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3화 – 오! 북극성

오! 북극성

아르티어스가 촌락의 장년층이나 노년층들을 모아놓고 야만족 언어로 뭔가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묵향은 할 일 없이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거의 반나절 에 걸친 대화를 끝낸 후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돌아왔다.

“뭐라고 하던가요?”

“뭐 그렇게 대단한 정보는 없더구나. 예전에 네가 살던 나라 이름이 송이라고 했었냐?”

“예.”

“저놈들의 말에 따르면 여기는 대족장 ‘타르티’가 이끄는 ‘둥루젠’ 부족에 속해 있는 ‘아라오’ 촌락이라 하던데.”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둥루젠이라니?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둥루젠이요?”

“응. 둥루젠은 63개의 크고 작은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을 지배하는 대족장이 타르티라는 녀석이라는 거지. 둥루젠 부족의 영토는 대단히 넓은데, 남쪽으 로는 신령스러운 ‘바이투’산에까지 이르고, 북쪽으로는 ‘다이슈에 평원까지 연결되어 있다는구나. 또 서쪽으로는 ‘헤슈이’ 부족의 대족장 ‘아구다’라는 자가 세운 ‘진’이라는 나라와 접해 있고, 동쪽은 바다와 접해 있는 모양이더라.”

이야기를 듣던 묵향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젠장,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잖아요. 하다못해 지도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여기서 바다까지가 얼마나 먼지, 그리고 진이라는 나라와의 거리 는 얼마나 되는지 그런 거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거야 가 보면 알겠지. 저 녀석들 말로는 여기서 바다까지는 건장하고 빠른 말로 5일만 가면 된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대족장 타르티가 사는 곳까지 가려면 말을 타고 가더라도 거의 20일은 족히 서남쪽으로 내려가야 된다고 하더라.”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말을 차분히 분석해 보았다.

“말을 타고도 20일이라……. 그렇다면 여기는 길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곳이니까 대충 1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둥루젠이라는 부족이 아버지 말씀대로 크기는 아주 큰 모양이에요.”

“그건 모르지. 땅덩어리 크기와 호비트의 수는 비례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묵향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무료한 듯 잠시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아르티어스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나저나 계속 여기에 머물러 있을 생각이냐?”

묵향은 단호한 표정으로 아르티어스의 말에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물론, 여기저기 여행하는 건 좋죠. 하지만 그게 단순히 여행으로 끝나지가 않잖습니까. 아버지가 언제나 쓸데없이 여기저기 시비를 걸어가 지고, 복잡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이 한두 번이에요?”

묵향이 더 이상 말도 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대답하자 아르티어스는 전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있었기에 대충 얼버무리는 투로 중얼거렸다.

“뭐, 호비트들 사는 세상에 사건이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리고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나중에 보면 결국 제일 신나 하는 건 언제나 너였잖냐?”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말에 벌컥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 정말 귀찮단 말이에요.”

“미, 미안하구나. 난 그저 즐거운 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아르티어스가 당황해하며 사과를 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침묵이 싫었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뭔가 말을 걸려고 하다 그만 두 었다. 그 대신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에 작게 원을 그리듯 돌리기 시작했다.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손가락 끝을 기준으로 대기의 마나가 살그머니 모여들어 파동치기 시작한다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자신의 손 가락 끝을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거 보고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냐?”

“글쎄요……? 지금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마법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연세에 저하고 장난치자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묵향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런 둔하기 그지없는 녀석, 마나의 양이 다르잖아. 이렇게 대기에 마나가 희박해서는 마법을 사용하기가 아주 힘들지. 여기 와서 몇 번인가 마법을 써 봤는데, 강 력한 마법을 쓰기는 힘들겠어.”

묵향은 또 아르티어스가 무슨 사건을 일으킬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아버지가 야만족들 때려잡을 것도 아닌데, 웬 강력한 마법 타령이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혀를 차며 설명해 주었다.

“쯧쯧, 이런……. 만약 이곳이 중원이 아니라면 다시 차원 이동 마법을 써야 하는데 그 마법은 그럼 파이어 볼 같은 하위급 마법인 줄 아느냐? 웬만한 공격 마법보 다도 더 강력한 마법이란 말이다.”

