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5화 – 연기파 배우 아르티어스

연기파 배우 아르티어스

“이제 어떻게 한다?”

아주 급속도로 모든 상황에 적응해 나가는 묵향을 상대로 아르티어스는 힘겨운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잠을 못 자게 하는 방법으로 골탕을 먹이려고도 했지만, 묵향이 일단 안 자려고 들면 드래곤인 자신보다도 더욱 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르티어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묵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잠이 아니라 하루에 30여 분 정도의 운기조식(運氣調息)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처럼 눈치 빠른 드래 곤이 왜 묵향이 운기조식을 하면서 기력을 보충하고 있는 사실을 몰랐을까?

원래 내공수련을 위해 토납술을 처음 배우는 경우, 가장 먼저 익히는 것이 좌공(坐앉아서 하는 운기법)이었다. 좌공을 완벽하게 익힌 후에는 와공(臥功: 눕거 나 엎드려서 하는 운기법)을 익히게 되고, 그마저도 완벽하게 익히면 가장 마지막 단계로 익히는 것이 입공(立功 : 서서 하는 운기법)인 것이다. 물론 입공을 통해 운기조식을 한다고 해도 좌공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내력이 쌓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입공까지 다 익힌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안전한 곳에서 홀로 운기조식 을 할 때는 좌공을 애용한다. 그렇다면 왜 배우기도 힘든 와공이나 입공을 익히는 것일까? 바로 그것은 좌공을 할 여건이 안 될 때를 대비해서 익히는 것이다.

묵향 같은 초절정의 내가고수가 입공까지 익히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운기조식을 할 때 자세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앉으나 서나, 눕거나 엎드 리거나 혹은 말 탄 자세에서까지도 운기조식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아르티어스가 제아무리 묵향의 잠을 방해하려고 노력을 해도 도무지 통하지 않았던 것 이다.

잠을 가지고는 도저히 승리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자 아르티어스는 그때부터 묵향을 철저하게 외톨이로 만드는 것으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아 예 묵향과는 일언반구 대화를 나누려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곧바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길잡이인 다쿠다와는 대단 히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고, 일부러 묵향이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도록 여기저기 손짓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아르티어스는 그것도 통하지 않음을 깨닫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은 이제 더 이상 아르티어스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아예 명상이나 즐기자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던 것이다.

“이런 젠장! 어떻게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호비트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진짜 저놈이 호비트가 맞기는 한 건가? 저 지랄 같은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혹시 호비 트의 탈을 쓴 드래곤 아냐?”

아르티어스가 그토록 압력을 가했건만, 묵향에게는 전혀 씨알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일부러 쌀쌀맞게 대해 며칠 외톨이 신세가 되면 자신에게 굴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상종하지 않자, 묵향이 오히려 더 잘되었다는 듯 명상이나 하면서 차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자 기가 막혔다. 외로움을 느끼기는커 녕 표정 하나하나에 여유로움까지 배여 있는 놈한테 더 이상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편안한 신색으로 바뀌고 있는 이런 묵향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할 아르티어스가 아니었다. 이제 이곳 샤이푸 촌락에서 둥루젠 부족의 대족 장 타르티가 산다는 성(城)까지는 단 하루거리도 되지 않았다. 만약 성에 들어가서 뭔가 중원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찾아낸다면 그때는 이 상태가 영구히 지속될 우 려마저도 있었다. 앞으로 이 차원계에서 편하게 지내려면 기선 제압이 그 선결 요건인 만큼, 성에 들어가기 전에 이 신경전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 식할수록 아르티어스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지고 있었다.

‘전번에도 주도권을 뺏긴 덕분에 개고생을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럴 수는 없지.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럴듯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아르티어스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은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한 호비트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먹을! 빌어먹을!”

