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1화 – 털이 숭숭 난 다리

털이 숭숭 난 다리

푸석푸석한 흙먼지만 날리는 황량한 땅이 끝없이 이어지는 벌판에도 봄은 찾아오는지 여기저기서 푸르른 새싹들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 사위는 점차 어둠에 잠겨들며 붉은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둥루젠의 한 작은 촌락민들은 마을 옆 공터에 피워 놓은 화톳불 주변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 을 맞이해서인지 먹을 것은 별로 없었지만 촌락민들의 안색은 밝고 넉넉해 보였다.

화톳불에 걸려 있는 거대한 솥에는 그동안 비축해 두었던 얼마간의 고기와 나물을 아낌없이 넣고, 모든 촌락민들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국을 끓이고 있었다.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끓는 국에서 퍼져 나오는 구수한 냄새는 촌락민들의 코를 사정없이 사로잡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촌락민들이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 던 어느 순간이었다.

번쩍!

지상에서 약 3미터쯤 되는 공간에서 갑자기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촌락민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고 그 빛을 바라봤다. 시간 이 조금 흐르자 빛 무리 가운데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더욱 촌락민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였다. 빛 무리의 중심 부위가 시커멓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둥그런 물체 두 개가 불쑥 튀어나오며 땅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사람은 순식간에 균형을 잡으며 우아하게 착지했다. 일단 착지에 성공한 그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으아아악!”

“헉!”

촌락민들은 허공에서 사람이 튀어나오자 기겁을 하며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놀라기는 빛 속에서 튀어나온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차원 이동을 끝내자마자 자신들의 눈앞에 웬 털이 숭숭 난 시커먼 것들이 괴성을 지르며 와글거리는 것을 보자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던 것이다.

“이, 이건 뭐라고 하는 몬스터냐?”

아르티어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이미 냉정을 되찾은 묵향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에이씨, 또 잘못 왔잖아요.”

묵향의 투덜거림에 아르티어스는 천천히 자신들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커먼 것들을 둘러봤다. 처음 봤을 때는 너무 지저분하여 몬스터라고 착각할 정도 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호비트였다. 그 호비트들은 모두들 화톳불 주변에 둘러앉아 자신들을 경악한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지 아직 덜 익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호비트도 있었고, 볼이 불룩 튀어나오도록 입 안 가득 음식물을 머금고 있는 호비트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놀라서인지 아예 음식물을 삼킬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없이 많이 여행을 다녀 본 아르티어스였지만, 이렇게 지저분하고 멍청하게 생긴 호비트는 난생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어째 생긴 것은 호비트 같은데, 하고 있는 꼬라지는 오크냐?”

아르티어스가 몬스터라고 착각할 정도로 그 촌락민들의 차림새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들 모두 털가죽으로 몸을 두르고는 있었지만, 이들이 입고 있는 것은 옷 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너무 단순했다. 그저 큼직한 털가죽을 대충 잘라서 이어 붙여 몸에 둘러놓은 형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가죽을 가늘고 길게 잘라서 허리를 질끈 동여매어 상체에 두르고 있는 털가죽을 고정했다. 그 털가죽 밑으로 또 다른 가죽이 삐쭉 내려와 있는 것을 보면 아마 하의도 가죽으로 만들어 서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아르티어스가 어이가 없었던 부분은 그들의 머리 모양이었다. 수컷들은 앞머리를 빡빡 밀었고, 뒷머리는 한 가닥으로 길게 땋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암컷 들은 머리를 밀지는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여러 가닥으로 땋아서 그 끝에 갖가지 색깔의 수실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있었다. 좀 늙은 몇몇 암컷들은 그 끝에 작은 방울을 달고 있기도 했다. 나름대로 모양를 낸다고 수실이나 방울을 달고는 있었지만 머리카락을 얼마나 감지 않았는지 온통 기름기로 번질거리고 있었다.