그제서야 묵향은 걱정스럽다는 안색으로 얼른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전처럼 마나를 끌어 모으기 힘드니까, 용언 마법으로 차원 이동을 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묵향의 질문에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차원 이동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현재 내 몸 상태로 용언 마법이 가당키나 하다고 너는 생각하는 거냐? 원래 용언 마법이라는 것은 아주 빠른 기습 공격에 유 효한 것이지, 초강력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어. 물론 드래곤으로 현신한다면 그것도 가능하지만 공간이동이나 차원 이동에는 얻는 게 있는 만큼 잃는 것도 생기게 되어 있지. 호비트의 몸체보다도 수백 배나 큰 드래곤의 몸집을 이동시키려면 그만큼 더 많은 마나가 필요하거든. 나 정도 되니까 트랜스포메이션한 몸으로도 본신 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거라구.”

“그러니까 그거 한 번 더 하시라니까요. 위대한 골드 드래곤의 후예이신 아버지께 불가능이란 단어가 있겠어요? 차원 이동 몇 번 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고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르티어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묵향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끔 자신이 생각한 꿍꿍이를 재빨리 얘기했다.

“험험,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현재 내 몸에 남아 있는 마나는 그놈의 차원 이동으로 인해서 거의 바닥난 상태라는 말이다. 오랜 시간 몸을 사리면서 용언 마법을 쓰지 않고 마나를 저장해 나간다면 네 말대로 충분히 차원 이동을 할 수가 있겠지.”

“흠, 어쨌건 가능은 한 거군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거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환히 웃으며 얼른 대답해 주었다.

“현재 대기에 떠도는 마나의 상태로 보아 최소한 5년, 길어 봐야 10년 정도? 사실 그 정도 시간은 눈 깜짝하면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으하하 핫!”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발끈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듯 소리쳤다.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 나같이 위대한 드래곤 일족이 농담 따위를 할 수 있겠냐.”

묵향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아르티어스에게 추궁하듯 말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드래곤에게는 찰나일지 몰라도 호비트에게는 생사가 갈릴 정도로 긴 시간이라구요.”

묵향의 말에 당혹스럽다는 말투로 아르티어스는 대답했지만, 눈은 여전히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 그런가? 가끔 네가 호비트라는 것을 잊어버린단 말씀이야. 그건 그렇고 네가 호비트라는 생각이 들도록 행동을 해야 내가 잊어버리지 않을 거 아니냐? 거의 40년을 함께 지내 왔지만 뭐 변한 게 있어야지? 늙지도 않는 게 무슨 호비트야? 세월이 흘렀는데도 늙지도 않는 것은 뱀파이어 이후로 네가 처음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발끈해서 말했다.

“뭐요! 나를 흡혈귀 따위와 비교를 하시다니…….”

“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뭐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 궁리해 보기로 하자꾸나.”

아르티어스는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후 말을 이었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을 하기에 앞서서, 우선 우리가 제대로 왔는지, 아니면 또다시 잘못왔는지, 그것부터 제대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현재 우리의 위치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또다시 무턱대고 차원 이동을 한다고 하는 것은 네가 생각하기에도 좀 무리가 있지 않겠냐? 사실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 모든 차원 에 일일이 다 가 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냐?”

“그럼 어떻게 해요? 아버지만 믿고 이리로 온 건데요.”

묵향이 약간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하자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핫,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위대한 골드일족의 나니까 그 쥐꼬리만 한 단서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차원 이동이 기록된 마법책을 역으로 되짚어 서 좌표를 잡아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무 위대하단 말씀이야. 그나저나 드래곤 일족 역사상 차원 이동까지 하면서 부지런을 떨어 댄 드래곤은 아마 나뿐일 걸? 으하하핫.”

묵향은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괜히 아르티어스의 성질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느꼈기에 시큰둥한 어조로 맞장구를 쳐줬다.

“그…, 그렇군요.”

