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14화 – 문도 못 여는 바보 드래곤

문도 못 여는 바보 드래곤

사내는 총총히 걸음을 옮겨, 무사들이 서 있는 앞에 도착했다. 무사들은 그 사내를 이내 알아보고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무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자 인 듯한 무사가 앞으로 나서며 사내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메지마 상. 영주님께서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사의 목소리는 아주 정중했다. 사메지마라는 사내의 직책은 민정담당관이라는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었고, 그가 지닌 미우다 영지 내에서의 위치는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그는 후지와라 영주의 가장 총애를 받는 가신들 중의 한 명이었고, 언제 어디서나 영주와 단독 면담을 청할 수 있는 세 명의 고문들 중 한 명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이 정보를 총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사는 뒤로 돌아 서며 문 앞에서 크게 외쳤다.

“사메지마 상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낮지만 아주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고 해라.”

“옛.”

무사는 얇은 창호지로 도배된 문을 드르륵 열어 주며 사메지마를 향해 말했다.

“어서 드시지요.”

가볍게 무사에게 예의를 표한 사메지마는 실내로 들어서다 흠칫 했다. 영주의 오른쪽 옆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무사를 봤기 때문이다. 이제 서서히 백발이 늘 기 시작하는 이 깐깐해 보이는 얼굴의 무사는 현재 미우다 영지의 모든 군사를 총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장군이었다. 그는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잔인했지 만 아주 뛰어난 장군이었다.

사메지마가 그를 보고 흠칫 놀랐던 것은, 그는 지금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해적들이 고다이 영지에 대규모로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한 것이 오 늘 정오쯤이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후지와라 영주는 타다마사 장군에게 동쪽 해안선을 지키라고 급히 파견했다.

그리고 미우다 영지의 전 지역에서 동쪽 해안선을 보강하기 위해 지원군이 계속 보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사들을 총 지휘할 타다마사 장군이 왜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잠시 당혹스러워하는 사메지마의 귀에 후지와라 영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주 급박한 전갈이 날아왔기 때문일세.”

급히 정신을 차린 사메지마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후지와라 영주에게 예의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예? 급박한 전갈이라니요.”

“고다이 영지로 군사들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일세.”

“그,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해적들을 토벌하라는 것입니까?”

사메지마의 물음에 후지와라 영주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해 주었다.

“토벌이라기보다는 고다이 영지에서 쫓아내라는 것이지. 상황이 급박하니 당장 군사를 파견해 달라는 거야.”

후지와라 영주에게 이런 식의 압력을 가해 올 수 있는 것은 미우다 영지 남쪽에 위치한 겐페이 영지를 다스리는 미나모토 다카우지 영주뿐이었다. 미나모토는 3만 에 가까운 정예 병력을 가진 겐페이 지역을 다스리는 대영주였다. 그리고 미나모토 대영주는 후지와라 영주의 첫째 아들을 볼모로 잡아 두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과 결혼까지 시켜 두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돈지간의 맹방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나모토 대영주로부터 사사건건 간섭을 받는 속국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사메지마는 군사를 총지휘할 타다마사 장군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후지와라 영주는 그 전갈을 받자마자, 타다마사 장군에게 급 히 돌아오라고 전령을 보냈음이 틀림없었다.

“간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해적들의 수는 거의 5천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또한 대선단을 함께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병사들만으로는 그들과 정면충돌을 하는 것은 너무 피해가 클 것으로 판단됩니다.”

사메지마의 말에 후지와라 영주는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것을 난들 모르는 줄 아는가? 그러니까 자네와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닌가.”

후지와라 영주의 신경질적인 질책에 사메지마는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간자들이 보고한 해적들의 진격 방향과 미우다 영지의 군 사력 등을 따져 본 사메지마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모내기철입니다. 그런 만큼 병사들을 소집하는 것에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핑계를 대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제가 이리

로 오기 전에 들은 보고로는, 해적들은 지금 해안선을 따라서 동쪽으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진격 속도로 미뤄 봤을 때, 그들은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 고다 이 영지를 빠져나갈 것 같습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사메지마의 말을 잠시 생각해 본 후 입을 열었다.

