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13화 – 혹시 여행 오셨나 보죠?

혹시 여행 오셨나 보죠?

잘 구워지고 있던 사슴의 몸에서 기름이 흘러내려 모닥불 위로 떨어지며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기 익는 구수한 냄새에 아르티어스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사 슴을 꿰어 놓은 나무 작대기를 옆으로 약간 돌린 후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이제 먹자!”

그러자 묵향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거 겉만 익었지 속까지 익으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니까요.”

“너 아직도 잘 모르는구나. 고기는 완전히 익힌 것보다는 조금 덜 익혔을 때가 가장 맛있다구. 한입 베어 물면 선홍빛 핏물이 살짝 흘러나올 정도가 제일 맛있다니 까.”

“아, 글쎄. 조금만 더 참으시라니까요. 설마 의리 없게 혼자 드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먹으려면 같이 먹자구요.”

한참을 실랑이하던 그들은, 이윽고 고기가 어느 정도 익자 저마다 사슴 다리 한 짝씩을 뜯어 들었다. 두어 입쯤 뜯어 먹었을까? 어디선가 급하게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티어스는 사슴고기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우음…, 이게 무슨 소리냐?(이게 무슨 소리냐?)”

묵향은 못 들은 척 더욱 열심히 고기를 뜯고 있었다. 아무리 사슴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놈이라서 그런지 고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양껏 포식을 하 려면 먹는 속도를 올릴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묵향의 모습을 아르티어스는 사랑스러운 듯 그윽한 눈길로 바라봤다. 길게 기른 황금색의 머리카락, 앳된 얼굴. 그리고 저 박력 있는 식성까지…….

“에구, 어쩌면 저렇게 먹성이 좋을까? 보면 볼수록 귀엽…, 어어??

자신이 잠시 바라보고 있는 사이 고기의 양이 팍팍 줄어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여기까지 잘 모이지도 않는 마나를 끌어 모아 날아온다고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한 터라 몹시 배가 고픈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배려해 고기를 양보해 줄 아들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아르티어스도 질세라 고기를 씹어 삼키는 속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들놈의 먹는 모습을 보니 딴 일에 신경 쓰고 있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묵향보다 입이 크다는 장점을 십분 활용 하여 고기를 거의 씹지도 않고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아들놈의 위장은 드래곤의 것을 떼다가 붙였는지, 한꺼번에 엄청난 양을 먹어치울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먹지 않으려고 든다면 몇 날 며칠 동안 안 먹어도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필사적으로 먹어 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황은 묵향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뱃멀미 때문에 먹지 못한 것을 만회하려는 듯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 대고 있는 중이었다. 뼈다귀까지 쪽쪽 핥아 가며…….

둘이 사슴고기에 온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무장한 병사 몇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묵향이나 아르티어스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갑옷을 입고 있었 지만, 그들이 갖추고 있는 무장만은 여태껏 보아 왔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르티어스는 흥미롭다는 듯 병사들을 향해 눈길을 보냈지만, 여전히 손과 입은 고기를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병사들 중에서 한 명이 앞으로 쓱 나서며 낯선 이방인들을 향해 뭐라고 큰 소리로 지껄여댔다. 그러면서 그는 길쭉한 검이 꽂혀 있는 검집을 일부러 흔들어 보이 며 위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것을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뭐라고 하는 거냐?”

아르티어스의 심드렁한 말에 묵향은 고기를 한껏 입 안에 머금은 채 대꾸했다.

“저에도 마해죠? 아바가 모르느 거스 제가 어떠게 아게서요?(전에도 말했죠? 아빠가 모르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젠장, 여기서는 또 말이 다르네. 거기서는 안 그랬는데, 이곳은 어찌 된 것이 가는 곳마다 언어가 다르냐? 야! 그건 그렇고 치사하게 혼자만 먹기냐?”

아예 자신을 상대조차 안 하자, 말을 걸었던 병사는 잠시 황당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동료들에게 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병사들은 큰 소리로 뭐라고 지 껄여 대며 갑자기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일 앞쪽에 긴 창을 든 병사들이 서고, 그 뒤에 검을 든 병사들이 포진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병사들임이 분명했다.

