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14화 – 무림고수 안휘성 집결
무림고수 안휘성 집결
“사형과 함께 왔으면 좋았을 것을..”
말을 타고 앞서 나가던 패력검제가 중얼거리자, 그의 아들인 폭풍검 서량이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다.
“마교의 장로기는 하지만, 수행원도 몇 없다고 하는데 사숙의 힘을 빌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나중에 이 일을 아시게 되면 부리나케 달려오셔서 노화를 터뜨리시지 않겠느냐? 그래서 출발하기 전에 사형께 연락을 넣어 두기는 했다. 하지만 긴급을 요하는 일이라 그렇게만 처리해 놓고 바로 출발한 것이다. 사형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다가, 오랜만에 나온 먹음직한 놈을 남에게 뺏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말을 마친 패력검제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패력검제는 중년의 호위 무사 둘을 대동한 채 아들과 함께 앞서 나갔고, 그 뒤로 멀찍이 떨어져서 7룡4봉의 젊은이들이 따랐다. 아직 햇병아리들인 그들이 함께 말 을 달리기에는 패력검제의 위상이 너무나도 높았던 까닭이다.
화경의 고수와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이 그들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화경의 고수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거려지기도 했지만, 화경은 무예를 익히는 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닌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내뱉는 말에 신경이 쓰 이지 않을 리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따라가며 앞에서 오가는 얘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문득 초미가 옆을 바라보며 살포시 입을 열었다.
“제령문주님의 사형이 누구시지요?”
그러자 옥대진은 자신이 무림의 정세에 해박하다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듯 교묘하게 화제를 그쪽으로 돌렸다.
“아, 초 소저께서는 강호에 대해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분은 고혼일검(孤魂劍) 여민(呂) 대협이시죠.”
고혼일검은 대단히 유명한 검객이었다. 그는 병사했다고 알려진 뇌전검황(雷電劍皇)의 마지막 남은 후손이다. 그렇기에 모두들 그가 문주직을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는 문주직을 그의 사제인 서진에게 양보했다.
그것 때문에 세간에서는 제령문에서 뇌전검황과 상당수의 고수가 사망한 원인이 돌림병이 아닌 뭔가 다른 이유일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제령문은 돌림병 탓이라고만 할 뿐, 입을 꽉 다물고 있으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어찌 되었건, 문주직을 양보하고 문을 나온 여민의 행적은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강호를 떠돌며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사파의 씨를 말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 강호에서는 제령문에서 일어난 일이 혹시 사파하고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소문이 잠시 떠돌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파의 손에 변을 당했다고 하 기에는 뇌전검황의 명성이 너무나도 높았기에 그 소문은 곧 사그라들었다.
여민은 아주 뛰어난 검술을 지닌 절정고수였기에, 모두들 대협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파 인물들에게 가하는 손속이 너무나도 잔인했기에, 정파에 적을 둔 무인들조차 그를 멀리하고 있었다. 대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혈향(血香)이 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말에 초미는 놀랍다는 듯 물었다. 사실, 그런 혈귀와 제령문주가 동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 그분이 제령문주님의 사형이셨어요?”
“잠시만요.”
옥대진은 슬그머니 말고삐를 잡아당겨 앞쪽과의 거리를 한층 늘려 잡았다. 그러자 그녀들도 곧 뭔가를 눈치 챈 듯 그에 맞추어 슬그머니 뒤로 처졌다. 옥대진은 앞 쪽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오래전 제령문에 돌림병이 돌아 많은 고수가 죽었다는 소문 들어 보셨습니까?”
그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능비화가 끼어들었다.
“예, 들어 본 적이 있어요. 그때 문주이셨던 뇌전검황 선배님을 비롯한 많은 제령문의 고수가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제가 들은 소문으로는 그게 돌림병이 아니라 마교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마교가 쳐들어와서 그토록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죠. 지금도 제 령문의 모든 식솔들이 사파나 마교라는 얘기만 나와도 이를 갈 정도로 그들을 증오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게 소문만은 아닌 모양이더군요.”
“그런 소문도 있었단 말인가요?”
“예, 대신 제령문 쪽에서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하니, 그걸 비밀에 붙인 것이겠지요.”
이때, 멀리서 장소성이 들려왔다. 상당한 내공이 실린 휘파람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자, 모두들 그쪽으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경공을 전 개하며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리기 위해 일부러 장소성을 낸 것이다. 그것을 보면 적대적인 목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상대가 가까이 접근해 오자, 초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접근해 오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장소성을 날리며 다가온 자는 패력검제 일행과 거리가 좁혀지자 급격히 속도를 줄였다. 그런 다음 패력검제를 향해 정중하게 권하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패력검제 대협.”
그러자 패력검제는 마주 포권하며 환하게 웃었다.
“오, 어서 오십시오, 일진검(一鎭劍) 대협.”
그 말을 듣자 패력검제와 동행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진검 초우(礎雨)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젊었을 때 강호행을 하며 가문을 숨기기 위해 검을 이용했다. 그 때문에 도(刀)로서 유명한 초씨세가의 가주 명호가 일진검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명호와는 달리 거대한 도를 등에 지고 있었다.
모두들 인사를 나눈 후, 패력검제가 초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시는 길이십니까?”
“예, 그게 제 여식을 만나려고 말입니다.”
그 말에 패력검제의 시선이 초미에게로 돌려졌다. 그녀의 아버지가 급히 따라온 이유야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녀는 울상을 해가지고 초우에게 말했다.