“흐흠,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모내기만 가지고는 명분이 너무 약해. 병사들을 소집하여 영지 접경 지역까지 보내는데 하루, 그리고 해적들이 있는 곳까지 가는 데 이틀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모내기를 핑계로 댄다고 해 봐야 하루 정도를 더 얻어 낼 수 있을 뿐이야.”

사메지마는 미리 생각해 두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예, 바로 그 하루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영주님의 말씀대로 해적들이 도착하는 데까지 4일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그동안 해적들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4일 동안 해적들은 이동할 테고, 그들을 따라잡으려면 최소한 하루, 어쩌면 2일 동안 행군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적들을 따라잡았을 때, 해적 들은 거의 고다이 영지를 빠져나가기 직전쯤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군.”

“과연, 그렇겠군.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하루의 시간이라는 것은 엄청난 도움이 되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미야모토 대영주는 그들을 격퇴할 것을 명령했어. 아무리 빠져나가기 직전의 적이라고 해도, 싸워야 한단 말일세.”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그때 타다마사 장군님께서는 단독으로 해적을 공격하지 마시고, 어떻게 해서든 고다이 영지의 군사들과 합동 작전을 벌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고다이 영지측 에서는 쉽게 해적들과 전투를 벌일 엄두를 내질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5천이나 되는 해적들과 전투를 벌이게 되면 당연히 자신들의 군사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니까 말입니다.”

기가 막힌 계책이라는 듯 후지와라 영주는 무릎을 탁 치며 기뻐했다.

“오호라, 그러니까 선택권을 그쪽에 주자는 말이군? 그렇게 되면 그들은 거의 다 빠져나간 해적들을 때려잡자고 피해를 입느니 그냥 놔두는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겠지?”

“예, 바로 그것입니다. 주군.”

후지와라 영주는 타다마사 장군에게로 시선을 돌려 명령을 내렸다.

“자네에게 병력 5천을 주겠다.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전투가 붙는다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게.”

후지와라 영주가 동원 가능한 병력은 1만 2천이 고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5천씩이나 되는 병력을 맡긴다는 것은 엄청난 신뢰의 표시였다. 타다마사 장군은 깊숙 이 고개를 조아리며 힘차게 대답했다.

“옛, 주군!”

허리에 길고 짧은 두 개의 검을 찬 타다마사 장군이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사메지마는 목소리를 낮추어 후지와라 영주에게 새로운 정보를 보고 했다.

“주군, 방금 전에 전령이 아주 재미있는 보고를 가지고 왔습니다.”

“뭔가?”

사메지마는 생각할수록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옛, 동쪽 해안선을 방어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던 고다마 장군이 이방인 남녀 둘을 발견하고 이곳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이방인들이라고?”

“옛, 피부색이 새하얗고, 머리색도 색다른 이방인들이라고 합니다. 고다마 장군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한사코 여행 중이었다고 주장한답니다. 어쩌면 대국이나 혹은 다른 곳에서 온 간자(間者)인지도 모르지요.”

후지와라 영주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을 하다가 사메지마에게 물었다.

“흐음, 여행 중이라고?”

“옛, 주군. 전령에게 물어 보니 행색으로 보아 남자는 꽤 지체가 높은 것 같았고, 함께 있는 소녀는 하는 행동으로 보아 부인인지 하녀인지 잘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쨌건 그들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는 후쿠오카밖에 없을 테니, 일단 후쿠오카에 잠입해 있는 간자에게 그들의 인상착의를 알리고 조사해 보라고 일렀습니 다. 아마 조만간에 연락이 올 것입니다.”

6살짜리 아이를 신부로 맞아들이는 경우도 있었기에, 소녀라고 한다면 물어보기 전에는 부인인지 하녀인지 분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메지마의 빠른 일처리가 마음에 드는지 후지와라 영주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그럼 확실한 정보가 나올 때까지 귀빈으로서 잘 대접하도록 해라. 하지만 감시는 철저히 하도록!”

“옛, 아주 감시가 용이한 방으로 배정을 해 놨으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혹시 이방인 소녀가 하녀일 경우를 대비하여 따로 머물 방도 마련하라 일러두었습 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용의주도한 사메지마의 조치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궁금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영주도 이방인은 여태껏 만나 본 적 이 없었기 때문이다.

“흠, 이방인이라…….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만나 볼까? 아주 기대가 되는군.”

