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6화 – 둥루젠의 수도
둥루젠의 수도
대족장 타르티가 살고 있다는 성은 해안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세워진 돌로 만든 작은 석성(石城)이었다. 아마도 그 성은 커다란 항구와 그것을 끼고 잘 발달되어 있는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건설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을의 주민들을 모두 다 수용하기에는 성의 규모가 무척이나 작 았고, 마을은 성 안쪽이 아니라 항구를 끼고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의 규모는 크지는 않았지만,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보는 문명적인 것이었다. 물론 성벽을 쌓아 놓은 돌 자체도 네모반듯한 것이 아니라 대충 커다란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 같은 엉성한 구조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묵향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살고 있었던 시절보 다 훨씬 과거에 도착한 것이 아닌가하고 조바심을 내고 있었는데, 이 정도 규모의 성까지 쌓아 놨을 정도라면 그렇게 심하게 과거로 온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 었기 때문이다.
“저것 봐라.”
묵향은 감회 어린 표정으로 성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르티어스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막 바다로 출항하고 있는 40여 척의 크고 작은 배들로 이루어진 선단이 보였다. 큰 배를 중심으로 수십 척의 작은 배들이 지네발같이 달려 있는 노를 힘차게 저으며 바다를 헤쳐 나가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리 고 널찍한 만(灣)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 내에도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항구를 내려다보며 아르티어스는 감탄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야말로 천연적인 항구로구나. 웬만한 폭풍이 불어도 끄떡 없겠어.”
“그러니까 여기에다가 항구를 만들었겠죠. 일단 항구로 가 봐요. 혹시나 제가 살던 곳을 아는 상인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자꾸나.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라면 이 주변의 많은 나라에 가 봤겠지.”
이곳은 둥루젠의 수도였다. 그리고 항구를 수도로 정했다면, 예상외로 이 야만족들은 해상 무역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해상 무역의 특성상 먼 곳까지 진출했을 것이고, 교역지의 많은 상인들이 와서 득실거릴 수도 있을 테니 묵향이 원하는 정보를 얻기에 좋을 것이 아닌가?
아르티어스 일행이 시내로 들어서자 길거리를 지나가던 수많은 원주민들은 이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 하지만 한눈에 척 봐도 이방인들은 비무장인 것이 확실했기에 호기심 어린 눈길만을 던졌을 뿐 별로 주의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항구에 도착해 보니 거의 60여 척이나 되는 배들이 선착장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 작은 배들이었다. 하지만 큰 배들도 몇 척인가 보였다. 정박해 있는 배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30미터가 조금 넘어 보였고, 유선형으로 길쭉하게 빠진 선체와 배 중심에는 선체의 크기에 비해 짧게 느껴지는 돛대가 두 개 솟아 있 었다. 그리고 몇몇 배는 그보다 훨씬 작아서 제법 크다 싶은 것이 25미터 정도였고, 대부분의 배들은 20미터도 안 되는 것들뿐이었다.
묵향이 예전에 통치했던 치레아 공국도 바다를 통한 중개 무역을 주축으로 했었다. 묵향은 치레아 공국에 가서야 난생 처음으로 바다를 봤었고, 또 자신이 다스리 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서 무역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었다. 대량의 상품을 거래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운송 수단이 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 정박하고 있는 배들은 그때 봤던 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먼저 한눈에 척 봐도 길이만 길쭉하게 길었지, 높이와 폭이 작아서 화물을 그다지 많이 실을 수는 없을 것 같 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미개한 민족이라면 저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보는 묵향이었다.
묵향이 감회 어린 표정으로 넓은 바다와 그 사이사이에 떠 있는 배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는 그 배들을 쓰윽 둘러보더니 심드렁하게 한마디 했다. “에이씨, 뭐야 이거! 용골(龍骨: Keel)이 없잖아. 뭐 이런 배가 다 있어?”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도무지 의문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기어코 질문을 던졌다.
“아빠, 용골이라니요? 그럼 배를 건조할 때 드래곤 본을 써야 된다는 말이에요? 아빠 앞에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드래곤 잡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 귀한 뼈다 귀를 배 만드는 데 쓴단 말예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황당하다는 듯 한동안 말을 잊고 묵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무식한 녀석이 과연 나의 아들이란 말인가? 정말 어이가 없군.”
