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8화 – 번개의신 당케 탱게르

번개의신 당케 탱게르

“밖이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것이냐?”

두툼한 호랑이 가죽을 깔아 놓은 의자에 앉아 있던 대족장 타르티는 밖이 시끌벅적 시끄럽자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해리바가 즉시 문 앞에 서 있던 호위 병사에게 지시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 봐라.”

“옛!”

병사가 달려 나간 후, 타르티는 해리바와 방금 전까지 나누던 대화를 계속했다.

“흐음, 아무래도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명확한 확증도 없는 상태에서…….”

해리바는 침중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계속 타르티에게 밀어 붙였다.

“대한(大汗)이시여,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작년에 스루 한님은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여자가 나이가 차면 결혼을 시키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그 상대가 우구나이 한님이었습니다. 우구나이 일족은 둥루젠 북쪽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대부족이 아닙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며칠 전에는 구로 한님께 딸을 달 라고 청혼을 넣은 모양입니다. 물론 스루 한님의 둘째 아들이 장성해서 결혼할 나이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그 상대가 구로 한님이라면 저희로서는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이번 혼사가 성립된다면 둥루젠의 북방 전체는 스루 한님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스루 한님께서 대한께 대 항하고자하는 뜻을 한번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세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세력을 결집한 후에 대항을 시작하면 저 희로서는 이미 늦습니다. 그러니 빨리 뭔가…….”

하지만 해리바의 말은 여기서 끊겨야 했다. 왜냐하면 방금 자신이 내보냈던 병사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 대한이시여. 큰일 났습니다.”

해리바는 인상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대한께서 계신 곳에서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리 호들갑을 떨고 난리냐?”

“탱게르께서 현신하셨습니다. 번개의 조화를 부리시는 것으로 보아 당케 탱게르이신 것이 분명합니다. 오오, 탱게르시여!”

해리바는 대한과의 밀담이 방해를 받은 것도 짜증이 났지만, 그 대화를 방해한 병사가 횡설수설하고 있자 더욱 화가 치밀었는지 언성을 높여 질책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좀 더 자세히 말해 보라!”

“예, 두 분의 탱게르께서 오셨습니다. 두 분 다 정말 여인처럼 아름다우신 분들인데, 한 분은 불타는 듯 붉은 머리에…….”

병사의 보고를 다 들은 후 해리바는 손을 내저어 병사를 물리쳤다. 그런 다음 타르티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당케 탱게르께서 왕림하신 것을 보면, 대한께 탱게르의 축복이 함께 하시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타르티는 시큰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병사의 보고를 듣다 보니 아무래도 씨쥬 상인 놈이 농간을 부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부족민들이 탱게르를 열성적으로 받드는 것이 부려먹기 편해서 좋기는 하지만 그런 허무맹랑한 전설이나 신화를 믿는다는 것은 바보짓이야.”

해리바는 타르티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난 뒤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과연, 현명하신 생각이십니다. 물론 그들이 진짜 탱게르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가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께서는 그들을 진짜로서 받아들이십시오.” 해리바의 조언에 타르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언성을 높여 외쳤다.

“뭐라고? 왜 내가 그런 바보놀음에 장단을 맞춰줘야 한다는 말이냐?”

“탱게르께서 대한께 나타났다는 것은 대단히 상서로운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예순넷씩이나 되는 탱게르들 중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설혹 그들이 사기꾼들이라도 상관없는 일이지요.”

타르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해리바를 바라봤다. 하지만 해리바는 그런 타르티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계속했다.

“예, 그런 하찮은 것들은 모두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탱게르께서 그 누구도 아닌 대한께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잘 이용하신다면 동루젠 부 족의 진정한 화합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서야 해리바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타르티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옳거니, 그런 것이 있었군. 탱게르의 뜻이 나에게 이어졌다면 그 누구도 감히 내게 반항할 수 없겠지?”

“예, 물론입니다. 설혹 반항하는 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대한께서 군대를 끌고 가신다면 항복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그 어떤 부족민도 탱게르의 군대를 상 대로는 싸우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타르티는 호탕하게 웃으며 해리바에게 지시했다.

“크하하핫! 좋아좋아. 그렇다면 주술사를 빨리 불러라!”

대족장 타르티의 명령이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해리바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주술사는 왜 찾으시는 것이옵니까?”