투덜거리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눈에 다쿠다의 모습이 보였다. 다쿠다는 몇 번 타르티가 사는 성에 가 봤던 탓에, 갑자기 현신한 신들을 모시고 성까지의 길 안내를 촌장으로부터 명령받은 상태였다. 성으로 갈 때는 신과 함께여서 편안하게 여행을 해야 했기에, 여러 마을들을 거치며 잠자리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 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20일은 필요했다. 하지만 돌아갈 때는 황야를 가로질러 죽자고 말을 달리면 넉넉잡고 15일이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무리 일정을 빡빡하게 잡는다 해도 처자식과 무려 한 달 이상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것도 농사 때문에 한참 바쁜 이 시기에 말이다.

봄에 파종을 잘해 놔야 그해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봄은 일년 중에 가장 중요한 계절이지 않은가? 혹시나 파종할 시기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다쿠다는 우울한 얼굴로 달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있었다.

그런 다쿠다의 모습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가소롭다는 듯 투덜거렸다.

“달을 보고 눈물을 흘리다니, 호비트란 족속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든 놈들이란 말씀이야. 한없이 강한 듯하면서도, 저런 사소한 것에는 저렇게 심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다쿠다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아르티어스의 눈빛이 뭔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번쩍였다.

“흑흑흑…….”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묵향의 귀에 들려왔다. 묵향은 이때 아르티어스 몰래 살짝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원래가 운기조식을 하게 되면 인체의 가장 말단까지 신 선한기가 퍼져 나가기에 온몸의 감각은 몇 배나 증폭되게 된다. 따라서 그 때문에 운기조식 때는 무아지경으로 빠지기 직전이 가장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세심하게 내공을 조절해야 하는 상황에서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에 의해 외부의 미세한 자극들이 여과 없이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묵향은 천천히 운기조식을 끝마쳤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묵향은 소리가 나오는 곳 근처 에 있는 나무 위에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그런 다음 아래를 살며시 내려다보던 묵향은 놀라서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오랜 수련을 통한 기적적인 인내심으로 그것을 겨우 극복해 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달을 보면서 서럽게 울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보였던 것이다.

놀람이 끝나자 그다음에는 더욱 호기심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왜 아르티어스가 울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가 눈물과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드래곤이라는 최강의 종족이 말이다.

“흑흑, 아버지! 왜 저를 남겨 두고 그렇게 빨리 가셨습니까?”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커다란 달은 이제 반쪽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아르티어스는 달을 보면서 주절거리며 진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 삼아 할 생 각이었으나 아마도 달밤의 묘한 정취가 아르티어스의 감정을 자극했는지도 몰랐다.

“왜 이렇게 아버지가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냥 엄한 아버지가 싫기만 했는데, 지금은 너무 후회가 되요. 진작 아버지에게 효도해 드리는 건 데……. 역시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어요. 너도 자식이 생기면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그 말을 이제야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이렇게 후회가 될 줄 알았다면, 이렇게 가슴이 아파 올 줄 알았다면…..”

서글피 울며 주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쩔 때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까지 해요. 왜 일찍 돌아가셔서 제게 효도할 기회도 주지 않으시고, 끝내 불효막심한 놈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겁니 까? 왜!”

한참을 주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는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우는 모습보다 더욱 처연하게만 느껴졌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를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짓이라도 이제는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제가 미우시죠? 하지만 너무 절 미워하지는 마세요. 흑흑, 사사건건 저와 대치해서 싸우려고만 드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제가 얼마나 아버지께 불효한 놈이었는지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묵향은 도저히 더 이상 숨어서 엿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곳에 있는 야만인들 중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이 조금만 자존 심을 숙이고 들어가면 될 것을, 저렇게까지 아르티어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다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들과 지내고 싶다는 단 하나의 소망만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아르티어스를 말이다.

묵향은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며 아르티어스를 꼬옥 껴안았다. 그의 두 눈에서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 그렇게 슬퍼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셨어요. 제가 잘못한 것이지 아버지가 잘못하신 게 아니라구요.”

아르티어스는 흐느껴 우는 묵향을 따스한 손길로 다독거려 주며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꼭 껴안고 있었기에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아르티어스는 이미 그때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네게 무슨 도움이 되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그냥 아버지의 레어나 지키면서 참회하면서 사는 것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고향을 찾겠다는 너의 간절한 바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쓸데없이 내 고집만 피웠구나.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잘못했다.”

