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15화 – 뇌전검황의 제자
뇌전검황의 제자
각 문파 혹은 무림맹에서 파견된 고수들은 모두들 무영신마 장영길을 찾고 있었다. 모두들 그의 초상화를 들고, 그에 부합되는 인물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
만 도무지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들 이리저리 서성대며 서로 간에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마을로 들어서며 무사들이 너무 많이 눈에 띄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오잉? 이상하네. 요 며칠 들어 무장을 하고 있는 놈들이 자주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냐?”
“제 부하들 중 한 놈이 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에요. 그 녀석을 잡겠다고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거죠.”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알 만하다는 듯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치 챈 묵향이 따지듯 물었다.
“아버지! 아직도 그 얘기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계신 것은 아니겠죠?”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음흉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짜식, 뭘 그 정도 가지고 숨기려고 해. 내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니까 그러네. 나도 너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짓은 다 해 봤어.”
“이해하기는 뭘 이해해요? 나는 그런 짓 해 본 적도 없다니까요.”
둘이서 아웅다웅 싸우면서 길을 가던 묵향은 이상한 광경을 보고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말을 타고 가던 무림인들 중 몇 명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넋이 빠 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묵향은 혹시 자신을 보는 게 아닐 수도 있었으므로 뒤편으로 고개를 돌려봤지만, 아무리 봐도 그쪽 방향에는 놀랄 만 한 그 무엇도 눈에 띄지 않았다.
묵향은 그들을 향해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호오, 나를 알아보는 녀석이 있었군. 서로 안면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 같이 오붓하게 대화나 좀 나눠 볼까?”
묵향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보자 초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과거 자신이 멋도 모르고 함께 여행했었던 악마. 초 우는 나중에야 사악하기 그지없는 마두의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그가 그 마두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초우는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점혈한 것 도 모자라서 결박까지 하고, 거기에다가 여동생들은 그를 허풍쟁이라고 모욕까지 줬었는데, 그러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길을 가던 아버지가 갑자기 멈춰 서서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본 초미는 짜증 어린 어조로 외쳤다.
“아빠, 뭐 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초우는 그 말을 들을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 암흑마제? 당신이… 어, 어떻게 여기에…….”
초씨세가주의 입에서 ‘암흑마제’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아직까지 상대의 정체를 모르고 있던 일행의 표정이 경악감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뿐. 아직까지 그 들은 패력검제’라는 기댈 곳이 있었기에 절망감까지는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묵향을 바라보는 패력검제의 두 눈도 초우처럼 경악감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묵향의 눈초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안 그래도 아르티어스에게 극악한 인물로 오해받고 있었기에 목구멍까지 짜증이 치밀어 올라 있었던 중이었다. “네놈도 암흑마제 타령이냐? 오냐, 네놈 눈에는 내가 그렇게 악당으로 보인단 말이지. 그래, 너 오늘 잘 만났다. 악당으로 봤으면 악당답게 행동해 줘야겠지.”
갑자기 묵향의 신형이 번쩍 사라진다 싶더니 어느새 그는 초우의 코앞에 서 있었다. 불식간에 당한 일이라 초우가 반사적으로 방어를 하려 했지만 이미 상대의 주 먹은 자신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퍽!
“크악!”
그 이후로 가해진 구타는 차마 입으로 말하기도 안타까울 정도였다. 묵향이 초씨세가의 가주를 복날 개 패듯 패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 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처음 그가 초우를 노려볼 때의 그 끔찍한 살기.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모두들 살기에 질려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패 준 후, 그것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는지 발로 몇 번 더 찬 묵향은 이빨 갈리는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다시 한 번 더 그놈의 명호를 말해 봐! 아예 파묻어 줄 테니까.”
쿨럭쿨럭!
땅바닥에 나뒹굴어 정신을 잃은 듯 쓰러져 있던 초우는 묵향의 발길질에 정신을 차린 듯 다급히 입을 벙긋거렸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삶에 대한 욕구가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이 두들겨 맞았는지 그의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새어 나올 뿐이었다.