사메지마는 영주의 말에 다급한 표정으로 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 중의 한 명이 화염의 술을 쓴다고 합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사메지마에게서 튀어나오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화염의 술이라고?”

“옛, 고도의 수련을 쌓은 닌자들이나 쓰는 술법이기에 주군께서 친히 그들을 만나신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뭔가 생각해 보던 후지와라 영주는 사메지마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자네는 정보나 좀 더 모아 보도록!”

“옛, 주군.”

“이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럼 편히 쉬시기를.”

처음 만났을 때 아르티어스에게 접근하여 둥루젠 말로 통역을 했던 병사는 아르티어스와 묵향을 숙소로 안내해 준 다음, 얼른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뒤로 돌아 섰다. 원래는 방까지 안내를 해야 마땅했지만 아르티어스의 첫인상이 워낙 흉흉했기에 조금이라도 같이 있기 싫었던 것이다.

병사는 혹시라도 아르티어스가 자신을 부를까 두려운지 도망치듯 황급히 사라져 버렸다. 병사가 가고 난 후, 아르티어스는 방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묵향에게 물었다.

“이거 어디가 문이고, 어디가 벽이냐? 아니면 이게 전부 다 문인가? 내가 살다 살다 손잡이도 없는 이런 문은 처음 본다. 그나저나 이건 도대체 어떻게 여는 거야? 에이, 성질나는데 그냥 부수고 들어가?”

아르티어스가 은근히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리자 묵향이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문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문도 못 여는 드래곤이라는 말이 묵향에게서 튀어나올까 봐 아르티어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딴청을 피웠다.

“흐흠, 여기에 사는 호비트들은 여태껏 내가 봐 왔던 놈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특이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 것 같군. 너도 오면서 봤잖냐? 성(城)도 아주 이상하 게 만들어 놨고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처럼 오키타의 안내를 받아 영주가 살고 있는 성으로 왔을 때 자신들이 알고 있던 성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그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날아오를 듯 아름답게 지어져 있는 내성은 아르티어스는 물론이고 묵향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10미터는 됨직한 높은 성곽 위로 내성의 3층 누각이 아름답게 솟아 올라 있는 성은 마치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놀란 것은 성안으로 들어갈수록 복잡한 구조였다. 돌로 치밀하게 쌓아 올린 성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방어가 용이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아르티어스의 마음이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이곳도 결코 평화로운 곳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만 하면 이곳에 서도 흥미진진한 하루하루를 만끽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내심 입이 찢어져라 웃었던 아르티어스였다.

그리고 성안으로 들어왔을 때, 내부 구조를 본 아르티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밖에서 봤을 때를 생각한다면 성안에도 분명 두터운 벽들로 가로막혀 있을 것이라 고 생각했었지만 실제의 모습은 그것과 아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빛을 싫어하는 뱀파이어가 사는 성처럼 어두컴컴한 좁은 복도가 마치 미로와도 같이 이리저 리 뚫려 있었고, 그 복도의 양 옆으로는 희멀건 종이를 바른 문들이 쭉 연결되어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들을 안내한 병사가 성의 정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들이 다른 영지의 간자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의식해 구석진 성벽을 따라 내성 가장 깊숙한 곳으로 곧장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가 뭐라고 주절거리든 묵향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나무 창살에다가 얇은 종이를 발라놓은 문에 다가가 이리저리 살펴보다 곧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이거, 미닫이 문이네. 아빠는 처음 보시죠? 이런 식으로 여는 것을.”

드드드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묵향도 처음 보는 형태의 방이 그들을 맞이했다. 자신과는 달리 묵향이 너무 쉽게 문을 열자 슬쩍 인상을 찡그리며 안으로 들 어서던 아르티어스는 금이 든 궤짝을 한쪽에다 던져 놓고, 재미있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호오, 여기는 주거 문화가 아주 독특하구나. 방바닥을 온통 짚으로 깔아놨을 뿐만 아니라 벽은 없고, 사방이 온통 문이네. 네가 태어났던 중원도 이런 식이냐?” 묵향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흔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뇨, 이런 식으로 벽이 없으면 여름에는 시원할지 모르겠지만 겨울에는 얼어 죽기 딱 알맞죠.”

