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4화 – 계속되는 사기 행각

계속되는 사기 행각

대평원을 가로지른 아르티어스 일행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다른 촌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쿠다가 멀리 보이는 이동식 천막들을 가리키면서 뭐라고 한참 설명을 하자, 그것을 다 듣고 난 아르티어스가 묵향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이 일대가 쑤젠 족장의 영토라고 하는군. 이 근처에 퍼져 있는 48개의 크고 작은 촌락들을 이끄는 녀석이래. 그리고 저기에 보이는 저것이 그 중 하나인 샤이푸 촌락이라는군. 오늘은 저기에서 묶는 것이 좋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다.”

“그러죠, 뭐.”

“그건 그렇고, 아들아.”

갑자기 아르티어스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묵향은 흠칫 놀라며 뒤로 급히 물러섰다.

“왜 갑자기 그렇게 부르세요? 소름 돋치게 시리…….”

“사실 이 근처에서 너를 알아볼 호비트도 없고, 또 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삶에 지장받을 놈도 없지 않냐? 그러니까…….”

뭔가를 바라는 듯 은근한 아르티어스의 말을 묵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도 말라는 듯 단숨에 거절했다.

“싫어욧!”

“에이, 그래도…….?

싫다고 했는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렸는지 아르티어스는 계속 묵향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묵향의 반응은 한마디로 웃기지 마라였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 망할 크로네티오의 저주에서 벗어나서 한시름 놨더니, 또 그 저주받을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겁니까? 안 해요! 아니, 절대 로 못 해요.”

“허, 거~참!”

잠시 난감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르티어스는 작전을 바꿨다. 아예 안면 몰수하고 언성을 높여가며 반항하는 아들놈에게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불효막심한 놈! 호비트라는 것들은 효도라는 것도 모르냐? 애비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네가 잘될 줄 아느냐? 자고로 애비의 말을 안 듣는 놈치고, 그 뒤끝이 좋았던 놈은 대륙 전체를 뒤져 봐도 단 한 놈도 찾을 수 없을 거다. 아이구, 아이구, 내가 세상 헛살았지. 어떻게 저런 놈을 아들이라고 믿고 의지하며 그 험 한 차원의 미로까지 따라나섰누. 내가 멍청한 놈이지…….”

서글픈 듯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가슴 한쪽이 약간 찔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매몰차게 거부했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약해져 말끝이 떨리는 묵향이 었다.

“그,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거예요.”

“그래, 너 잘났다! 이 망할 녀석아. 내 귀여운 천사를 단 한 번만 보여 달라는 데도 싫다니, 그래 너 혼자서 잘 먹고 잘살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

그다음부터 아르티어스는 묵향과의 대화를 아예 끊어 버렸다. 아니,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샤이푸 촌락에 도착하자마자 다쿠다는 촌락 중 앙에 위치한 조금 커 보이는 천막으로 달려갔다. 곧이어 그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네 명의 촌로들과 함께 돌아왔다.

촌로들은 아르티어스를 보자마자 경건한 표정으로 절을 하며 뭐라고 외쳐댔고, 아르티어스는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여 줬을 뿐이다. 그런 후 그 들은 뭐라고 장시간 대화를 나눴는데, 그사이에 묵향이 한 일이라고는 멀뚱멀뚱 서서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대화가 끝나자 촌로들은 한쪽 구석에 위치한 그래도 비교적 깨끗한 천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배불리 식사를 한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편안한 기분으로 쉬고 있을 때였다. 천막 밖에서 헛기침 소리와 함께 촌로 한 명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들어와 연신 절을 하며 아르티어스에게 뭔가를 간구하는 듯한 말 을 계속하였다. 아르티어스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촌로가 그들을 안내한 곳은 촌락 한쪽 구석에 위치한 거대한 천막이었다. 급히 만든 흔적이 역력한 천막 안에는 수십 명의 환자가 드러누워 끙끙거리고 있었다. 식 사를 하는 동안 이웃 촌락에까지 연락이 되어 근처에 있는 환자들이란 환자들은 모두 다 몰려온 것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환자들과 함께 이웃에 있는 촌락민들까지 모두 몰려왔는지 한산했던 작은 샤이푸 촌락은 이제 3백여 명의 원주인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촌락민들의 아르티어스에 대한 경외심은 그가 한 명, 한 명 환자를 치료하면서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들것에 실려 왔던 한 환자가 아르티어스의 손에 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빛 무리에 휩싸이자 벌떡 일어서는 것을 보고 극에 달했다. 수많은 촌락민들이 경외심에 모두들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 록 절을 하는 것을 보고 묵향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어쨌건 아르티어스의 신을 사칭하는 행위는 그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환자 치료가 끝난 후 대규모 축제가 벌어졌다. 물론 그렇게 잘 살지도 못하는 촌민들이 3백여 명 정도 모인 만큼 말이 대규모지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봤을 때 그건 화려한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촌민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서 축제 준비를 했다.