“마, 아니, 처, 천마신교의…, 교주.”
묵향은 싸늘하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그래,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
묵향은 말 위에 탄 채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패력검제 쪽으로 시선을 획 돌리며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이쪽은 그래도 제법이야. 화경이라……. 반항하는 맛이 꽤 쏠쏠하겠어.”
먹이를 눈앞에 둔 매처럼 잠시 패력검제를 노려보던 묵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구면이지? 네 녀석 표정만 봐도 다 알아. 이름이 뭐지?”
이때 패력검제의 뒤편에 서 있던 서량이 우렁차게 외쳤다.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 그 자신의 공포심을 억눌렀던 것이다.
“감히, 아버님께 그따위 언사를 내뱉다니. 각오해랏!”
서량은 말 위에서 순식간에 뛰어올라 어느새 검을 뽑았는지 필살의 공격을 가해 왔다. 그의 검이 휘둘러지며 막강한 검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묵향 도 손을 썼다. 그의 손이 강기에 싸여 퍼렇게 변하며, 괴이한 곡선을 그렸다. 순식간에 검기와 강기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검기가 수강(剛)을 이길 수 는 없는 법. 어느 순간, 묵향의 손이 서량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검막을 뚫고 쑥 들어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때 서량의 목숨을 살린 것은 패력검제였다. 그는 아들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휙 던져 버리며,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검을 들고 묵향을 향해 짓 쳐 들어갔다. 그의 검에서는 서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패도적인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쿠콰쾅.
화경의 고수가 펼치는 검무는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검이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엄청난 강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허공을 수놓았다. 세인들로서는 상상도 하 기 힘들 정도의 파괴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기에, 뒤에 서 있는 일행들은 패력검제의 위용에 압도되는 자신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면서도 패력검제의 안색은 점점 창백하게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마저 흘러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60여 초식이 지나가 버렸을 정도로 쾌속하게 벌어진 격투였기에, 주변에 서 있는 일행은 패력검제를 돕겠다고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챙!
어느 한순간, 두 고수의 격투는 끝나 있었다. 곧이어 하늘에서 핑그르르 돌며 부러진 검신 조각이 날아와 땅에 푹 박혔다. 그제야 일행은 패력검제의 검 끝에 시선 을 집중시켰다. 그의 검은 부러져 있었다. 일행의 안 그래도 커다래진 눈이 한층 더 커지는 순간이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묵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호, 이제 알겠어. 뇌전검황의 제자였군. 묵직하게 가해지는 검의 압력. 깨끗한 몸놀림. 과연, 그분을 쏙 빼닮았군 그래. 어쩐지 나를 알고 있더라니…….’ 사부의 이름이 나오자 패력검제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 무슨 악연이라는 말인가? 사부님도 저놈의 손에 당하셨는데, 나까지? 게다가 사부께서 쓰셨을 때는 흠집하나 나지 않았던 패왕검마저 토막이 날 정도라니……………..’
뇌전검황은 죽는 순간까지도 복수를 자제하라고 당부했었다. 현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복수는 꿈도 꾸지 말라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그제야 사부께서 왜 그런 유언 을 하셨는지 이해가 가는 패력검제였다.
패력검제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조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량아, 이 아비는 이렇게 간다마는, 너는 결코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거라. 상대는 탈마의 고수. 복수 자체가 불가능함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패력검제의 뒤쪽에 도열해 있던 일행은 ‘탈마의 고수’라는 말에 두 눈을 부릅떴다. 그렇다. 그들은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암흑마제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탈마의 고수였다. 별의별 극악한 방법을 통해 마교 사상 그 누구도 깨지 못했던 극마의 벽을 허문 악마. 눈앞에 서 있는 허약해 보이는 청년이 그 악마인 것이다.