한참 웃음을 터뜨린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정색을 한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 다시 아까 하던 말로 돌아가서, 네가 살던 세상에는 그 중원이라는 곳만 있었냐? 그러니까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종족은 너처럼 노리끼리한 피부색에, 까만 눈에, 까만 머리카락뿐이었냐는 말이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던 묵향은 어색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그건 아니죠. 색목인(色人)이라는 눈 색깔이 다른 종족도 있다고 들었고, 또 남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묘족이라고 해서 특이한 습성을 지닌 종족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예전에 한 번 가 봤던 몽고에도 저 야만족들 못지않게 미개한 습성을 지닌 놈들이 살고 있었죠. 제가 알고 있기로는 아마 가장 문명이 발달한 곳이 중원일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으스대며 말했다.

“물론 내가 실수를 했을 수도 있겠지만, 위대한 이 몸이 두 번씩이나 실수를 할 리가 없잖냐? 그래서 그런지 난 아무래도 이곳이 좀 미심쩍단 말씀이야. 네가 생각 해도 그렇지?”

아르티어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묵향을 바라본 후 물었다. 아무래도 묵향이 자신을 같잖다는 듯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표정이 왜 그러냐?”

아르티어스의 질문에 묵향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계속 말씀하시죠.”

“좋아, 만약 내가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우리들은 네가 중원이라고 부르는 곳의 외곽 지역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우리가 떨어진 이곳이 네가 예전에 살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할 수 있겠냐?”

“그, 그야…….?

잠시 생각해 보던 묵향은 그 말도 그럴듯하게 느껴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전번 차원 이동을 한 뒤 워낙 고생을 한 탓인지 대답이 영 시원스럽지 는 않았다. 묵향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럼 역시 이번에도 돌아다녀 봐야 하겠군요.”

묵향의 대답은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티어스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핫! 바로 그거야. 돌아다녀 봐야 진실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냐? 물론 어쩌다 보면 복잡한 사건에 휘말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최대한 자신을 숨긴다면 피해 갈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어? 또 위대하신 내가 함께 있는데 무서울 것이 뭐가 있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최대한 자신을 숨긴다고? 그럼 언제나 먼저 시비걸고, 사고 친 게 누구였느냔 말 이다. 하지만 묵향은 대놓고 반박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 참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그의 말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젠장, 어쩔 수 없죠.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뭐, 사방이 탁 트인 벌판이니까 아무 곳이나 골라잡아 보시죠.”

“흐흐흐, 어디로 갈까?”

음충스런 미소를 지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먼저 둥루젠의 수도에 가자. 이런 야만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도 수도라면 뭔가 달라도 다른 것이 조금 있겠지. 그리고 정보를 얻으려면 수도에 가서 수소문을 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니겠냐?”

“좋을 대로 하세요. 남는 게 시간이니까. 그건 그렇고 언제 떠나실 거예요?”

“뭐, 준비할 것도 없으니 당장 떠나야지. 때는 봄, 유희를 떠나기에는 최적의 계절이 아니겠냐? 그리고 준비는 족장에게 말해 놓으면 알아서 해 줄 거고 말이다.” 묵향은 유희라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유희라면 중원식으로 생각하면 계집을 옆에 끼고 노닥거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요, 아르티어스가 살던 시 대의 유희(Amusement)라면 오락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번 여행을 아르티어스는 뭐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인가?

“유희라구요? 그럼 아버지는 내가 살던 세계를 찾아서 헤매는 것을 장난쯤으로 생각하시고 계신 겁니까?”

생각하지도 못했던 묵향의 반응에 아르티어스는 순간 당황했지만 탁월한 순발력으로 자신의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군. 여행 말이다, 여행. 우리 드래곤은 그걸 유희라고 말하거든. 여행이라는 단어는 호비트들과 어울린 후에나 배웠지. 하지만 유희라 는 말이 입에 익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나 보구나.”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변명에 미심쩍은 듯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종족상의 차이라는데, 그걸 따지고 들어 봐야 어쩌겠는가.

“그래요? 내가 알고 있는 유희하고는 뜻이 조금 다르네. 그건 그렇고, 누가 촌장인데요?”

묵향이 더 이상 따지고 들지 않자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응, 바로 저기에 후줄근한 가죽쪼가리를 걸치고 앉아 있는 주술사 노인 말이다. 여기서는 ‘차간부우’라고 하는데, 대충 뜻을 해석해 봤을 때 주술사가 가장 그것 과 비슷한 뜻을 지닌 단어일 거다. 아무튼 그 주술사 오른편에 앉아 있는 녀석이 촌장이지.”