“탱게르가 왔다면 당연히 주술사와 함께 맞이해야 할 것 아닌가?”

타르티의 대답에 해리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술사는 지금 마을에 환자가 생겨서 성밖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대한께 오히려 더 잘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타르티는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탱게르와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여태껏 주술사가 해 왔지 않습니까. 탱게르의 뜻이라고 한다면 심지어 한汗)까지도 바꿔치울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있죠. 그만 큼 위험한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탱게르가 직접 현신하셨으니, 이번 경우는 주술사를 통하지 않고 대한께서 직접 대화를 시도해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 까?”

타르티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호오, 그러니까 탱게르를 끼고 있기만 하면 내 말이 곧 탱게르의 말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약 주술사가 탱게르를 만나게 그냥 놔둔다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해리바는 타르티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오자 곧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예, 만약 주술사가 탱게르가 가짜라는 것을 밝혀낸다면 아주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겠지.”

“그러니까 주술사가 탱게르께 접근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타르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을 하다 해리바에게 지시를 내렸다.

“좋아, 그럼 자네는 곧장 주술사에게 가서 시간을 끌어. 아니, 그보다는 아예 만나지 못하게 막아.”

지시를 받고 급히 밖으로 나가려던 해리바는 뭔가 떠올랐는지 뒤로 돌아 타르티에게 말했다.

“대한,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일주일 후에 또 다른 선단이 지팡그로 출발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감사제를 대대적으로 올리도록 주술사에게 지시하는 겁 니다. 물론 감사제 준비를 넉넉하게 할 수 있도록 금을 듬뿍 집어 주면 되겠지요. 그리고 이번 감사제는 매우 성대한 것이니, 감사제가 무사히 잘 끝마쳐질 수 있도 록 부정이 타지 않는 곳에서 감사제 전까지 탱게르께 기원을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타르티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무릎을 치며 찬성했다. 그러나 곧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호오, 그것 정말 좋은 생각이군. 그나저나 젠장, 그 탐욕스러운 주술사 놈에게 또 얼마나 많은 금을 집어 줘야 되는 거야?”

잠시 투덜거리던 타르티는 해리바에게 지시했다.

“황금은 필요한 만큼 자네가 알아서 가져가게. 어쨌건 자네는 지금 바로 주술사에게 가 보게. 주술사가 언제 성으로 돌아올지 모르니까, 한시가 급해.” “옛!”

지시를 내린 타르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이제 둥루젠을 일통시키는 한판 연극을 하러 가 볼까. 흐흐흐.”

한동안 목청껏 천신의 이름을 외치고 있던 병사들의 외침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주위가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했을 때, 웬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르티어스의 눈에 보였다. 그의 뒤에는 네 명 정도의 기골이 장대한 호위 무사들이 허리에 칼을 찬 채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아르티어스 로부터 3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부터 땅바닥에 엎드리더니, 엉금엉금 기어서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왔다. 이윽고 아르티어스 앞에 도착한 그 사내는 정중한 어 조로 한동안 중얼거리더니 양손을 뻗어 아르티어스의 발을 살며시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묵향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놈은 도대체 제정신이 박힌 놈인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발을 자기 머리 위에 올릴 수 있는 거죠? 내가 저런 꼴을 당했다면 칼을 물고 죽었을 건데, 저놈은 자진 해서 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네.”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흐흐흐, 이것이 바로 이놈들이 하는 복종의 맹세지. 그러니까 자신을 노예처럼 부려 달라는 의미가 아니겠냐. 너는 이놈이 누군 줄 모르겠지?”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발을 머리에 올리고 있는 중년의 사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묵향은 당연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점쟁이가 아닌 이상 처음 보는 원주민이 누군 지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원주민들은 머리 모양도 한결 같았고, 또 모두들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있었기에 그놈이 그놈 같아서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묵향이 맹한 얼굴로 서 있자, 아르티어스는 호기롭게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핫, 바로 이 녀석이 대족장 타르티라는 놈이야. 이것으로 둥루젠 부족의 모든 호비트는 모두 다 내 노예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서, 설마…….”

“쯧쯧, 그래서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아직도 너는 좀 더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르티어스도 이것을 공짜로 배운 것은 아니었다. 무슨 할 짓이 없어서 드래곤이 호비트의 심리를 연구하고 있겠는가. 한번 몸체만 쓰윽 보여 줘도 모든 것이 만사형통인데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다 다크 탓이었다. 그녀에게 휘둘리며 아르티어스가 그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뿐만 아니라 나중에 는 수많은 호비트들을 거느리고 막노동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보니 호비트들을 손쉽게 다루는 방법을 어쩔 수 없이 익힐 수밖에 없었던 아르티어스였던 것이 다.