갑자기 분위기를 잡으며 유언을 읊조리고 있는 패력검제가 가소롭게 느껴졌는지, 묵향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봐, 헛소리 그만 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이거야. 무영신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패력검제는 잠시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왜 너를 죽여야 하는데?”
“사부님은 죽이지 않았소? 그런데, 왜 난?”
묵향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어. 다만, 한중길 교주가 그분을 죽여 달라고 지시했었거든. 그래서 죽인 거지.”
“그런… 것이었소?”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패력검제에게 묵향이 이죽거렸다.
“왜? 너도 죽여 주랴?”
그제야 패력검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후~,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건 그렇고 아까 질문했던 게 뭐였소?”
묵향은 짜증이 나는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빌어먹을! 무영신마 그 새끼가 어디에 있느냐고 몇 번이나 물어야겠어!”
“그건 나도 모르겠소. 우리도 그를 찾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말이오.”
“흐음…, 모른다는 데야 어떻게 할 수 없지.”
한참을 궁리하던 묵향은 도무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짜증이 나는지 투덜거렸다.
“젠장,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무영문이든 거지새끼든 그놈들을 잡아 족치는 쪽이 훨씬 빠르겠어. 이놈들 어디 걸리기만 해 봐라.”
묵향은 고개를 획 돌려 뒤를 바라보며 외쳤다.
“아버지, 빨리 가요.”
그 말에 패력검제 등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마교 교주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화경 이상의 경지에 올라 육체를 초월해 버린다면….
모두들 놀란 눈으로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들 중 한 명을 빤히 바라보던 묵향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질문을 던졌다.
“이봐, 너도 나하고 면식이 있었나? 네 녀석 나이를 짐작컨대 그럴 리는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짐작이 안 된단 말씀이야.”
묵향에게 지명을 당한 옥대진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왜 자신을 지명하며 면식이 있다고 한단 말인가. 옥대진은 상대의 공포스 런 기세에 질려 버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 절대로… 교주님을 뵌 적이 매, 맹세코… 없습니다.”
그러자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상한 일이군. 그 눈매가 꽤나 눈에 익은 것 같은데 말씀이야. 그건 그렇고 네놈 이름이 뭐냐? 참, 이 몸한테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저렇게 된다 구.”
그러면서 묵향이 가리킨 것은 아직도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초씨세가의 가주였다. 묵향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겼던 옥대진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히익! 오, 옥대진입니다. 가, 강호에서는 매, 매화검으로 통하죠.”
‘매화’하니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무림맹주 옥청학. 그는 백류매화검법(白流梅花劍法)의 달인이었다.
“호오, 옥씨에 매화라. 그러니까 옥청학이 떠오르는군. 그 녀석과 어떤 사이지?”
옥대진은 겁에 질려 온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즈, 증조부님이십니다.”
묵향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세 명이나 되는 옥씨를 자신의 손으로 보냈는데, 그놈의 옥씨들은 바퀴벌레들처럼 끈질긴 생명 력을 가지고 아직까지도 눈에 띄고 있는 것이다.
‘맞아, 그러고 보니 저 눈매가 그녀와 닮았어. 젠장! 그냥 볼 때는 몰랐는데, 놀래가지고 눈을 동그랗게 뜨니까 알겠군.’
떠오르는 잡생각을 흩어 버리듯,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든 후 묵향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패력검제 일행은 뒤돌아서서 사라지는 마교 교주의 뒷모습에서 강인함이 아닌 생각지도 못했던 ‘슬픔’을 발견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가 절대자와 고 독은 함께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절대자와 슬픔이 함께하는 것일까?
모두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묵향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의 귓가에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윽!”
그때까지도 땅바닥에 길게 드러누워 있는 초씨세가주의 신음 소리가 그들의 시선을 되돌렸다. 그제야 초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켰다. “아빠! 아빠! 정신 차리세요. 곧 의원한테 모시고 갈게요. 조금만 참으세요.”