그런 괴상한 머리 모양에다가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그 위에 털가죽으로 잔뜩 몸을 감싼 것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으니 아르티어스로서는 몬스터 들이 떼거리로 모여 있는 줄 착각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그들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을 때, 촌락민들도 얼이 빠진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괴상한 복장의 이방인들을 바 라보고 있었다. 그저 짐승 가죽을 걸치고 있는 자신들에 비해 이방인들의 옷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바람만 불어도 살짝 날릴 것 같은 하늘하늘한 천으로 된 옷이었다. 그리고 이방인들 중의 한 명은 정말이지 특이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오 도록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피부색은 창백하리만큼 희었다.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번엔 뭐가 잘못된 거지? 그만큼 좌표가 정확한지 몇 번씩이나 확인했는데 말이야.”

이리저리 손가락을 꼽아보며 아르티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묵향의 얼굴은 확 찌그러졌다.

“아빠! 또 좌표를 잘못 계산한 거예요?”

“글쎄다, 난 분명히 제대로 한다고 했는데, 그나저나 내 살다 살다 이런 미개한 호비트들은 처음 보는군.”

아르티어스의 눈에 비친 미개한 호비트들은 지금 난리가 아니었다.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던 호비트들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암컷들은 비명을 지르며 새끼들 을 데리고 부리나케 뒤로 달아났고, 수컷들은 허겁지겁 자신의 주위에 놓여 있는 창이나 활을 주워든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의 몇 명은 허리에 찬 반월형으로 생긴 길쭉한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일단 대충이나마 무장이 갖춰진 수컷 몇몇이 자신들 딴에는 잔뜩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르티어스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인지 그들이 쥐고 있는 창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심드렁한 눈빛으로 하는 꼴을 바라보던 아르티어스는 그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 혀 오자 갑자기 인상을 팍 찡그리며 소리쳤다.

“에이씨, 이것들은 목욕도 안 하나! 내 코가 썩는다, 썩어!”

아르티어스의 말대로 그들이 다가오자 코가 마비될 정도로 강한 악취가 풍겨 나왔다. 때가 꼬질꼬질한 털가죽 옷이나 꾀죄죄한 용모로 미루어 봤을 때 아주 비위 생적인 생활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화톳불 저 뒤편으로 여러 채의 이동식 천막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한곳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민족은 아닌 듯했다. 건장한 수컷들 몇몇이 무기를 들이밀며 위협적인 어조로 외쳐대고 있었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 의 위협적인 몸짓과 괴성에도 불구하고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묵향에게 질문을 던졌다.

“거참, 술에 취했을 때 봤으면 완전히 오크로 보이겠군. 그나저나 저놈들이 뭐라고 하는 거냐?”

“위대한 드래곤이신 아빠가 모르시는데, 미천한 호비트 따위인 제가 어찌 알겠어요?”

왠지 비비꼬인 묵향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맞받아쳤다.

“같은 미천한 호비트니까, 혹시 알까해서 물어본 거지.”

안 그래도 또다시 차원 이동이 잘못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던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빈정거림에 화가 나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잇, 젠장.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차원 이동 따위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반응에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차원 이동 따위? 감히 차원 이동에 ‘따위’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놈은 네놈밖에 없을 거다. 드래곤이 비록 신과 맞먹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아마 전 드 래곤 일족 중에서 차원 이동을 경험해 본 드래곤은 나밖에 없을걸?”

거드름을 피우며 아르티어스가 목에 힘을 주어 말하자 묵향은 웃기지 말라는 듯 빈정거렸다.

“오호! 그래요? 그럼 다른 드래곤들은 능력이 없어서 차원 이동을 못한다는 말씀이네요? 혹시 차원 이동이 어려워서 못하는 게 아니라, 할 수는 있지만 귀찮아서 안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아빠가 지금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다 마법 실력이 강하다고 착각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죠? 할아버지도 차원 이동을 안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묵향의 말에 한껏 거드름을 피우던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차원 이동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간만에 기분 좀 내려 했더니 이런 식으로 빈정거 리다니……. 물론 그 말이 사실이기는 했지만 아르티어스의 기분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그, 그게 자식으로서 애비에게 할 말이냐? 너를 위해서 이렇게 별 같잖은 차원을 떠돌아다니는 나에게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분노에 찬 표정을 본 묵향은 약간 찔끔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기분을 맞춰주기 시작했다.

“에이, 그냥 농담한 것 가지고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요? 그나저나 이렇게 아빠와 함께 여행을 다니니 정말 좋네요. 아빠도 여행 좋아하시잖아요. 기분 푸시라 “구요.”