잠시 어깨를 으쓱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호비트의 심리 상태를 꿰고 있으면 뭐 하느냔 말이다. 정작 그가 휘어잡고 싶은 호비트 놈에게는 아예 자신의 말이 먹혀들지를 않는데 말이다. 아니, 먹혀 들어가기는커녕 그 지독한 똥고집과 드래곤도 손을 내저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파워, 이게 정말 호비트가 맞기나 한지 아르티어스도 가끔 헷갈릴 지경이었던 것이다.

“에이, 젠장. 만사를 잊어버리고 오랜만에 뜨뜻한 물로 목욕이나 하고 싶구나. 어서 성으로 들어가자.”

아르티어스의 속을 모르는 묵향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예.”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타르티의 안내를 받으며 내전(內殿)으로 들어갔다. 아르티어스는 호랑이 가죽이 깔려 있는 상석에 거만한 태도로 앉아 타르티와 부하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타르티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을 때 타르티는 왠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르티어스가 인상을 팍 찡 그리자 허둥지둥 부하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가 왜 그렇게 허둥댔었는지는 목욕을 하러 간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타르티가 안내한 곳은 성의 부엌 뒤편에 급조한 커다란 천막이었다. 천막 안에 들어간 묵향 이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 목욕탕 맞아요?”

아르티어스 역시 목욕탕을 둘러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글쎄다.”

“제가 보기에는 통돼지 한 마리 잡아넣고 삶는 곳 같은데요?”

묵향의 표현대로 이건 돼지를 잡아 삶는 곳인지, 목욕을 하는 곳인지 분간이 안 가는 곳이었던 것이다. 소 한 마리는 통째로 삶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무쇠 솥에 물 이 펄펄 끓고 있었고, 그 옆에는 찬물이 들어 있는 크고 작은 그릇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젠장, 용도는 네가 말한 그게 맞는 것 같은데 뭐 어쩔 수 있냐. 이놈들은 아무래도 목욕이라고는 거의 안 하고 사는 것 같단 말씀이야. 그래서인지 내가 알고 있는 원주민 말 중에서 ‘목욕’이라는 단어는 아예 없었다. 그래서 뜨뜻한 물로 몸을 좀 씻은 후에 식사를 하고 싶다고 했지.”

“뜨뜻한 물이요? 이 정도면 고기를 삶아도 되겠는데요. 하긴 뭐 어쩔 수 없지. 일단 씻을 수만 있다면 이런 거라도 어딘데…….”

확실히 대족장이 사는 성에 온 것은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 마른 고기 조각이나 씹으며 저녁을 때울 뻔했는데, 오랜만에 목욕도 하고 진수성찬까지 대접받았던 것이다. 진수성찬이라고 해 봐야 여태껏 다른 촌락에서 대접받았던 것과 같이 이곳에서도 고기를 굽거나 삶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말린 고기보다야 백배 낫지 않은 가. 단지 음식을 차려 놓은 모양이 조금 수상쩍었지만..

“어째 상을 차려 놓은 모양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글쎄 말이다. 이거 꼭 무슨 제사라도 지낼 때 음식 차려놓은 것 같은 모양인데?”

그도 그럴 것이 묵향과 아르티어스의 앞에는 커다란 탁자가 놓여졌고, 그 위에 수많은 음식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음식들의 상태였다. 한 마리 통째로 삶아 놓은 양이라든지, 커다란 술항아리나 통째로 구은 커다란 생선 몇 마리가 층층이 쌓여 접시에 담겨 있었다. 일단 요리는 한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어떻게 이대 로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적당히 덜어서 작은 접시에 따로 담아서 먹는다면 몰라도 말이다.

이윽고 음식을 탁자 위에 모두 놓자, 병사 한 명이 잡티 하나 없는 아름다운 백마를 한 마리 끌고 왔다. 연회석상에 웬 말을 끌고 오나 싶어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 로 바라보며 묵향이 중얼거렸다.

“여기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선물을 하는 풍습이 있는 모양이죠? 그나저나 아주 멋진 말이네.”