폭풍검 서량이 다급히 초우를 등에 업고 의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패력검제 일행은 다급히 의원을 찾아갔다. 일단 생명에는 이상이 없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서야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 가. 천하의 초씨세가주가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해 보고 저 꼴이 되다니…. 그런 괴물과 마주한 후, 상처 하나 없이 살아 나왔다는 것만 해도 기적처럼 느껴졌다. 패력검제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허망하게 패했다는 것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무공이 돌아가신 사부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 더욱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복수를 위해 그토록 무공수련에 매진했거늘, 사부조차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패력검제는 모르고 있었다. 묵향의 무공은 뇌전검황과 겨루던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말이다.
패력검제는 부러진 패왕검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패왕검을 바라보던 그가 눈을 들었을 때, 젊은이들의 안색이 말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살았 다는 안도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두들 넋이 빠진 듯 축 쳐져 있었던 것이다.
호통을 쳐서 그들의 기운을 북돋아 줄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금 전, 암흑마제의 앞에 섰을 때가 생각났던 것이다. 자신도 밀 려드는 공포감에 그렇게 긴장했거늘, 하물며 강호 경험이 미숙한 젊은 아이들로서는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패력검제는 생각을 바꿔 젊은이들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 모두들 술이나 한잔하러 가세. 아무래도 그게 좋겠구먼.”
패력검제는 마지못해 일어서는 젊은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객잔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객잔 옆 골목 깊숙한 곳에 거지 둘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저건 뭐지?”
“혹시, 대낮부터 술을 마신 것은 아닐까요?”
이때, 패력검제의 뇌리를 스치는 말이 있었다.
“무영문이든 거지새끼든 걸리기만 해 봐라.’
악의에 가득 찬 이 말을 내뱉은 인물은 바로 마교 교주였다. 패력검제는 곧장 거지들에게로 다가갔다. 과연 몸을 살펴보니, 내공을 연성한 흔적이 있었다. 바로 개 방의 방도라는 말이었다.
“개방도다. 너희들은 이들도 의원에 데려다 주거라.”
“옛.”
그의 호위 무사 둘이 거지들을 떠메고 의원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며, 패력검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뱉은 말은 반드시 실행에 옮기고야 마는 사람이로군.”
패력검제의 일행은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이미 몇몇 손님들이 둘러앉아 두런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패력검제는 객잔 안을 쭉 둘러보다 뭘 발견했 는지 눈빛을 빛내며 동행한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누가 저 젊은이를 아는 사람이 있느냐?”
패력검제가 가리킨 쪽으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대부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옥대진이 앞으로 나서며 자신 있게 말했다.
“저 녀석은 천지문의 제자입니다. 대협께서도 아시다시피 마교와의 연줄을 이용해 생명을 부지하는 쓰레기들이지요.”
“노부는 저 아이의 이름을 물은 걸세.”
딱딱한 어조로 패력검제가 말하자, 옥대진은 찔끔하여 즉시 대답했다.
“진팔이라고 합니다.”
그때 진팔은 자신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모를 정도로 얼큰하게 취해 있는 상태였다. 교주에게 받은 막대한 액수의 은자가 있는데, 술값을 두 려워하겠는가? 여태껏 돈이 없어서 못 마셨던 술이기에 그 맛이 더욱 각별했는지도 모른다.
진팔이 고개를 들자, 웬 건장한 청년이 무게 있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같이 합석을 해도 되겠는가?”
‘웬 떨거지가…’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진팔은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과 동행하고 있는 자들에게로 시선이 돌려졌다. 그를 중심으로 포진하고 서 있는 장 한들은 상당한 수준의 무예를 익힌 자들이었다. 특히나 그중에서 뒤쪽에 서 있는 젊은이는 자신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인물들과 함께 서 있는 젊은이. 고색창연한 보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 보통 사람일 가능성은 없었다. 너무나도 무공이 깊어, 자신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일 수도 있었다.
