의 일을 해결하자고 적국인 본국과 손을 잡을 정도로 미련한 인물은 절 대로 아니옵니다.”
“그런가? 아까운 일이군. 이 기회에 미네르바를 확실하게 밀어내야만 하는데 말이야.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잠시 궁리하던 레티안이 의견을 내놓았다.
“역공작을 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어떻게 말인가?”
“예, 본국에서 미네르바를 구원해 달라고 크루마 황실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옵니다. 그러면서 뒤로는 미네르바와 본국이 얼마나 친했었는지를 슬며시 흘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본국과 크루마의 미묘한 관계가 있기에 그 점이 오히려 미네르바에게 독으로 작용하지 않겠사옵니까?”
“흐음, 괜찮군. 하지만 그것으로는 조금 약할 수도 있겠어.”
“그러면서 또 한 가지 작전을 더 병행하는 것이옵니다.”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로체스터 공작을 바라보며 레티안은 음흉스런 어조로 말했다.
“어스무스 그랜딜 공작을 암살하는 것이옵니다. 물론 그 암살은 미수에 그쳐야 하겠죠. 그러면서 크루마의 군부와 원로원이 정면 대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유도하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군사 재판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원로원에서 가만히 있겠사옵니까? 어쩌면 미네르바의 처형까지도 유도해 낼 수 있을 것이옵니 다.”
“좋은 계획이다. 즉시 시행하도록 해라.”
“옛, 전하, 명령대로 이행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리고…….”
그녀는 두 번째 서류를 건네며 보고했다.
“참, 크라레스의 첩자들에게서 회답이 왔사옵니다.”
“크라레스? 크라레스에서 왜?”
“전하께옵서 용병대장의 위치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책망하듯 말했다.
“아, 맞아 그랬지. 요즘 일이 많다보니 깜빡 잊어버렸군.”
그런 다음 로체스터 공작은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가 키에리를 찾은 것은 케락스시가 드래곤에게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중압감을 함께 나눌 만한 동료가 필요해서였다. 하지만 그 일이 너무나도 순조롭게 해결되어 버렸기에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 바로 그 보고서이옵니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 일대에서 격투를 벌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을 뿐, 그 외의 것은 알아낼 수 없었다고 하옵니다. 몇몇 마 법의 흔적들, 그리고 타이탄을 사용한 듯한 거대한 무기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옵니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타이탄의 발자국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 이상하다고 하옵니다.”
“그런가……. 이 일을 어떻게 한다? 로젠을 불러라.”
“옛, 전하.”
레티안이 로젠을 호출하기 위해 방을 나간 후 로체스터 공작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메를리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오? 미카엘이 돌아왔다오.”
로체스터 공작은 싱긋 미소 지었다.
“아주 훌륭한 기사로 성장했더군. 처음에는 워낙 한심한 몰골을 하고 있기에 못 알아봤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크라레스의 기사가 되어 있는 것은 정말 의외 였지만, 그 녀석은 당신을 닮아서 사람 보는 눈은 있는 것 같소. 치레아 대공의 개인 기사단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말이오. 아마도 크라레스가 적국으로 존재하는 한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검술을 미카엘에게 전수하지는 못할 것 같소. 대신 뛰어난 무가로서의 로체스터 가문의 명성은 크라레스에서 계속 이어질 테니 돌아가신 아버님도 용서해 주시지 않겠소?”
까미유는 날쌔게 좌우로 움직이며 주변을 살펴본 후 돌아와서 로젠에게 보고했다. 아직 해 뜨기 직전이기는 했지만, 주위를 살펴보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밝았다. “주변에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 일단 이곳은 적국이니까 대비를 안 할 수 없지. 너하고 오스카는 주변을 살펴보며 흔적을 찾아라. 나는 이곳에서 나머지와 함께 대기하겠다.”
“알았수. 오스카 따라와라.”
까미유는 오스카와 함께 날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가 버린 후에 로젠은 메글리에게 말했다.
“경은 타이탄에 탑승한 채 대기하도록 해. 어쩌면 적에 상당한 실력자가 끼어 있는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옛, 전하.”