“그, 글쎄다. 전에 말을 몇 마리 선물을 받기는 했지만 그때는 떠날 때 받았었는데…, 이상하네?”

하지만 그들의 의문은 곧 풀렸다. 대족장이 손짓을 하자, 병사 한 명이 우유가 가득 든 작은 질그릇을 가지고 다가와서 말에게 먹였다. 말이 우유를 다 마시고 나자 병사는 말의 이마에 우유를 뿌린 후 물러났다. 그러자 커다란 칼을 든 덩치 좋은 병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섰다.

퍽!

단칼에 백마의 목을 잘라 버렸기에 사방으로 붉은 피가 튀었다. 그는 백마의 목을 자른 후 재빨리 커다란 질그릇을 대고 피를 받기 시작했다. 곧이어 커다란 질그 릇은 백마의 피로 흘러넘칠 정도로 가득 찼다. 병사는 질그릇이 피로 가득 차자, 곧장 타르티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는 정중히 바쳤다. 타르티는 그 질그릇을 가 지고 상 앞에 놓은 다음 몇 번인가 절을 하며 한참 동안 뭔가 중얼거렸다.

묵향은 자신들의 앞에다가 도저히 먹을 수도 없을 만큼 태산같이 음식을 쌓아 놓았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말을 도살하는 등 괴상한 짓을 한 대족장이 오랜 시간 절을 해대며 중얼거려 대자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녀석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예요?”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참~내, 겨우 피 한 사발 놔두고 원하는 것도 많구먼. 부족의 완벽한 통일을 이루게 해 달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손이 번성하게 해 달라는 둥 별의별 자질구레한 헛소리들을 늘어놓고 있는 중이야.”

“뭐, 뭐라고요? 그럼 저놈들 지금 우리를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말입니까? 감히 산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다니……?”

묵향이 약간 흥분한 듯하자 아르티어스는 다급히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쉿!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 안 그러면 들통 날지도 모르니까.”

이윽고 타르티는 기원을 모두 끝냈는지, 질그릇을 가지고 아르티어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르티어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질그릇을 바치며 뭐라고 또다시 말했다. 타르티로부터 질그릇을 받아든 아르티어스는 망설이지 않고 쭈욱 한 모금 들이켠 다음 질그릇을 묵향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 한 모금만 마셔라.”

“으엑! 이걸 마시라구요?”

“그럼 어쩌겠냐? 도저히 못 마시겠으면 마시는 척이라도 해. 이것도 다 우리가 신인 척하고 있기에 생겨난 결과니까 말이다. 만약 안 마시면 우리가 스스로 신이 아니라고 실토하는 것이나 똑같은 결과가 나오게 될 거다.”

묵향은 마지못해 피비린내 나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다음 타르티에게 돌려줬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피비린내는 숱하게 맡아 봤지만, 그냥 맡는 것하고 그것을 마 시는 것은 천지 차이가 있었다. 묵향이 뱃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겨우 참고 앉아 있을 때, 야만인들의 의식은 계속되고 있었다. 타르티는 자신도 한 모금 마신 다음, 그 질그릇을 서열 순서대로 방 안에 있는 모든 원주민들이 한 모금씩 마시도록 했다. 아마도 한 모금씩 마시면서 서로 간의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모양이었다. 의식이 끝난 다음에는 묵향과 아르티어스 앞에 놓여졌던 음식을 거둬들여, 각자 먹을 수 있도록 다시 요리하여 연회석상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배분하기 시작했 다. 음식과 술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기에, 모두들 담소를 나누며 먹고 마시기 시작했기에 자연 연회석상은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연회가 시작되고 난 후, 하녀로 보이는 여자들이 여기저기에 음식물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물론 하녀로 보인다고 한 이유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복장이 약속이 나 한 듯 거의 엇비슷했기에 옷만 봐서는 신분의 고하를 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녀는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신선한 생고기를 가득 담아 놓은 접시를 몇 개인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아르티어스와 묵향 앞에다가 놓았다.

“이건 또 뭐예요? 요리를 해서 가져오지 않고 왜 생고기를 가져오는 거죠? 아니면 즉석에서 요리를 해 주려는 모양인가?”

묵향의 말이 그럴듯하다 생각된 아르티어스는 하녀에게 뭔가 질문을 던졌는데, 하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몇 마디 대답한 후 줄행랑을 쳐 버렸다. 아마도 지고하신 존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아르티어스는 하녀가 떠난 후 묵향에게 대답해 줬다.