“이런 젠장!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는데, 이것들은 뭐야?”

묵향은 오랜만에 만끽하는 즐거운 식사를 방해받자 짜증난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들고 있던 사슴 다리를 휘두르며 병사들을 그야말로 개 패듯이 패기 시 작했다.

퍽!

“꾸에에엑!”

“으억!”

삽시간에 창과 검을 든 병사 다섯 명이 사슴 다리에 맞고 쭉 뻗어 버리자, 남은 병사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일단 병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자 묵향은 더 이상 공격할 마음이 없었기에 고기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다급하게 외쳤다.

“이런, 젠장!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혼자서 다 먹기예요?”

묵향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에게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사슴고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신들을 무시한 채 걸신들린 듯 와구와구 먹고 있는 이상한 옷차림의 이방인들을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병사들은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일으켜 세워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와 중에도 거친 음성으로 뭐라고 지껄여 대며 허세를 부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꺼억! 잘 먹었다.”

트림을 하며 이빨을 쑤시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얼마나 얄미운지, 묵향은 들고 있던 뼈다귀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바닥으로 내팽개친 뼈다귀는 얼마나 열심히 훑어 먹었는지 살점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거의 광택이 날 정도였다.

“이런 젠장, 설마 그렇게 아귀처럼 먹어 대다니……. 드래곤으로서 체면을 좀 생각하시죠.” 아르티어스는 별소리 다 한다는 듯 여유 있게 이빨을 쑤시며 대꾸했다.

“쩝, 배고픈데 체면 따위나 생각하게 됐냐? 그나저나 너무 급하게 먹었나. 뱃속이 더부룩하네.”

아르티어스의 말에 아직까지 허기를 못 채운 묵향의 이마에는 붉은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이, 정말 너무 하잖아요. 평소에 예쁜 아들이 어쩌구 저쩌구 말만 잘하시더니 어떻게 먹을 것 앞에서는 아예 안면 몰수할 수가 있는 겁니까? 그리고 사슴은 누가 잡았는데 내가 먹을 것도 없이 왜 그렇게 많이 잡수세요!”

묵향이 성질을 내며 바락바락 대들자 아르티어스는 치사하게 먹을 것 가지고 별 트집을 다잡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사내자식이 치사하게 먹을 것 가지고 계속 그럴래! 그러는 너는? 그 덩치에 그 정도 먹었으면 됐지, 얼마나 더 먹어야 된다는 소리냐? 나야 원래 드래곤이 다 보니 이 정도 먹지 않으면 체력 관리가 힘들단 말이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절반 정도는 네가 먹었잖아!”

처음에는 약간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던 아르티어스였지만, 말을 하다 보니 점점 열이 받는지 서서히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반응에 묵향 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절반이요? 절반씩이나 먹었으면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겠어요. 삼분지 일 정도도 제대로 못 먹었다구요!”

묵향이 집요하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아르티어스는 겸연쩍은 듯 고개를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젠장, 그 정도면 많이 먹은 거지. 웬만한 호비트는 그 반만 먹어도 배 터지겠다.”

“그것도 호비트 나름이죠. 비겁하게 내가 배고파 하는 거 뻔히 알면서, 싸우는 틈을 이용해서 그렇게 많이 먹어 대다니…….”

계속 묵향이 이죽거렸지만 아르티어스는 신경도 쓰지 않고 포만감이 느껴지는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허허헛! 그게 다 연륜 아니겠냐?”

“연륜 좋아하시네요.”

묵향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언쟁을 벌이느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는 데,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오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물론 그 소리는 아주 작았기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알아챌 수도 없었겠지만 아르티어스는 드래곤이 아닌가?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하지만 묵향은 그 정도는 벌써 알고 있었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모르죠, 뭐. 아까 몇 대 맞은 놈들이 동료들을 끌고 오는지 말이에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박했다.