“방금 아빠가 용골이라고 했잖아요. 즉, 용의 뼈다귀!”
계속 묵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자 아르티어스는 답답하다는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이구! 용골이라는 것은 뼈다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까…….?”
아르티어스는 땅바닥에 쓱쓱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배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설명을 해줬다. 용골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배의 골격을 잡 는 그 중심축을 용골이라 부르며, 그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배의 강도에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아르티어스의 설명에 의하면 대해를 횡단하려면 용골은 절대적인 필수조건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용골의 구조를 설명한 후,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묵향에게 말해 주었다.
“물론 무역선이 전선(戰船)처럼 튼튼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대해를 횡단해서 무역을 하려면 이런 배로는 어림도 없다고 봐야 하지. 그렇다면 연안을 돌아다니 면서 무역을 하는 배인가? 흐음, 하지만 상선이라고 하기에는 배의 형태가 좀 이상해. 배가 너무 날씬하고, 또 높이가 낮은 만큼 짐도 많이 실지 못할 거야. 거~참,
이상한 노릇이군.”
알아듣기 쉽게 묵향에게 설명해 주는 아르티어스의 배에 대한 지식은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묵향은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우와, 아빠가 어떻게 그렇게 배에 대해서 잘 아세요? 아빠는 바다에 산다는 그 실버 드래곤도 아니잖아요.”
아르티어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묵향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험, 내 나이 벌써 4천! 웬만한 것은 다 경험해 봤지. 내가 소싯적에 네 할아버지 속 많이 썩힌 거 알지?”
“그, 그랬죠.”
“내가 사고 친 다음에 한동안 아버지를 피해서 튄 곳이 뱃사람 생활 아니겠냐. 네 할아버지는 물 근처에도 잘 안 가시는 성격이었기에 그곳이 안성맞춤이었지.”
그 말에 묵향은 아르티엔이 아르티어스를 잡는다고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잠시 연상해 보았다. 처음에는 치기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가, 그다음에는 인자한 사부 의 모습. 짧은 시간이었지만 묵향은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의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그때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고개를 주 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정말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비록 얼마 같이 지내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 성격도 보통은 아니시던데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그 악몽 같던 시간들이 떠오르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말도 마라. 내가 그때 한 고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빨이 갈린다. 너무 급하게 튀다 보니 보석이나 돈이 될 만한 것을 하나도 못 챙겼거든. 그러니 별수 있냐?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그런데 바다라고는 난생 처음 접해 보는 사람을 태워 주는 배가 어디 있어야지.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상선에 탔더니, 신참이라고 자식 들이 나를 얼마나 갈구던지…….”
아르티어스의 얘기에 묵향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아빠 성격에 그걸 그냥 놔 뒀어요?”
그때를 생각하자 아직도 진절머리가 나는지 아르티어스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어쩔 수 있냐? 그놈의 뱃멀미가 뭔지……. 한 달을 생고생을 하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더라. 그리고 뱃멀미에 익숙해진 후에도 도망치는 몸에 사고를 칠 수가 있어야지. 그랬다가는 순식간에 소문이 쫙 퍼질 건데 말이야. 마침 우연한 기회에 내 성격에 대충 맞는 배가 있길래 얼른 그리로 옮겼지.”
“아빠 성격에 맞는 배가 어딨어요?”
아르티어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어어, 그렇고 그런 게 있어. 건실하게 열심히 일하면서도 아주 화끈한 애들이 많이 모여 있는 배가 말이야. 하하핫! 그때는 정말 재미있었지. 역시 배를 바꿔 타기 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거든.”
“그럼 그 배에 꽤 오래 타셨겠네요? 아빠는 성격에 맞으면 거의 무한정으로 눌러앉아 있잖아요.”
한참 흥이 나서 얘기를 하던 아르티어스는 안 좋은 과거를 회상이라도 하는 듯 갑자기 인상을 팍 찡그리다 계속 말을 이었다.