“그건 방금 잡았던 백마의 심장과 간 그리고 콩팥이래. 아마도 여기서는 이것을 날것으로 먹는 모양이야.”

그 말에 묵향이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와 똑같이 날고기가 주어진 곳이 딱 한 군데 있었다. 그곳은 대족장과 그의 심복들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말 한 마리에서 나 오는 심장과 간, 콩팥이라고 해 봐야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니었기에 일부는 신께 바치고, 나머지는 가장 높은 사람들만 먹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면 이 날고기가 꽤 나 여기서는 고급 음식인 것 같았다.

그 외에 제공된 음식물은 이곳까지 오면서 촌락에서 먹었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술은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처럼 텁텁한 냄새가 나는 뿌연 술도 나왔지만 맑은 빛깔의 술도 있었던 것이다. 원주민들은 그 술을 투박한 질그릇으로 만든 목이 길쭉한 병에 담아 와서 화로에다가 술병을 넣어 따뜻하게 데운 후 마셨다. 묵향 이 따뜻한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그 술을 한 잔 쭈욱 들이켜자 목구멍에서부터 시작해 속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와, 이거 제법 괜찮은데요? 여기 와서 처음 맛보는 제대로 된 술이네요. 이 정도 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을 보면 생각만큼 그렇게 야만인은 아닌 모양이에요.” “정말이냐?”

아르티어스도 한 잔 쭈욱 들이켠 다음 그 술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연거푸 몇 잔 들이켰다.

“정말 특이하구나. 내 여태껏 수많은 술을 마셔 봤지만, 이렇게 따끈하게 데워서 마시는 술은 처음이군. 대부분의 술은 다 차게 해서 마시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렇 게 해서 마시니 그 나름대로 괜찮구나.”

“근데 이게 무슨 술이죠?”

아르티어스는 옆에서 시중들고 있던 원주민에게 몇 마디 물어 본 후, 묵향에게 전해줬다.

“사케라는 술이라는구나.”

묵향은 사케와 함께 자신의 앞에 놓인 고기를 몇 조각 집어먹다가 궁금한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무슨 고기예요?”

며칠 전만 해도 아르티어스와는 냉전 중이었기에 뭔가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화해를 하고 나니 자신이 지금 먹고 있는 게 뭔지 궁금해 졌던 것이다. 닭이나 오리 같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고, 소나 돼지와는 또 맛이 달랐다. 그리고 중원에 있을 때 한 번씩 별식으로 먹어 봤던 개와도 뭔가 달랐다. 그렇 다면 이게 양인가? 하지만 양고기치고는 노린내가 없지 않은가.

“응, 그거 말고기다. 어때, 맛있지?”

“이게 말이라구요? 어떻게 여기서는 말을 그렇게 많이 잡아먹죠? 지금까지 거쳐 왔던 마을들 중에서 첫 번째 마을만 빼고는 모두들 말을 잡았잖아요?”

“아, 그랬었나? 맞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나는 저쪽 세계에 있을 때 어쩌다 가끔씩 말을 잡아먹었었기에 그런가 보다 했지.”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그런 묵향의 모습이 정말 깨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고 생각하며, 아르티어스는 감회 어린 표정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봤다.

“어? 저랑 같이 계실 때는 한 번도 말고기를 드신 적이 없었잖아요? 사실 그쪽에서도 말은 유용한 탈것이었고, 그래서 아주 귀하게 취급된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하긴, 늙어서 쓸모없어진 말을 잡아서 농노들이 먹는다는 말은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는 것도 같지만. 하지만 아버지가 그런 늙은 말고기를 먹을 정도로 생활 이 곤란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데요.”

“아아, 그건 내 영토에 침입해 들어온 놈들을 해치울 때 말이다. 그때 사람만 먹자니까 생각 외로 양이 별로더군. 사실 네다섯 명 해 봐야 한입거리도 안 되니까 말

이야. 그래서 그때 말도 함께 먹었지. 쩝…, 아주 싱싱한 말들이어서 그런지 맛이 꽤 좋았거든.”

입맛을 다시며 아르티어스가 능청스레 말하자 묵향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어어? 얘야. 친절히 대답을 해 줬을 뿐인데, 그런 반응을 보이면 이 애비한테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냐?”