진팔은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어정쩡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 앉으시죠.”
패력검제는 동행을 향해 구석 쪽에 있는 탁자를 가리키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들은 저쪽에 앉게나. 노부는 이 아이와 잠시 얘기 좀 하고 갈 테니까 말일세.”
“예.”
그 말을 듣고 진팔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젠장, 암흑마제에 이어, 이번에도 반로환동한 고수란 말인가? 씨팔, 남들은 평생에 하나도 만나기 힘들다던데, 나는 왜 이렇게 자주 만나는 거야?”
패력검제는 자리에 앉으며 슬며시 말을 걸었다.
“내 오늘 자네를 보니, 천지문에 대해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겠군.”
천지문이라는 말이 상대에게서 튀어나오자 진팔은 조금 긴장했다. 상대는 자신의 정체까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으니 약 간의 두려움과 함께 짜증이 솟구쳤다. 그렇다고 그 짜증을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런 때, 과거 뼈저린 수업을 통해 얻은 진팔의 학습 효과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접대용 미소를 얼굴 가득 띠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헤헤. 그, 그러십니까?”
조령과 쟈타르는 진팔과 함께 동행하며 느낀 건데, 그는 용하게 고수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 아주 비굴할 정도로 아부를 잘하는 특징 또한 지 니고 있었다. 조령 등은 그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눈앞의 상대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진 형의 반응으로 봤을 때, 저놈도 고수라는 말이군.’
상대가 엄청난 고수라면 강호의 물정도 모르는 자신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전에 만났던 암흑마제의 경우, 겨우 말 한마디 마 음에 들지 않게 했다고 그 많은 사람들을 시체로 만들었지 않았던가. 그런 식으로 저세상에 가기는 싫었던 조령 등은 입을 꽉 다물고 예의 바르게 경청하는 자세만 을 보였다.
그들은 또, 진팔의 신상에 대해 큰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진팔에게서 들은 것은 매우 단편적인 정보들뿐,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교 교주와 의 친분, 남궁세가를 탈출하며 목격한 그의 고강한 무공. 그런 것이 거저 얻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 이것저것 알아 보려고 그를 꾀어 대낮부터 술을 먹이고 있던 중이었는데, 기회가 저절로 굴러 들어왔으니 참견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내 하나만 물어봄세. 천지문이 현문(玄門)의 한 갈래인가?”
현문이라 함은 도가 계열을 말하는 것이다.
“아닙니다, 어르신.”
진팔이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고, 패력검제는 더욱 알 수 없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이상하군. 자네의 내공은 분명 현문의 것이야. 현문이 아니고서야 그토록 정순한 내력을 쌓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다고 불문의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는 상대를 보며, 진팔은 술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눈에 자신의 내공 내력을 꿰뚫어보다니. 상대는 예감대로 능력을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고수였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옳았던 것이다.
“헤헤, 물론 본가에서는 다른 심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생은 어렸을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것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엄친께 서 이것만을 익히라고 딴 건 안 가르쳐 주셨거든요.”
물어본 것에 대해 상세히 대답을 했기에 어디 한 군데도 흠잡을 데는 없었다. 하지만 무게감 있게 보였던 청년이 그 첫인상과는 달리 아무래도 아첨꾼인 듯하지 않 은가?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던 게로군. 자질은 뛰어나나 인성이 저래서야…….’
그렇다고 그것을 입에 담을 패력검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여는 그의 어조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호, 기연을 얻었던 게로군. 뛰어난 자질에, 뛰어난 심법. 아주 복 받은 젊은이로다.”
그 말에 진팔은 마치 엄청난 욕이라도 얻어먹은 듯,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술기운이 한꺼번에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접대용 미소는 사라지 고 진팔의 진면목이 노출되었다.