“에이씨! 말도 마라. 한참 재미있을 만하면 군함들 눈치 봐야 하고, 나중에 크게 한 건 하려고 중앙 해로(海路) 쪽으로 접근했다가 순시함에 걸려 배는 박살 나고 아주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때 얼마나 열심히 순시함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헤엄을 쳤는지……. 동료들의 일부는 건져져서 돛대에 목이 매달렸었지. 참, 끔찍했었 어. 해적은 잡히면 무조건 사형……?”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말을 실수했음을 깨닫고 얼른 말을 멈췄다. 하지만 묵향의 눈이 벌써 실쭉 가늘어진 상태에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르티어스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저것 봐라. 저쪽에 묶여 있는 작은 배들은 한눈에 척 봐도 고기잡이 배라는 것을 알겠지?”
묵향은 의심스럽다는 듯한 시선을 채 지우지는 못했지만, 일단 아르티어스의 의도대로 시선을 어선 쪽으로 돌렸다.
“예.”
“요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면서 고기 잡는 배들이야 돛을 쓰건, 노를 쓰건 별 상관할 바가 없겠지만 상선은 달라. 상선은 보통 돛으로 움직이지. 노를 이용하는 경우 는 극히 드물거든. 왜냐하면 상선의 경우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양의 물건을 옮기는 데 그 의미가 있단 말이야. 많은 노잡이들에 대한 인건비도 문제가 되겠지. 물론 노잡이를 노예로 쓸 수도 있겠지만, 장거리 항해를 한다면 그들의 식량과 물을 실을 공간이 필요하지 않겠니? 그만큼 화물을 적재할 공간이 줄어든다는 말이지. 돛 을 사용하면 역풍이 불 때 힘들기는 하겠지만, 노잡이들이 차지할 공간까지도 모두 화물로 채워 넣을 수 있으니 그만큼 짐을 많이 실을 수 있거든.”
잠시 아르티어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 묵향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렇다면 결론은 전선(戰船)이라는 말인데, 그럼 왜 용골을 달지 않았을까? 용골을 달면 깊은 바다에 나갈 때 안정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튼튼하거든. 원 래 해전을 하다 보면 배끼리 부딪칠 수도 있고…, 그런 만큼 튼튼한 선체는 필수조건인데 말이다.”
“용골을 만들 줄 몰라서 그런지도 모르죠.”
아르티어스는 손가락을 탁 튕기며 말했다. 아들놈의 말대로 해답은 너무 간단한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맞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 이유밖에 없겠어. 이놈들이 원체 미개하다는 사실을 내가 잠시 깜빡했군.”
아르티어스의 설명에 묵향은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상선이 모이는 곳이라면 이 근처 바다를 항해한 선원들이 득실거릴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뭔가 중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르티어스의 말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저것들이 상선이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것은 상선이 아니라는 말이군요. 그럼 여기에서 어정거려 봐야 별로 득 될 것도 없겠네요.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묵향이 질문을 하자 아르티어스는 미리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 시장으로 가야지.”
“시장에는 왜요?”
아르티어스는 다쿠다가 끌고 있는 짐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것들을 팔아치워야 할 것 아니냐? 가죽뭉치를 들고 다녀봐야 쓸데도 없고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다쿠다에게 지시해서 시장으로 안내하게 했다. 시장으로 가면서 묵향은 시가지의 규모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월등하게 크다는 데 놀랐다. 물론 시가지의 규모는 겨우 5만 명 정도가 모여 사는 수준이었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원주민들의 생활수준에 비했을 때 이것은 정말 대단한 규모였다. 원래 많은 인구를 수용하는 시가지가 발달하려면 상업이나 공업의 발전은 필수적이었다. 한곳에 집중된 그 많은 인구가 먹고 살 기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역시 묵향의 예상대로 시장의 규모는 대단히 컸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득실거리며 갖가지 물품들을 거래하고 있었다. 말이나, 소, 양, 염소, 닭 등의 각종 가축이라 든지 쌀이나 보리, 호밀, 수수 등의 곡물들. 그리고 담비나 족제비, 여우 같은 값비싼 가죽들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구리나 무쇠로 만든 솥을 파는 상인도 있었고, 여 자들의 장신구로 사용하는 구슬이나 방울 등등 수많은 자질구레한 상품들도 보였다.