순간 아르티어스가 당황한 어조로 말을 건넸지만, 묵향은 그쪽으로는 아예 시선도 돌리고 싶지가 않았다. 워낙 오랫동안 그와 함께 지내다 보니 드래곤이라는 사 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했기에 당황했던 것이다.

드래곤은 파괴와 공포의 상징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친근하게 다가와서 오랜 세월 함께 울고 웃으며 부대꼈다. 그러다 보니 묵향은 그가 드래곤이라는 사실 을 점차 잊어가고 있었다. 말로야 드래곤이라는 둥, 위대한 골드일족의 후예라는 둥 뻐기기는 했지만, 그의 행동 양식을 인간의 것에 맞춰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다. 사실 드래곤이라면 말과 사람을 생으로 씹어 먹든,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든 별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아르티어스는 단순히 그의 과거를 이야기해 줬을 뿐이었 다. 자신이 과민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문득 묵향은 차원 이동을 할 때, 자신을 처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함께 가자고 눈물짓던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드래곤인 그가 하등한 호비트인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에 비해서 자신은 아르티어스의 간단한 부탁 하나도 들어주기 싫어 몇 날 며칠을 감정싸움을 해 대지 않았던가. 묵향은 아르티어스에게 좀 더 잘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묵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르티어스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되돌리며 물었다. 물론 이것은 방금 전에 자신이 아르티어스를 외면한 것을 상쇄시키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저쪽을 보니까 원주민 녀석들이 아주 맛나게 고기를 먹고 있던데요? 그런 걸로 미루어 보아 식량이 모자라기 때문에 폐마를 잡아먹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혹시 묵향이 토라진 것이 아닌가 조마조마하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토라진 것이 아니라 저 뒤쪽을 둘러보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던 것으로 착각하고, 즉각 아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아르티어스는 옆에 서 있던 원주민들을 향해 뭔가 질문을 던졌고, 그들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아마도 말고기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동안의 토 론이 끝나자 아르티어스는 환히 웃으며 묵향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저 녀석들 말로는 오늘이 아주 경사스러운 날, 그러니까 천신께서 내려오신 날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말고기를 대접하는 거래. 말고기는 열 량이 많아서 추운 겨울을 나는 데 양과 함께 최고의 음식으로 친다는구나.”

열량이 많다는 부분에서 묵향은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역시 환경적인 문제였군요.”

“아니, 그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문제지. 열량도 많고, 맛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말고기에는 기생충이 없다고 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란 것이 잡으면 고 기가 엄청 나오잖아.”

아르티어스의 말을 듣고 있던 묵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일단 덩치가 있잖아요.”

“그렇지? 그렇다 보니 보관상에 문제가 생기는 거야. 몇 사람 모였다고 말 한 마리를 잡았다가는 그 고기를 싱싱한 상태에서 다 먹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든.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만 말을 잡는다는 거야. 이리로 오면서 먹었던 육포도 말고기를 말린 것이라 하더라.”

이곳까지 오면서 먹었던 말린 고기가 말이었다는 사실에 묵향은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예에? 말고기로 육포도 만든다구요?”

“물론이야, 여기서는 먹고 남은 음식은 상하지 않도록 잘 저장을 한다는구나. 잘못하면 상해서 버리게 되니까 말이다. 소금은 구하기가 힘드니 소금에 절이는 방 법 대신 보통은 훈제를 한다고 하더군. 어찌 되었건, 이곳 호비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이기는 하지만 평상시에는 구경하기에도 힘든 것이 말고기라는군. 사실 말 은 아주 많은 용도로 쓰이는 동물이잖니? 탈것으로도 이용되고, 짐을 옮기거나 밭을 가는데도 쓸모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웬만큼 경사스러운 일이 있지 않는 한 말고기는 거의 구경하기도 힘들다는구나.”

아르티어스의 자세한 설명에 이해가 간다는 듯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호오, 그러니까 여기서는 폐마를 잡아서 먹는 방식이 아니군요.”

“물론 폐마를 잡아먹기도 하겠지. 하지만, 신께서 왕림하셨다는데 감히 폐마를 잡아서 대접하는 놈이 어디 있겠냐? 만약 그랬다가는 내가 벌써 박살을 냈지. 내가 이래봬도 입맛이 좀 까다롭잖냐?”

묵향은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아귀처럼 쩝쩝거리던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같잖다는 듯 대꾸했다.