“아, 바로 저 노인이 주술사였어요?”

“그래, 촌락민들 중 몇 명이 갑자기 병에 걸려서 의식을 잃어 가자 며칠 전부터 신들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갑자기 우리들이 나타나자 자신 의 기도를 듣고 천신(天神)이 현신한 것으로 알고 있더군. 그러니까 이 몸을 신으로 알고 있는 거지.”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에요? 아버지를 천신으로 알다니……?”

“말 그대로다. 나는 저 녀석들하고 좀 색다르게 생겼잖니. 그러니까 난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고, 너는……..”

잠시 말을 멈췄던 아르티어스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신을 수행하고 온 시종이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촌락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둥루젠의 수도를 향해서 출발했다. 환송이라고 해 봐야 촌락민들이 모두 다 나와서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해 댄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황송해하는 듯한 표정을 보면 그들이 아르티어스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촌장은 아르티어스와 묵향을 위해 말 세 필을 내줬다. 그리고 신이라 생각한 아르티어스에게는 존경의 표시로 사금(金)과 담비와 수달, 여우 가죽, 그리고 커다 란 반달곰의 가죽에다가 투박한 솜씨이기는 하지만 부드러운 어린 양의 가죽으로 만든 조끼도 챙겨 주었다.

족장이 아르티어스에게 붙여 준 “다쿠다’라는 원주민은 이 근처의 지리를 손금 보듯 잘 알고 있어 둥루젠의 수도까지 안내를 해 주기로 했다. 그는 말 세 필 중 두 필에는 사람이 타고 갈 수 있도록 안장을 준비했고, 나머지 한 필에는 식량과 짐 꾸러미들을 차곡차곡 실었다. 다쿠다는 매우 기마술이 뛰어나서인지 짐말의 고삐를 잡고, 양다리만으로 자신의 말을 조종해서 앞으로 나갔다.

일단 마을을 벗어나자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대평원이 그들을 맞이했다. 대평원은 상당히 황량하기는 했지만, 드문드문 초목도 우거져 있었다. 그리 고 지평선 저 너머로 제법 높아 보이는 산들도 간혹 보였다.

끝없이 이어진 광활한 대평원은 여행자에게 단조롭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자연의 신비로움마저 느끼게 했다. 느긋하게 평원을 감상하며 가던 아르티어스는 맨 앞 에서 안내를 하던 다쿠다가 갑자기 말을 세우자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다쿠다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손을 눈가에 대고 햇빛을 가리며 서쪽에 걸려 있는 해를 슬 쩍 바라본 다음 아르티어스에게 공손한 어조로 뭐라고 말했다.

“뭐라고 그래요?”

묵향이 묻자 아르티어스는 광활한 대평원을 감상하다 흥이 깨져서인지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서 야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군.”

“뭐, 급할 것도 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시죠.”

아르티어스가 뭐라고 말하자 다쿠다는 재빨리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근처에서 작은 나무를 베어다가 가지를 쳐낸 다음 네 개의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기둥의 끝 부분을 네 개의 나무막대로 연결한 후 밧줄로 단단하게 묶었다. 이렇게 뼈대를 세운 후 그 위에 나뭇잎이 잔뜩 붙어 있는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엮어 간단하게나마 밤이슬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을 완성했다.

날씨도 좋았고, 또 기온도 야영을 하기에 딱 알맞은 상태였기 때문인지 다쿠다는 양옆에 벽을 세우는 것은 생략하고 근처에서 풀을 베어다가 바닥에 푹신하게 깐 다음 그 위에 두툼한 가죽을 깔았다. 신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잠자리를 만들어 놓은 후 다쿠다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말 등에 매어놓은 짐 꾸러미 중 하 나를 풀어 그 안에서 말린 고깃덩어리와 찐 쌀을 꺼냈다. 쌀을 찐 다음 잘 말려 놓은 것이었기에 그것 또한 딱딱하기는 고깃덩이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다쿠다는 작은 나뭇가지를 모아 고깃덩이의 끝부분을 꿰어 적당히 불에 구워 아르티어스와 묵향에게 찐 쌀과 함께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권했다. 돌덩이만큼 딱딱 한 찐 쌀과 불에 구은 고기가 그날 저녁 식사의 전부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사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하자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아르티어스와 묵향은 다쿠다가 만들어 놓은 임시 숙소에 자리를 잡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든 다쿠다는 말들을 묶여 놓은 곳 바로 옆에 두툼한 천을 깔고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

대평원의 싱싱한 풀 내음과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잠을 자기에는 좋았지만 묵향은 왠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옆에 누운 아르티어스는 일찌감치 꿈나라로 가 버렸는지 가늘게 코까지 골며 팔자 좋게 자고 있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서 있지 않은 묵향으로서는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쉽게 잠을 잘 수 없었다.