“동료라고? 그놈들이 무슨 산적 패거린 줄 아느냐? 동료라고 하게. 그놈들 하고 있는 복장을 봤을 때 어딘가에 소속된 정규군 같았단 말이다. 그리고 이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로 봤을 때 최소한 4백 명은 넘겠군. 산적 패거리가 그렇게 많이 떼 지어 돌아다닌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안 그래도 사슴고기를 양껏 못 먹은 데 대한 앙금이 남아 있던 묵향은 계속 이죽거렸다.

“정확히 하면 5백 명 정도에 말 세 필이에요. 여기 오면서 못 봤어요? 해적도 4천 명씩 떼 지어 다니는데, 산적이 그 정도 안 될 이유가 없죠.”

“그, 그런가?”

이곳 물정을 모르기는 아르티어스도 마찬가지였기에, 묵향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는 놈들이 병사인지 산적인지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병사건, 산적이건 귀찮기는 매한가지니까 말이다.

“그럼 빨리 자리를 옮기자. 여기 있어 봐야 귀찮기만 하지 않겠냐?”

그 말에 묵향은 아예 뒤로 벌렁 드러누우면서 비비 꼬인 어조로 말했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에요? 드래곤으로서 체력 관리를 하시려면 많이 드셔야 한다면서요. 사슴고기로는 요깃거리도 안 되셨을 텐데, 후식거리가 제 발로 찾아오고 있는데 얼마나 좋아요? 이야~. 아빠 오늘 먹을 복이 터졌네.”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입맛을 다시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한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의 배를 바라 보며 과연 5백 명이라는 먹을거리가 들어갈 수나 있는지 고민했던 것이다.

“글쎄.. 뭐, 호비트 고기가 그리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니 상관은 없겠지만, 아무리 내가 아무리 드래곤으로 현신한다고 해도 호비트 5백 명에 말 세 필이면 양이 좀 과한데?”

아르티어스는 그 말을 하며 묵향의 눈치를 힐끗 봤다. 먹으라면 뭐 못 먹을 것도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호비트인 양자 앞에서 호비트를 먹는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묵향의 대답은 전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설마요. 등빨 좋고 위대(胃大)하신 드래곤께서 그 정도 양에 우는 소리를 하신다면 지나가는 드워프가 웃겠죠.”

그제서야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르티어스는 이제 더 이상 묵향과의 대화가 질린다는 듯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계속 여기 있을 거냐? 얼마 안 있으면 저놈들이 도착할 텐데 말이다.”

묵향은 슬쩍 옆으로 돌아누우며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맘대로 하세요. 저는 허기져서 움직일 힘도 없네요.”

계속된 묵향의 이죽거림에 아르티어스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듯 그 옆에 털퍼덕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이런 망할! 그래, 네 맘대로 해 봐라.”

두두두두.

잠시 후,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기사(騎 셋이 5백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묵향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빠르게 주위를 포위하여 도주로를 차단했 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기사들은 천천히 묵향 앞으로 말을 몰고 나섰다. 그런데 묵향이 보기에 기사들의 표정이 야릇하였다. 수상한 인물들이 있다는 보고에 도망치 기 전에 체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달려 왔건만 모닥불 주위에 여유롭게 앉거나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약간 허탈해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때까지도 이빨을 쑤시면서 주위를 흥미롭다는 듯 둘러보았다.

“호오, 여기 놈들은 상당히 복장이 특이하네? 방금 전에 봤던 녀석들도 그렇지만, 아주 독특해. 특히 말 위에 앉은 놈들의 갑옷을 보면 저게 방어를 위한 거냐? 아 니면 허세를 부리기 위해 양옆으로 얼기설기 붙인 거냐? 되게 헷갈리네.”

묵향도 기사들을 힐끗 쳐다본 후 중얼거렸다.

“글쎄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척 보니 단단하게 비끄러맨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마 드시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걸요?”

“너는 저것들이 지금 먹을거리로 보이냐? 얘가 나하고 오래 다니더니 자기가 호비트라는 것을 잊어버렸나? 너! 아무래도 나한테 치료 좀 받아야 하겠다.”

아르티어스가 손가락을 꺾어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서자, 묵향은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오호, 오랜만에 저와 대련을 하시자는 건가요?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네.”

묵향의 반응에 아르티어스는 질겁을 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트랜스포메이션한 이런 육체를 가지고 맞붙어 가지고는 도무지 상대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아르티어스였기 때문이다.