묵향의 너스레에 아르티어스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행? 여행이라고? 이게 뭐가 내가 좋아하는 여행이라는 말이냐? 내가 원하는 여행은 이런 게 아니다. 나는 아들내미하고 오붓하게 여행하고 싶었단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지금 하고 있잖아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의 인상은 확 찌그러졌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버럭 소리쳤다.

“뭐시라? 사랑스러운 내 아들은 너처럼 다리에 털이 숭숭 나지는 않았어!”

이렇게 서로의 대화가 겉도는 것은 아르티어스의 묵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들인 다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살 던 차원에서 벗어나자 저주는 풀려 버렸고, 그리고 아르티어스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 다크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물론 묵향이 다크와 동일 인물임을 알고는 있 지만, 아무래도 현재의 모습에는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성난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자, 묵향의 시선도 그의 손가락을 따라 자신의 다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이어 예쁜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 는 스커트 자락 밑으로 시커먼 털이 숭숭 난 자신의 다리통이 보였다.

‘허걱!’

그제서야 묵향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원래가 차원 이동을 하면 몸만 이동할 수 있을 뿐, 신체를 제외한 그 어떤 물건도 함께 이동하지 못한다. 검 같은 무 기는 물론이고, 옷가지 하나 조차도……. 전번 차원 이동을 할 때 벌거벗은 몸으로 떨어져 얼마나 놀랐던가. 차원 이동이 끝나는 그 짧은 순간에 혹시나 중원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묵향은 그것을 잠시 잊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묵향이 입고 있는 것은 아르티어스가 차원 이동이 끝나는 시점에 마법으로 만들어 준 옷 이었다. 하지만 만들어 준 옷이 이게 뭐란 말인가?

“이, 이게 뭐야?”

묵향이 어이가 없어 중얼거리자 아르티어스는 화가 난 어조로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싫으면 벗어!”

아르티어스의 통렬한 일격에 묵향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한참을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던 묵향의 인상이 서서히 험악하게 굳어져갔다.

“정말 이렇게 유치하게 나올 거예요?”

“뭐가?”

“왜 이따위 옷을 입히느냔 말이에요? 나는 여자가 아니라구요. 남자란 말입니다. 자, 봐요!”

묵향은 털이 숭숭 난 자신의 다리가 잘 보이도록 스커트 자락을 번쩍 위로 치켜 올리며 외쳤다.

“도대체가 이런 다리에 스커트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묵향의 표정이 점점 더 사나워지자, 아르티어스는 찔끔거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성질을 건드렸다가는 저 더러운 성격에 뒷감당을 하기가 버거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흐흠, 그럼 옷에 어울리게 여자로 변하면 될 거 아니냐? 그 방법은 아주 오래전에 너한테 가르쳐 준 것으로 아는데 말이다.”

“오호! 아빠의 속셈이 그거였군요. 정말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제기랄! 그딴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차원 이동을 제대로 할 리가 없지!”

말을 하던 묵향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가 힘들었던지, 입고 있던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벗어 발기발기 찢어 버렸다.

“저하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 그렇게 싫으시다면 차라리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죠.”

차가운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살살 구슬렸어야 하는데, 저 지랄 같은 성격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너무 다그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고 내심 후회하는 아르티어스였다. 급히 마법으로 묵향의 옷을 만들어 주며 아르티어스는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번쩍!

빛과 함께 묵향의 벌거벗은 몸 위에 뭔가 아른거리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인가 단정한 여행복이 입혀져 있었다.

“에이~, 뭐 이런 사소한 걸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냐? 내가 비록 좀 심한 장난을 쳤다고 아빠에게 그렇게 화를 내면 못쓰지. 자, 옷도 이렇게 새로 만들어 줬 잖니? 이제 그만 화를 풀거라. 마음에 안 들면 말해. 마음에 드는 걸로 한 벌 쫘악 뽑아 줄 테니까 말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해 주면 될 것을, 계속 사소한 것을 가지고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아르티어스에게 묵향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자신만을 의지하여 이 먼 곳까지 따라와 준 아르티어스가 아닌가? 그렇다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힘들었기에 내심으 로만 아르티어스에 대한 욕설을 퍼붓고 있는 묵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