“아빠, 제발.”
초우는 그녀의 주위를 둘러봤다. 척 보아도 출중한 기량을 지니고 있는 듯한 젊은이가 둘씩이나 보였다.
그들을 보자 가출한 딸을 데리러 온 초우의 마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결혼할 나이에 다다른 딸을 가진 부모의 심정은 똑같을 것이다. 파락호 같은 놈팡이 놈들하고 어울려 다니는 것도 아니고, 명문의 자제들하고 어울리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는 패력검제마저 곁에 있으니 더욱 마음이 놓이는 초우였다.
“딸아이의 강호 초출 기회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군.’
초우는 딸아이를 손짓해서 불러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간 후, 음흉스런 표정을 지으며 전음으로 말했다.
<혹시 저 중에서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는 게냐?>
그 말에 초미는 발끈해서 큰 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아빠는 저를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패력검제 대협께서 마두의 목을 베는 것을 구경하고 싶었을 뿐이라구요.”
초우는 저쪽에 서 있는 패력검제 일행을 힐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어 딸에게 말했다.
“그, 그러냐? 어흠…, 좋다. 나도 함께 가기로 하지. 대신 자유 시간은 충분히 줄 테니까 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봐라. 둘 다 뛰어난 녀석이기는 하지만, 아비 인 내 의견을 물어본다면 나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왼쪽보다는 오른쪽에 서 있는 녀석을 적극 추천해 주고 싶다.”
그러면서 초우가 지목한 것은 폭풍검 서량이었다. 초미는 얼굴을 붉히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아빳!”
하지만 초미는 그 말이 싫지만은 않은지 서량을 살짝 훔쳐보았다.
“안녕하신가, 흑풍대주.”
뜻밖에 모습을 드러낸 홍진을 보자 관지는 반갑게 인사하며 반겼다.
“예, 안녕하셨습니까? 그런데,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사람을 보내셨으면 제가 찾아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근처에 온 김에 자네 생각이 나서 잠시 들렀네.”
“차라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홍진은 혹시 엿듣는 자가 있는지 주의 깊게 주위를 살펴본 후 낮은 소리로 말했다.
“실은, 뭔가 좀 아리송한 정보가 입수되어 그대와 상의 좀 할까 해서 일부러 찾아왔네. 괜히 내가 자네를 호출하면 천리독행 부교주 쪽에서 긴장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 말에 관지는 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정보인데 그러십니까?”
“확실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현재 무림맹의 고수들이 안휘성에 집결하고 있다는 수하들의 보고서가 올라오고 있네.”
마교 내의 가장 강력한 첩보 조직인 비마대(秘魔隊)의 수장인 홍진이 하는 말이니 틀림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관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휘성에 고수들을 파견해서 뭘 한다는 말인가?
“안휘성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 정도로 많은 고수를 파견할 만한 일은 보고받은 바가 없네. 그래서 내가 그대를 찾은 것이지. 혹시 요즘 들어 천리독행 쪽의 동태에 뭔가 수상한 점은 안 보이 던가?”
물론 홍진도 첩보망을 이용해 철영 부교주를 감시하고 있었지만, 수하들에게서 이렇다 할 보고가 올라온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관지를 찾아온 것이다. 관지도 독자적인 첩보망을 이용해서 철영의 세력을 감시하는 중이었기에, 혹시 그쪽에서 알아낸 것이 있을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말이다.
“예? 전에 말씀드린 그것 외에는 별로 수상한 점이 포착된 것은 없습니다만…….”
잠시 궁리해 보던 홍진이 중얼거렸다.
“청해성과 사천성에 비밀 분타를 몇 개 슬그머니 만든 것은 나도 포착했는데……. 설마, 안휘성에까지 뭔가를 만들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수하들에게 그 방향 으로도 조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해야겠군. 그건 그렇고, 같은 식구들끼리 서로 감시해야 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구먼. 어쩌다 마교가 이렇게까지 됐는 지……..
이때, 관지가 갑자기 검을 번개처럼 뽑아 들었다. 천장 위에서 미세한 인기척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막 손을 쓰려는 찰나, 홍진이 다급히 제지했다.
“아닐세. 내 수하네.”
뭔가 서로 간에 전음이 오고 가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홍진이 관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새로운 정보가 도착했네. 우려와는 달리 천리독행 쪽의 소행은 아닌 모양일세.”
“그럼?”
“아마 사파 쪽에서 말썽꾼이 하나 튀어나온 모양이야. 그자를 척살하기 위해 무림맹의 고수들이 움직이는 것이라는군. 우리로서는 한시름 놓은 셈이지.”
그 말에 관지는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홍진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오히려 시작이 아닐까요? 만약 천리독행 부교주가 이 사실을 알아 보십시오. 그는 그자를 구출하자고 제안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건을 본교 진출을 위한 시발 점으로 삼고자 말입니다.”
그러자 홍진은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맞아, 그럴 수도 있겠군. 수하들 입단속을 잘 시켜야겠어. 그건 그렇고, 나는 이만 가 보겠네. 너무 오래 있으면 자네한테도 폐가 될 테고, 또 나한테도 별로 좋지 않게 작용할 게 분명하니까.”
홍진이 가 버린 후, 관지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젠장, 갈수록 태산이로군.”
계속되는 철영 부교주와의 신경전에 지쳐가고 있던 관지였기에, 이런 푸념을 해 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