“아, 아니다. 대련은 무슨 대련.”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병사들 중 한 명이 앞으로 튀어나와 기사 앞 에 무릎을 꿇고 앉아 뭐라고 한참 떠들어 댔다. 기사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을 하는 듯하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천천히 아 르티어스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왠지 모르겠지만 사뭇 살기에 찬 모습이었다. 아르티어스에게 다가온 그 병사는 살기에 찬 눈빛을 흘리면서도 덤벼들지는 않고 나 직한 어조로 뭐라고 한참 동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놈 뭐라고 하는 거예요?”

“글쎄다. 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뭐 이런 소리가 아니겠냐?”

묵향은 병사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 보려 했지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투에 담겨 있는 분위기나 감정은 대략적으로 눈치 챌 수 있었다.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생각하다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아빠, 아마 한판 붙자고 저러는 거 아닐까요? 목소리를 자세히 들어 봐요. 은근슬쩍 살기가 느껴지는 것이 결코 대화를 원하는 그런 말투가 아니라구요.”

“그, 그런가? 가만, 그렇다면 저놈이 지금 나를 째려보고 있는 것이 한판 붙자는 것이었어?”

묵향의 말을 듣고 보니 아르티어스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여 말했다.

“그럼 아까부터 떠들어 대는 말이 다 욕이겠군. 이런 망할 자식! 감히 호비트 주제에 나한테 욕을 했단 말이지. 너 일루 와 봐. 아예 껍질을 벗겨 주마.”

바로 그때, 지금까지 주저리주저리 뭐라고 읊어대고 있던 병사는 말을 끝내고 아르티어스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르티어스가 자신을 향 해 마치 강아지를 부르듯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덤비라는 손짓을 하자, 그는 심한 모욕감을 느낀 듯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단숨에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들었다. “끼요오오옷!”

아르티어스는 급히 주문을 외운 후 앞으로 손을 쭈욱 뻗었다. 다음 차원 이동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기에 용언 마법은 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서로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관계로 시간 여유가 없었기에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순간 아르티어스의 손끝에서는 붉은 화염 덩어리가 엄청난 열기를 뿜 어내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그 화염 덩어리를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하는 돌진해 오던 병사의 얼굴은 화염을 뒤집어쓰는 그 순간 당혹과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펑!

“크아아악!”

병사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데구르르 구르기 시작했다. 병사가 이상한 불덩어리에 당하는 것을 보자 말 위에 타고 있던 기사의 안색 이 약간 일그러졌다.

“으음, 마사카 히노쥬쯔?”

기사는 슬쩍 말에 박차를 가하여 앞으로 나섰다. 왠지 냉혹한 듯한 눈길로 온몸에 불이 붙어 뒹굴고 있는 병사를 바라본다 싶은 순간, 흰 선이 번쩍 빛났다. 언제 뽑 아 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약간의 피가 묻은 검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불이 붙은 몸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병사의 목은 어느 순간에 떨어져 나갔는지 땅바닥을 구르 고 있었다. 기사는 병사의 시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느긋하게 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기사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후 천천히 앞으로 말 을 몰아 나오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오마이다찌 닌자까?”

부하의 목을 냉정하게 날려 버리는 광경을 봐서인지 묵향의 목소리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약간은 떨렸다. 평상시에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일에는 무관심했지만 부하만큼은 확실히 챙기는 묵향이었기에, 마치 벌레를 베듯 부하의 목을 날려 버린 기사의 태도가 아주 탐탁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저 새끼, 뭐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누누이 말했듯이 여기 말은 모른다니까. 그건 그렇고 여기는 정말 화끈한 곳인 모양이구나. 저렇게 박력 있게 부하의 목을 자르는 광경은 내 생전 처음이 다.”

정말 감탄을 했다는 듯한 아르티어스의 대답에 묵향은 인상을 찡그리다가 답답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젠장, 그럼 한 놈 잡아다가 말 좀 배워요. 편한 마법 놔두고 뭐해요? 답답해서 이거 살겠나.”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허~참! 내가 또 그 짓을 귀찮게 해야만 하냐?”