“아니, 이게 복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이런 빌어먹을!”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욕설에 패력검제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의 그 느낌이 맞았던 것이다.
‘재미있는 놈이로다.”
진팔은 눈앞에 보이는 술병을 집어 벌컥벌컥 몇 모금 마신 후 노성을 토해 냈다.
“이따위 복은 줘도 안 받어! 나~쁜 새끼. 분명히 그것도 어린애를 괴롭히는 게 재미있어서 했을 게 분명하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아?”
패력검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깊은 사연이 있는 놈인 모양이다.
“허어, 이 친구 그러고 보니 술이 많이 되었구먼. 하지만 아무리 취해도 말은 바로 하게나. 무공을 익히는 자가 가장 원하는 것이 최고의 심법이라네. 과정이야 어 찌되었건, 그걸 얻었으면 크나큰 기연을 얻은 것이 아닌가?”
진팔은 한참 허탈하게 웃더니 술잔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무공이 높아지면서 주위에는 시기와 질투에 가득 찬 놈들이 늘어나더군요. 동문이라는 놈들이 제가 마교의 심법을 익혔다고 뒤에서 험담을 해 대는 데는 저도 할말이 없더라구요. 노선배께서도 아시다시피, 천지문하면 강호에서 쓰레기 문파로 취급당합니다. 그리고 그 문 도들도 쓰레기로 취급되구요. 밖에서 그런 대접을 받는 것도 억울한데, 안에서까지 그따위 취급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패력검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팔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구먼. 하지만 그건 모함일세. 자네의 심법은 결코 마교도가 익히는 역혈의 심법이 아니거든.”
“노선배께서는 한눈에 알아주시지만, 다른 놈들은 그걸 모르죠. 다만 뒤에서 욕이나 내뱉을 줄 알 뿐…, 개새끼들!”
진팔은 술김을 빌어 이리저리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패력검제는 그런 후배를 놓고 야단을 치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더욱 주정을 부리도록 가려운 데를 긁어 주고 있었다.
쌓인 것이 있으면 풀어야 하는 법. 게다가 가만히 듣다 보니 꽤나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젊은이로다.”
한참 듣고 있던 패력검제는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고 있는 진팔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팔에게 욕먹고 있는 상대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 문이다.
“허허 참, 그토록 고절한 심법을 가르쳐 주고도 이렇듯 욕을 먹다니,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먼……..
혼자서 중얼거리는 듯했지만, 진팔이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원래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 천지문의 문도가 마교 교주에게 무공을 배웠다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할 것인가? 안 그래도 마교와 결탁한 쓰레기 들이라는 소리가 강호를 떠도는데 말이다. 하지만 워낙 취기가 오른 진팔에게는 그걸 인식할 정신이 없었다. 과연 패력검제의 의도대로 술에 취한 진팔은 발끈해서 외쳤다.
“큭큭! 그 빌어먹을 자식은 묵향이란 녀석이죠. 바로 그 잘~난 암흑…….”
말을 하던 진팔은 아차했다. 꺼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그는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놀라서 상대를 쳐다봤다. 혹시나 몰랐으면 하는 진팔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이미 묵향을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가 한 일이었나?”
진팔은 눈이 둥그레져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설마 그, 그를 아십니까?”
“물론일세. 방금 전에 만나서 칼부림까지 했었지.”
칼부림까지 했다는 말에 진팔의 놀람은 극에 달했다.
‘젠장, 요놈의 방정맞은 주둥이 때문에 오늘이 내 제삿날이구나.’
하지만 패력검제는 사색이 되어 있는 진팔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창문을 통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단한 사람이로고. 무공도 뛰어나지만, 그 마음 씀씀이도 대범하기 그지없도다. 뛰어난 심법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냥 가르쳐 줄 이가 무림에 과연 몇 이나 되겠는가? 무공도, 도량(度量)도 노부의 완패로다. 어쩌면 노부는 그를 오해하고 있었던 듯하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