촌민들은 축제에 쓰기 위해 튼튼해 보이는 백마(馬) 한 마리를 잡았고, 황소 한 마리, 양 다섯 마리, 염소 다섯 마리, 개 열 마리를 잡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말은 교통수단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황소는 농경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양은 겨울을 나기에 적합한 따뜻한 가죽옷을 제공하는 원천이었고, 염소는 젖 을 제공해 줬다. 또 개는 주인의 재산을 지키는 파수꾼이 아닌가. 닭, 오리 같은 식용으로 키우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물들을 잡아 요리함으 로써 신께 대한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던 것이다.

모든 제물(祭物)들은 신께 바치는 의식에 따라 우유를 먹였다. 우유는 흰색이기에 길상(吉祥)을 상징한다. 만약 제물이 우유 마시기를 한사코 거부한다면 그것은 제물이 상서롭지 못하다는 반증이기에 딴 것으로 바꾼다. 그런데 제물로 선택한 모든 동물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우유를 말끔하게 다 마셔 버렸기에, 원주민들은 대 단히 좋아했다. 일단 우유 먹이기가 끝나고 나자, 기원을 담은 주문을 외우며 제물의 이마와 등에 우유를 뿌린 다음 도살을 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여기저기에 불 을 피워 그 고기들을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앞에 놓인 음식에 대해서 원주민들과 즐거운 듯이 얘기를 나누며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서 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고기들을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통역을 해 주지 않았기에, 무슨 고기인지 알 수도 없었을뿐더러 모든 고기들이 속은 거의 생고기나 다름없 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고기들은 아예 생것으로 나왔다. 아르티어스에게 부탁해서 고기를 좀 더 익혀 달라고 말할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젠장! 이럴 바에는 차라리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이 더 낫겠다.’

홀가분하게 혼자 여행하는 것이 오히려 둘이 여행할 때보다 덜 외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묵향은 아르티어스와 결별할 결심을 하지 못했다. 아르티어스의 말대로 시간적 오차가 의외로 클 수도 있었다. 사실 야만족들의 생활상을 보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과거로 온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로서는 아르티어스의 통역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태가 아닌가? 만약 또 다른 통역이 한 명 더 있다면 모르겠지만……. 묵향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투덜거렸다.

“젠장, 계속 이러실 겁니까?”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묵향의 시선을 피하며, 옆에 있는 늙은 촌민과 계속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에 묵향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거칠게 말 했다.

“이런 젠장! 내가 그런다고 재수 없게 그 계집으로 변할 줄 알아요? 빌어먹을!”

옆에 앉아 있는 촌로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묵향을 힐끔거리며 보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투덜거리자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승리 를 자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경우 생고기도 아주 즐겨먹는 편이었지만, 아들놈은 육류에 대한 취향에 있어서 자신과 극을 달리기 때문이다.

동물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욕구가 있다. 식욕과 수면에의 욕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욕이다. 성욕이야 자제력이 뛰어나다면 참아낼 수 있 는 것이었지만, 식욕과 잠은 도무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며칠 버티기는 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의도대로 되리라는 생각에 아르티어스는 가슴이 뿌 듯해져 옴을 느꼈다.

그런데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묵향의 왼손이 갑자기 투명하리만큼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저게 무슨 마법이지?”

철을 화로에 넣고 충분히 풀무질을 해 주면 선홍색으로 아름답게 달아오른다. 그런데 어떻게 호비트의 손이 그렇게 달아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와중에 저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상한 기운은 또 뭔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손에서는 사람을 억압하는 듯한 파괴적인 사이한 기운까지 함께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때 문에 묵향 주위에 앉아 있던 촌락민들은 허겁지겁 묵향 주위에서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묵향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왼손으로 고깃덩이를 슬그머니 쓰다듬었다. 슬쩍 쓰다듬었을 뿐인데도, 고기의 겉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타 버리는 것으로 보아 그 화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잘되지 않자 묵향은 타 버린 고기의 겉 부분을 잘라낸 후 입속에 집어넣으며 투덜거렸다.

“젠장! 겉 부분은 다 탔잖아. 뭐, 하지만 탄 부분만 떼어내고 나니 그런대로 먹을 만은 하네. 그건 그렇고, 고기 구워먹기에 혈수마공(血魔功)은 너무 파괴적인 것 같아.”

묵향의 투덜거림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 잡는 거대한 칼로 닭을 잡기가 힘들 듯, 혈수마공이 지닌 엄청난 양강(陽强)의 힘은 너무나도 파괴적이어서 고깃덩이를 새까맣게 태우는 데는 제격일지 몰라도, 노릇노릇하게 익히는 것은 매우 까다로웠던 것이다. 하지만 묵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열기를 발산하는 극양(極 陽)의 무공은 혈수마공 하나밖에 배운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뭐라고 중얼거리며 잘 익은 부분만 잘라내어 먹고 있는 묵향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오 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 내가 여기서 지면 드래곤이 아니다.’

아르티어스가 마음속 깊이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묵향은 인상을 찡그리며 탄 부분을 벗겨내고 먹을 만한 부위를 골라내려는지 고기를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 다. 그리고 몇 번 고기를 구우면서 공력을 조절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묵향은 쉽게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 후에야 묵향은 이쪽 차원에 와서 처음으로 만족스러 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