말을 하던 묵향은 짚으로 만든 바닥을 천천히 만져 보더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아마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는 방인가 봐요. 그나저나 이거 굉장히 촘촘하게 잘 만들었네. 그리고 여름에 문을 전부 열어 놓으면 굉장히 시원하겠죠?” 그 말을 듣자마자 아르티어스는 한쪽 방문을 드르륵 열며 말했다.

“안 그래도 방구석도 좁은데 지금 열..

문을 열던 아르티어스는 뭘 봤는지 잠시 두 눈을 꿈벅거리다 도로 방문을 탁하며 닫았다. 옆방에는 검을 든 무사들이 우글우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젠장, 설마 손님이 있을 줄은 몰랐네.”

묵향은 피식 웃으며 아르티어스에게 빈정거렸다.

“아빠는 꼭 문을 열어 봐야 사람들이 있는 줄 아시나 보죠?”

아르티어스는 대꾸도 않고 반대편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하지만 그 방에도 무사들이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문을 닫으려던 아르티어스 는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둥루젠 말로 지껄였다.

“젠장, 갑자기 문을 열어 미안하네.”

그러자 그들은 당황한 듯 잠시 허둥거리다 벌떡 일어나 아르티어스에게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뭐라고 지껄였다. 무례했던 것은 자신인데 그들이 더욱 고개를 조아 리자 아르티어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로 문을 닫았다.

별 웃기는 놈들을 다 본다는 듯 투덜거리던 아르티어스는 뭘 봤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묵향에게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불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 다. 이미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의 흥미로움이 전부 사라진 아르티어스로서는 이젠 짜증만이 남아 있었다.

“근데 이 자식들은 손님 접대가 왜 이 모양이야? 우리들이 무슨 마구간지기인 줄 아나. 짚으로 대충 만든 방에서 자라고 하다니, 영 기분이 안 좋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도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말이에요. 아무리 봐도 침대가 없는데 어디서 자란 말인지 모르겠네요.”

“그건 그렇고 일단 쉬었으면 좋겠는데 어디에 앉지?”

연신 투덜거리며 이리저리 방안을 둘러보던 아르티어스의 눈에, 방 한쪽에 쌓여 있는 쿠션 같은 것들이 보였다. 아르티어스는 그것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젠장, 바닥이 더러우니 이것을 깔고 앉으면 되겠군.”

쿠션을 가져다가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았지만, 아무래도 자세가 불편한 아르티어스였다. 불편한지 이리저리 몸을 뒤틀던 아르티어스는 쿠션을 벽 옆으로 옮긴 후 벽에 기대어 앉으며, 편안히 쿠션에 앉아 있는 묵향에게 물었다.

“넌 그러고도 편안하냐? 나는 도통 자세가 불편해서 원.”

“글쎄요, 저는 내공수련 때 보통 이런 자세로 몇 시간씩 앉아 있기에 별로 불편한지 모르겠는데요.”

바로 이때 방문 밖에서 간드러지는 듯한 여성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자신들의 방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두 사람이었기에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한 번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스르륵 방문이 열렸다. 방문 밖에는 웬 여인이 꿇어 앉아 묵향과 아르티어스 쪽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깊숙 이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두 사람이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발밑만을 보면서 방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와서는 다시 꿇어 앉아 조용히 문을 닫았 다. 그리고 살짝 뒤로 돌아앉더니 다시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하는 것이었다.

절을 끝내고 그녀가 고개를 살며시 들었을 때, 그때서야 두 사람은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귀엽게 생긴 소녀였다. 그녀는 무슨 말인 가 하려다가 아르티어스의 발을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놀란 듯 하던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나긋나긋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나 싶어 어리둥절해 있는 아르티어스와 묵향의 반응에, 그녀는 이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들임을 그때서야 깨닫고, 살그머니 다가와서는 두 사람의 신발을 벗겨서 방문 밖에다가 내 놨다.

“아, 이제야 알겠네. 여기는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 공간이 아닌 모양이네요.”

놀랍다는 묵향의 반응과는 달리 아르티어스는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젠장, 내 살다살다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방은 또 처음이네. 그나저나 이거 도무지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해서 죽겠구만.”

“그러니까 누구 하나 붙잡아서 말을 배우시라니까요. 아까 통역했던 그 병사 녀석을 불러 달라고 하려고 해도 말이 통해야 불러올 것 아닙니까?”