“그럼 말도 안 통하는 데 계속 이런 식으로 다니자는 말씀이세요?”

묵향은 기사가 마음에 안 들었기에 그냥 박살 내 버릴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아니 수백 명의 피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 사실 한 놈 잡아다가 말을 배우는 것이 수백 명을 때려잡는 것보다는 훨씬 손쉬울 것이 아닌가? 묵향은 잠시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게 귀찮으면 둥루젠 말로 해 봐요. 혹시 알아들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까?”

설마하는 표정으로 아르티어스가 둥루젠 말로 뭐라고 외치자, 놀랍게도 상대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냉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 뒤편에 서 있던 병사 한 명이 기 사 옆으로 다가와서 뭐라고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 후, 잠시 기사에게 뭔가 지시를 받은 병사는 아르티어스 앞으로 쓱 나서며 말을 건넸다. 비록 서툴기는 했지만 둥루젠 말이었다.

“너희들 해적이냐?”

아르티어스는 이곳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자가 나오자 꽤 기분이 좋은 듯 곧바로 대답해 줬다.

“당연히 아니지. 네놈 눈에는 내가 해적질이나 할 분으로 보이냐?”

병사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못 알아들은 듯 일순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무, 무슨 말이냐? 천천히 말해라.”

아르티어스는 한입거리도 안 되는 호비트 주제에 건방지게 위대한 드래곤인 자신에게 처음부터 반말을 지껄이자 처음과는 달리 슬그머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 했다. 그래서인지 죽여 버리고 대화할 만한 상대를 다시 찾는 게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런 놈을 또 찾는 것 또한 귀찮은 작업이었기에 일단 참 고 넘어갔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눈동자는 이미 매섭게 변해 있는 상태였다. 아르티어스는 병사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정확히 발음했다.

“당연히 아니다.”

아르티어스의 살기에 찬 눈빛에 병사는 찔끔거리면서도, 맡은 임무가 있었기에 용기를 내어 계속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주눅이 든 상 태였다.

“그럼…, 뭐냐? 그리고 어떻게 닌자도 아닌데, 화염의 술법을 쓸 줄 아느냐?”

화염의 술법이라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정도야 고삐 잡고 말 타기지.”

아르티어스의 말은 둥루젠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었다. 어릴 적부터 말을 타는 둥루젠에서는 양손을 다 놓고 말을 탈 줄 아는 것이 결코 자랑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이 고삐를 잡고 말을 탄다면 어떻겠는가? 병사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맹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뭐? 고삐 잡고 말을 타? 당연한 말을 왜 하는 것이냐?”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에게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기에, 말투가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에잇, 젠장. 짜증나게 계속 똑같은 말 반복시키고 있어. 쉽다는 말이다. 쉽다는!”

그 순간 아르티어스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병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병사가 주눅이 든 것은 5백 명이나 되는

병사의 창과 검에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당당한 상대방의 태도였다. 또한 상대방이 입고 있는 옷은 비단으로 만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주 하늘하늘한 것이 엄청나 게 값비싼 천 같았다. 저 정도로 비싼 옷을 입고 있다면 상당히 높은 직위의 인물임이 분명하다고 지레짐작한 병사는 감히 아르티어스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필사적 으로 용기를 내어 겨우 질문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늘게 바뀐 상태였다.

“그, 그렇다면 왜 여기 계세요?”

병사가 말투를 존댓말로 바꿨지만, 아르티어스의 기분을 돌려놓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이 답답한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슬 슬 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저놈들을 싸그리 다 뱃속에 처넣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아르티어스가 대답은 않고 자신을 어떻게 죽여 줄까 고민하듯 사 납게 노려보고 서 있자, 병사는 당황한 듯 이성을 잃고 혼자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호, 혹시 여행 오셨나 보죠? 아, 그렇구나. 여행…, 여행 중이셨구나. 하지만 해적 때문에 여행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

당황한 듯 한참을 횡설수설하던 병사는 나중에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혼잣말로 뭐라고 주절거리더니 사납게 노려보고 있는 아르티어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뒤로 돌아서 가 버렸다. 병사가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 버리자 묵향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도대체 뭐라고 한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글쎄다, 저놈이 싸가지 없이 반말로 슬슬 약을 올리잖아. 그래서 네 말대로 몽땅 다 뱃속에 집어넣어 버릴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그냥 돌아가 버리네. 참, 명도 질긴 놈이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기사가 탄 말을 연신 훔쳐보며 묵향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하는 그의 입에는 이미 침이 가득 고여 있었다.