“어~련하시겠어요.”

탱게르께 제사 지내는 형식으로 엄숙하게 시작된 대연회는 차츰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그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술 때문이었다. 평상시에 거행 되는 탱게르께 대한 제사의 경우, 매우 엄숙하게 진행된다. 물론 이때도 술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 양이 극히 한정적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한 사람이 두세 잔 정도 마시면 끝이었기에 뒤탈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타르티 대한의 지시에 의해 술이 거의 무제한으로 풀리고 있었기에 연회 자리는 화기애애해지기는 했지만, 조금 산만한 감이 없지 않았다. 타르티가 이렇듯 술을 푼 것도 다 따지고 보면, 탱게르께 경배를 드리기 보다는 부족의 화합을 도모하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 대한이 저 연회 석상의 최고 상석에 앉아 있는 둘을 절대로 탱게르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상석에 앉아 있는 그들도 이런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결코 싫지는 않은 듯 흥겹게 먹고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탱게르가 이곳에 온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주위의 한들을 다 불러 모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대연회라는 것도 탱게 르가 왕림한 후 겨우 세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급히 준비한 것이다. 그 때문에 수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세 부족의 한들을 초정한 것이 고작이었 다. 그리고 그 세 한들의 경우 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을 영토로 차지하고 있는 만큼, 타르티가 가장 신임하고 있는 한들이었다.

이번 대연회는 탱게르가 대한에게 왕림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식전행사 같은 것으로 급히 계획된 것이었다. 진짜 축제는 한 달 후에 일주 일 동안 대규모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이렇게 한 달이라는 여유 기간을 둬야 각 지역을 다스리는 한들이 집결할 수 있을 만큼 둥루젠 부족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둥루젠은 사냥과 목축을 주로 했지만 농업을 통한 생산도 꽤 많은 편이 었다. 그렇기에 한 곳에 정착하여 사는 생활이 가능했다. 그리고 제법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한들의 경우, 자신들의 항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항구에서 얻을 수 있는 수입이 토지에서 얻는 것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한들이 거주하는 곳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는 말은 곧, 전서구(傳書鳩)를 통한 빠른 정보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전서구를 가장 멀리 떨어 져 있는 한의 영토에 보냈을 때, 그가 연락을 받고 급히 준비를 갖춰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한 달이었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한들이 모두 도착한 후에 대규모 축제를 해야만 대한이 탱게르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둥루젠 전체에 과시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사실 대 한에게 있어서 탱게르가 진짜건 가짜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부하들이 탱게르가 현신했다고 믿도록 만들 정도로 확실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 고 자신은 그것에 편승해서 최대한의 이익을 챙기면 되는 것이다.

대족장 타르티는 왼쪽에 앉은 심복 부하들 중의 한 명이 사발에 가득히 담아 권하는 술을 단숨에 마신 다음 오른쪽에 앉아 있는 세 명의 한들에게 호기롭게 말했 다.

“자, 보게나. 탱게르의 뜻이 나에게로 이어지지 않았나?”

타르티의 말에 쑤젠 한이 공손한 어조로 가장 먼저 맞장구를 쳤다. 그는 겨우 48개 촌락을 다스리고 있는 세력이 약한 한이었기에, 이 기회를 이용하여 타르티에게 잘 보여 둘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둥루젠의 영원한 지도자가 될만한 분은 대한밖에 없으시다는 것을 탱게르께서도 인정하셨다는 명확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쑤젠 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한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하하핫, 쑤젠 한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덕분에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다니 이 모든 것이 다 둥루젠의 태양이신 대한께서 계시기 때문에 누리는 호 사가 아닌가 합니다.”

타르티 오른쪽에 앉아 있던 한들은 앞 다투어 아부하기에 바빴다. 타르티는 한들의 아부가 싫지는 않은 듯 호쾌하게 웃으며 잔을 쭉 들이켠 다음 말했다.

“하하핫! 탱게르께서 나를 어여삐 여기신 것이지 내가 어디 잘나서이겠는가? 하여간 오늘은 탱게르께서 현신하신 뜻 깊은 날이니 모두들 마음껏 즐기도록 하세!” 그렇게 신이라 사기 친 아르티어스와 이를 이용해 둥루젠의 일통을 꿈꾸는 타르티의 동상이몽이 교차하며 성에서의 밤은 시끌벅적한 가운데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