까미유와 오스카는 곧이어 마법이라도 직격한 듯 깊이 파인 구덩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구덩이들의 크기가 대단히 컸기에 그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무슨 자국일까요? 아주 깊이 파인 것을 보면 마법이라도 쓴 게 아닐까요?”
“글쎄……. 아니야, 마법은 아니고 뭔가 묵직하면서도 거대한 것이 날아와서 부딪친 것 같아. 여기를 봐.”
까미유는 재빨리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 후, 구덩이의 제일 안쪽에 있는 둥그렇게 솟아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 엄청난 물리적인 충격이 가해진 거야. 그 때문에 이 주위의 흙들이 몽땅 위로 날아가 버린 거지.”
구덩이 외곽 부분의 미끈한 부분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곳이 미끈한 것을 보면, 대단한 힘이 가해졌음에 틀림없어. 안 그러면 이렇게까지 깨끗한 경사면이 만들어질 수는 없거든.”
“그렇다면 적 타이탄이 철퇴라도 던졌다는 겁니까?”
“글쎄, 철퇴는 아닌 것 같아. 멀리서 철퇴를 던졌다면 이런 흔적이 생길 리가 없지. 이것은 좀 더 높은 각도에서 떨어진 물체에 의해서 생긴 거야. 물론 자네 말대로 먼 곳에서 타이탄이 철퇴를 던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철퇴가 어딘가에 있어야 할 거 아닌가? 혹시 녀석들이 회수해 갔다면, 이 근처에 타이탄의 발자국 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도 없잖아. 주위의 풀들을 봐. 어디에도 타이탄처럼 묵직한 것들이 돌아다닌 것 같은 흔적은 하나도 없어. 심지어 마차가 지나간 흔적조차 없잖아?”
“이해할 수가 없네요. 놈들이 날아다니는 것도 아닐 텐데…….”
“글쎄 말이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구만. 어쨌건 이것만 가지고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좀 더 찾아봐야겠다. 너는 이쪽으로 가 봐. 나는 저쪽으 로 가 볼 테니까.”
“예.”
잠시 수풀 여기저기를 뒤지던 까미유는 화살 한 대가 커다란 돌덩어리를 뚫고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래 웬만한 힘과 속도로는 화살이 돌을 파고들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상당한 실력의 기사로군.”
화살은 거의 20센티미터가 넘게 푹 박혀 있었다. 까미유는 검을 뽑아서는 솜씨 좋게 돌덩어리를 잘라 내기 시작했다. 과연 어느 정도 깊이로 들어갔는지 알아 보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로젠에게 보고할 자료로 쓰기 위해서였다.
이때 저 멀리서 오스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그는 서둘러 작업을 끝내고 잘라 낸 돌 조각을 가지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것 좀 보십시오.”
오스카가 가리키는 곳에는 아름드리나무가 밑동째 박살이 나서 쓰러져 있었다.
“대장 말대로 마법은 아닌 모양입니다. 나무를 박살 낸 후 저 뒤쪽에 있는 땅바닥까지 푹 팬 것을 보면, 철퇴 같은 둥근 것을 던진 것이 확실해요.”
“철퇴는 아니야. 뭔가 굵고 긴 사슬 같은 것 끝에 묵직한 철구가 붙어 있는 형식인 듯하다. 이쪽을 봐. 사슬 같은 것이 쓸고 지나간 흔적이 있지 않나? 물론 철퇴에 도 사슬을 붙이는 경우가 있지만, 상대방의 발자국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철퇴는 절대로 아니야. 철퇴라는 것은 원래가 근접 공격 무기잖아.”
“그럼, 채찍 같은 것일까요?”
“전체적인 흔적은 그런 것 같지만, 그걸 사용한 놈의 발자국을 찾을 수가 없잖아. 대체 뭐지? 크라레스 놈들이 뭔가 신무기라도 개발한 것인가?”
“글쎄요,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짐작이 안 가는데요.”
“뭐 어쨌든 그건 적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겠지. 그건 그렇고, 우선 생존자를 찾는 게 급선무다. 자네는 저쪽으로 가 봐. 나는 이쪽으로 가지. 딴사 람은 몰라도 한두 사람은 탈출에 성공했을 거야. 그들이 달아난 흔적을 찾아보라구.”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