“네가 아직도 허기가 진다하니 그냥 다 해치워 버리고 우리 포식이나 할래?”

“글쎄요. 동족을 잡아먹기는 그렇지만, 기사 녀석이 타고 있는 저 말은 윤기가 도는 것이 꽤 맛있어 보이네요.”

지금까지 둥루젠을 떠돌며 말고기를 먹는 것에 적응을 한 탓인지 묵향도 슬그머니 맞장구를 쳤다.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아르 티어스와 대화를 나눴던 병사도 상관에게 보고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말을 나눠 보니 대국(大國)에서 온 것 같습니다.”

기사는 부하의 말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곧 뭔가 이상하다는 듯 급히 질문을 던졌다.

“대국! 대국에도 닌자술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놀랍군. 그런데 생김새가 말로만 듣던 대국인하고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상관의 질문에 잠시 당황한 표정이었던 병사는 급히 머리를 굴려 대답했다. 아르티어스의 살기에 질려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기에 우물쭈물하다가는 질책 을 받을 것이 뻔했다.

“옛, 제 생각으로는 대국 상인들과 함께 온 서역인인 것 같습니다.”

“서역인이라? 흠…….”

기사는 저쪽에 서서 쑤군거리고 있는 두 남녀를 잠시 쳐다본 후 병사에게 물었다.

“옷차림새를 보아하니 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병사는 미리 생각해 두었는지 곧바로 대답을 하였다.

“옛, 저들은 그러니까…, 여행! 여행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상인들과 함께 저희 ‘야마토’로 유람을 온 대국의 귀족들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제게 둥루젠 말을 가르쳐 준 해적에게 듣기로는 서역의 상인들이 대국에 정착해서 높은 벼슬을 하사받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했습니다.”

기사는 수하의 말이 그럴 듯한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흐흠,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니까 여행 중이라고 했단 말이지?”

“옛! 한사코 여행 중이라고 우기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사는 잠시 생각해 보다 자신의 오른편에 서 있는 부하에게 물었다.

“오키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오키타는 혐오스럽다는 듯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잡아먹고 던져버린 사슴의 뼈를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육류는 거의 먹지 않았다. 있다면 최하층 계급인 에타뿐이었다.

에타는 늙어서 쓸모없어진 소나 말을 잡아 가죽을 얻고, 그 부산물로 생긴 고기를 먹었다. 그렇기에 사슴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거의 에타와 같은 식생활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였고, 그것은 바로 혐오의 대상이었다.

“옛, 아무래도 서역인이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고려를 통해서 왔지 않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저들을 여기서 죽여 버린다든지 하면 어쩌면 큰 문제로 발전할지도 모릅니다. 일단 성으로 압송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고다마는 자신에게 조언을 해 준 오키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많은 참고가 됐군. 좋은 조언을 해 줘서 감사하게 생각하네.”

오키타는 황송하다는 듯 조금 깊숙이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하며 겸연쩍은 듯 말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고다마 상.”

“아무래도 저들을 영주님께로 호송하는 것이 좋을 듯 하군. 저놈들이 대국의 귀족이든 아니면 간자(間者 : 첩자)이든 영주님께서 판단하시고 결정하시는 게 나을 것 같네.”

이윽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고다마는 통역을 할 수 있는 병사를 바라보며 명령했다.

“이봐!”

고다마가 부르자 병사는 즉시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옛!”

“저들에게 여행을 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우리 영지로 가서 한 며칠 쉬어 가시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봐라.”

“옛!”

병사는 상관의 입에서 임무를 게을리했다는 질책이 나오지 않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또다시 그 흉악한 눈빛의 이방인에게 말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별수 있겠는가? 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시에는 자신과 같은 쫄따구는 언제 목에 날아가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가는 병사의 모습은 엉거주춤 그 자체였다. 물론 자신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간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 이다.