‘도대체 중원에는 언제나 갈 수 있는 것일까? 과연 내가 살아서 중원에 도착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군.’

옆에 누워 자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잠꼬대를 하며 자신의 배 위로 다리를 올리자, 묵향은 슬며시 아르티어스의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놓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수많은 수련을 통해 단련된 그의 육체에 노숙 정도는 별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옆에서 낮게 코를 골기도 하고, 몸을 뒤척이기도 하는 아르티어스가 그에게는 더욱 성가시게 느껴졌다. 임시 숙소를 벗어나자 투명한 대기를 뚫고 수없이 많은 별들이 묵향을 반기는 듯했다. 그리고 수많은 별들 사이로 반달이 은은한 달빛을 뿌리며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달이군.”

묵향은 무심결에 한마디 내뱉은 후 밤이슬을 피할 수 있을 만한 나무 그늘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의 발걸음이 멈칫 멈추었고, 묵향의 놀란 시선은 다시금 화들짝 밤하늘을 쫓아 달려갔다.

“호… 혹시……?”

정신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묵향의 눈시울은 어느덧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중원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 커다란 달. 달의 생김새가 아주 비슷한 것 같아서 다시금 밤하늘을 올려다본 것이었는데, 달만이 아니라 별자리마저도 중원의 것과 똑같았다. 언제나 북쪽을 밝혀 주는 북극성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주위에 자리 잡은 수많은 별자리들도 언제나 자신들은 그곳에 있었다는 듯 미약한 존재감을 희미한 빛으로 던져 주고 있었다.

“여, 여기가 중원이야! 크하하하핫! 바로 여기라구! 바로 여기야!”

한밤중에 묵향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려 대자 나무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다쿠다는 깜짝 놀라 일어나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음소리에 깼는지 아르티 어스도 숙소 밖으로 머리만 내밀며 짜증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야, 한밤중에 뭐가 좋아서 웃고 난리야! 잠 좀 자자. 잠 좀!”

묵향은 한달음에 아르티어스에게 달려가서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제대로 찾아왔다구요. 여기가 중원이에요! 내가 태어난 바로 그 중원이라구요.”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뭐? 이 녀석이 드디어 미쳐 버렸나? 중원이라는 곳이 이런 황무지였다는 말이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살던 세상임에는 틀림없어요. 달의 모양이 똑같고, 또 별자리들도 똑같다구요.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여기가 틀림없다니까 요.”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말에 순식간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묵향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기롭게 말했다.

“역시 나는 위대해. 그 엄청난 시간과 공간과 차원의 미로에서 겨우 두 번만에 제대로 목적지를 찾아내다니……. 크하하하핫!”

한참 동안 묵향과 기쁨을 나누던 아르티어스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돌연 맥 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젠장, 그나저나 하필이면 여기일 줄이야. 좀 더 돌아다니면서 즐겼어야 하는 건데……. 하기야, 나도 어디가 어딘 줄을 몰라 대충 찍은 좌표가 중원일 줄은 꿈에 도 몰랐네.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

아르티어스의 말에 한참 기뻐하던 묵향은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지만 잠시 후에 그가 한 말의 뜻을 깨닫고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따졌다.

“엥? 뭐라구요? ‘하필이면’이라니요. 그리고 재수가 없다구요? 전에는 차원의 미로 운운하며 제대로 찾아가는 것은 엄청 어렵다고 얘기했었잖아요. 혹시 아버지 는 여태까지 이리저리 차원 이동 하는 것을 설마 놀러 다니고 있는 걸로 생각하신 거였어요?”