“에잇, 젠장! 어떻게 이 차원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미개한 호비트들의 말을 배워야 하는지, 귀찮게스리……”

아르티어스는 신발을 밖에다가 놔두고 들어오는 소녀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너, 이리 좀 와 봐.”

그녀는 아르티어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모양을 보고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아챈 듯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르티어스는 자 신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온 소녀의 머리에다가 손을 올렸다. 그녀는 움찔했지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옆에서 묵향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 면서 한마디 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다짜고짜 머리에다가 손을 올리면 어떻게 해요? 그건 아주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라구요. 만약 어떤 놈이 내 머리에다가 그렇게 손을 올렸으면 대가리를…….”

“시끄러워! 한참 정신 집중을 하고 있는 판에 옆에서 말 걸지 말란 말이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아르티어스는 소녀의 머리에서 손을 뗀 후,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상대가 지닌 과거 의 기억들. 둥루젠의 언어를 배우면서 비참할 정도로 동물적인 그들의 삶을 읽었을 때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던 아르티어스였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달 랐다.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오랜 시간 아르티어스가 가만히 앉아 있자 묵향은 약간 불안해졌다. 아르티어스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은 상대가 지닌 과거의 기억을 읽어 서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기에 단 한 번에 언어는 물론이고, 생활 습관과 관습 등 상대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지식까지도 흡수할 수 있었다.

이런 방법을 드래곤밖에 할 수 없는 것은 단시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방대한 자료를 모두 기억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욱 큰 문제는 상대의 감정 상태까지도 모두 여과 없이 전달되어 온다는 것에 있었다. 상대가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과거의 기쁨이나 슬픔, 그리고 비참했던 기억이나 절망감까지도…….

드래곤이나 되니까 그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견뎌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것은 조금 자극이 지나쳤는지 아르티어스도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묵향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괜찮아요? 이번에는 마법이 실패한 모양이죠? 아니면 여기 말이 너무 복잡해서 이해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애써 대답을 회피했다. 위대한 드래곤인 그가 한낱 호비트의 삶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예전에 유희 삼아 돌아다녔던 호비트 왕국에 있던 그 어떤 노예들도 이 소녀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아르티어스는 생각했다. 그만큼 소녀의 기억에서 파악한 이 곳의 관습이나 풍속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투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게 아니다. 따로 좀 생각할 것이 있어서…….”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녀는 이 이국적인 생김새의 청년이 마치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유창한 이 지방 사투리로 말하자 깜짝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조아 리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저는 오키타 사마께서 보내신 하나코라고 합니다. 뭐든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저를 시켜 주십시오.”

“그래? 알겠다.”

하나코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앞으로 두 분을 제가 모시려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가르쳐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르티어스는 소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약간 거만한 투로 말해 주었다.

“나는 위대하신 아르티어스라고 한다.”

그 말에 하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아루테에스?”

아르티어스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하녀를 노려봤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묵향이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며 빈정거렸다.

“아루테에스? 오, 이름이 괜찮은데요?”

“이런 젠장! 재미있기도 하겠다.”

아르티어스는 언짢은 표정으로 묵향을 째려 본 뒤, 묵향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하녀에게 말했다.

“뭐 좋아. 아루테에스라고 불러라. 그리고 저놈 이름은 묵향이야. 아주 성질이 더러운 놈이지. 절대 겉모양에 속으면 안 돼. 알겠어?”

소녀는 잠시 난감한 표정으로 묵향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무크향?”

이번에는 묵향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을 거의 만나 보지 못했던 묵향은 곧이어 생각을 바꿔 낄낄거리고 있는 아르 티어스에게 말했다.

“묵향보다는 다크라고 해 봐요, 다크 그편이 발음하기 쉬울 테니까.”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하나코에게 다시 이름을 가르쳐 줬다.

“이봐, 차라리 저놈 이름을 다크라고 불러라.”

하나코는 곧 묵향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옛, 다쿠사마.”

순간 묵향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더 찌그러졌다.

“에잇, 이놈의 종족은 혓바닥이 짧나? 왜 이렇게 발음을 못하는 거야? 젠장, 다쿠가 뭐야, 다쿠가?”

투덜거리던 묵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하나코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 다크든 다쿠든 너 편한 대로 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