이방인들에게로 주춤주춤 걸어가는 병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다마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그의 왼편에 서 있는 기사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고다마에게 물 었다.

“만약 저들이 청을 거절하면 어떻게 할까요?”

“그때는 곧바로 체포하라. 아무리 이쪽의 병사가 많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화염의 술법을 쓸 줄 아는 자다. 그러니 절대로 방심하지 말도록!”

“옛!”

심드렁한 태도로 병사의 말을 한참 듣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저쪽에서 며칠 쉬었다 가라고 초대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쉬어요? 어디서요?”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다, 자신들의 영지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꽤 높은 놈이 살고 있는 곳이겠지, 뭐.”

“아빠 생각은 어떤데요?”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뭘 어떻게 해? 한 며칠 쉬어가 달라고 저렇게 사정을 하는데, 가서 푹 쉬어 주면 되는 거지.”

너무나도 태평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사실 아무리 5백 명이나 되는 병사가 있다고는 하지만 드래곤인 아르티어스에게는 눈에도 차지 않았던 것이다.

“킥킥, 아빠는 저 녀석들이 좋은 뜻으로 우리를 초청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우리를 포위하고 서 있는 저 병사들을 보시라구요.”

묵향이 슬쩍 주위에 서 있는 병사들 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아르티어스도 병사들을 한차례 훑어봤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병사들은 무기를 겨눠 들고는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병사들이 여기에 도착해 포위망을 구축한 뒤, 상관으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생긴 결과였다.

“쩝, 뭐 그래 봤자 별일 있겠냐? 위대한 드래곤이신 내가 있는데 말이다.”

“아빠는 몸속에 쌓인 마나가 거의 고갈됐다면서요. 아마 저놈들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시답잖은 마법만 가지고는 곤란할 텐데……?”

계속 자신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묵향을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힐끗 째려본 아르티어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에잇, 그래! 내 말을 정정하마. 호비트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 같은 내 아들이 곁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살짝 눈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거 욕이에요? 칭찬이에요?”

아르티어스는 별걸 다 따진다는 듯 내심 투덜거렸지만 더 이상 묵향에게 트집을 잡히고 싶지 않은지 표정 관리를 확실히 했다. “물론 칭찬이지. 어차피 정보를 얻으려면 높은 놈을 만나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저쪽에서 초청을 해 주니 오히려 잘된 일이지.” 묵향은 왠지 미심쩍다는 듯 아르티어스를 꼬나보았지만 더 이상 말꼬리를 잡기도 그랬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러네요.”

“저들이 좋다고 했습니다.”

병사가 다가와 보고를 하자 고다마는 뒤를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그래? 잘된 일이군. 오키타.”

“옛!”

“곧장 성으로 전령을 보내라. 수상한 야만인을 발견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시를 하던 고다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신이 직접 저들을 데리고 영주에게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저들의 목을 벤다든지 한다면 자신이 직접 하고 싶었 다. 아니면 최소한 구경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저렇게도 피부가 하얗고 매끄럽지? 저 가느다란 목을 자르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리고 저 야만인들도 목을 자르면 붉은 피가 흘러나올까? 어쩌면 피가 파란색일지도 몰라. 젠장, 이 좋은 기회를 해적 때문에 날리다니…….?

고다마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후, 말을 이었다.

“오키타, 수고스럽겠지만 자네가 저들을 성까지 데려가 주겠나?”

“옛.’

고다마는 오키타에게 20명의 병사를 붙여 준 뒤, 병사들을 거느리고 서둘러서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소속된 미우다 영지의 동쪽에 위치한 고다이 영지에 해적들이 대규모로 상륙했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해적들의 상륙 지점이 미우다 영지에서 2백 리가량 떨어져 있었기에 현재로서는 급박할 것 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언제 미우다 영지 쪽으로 방향을 잡아 노략질을 하러 쳐들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고다마는 영주의 명령으로 동쪽 해안에 구축된 수비진을 보강하기 위해 달려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