시장을 한바퀴 둘러보면서 아르티어스는 다쿠다에게 지시해 상인들과 흥정을 붙여 지금까지 오면서 선물 받은 각종 가죽과 물품들을 사금과 바꿨다. 아무래도 이 곳에서는 가죽을 구하기가 쉬워서 그런지, 말 등에 실려 있던 그 커다란 가죽뭉치를 모두 다 넘겼음에도 받은 사금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르티어스는 짐말 과 식량까지도 다 팔아치우려고 했지만, 그것을 묵향이 가로막았다. 묵향은 짐말에 실려 있던 육포들 중에서 며칠 먹을 분량만큼만 꺼내어 자신의 말에 실었다. 그 런 다음 나머지는 모두 다 다쿠다에게 줘서 서둘러서 돌려보냈다. 이곳까지 안내해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아르티어스가 언제 말과 식량을 팔아 버리는 것으로 마음을 바꿀지 알 수없었기에 그렇게 서둘렀던 것이다. 다쿠다는 감사하다고 몇 번씩이나 고개를 조아리고 식량을 실은 말을 끌고 돌아갔다.
안내인인 다쿠다를 떠나보낸 후, 묵향은 시장에서부터 떠올랐던 의문을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시장에서는 아르티어스와 다쿠다가 물건을 판다고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한가롭게 대화를 나눌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둘만 남은 상황이었고, 아르티어스도 일을 모두 처리했기에 느긋하게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아빠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뭐가 말이냐.”
“여기 시가지의 규모가 너무 크잖아요. 부근에 사는 촌민들의 생활수준이라든지, 뭐 그런 것들을 봤을 때 이렇게 도시가 크게 발달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그 정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호비트야 약간의 땅만 있으면 쥐 떼처럼 불어나는 속성이 있잖느냐. 내 여태껏 살아오면서 호비트만큼 번식력과 생존력이 강한 동물은 쥐 말고는 본 적이 없다. 거기다가 이곳은 둥루젠 부족의 수도가 아니냐? 주위의 산물(産物)들이 이곳으로 집중될 테고, 또 대족장이 사는 곳인 만큼 안전까지 보장되니까 호비트들이 안 모 여들 수가 없겠지.”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치레아에 있을 때 느낀 건데 말이죠, 도시가 발달하려면 뭔가 확실한 이유가 필요하다구요. 상업이나 공업이 발달하지 않는 한, 많은 인구가 한곳에 모여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든요.”
묵향의 말에 별걸 다 신경 쓴다는 듯 아르티어스의 대꾸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또 모르지. 항구니까 물고기가 많이 잡히던지, 아니면 배를 통한 중개 무역이라도 하는지 말이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배가 상선은 아니라면서요. 그리고 작은 어선 몇십 척 아니, 항구 밖에 고기 잡으러 간 배가 그 몇 곱절이 된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돼요. 그리고 이놈들은 돈이라는 것도 없어서 물물교환을 하든지, 아니면 사금으로 거래를 하잖아요. 그 말은 상업을 통해 먹고 사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증거 아니겠어
요?”
“글쎄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놈들이 뭘 해서 먹고 사는지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중원을 찾는 거 아니었냐?”
묵향은 더 이상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낀 점을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아르티어스의 말처럼 중원을 찾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죠.”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자,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식당이나 찾아보자. 정보를 긁어모으는 데는 여행자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식당이나 술집만 한 데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죠, 뭐.”
“한 며칠 수소문을 하다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히겠지.”