무심결에 속마음을 중얼거린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자 손사래까지 치며 적극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무, 무슨 소리냐? 너도 봤잖아, 내가 엄청나게 고생한거 말이다. 마법책을 숙지하고 수많은 복잡한 계산을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내가 얼마나 머리를 굴려야 했는 지. 단지 나는 혹시나 우리가 목적지를 찾지 못했을 때, 네가 너무 실망해할까 봐 그렇게 얘기한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어떻게…….”

“험험, 뭐 사소한 말실수를 가지고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그러냐. 어찌 되었든 네가 말하던 중원에 왔잖니,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지, 뭐.”

잠시 아르티어스를 노려보던 묵향은 시간이 지나자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의심이 계속 들었다. “그 외에도 또 뭐 숨기고 계신 거 아니에요?”

묵향이 의심스럽다는 듯 묻자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실토했다.

“차원이 제대로 맞아도 시간이 다를 수가 있지. 또 차원과 시간이 맞아도 공간이 다를 수도 있고 말이다. 공간이야 좀 다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아가면 그만이 지만, 시간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가 있거든. 그러니까 운 좋게 네가 살던 차원과 공간이 맞는다 해도 시간대마저 똑같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네가 살던 세상에서 1백 년 전에 떨어질지, 아니면 1천 년 후에 떨어질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한 번 갔던 곳을 또 간다면 혹 모르겠지만……. 아무리 내가 드래 곤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가는 것 아니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불안감을 조금 느끼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 강도는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르티어스라는 최후의 버팀목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드래곤이면서 그것도 못해요? 언제나 전지전능을 외쳐 대면서..?”

묵향의 질책에 아르티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무리 우리들 드래곤이라고 해도 시간을 지배하지는 못한단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렇게 슬퍼했겠느냐? 겨우 몇 시간 앞이었지만, 그 시간을 되돌려 놓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지. 물론 무리하게 방법을 찾아보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위험 부담은 너무나도 커. 몇 시간을 거슬러 올 라가자고 마법을 썼는데, 몇만 년 앞으로 가 버릴 수도 있고, 또 몇만 년 뒤로 갈 수도 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은 차원과 맞물려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또 다른 차 원으로 날아가 영영 차원의 미아가 되어 버릴 우려도 있거든.”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잠시 불안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중원이라고 기뻐할 것만은 아니었다. 이곳을 잊지 못해 되돌아오고 싶었던 것은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돌아온 중원에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차라리 저쪽 차원에서 미네르바와 투닥거리며 사는 편이 훨씬 괜찮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안과 허탈감에 휩싸였던 묵향은 심호흡을 길게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아르티어스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온 것은 정말 운이 너무나도 좋아서 얻어진 결과라는 겁니까?”

“헛! 왜 그렇게 노려보냐? 사실 말하자면 원래 운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내 추리가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간 것도 많은 작용을 한 것이지.”

아르티어스의 입에서 추리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튀어나오자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추리라니요? 어떤 추리요.”

“네가 살던 곳에는 마법이라는 것이 분명히 없다고 했지?”

“그랬죠.”

“그런데 너는 차원 이동을 당했고 말이다.”

“예.”

아르티어스는 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자신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천천히 묵향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쪽에서 누군가가 네가 살던 세상으로 간 것일 거라고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살던 그 세상에서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설 명이 되지 않거든. 그렇기에 그 정확한 단서를 파악하는 데 다론이라는 놈이 가지고 있던 마법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거지. 일단 그것을 확보한 상태에서 정확한 계산만 할 수 있다면 내 마법으로도 네가 살던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거다. 물론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이렇듯 두 번째는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 아니 겠냐? 하지만…, 내가 직접 이곳으로 와 본 것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완벽한 계산과 그에 따른 마나의 콘트롤까지 가능하겠냐? 약간의 오차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

묵향은 그제야 아르티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오차’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위험도. 떨리는 음성으로 묵향이 물었다.

“그 오차가 어느 정도일까요?”

“글쎄.. 공간상의 오차가 생길 여지도 있겠지만, 시간적인 오차가 생길 가능성도 크다고 봐야 하겠지. 나로서도 그 정도만 짐작할 수 있을 뿐 더 이상은 모르겠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의 마음은 천근이라도 되는 양 무겁기만 했다. 답답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쉰 묵향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밝은 달이 둥실 떠 있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기쁘지가 않은 묵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