처연할 정도로 나직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시네요.”

묵향은 아르티어스에게서 배운 용언 마법을 다급하게 전개했다. 그것은 아르티어스가 묵향이 다크로 변신해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르쳐 준 트랜스포메이션 마 법이었다. 트랜스포메이션으로 변신했을 때는 저주에 걸렸을 때처럼 완벽한 성전환은 불가능하다. 즉, 성(性)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크는 아직 여 물지도 않은 소녀였었기에, 가슴은 거의 튀어나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런지 변신한 묵향은 과거 다크였을 때와 비교해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앳된 소녀와 같은 다크의 모습인 묵향을 꼭 끌어안으며 아르티어스는 감동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오오, 내 사랑스런 아들아…….”

묵향을 꼭 끌어안은 아르티어스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득의에 가득한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끌어안은 상태였기에 묵향으로서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주도권을 확실히 잡았다고 느낀 아르티어스는 나직하면서도 힘이 실린 목소리로 묵향에게 말했다.

“아빠라고 불러라. 아빠!”

잠시 망설이던 묵향은 결국 체념한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 아빠.”

달빛이 포근히 내리는 밤, 오랜만에 부자간에는 오붓하면서도 다정스런 대화가 오고갔다.

“젠장, 아들놈 하나 때문에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정말 지독하게도 말을 안 듣는단 말씀이야. 하지만 네가 아무리 까불어도 결국은 내 손바닥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킥킥킥.”

아르티어스는 키득거리며 잠을 자기 위해 천막으로 돌아갔다. 사실 단독 생활을 즐겨하는 드래곤에게 있어서 무슨 애절한 효심이라는 것이 있고, 또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하지만 비록 연극이기는 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기에 그런 것인지 천막으로 걸어가는 아르티어스의 걸음걸이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천막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묵향을 촌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다쿠다의 경우는 그 충격의 강도가 컸다. 그 도 그럴 것이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같은 황색의 피부에 검은 눈,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루 밤 만에 투명할 만큼 하얀 피부에 황금빛 찬란한 아름다운 머리카락, 그리고 커다란 갈색의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로 바뀌어 버렸으니 다쿠다나 촌락민들이 모두들 기절초풍할 만도 했던 것 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르티어스와 묵향을 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이란 원래 전지전능한 존재, 겉모습이야 언제든지 무엇으로든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들은 가급적 놀라움을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다쿠다가 지켜보는 가운데, 묵향은 가볍게 몸을 날려 말 등에 올라탔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마을 촌장과 주술사와 얘기를 나눈 다음 언제나 그 랬듯이 작은 주머니 하나를 받아서 품속에 챙겨 넣었다. 여태껏 다섯 군데 마을을 거치면서 하나씩 받았으니 아르티어스의 품속에는 다섯 개의 주머니가 들어 있는 셈이다.

그 주머니 안에는 촌민들이 주변에서 채집한 사금(砂金)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사금 외에도 촌민들이 존경의 표시로 바친 담비나 족제비 등의 가죽들, 곡물 가루 와 말린 고기까지 정성스럽게 가죽 주머니에 담아왔다.

다쿠다가 선물들을 말에다 실고 있는 것을 보며 묵향이 영 마땅치 않다는 듯 투덜거렸다.

“이 작은 마을에서 뭐 긁어먹을 게 있다고 저것들을 다 받는 거예요? 저런 거 없어도 우리가 먹고 사는 데 별 지장 없잖아요.”

“후후, 네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복과 식량만큼 중요한 것이 있더냐? 안 그러면 내가 이 나이에 사냥을 하러 다니리? 그것도 아니면 본체로 현신해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협박이라도 하라는 말이냐?”

가볍게 묵향의 의견을 일축한 아르티어스는 다쿠다에게 뭐라고 말하자, 다쿠다는 재빨리 말에 오른 다음 출발했다. 이제 이 여행도 오늘이면 끝날 것이기에 그의 채찍질은 경쾌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