아르티어스는 묵향을 이끌고 식당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도저히 식당을 찾을 도리가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지나가던 원주민 한 명을 붙잡고 식당의 위치를 물어보고 있는 동안, 묵향은 마침 근처에 있는 대장간의 정경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뭘 하는가하는 의구심으로 지켜봤지만, 곧이어 그것이 아주 원시적으로 쇠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 챌 수 있었다. 이들이 철을 만드는 과정을 원시적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이랬다. 대장간 일이라 고는 해 본 적도 없는 묵향이 이들의 작업 과정을 척 봐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진흙과 돌을 이용해서 가운데가 움푹 파인 동그란 가마를 일단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 속에다가 깨진 주철 솥이나 쇳조각 같은 것을 집어넣은 후 그 위에다가 숯 을 잔뜩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다가 돌과 적당하게 반죽한 진흙을 쌓아 올려 위쪽으로 작은 구멍이 나 있는 원뿔형을 만들었다. 이때 풀무질을 할 수 있는 작 은 구멍 하나만 옆에다가 뚫어 놓으면 가마를 만드는 작업은 끝나게 된다. 가마를 만든 후에 숯에다가 불을 붙인 후 커다란 가죽부대로 만든 풀무로 쉬지 않고 힘껏 풀무질을 하여 그 안을 뜨겁게 가열한다. 오랜 시간을 가열한 후 가마를 부수면 처음에 만들어 뒀던 가마의 움푹 파인 지점에 쇳덩어리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묵향이 이 모든 작업 과정을 지켜본 것은 아니었다. 묵향은 풀무질을 끝낸 후 가마를 부수고 쇳덩어리를 꺼내는 과정을 지켜보며, 역순으로 작업의 진행 과정 을 유추했을 뿐이었다. 우람한 근육질을 가지고 있는 원주민 둘은 꺼낸 쇳덩어리를 가져다가 숯불로 가열한 다음 시뻘겋게 달아 있는 상태에서 망치질을 시작했다. 아르티어스가 이리저리 수소문을 끝내고 온 다음 빨리 가자고 채근했기에 뭐가 만들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간이 대장간 앞에 쌓여 있는 완성품들을 봤을 때, 지금 그들은 창촉을 만들고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묵향은 모르고 있었지만, 아르티엔으로 인해 모든 기억을 되찾은 다음부터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 옛날 국광 시절 읽었던 수없이 많은 책을 통해 쌓인 지식, 치 레아 공국을 경영하며 얻었던 경험, 그런 모든 것들이 밑바닥에 깔려 무공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그를 서서히 변화시켜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묵 향의 성격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어디에 식당이 있대요?”
“글쎄…….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이 저쪽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거기에 가 보면 식당이 있지 않겠냐?”
하지만 아무리 가도 식당은 나오지 않았다. 또다시 아르티어스가 지나가던 원주민 한 명을 붙잡고 장황하게 질문을 늘어놨다. 원주민이 뭔가 난감한 듯한 표정으 로 아르티어스에게 중얼거리며 가 버린 후 묵향은 짜증난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겨우 식당 하나 물어보는 데 무슨 설명이 그렇게 길고, 또 저놈의 반응은 왜 그래요?”
“글쎄 말이다. 식당이라는 게 원주민 말로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거든. 아무리 기억을 유추해 봐도 떠오르지가 않는단 말씀이야. 그러니 자연 빙 둘러서 질문을 해 야 하고, 또 질문을 받은 놈도 모르겠다고 저러는구나.”
“젠장, 그럼 여행자들이 모인다는 그쪽이나 빨리 가 봐요. 거기를 쭉 둘러보다 보면 어딘가 있겠죠. 설마 여기까지 여행을 와서 풀뿌리를 씹고 있겠어요?”
묵향은 천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에 도착해서야 왜 자신들이 식당을 찾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천막들은 우물을 기준으로 넓은 공터에 수십 개 가 쳐져 있었다. 우물에서 원주민 아낙들이 가죽부대를 가지고 물을 길어 가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천막 앞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곡물과 함께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런 식이라면 이곳에다가 식당을 열어 봐야 장사가 될 턱이 없을 것이다. 여행객이라는 것들이 집과 식량을 함께 가지고 다니는데, 어떻게 장사가 될 턱이 있겠는 가 말이다.
“바로 저거였군요. 그렇다면 여기에는 식당이라는 게 없는 모양이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심각하게 잠시 생각해 보더니 중얼거렸다.
“식당뿐만 아니라 여관이라는 것도 없다는 게 정확한 분석일 게다. 내가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놈들은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어. 그렇다면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고 나서 무엇으로 대가를 지불할 것이며, 여관에서 하루 밤 자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냐? 아예 그런 식으로 화폐를 사용할 만한 일이 없다는 반 증이 될 테지.”
아르티어스의 설명에 묵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럼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저쪽에 가서 말린 고기나 구워 먹죠. 저 요즘 고기 잘 굽거든요. 헤헤.”
“그러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