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17화 – 묵향, 호북성으로

묵향, 호북성으로

술에 대취한 진팔을 침상에 뉘인 후, 조령이 다시금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패력검제가 말을 걸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합석해도 되겠는가?”

상대는 진팔의 내력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엄청난 고수였다. 그런 엄청난 고수를 옆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그것을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 남궁세 가의 무사들 때문에 그렇게 혼쭐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무림에 대한 그녀의 흥미는 아직 식지 않은 모양이다.

“예, 무, 물론입니다. 그러고 보니 존성대명도 여쭤 보지 못했군요. 소생은 조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수하입니다. 무림초출이기에 미흡한 점이 많으니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포권하는 상대에게 패력검제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대답했다.

“아, 노부는 서진이라고 한다네.”

패력검제는 가벼운 한담을 주고받으며 조령의 마음을 풀리게 만든 연후에 마음에 두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물어봄세.”

“예.”

“천지문의 제자와는 어떤 사이인가?”

“예? 천지문… 아, 진형 말씀이신 모양이군요. 그냥 길을 가다가 만난 사이입니다만..”

“그런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친한 것 같은데……. 노부는 혹시 약혼자인가 했지.”

상대가 자신이 여자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하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고수는 고수로군. 한눈에 알아보는 것을 보면 말이야.’

조령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죽을 고비를 함께 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선(死線)을? 호오, 그 얘기 좀 들려주겠나? 아주 재미가 있을 듯싶구먼.”

조령은 상대가 그런 말을 한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딱히 상대의 표정에서 악의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 다.

“저, 혹시 남궁세가하고 친분이 있으세요?”

조령은 처음부터 무림의 매운맛을 한껏 본 상태였다. 매운맛을 보다 보면, 그만큼 경험치가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남궁 뭐시긴가하는 작자가 자신에게 써먹 었던 방법을 그녀는 그대로 써먹었다. 역시 이래서 무림에서 몇 년 눈칫밥을 먹으면 노련한 강호로 거듭나게 되는 모양이다.

그녀의 의도를 짐작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지만, 패력검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노부는 남궁세가와 별로 친분이 있지 않다네. 원래 노부가 활동하던 곳은 산서성이었거든.”

“아, 그러십니까?”

조령은 힐끔힐끔 패력검제의 눈치를 살피며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마교의 교주를 만났던 일을 말이다. 물론, 일 이 어떤 방식으로 틀어질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교주가 친절한 척했다든지 하는 부분은 쏙 빼먹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교주가 자네들을 구출해 줬다는 말인가?”

“결론은 그렇지만, 사실 남궁세가 쪽에서 말실수를 했기에 얻은 어부지리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주는 우리들을 구해 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거든요.” 패력검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진팔의 심법은 교주가 전수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전수해 준 심법을 통해 쌓은 내공을 몰라볼 리 없을 것이다. 자신이 봐도 진팔의 기세는 다른 도가의 무공을 익힌 자들과 미세하기는 하지만 차이를 느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교주가 그 소형제에게 뭐라고 질문을 던지지 않던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령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부를 믿고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면 안 되겠는가?”

“그…, 그러니까 무섭게 노려보며 태허… 뭐라는 심법을 익히지 않았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태허? 태허로 시작하는 도가의 심법이라. 물론 소형제와 같은 그런 기세를 지닌 젊은이를 보지를 못했으니 절전된 것일 가능성이 크고…….”

한동안 궁리에 궁리를 하고 있던 패력검제는 이윽고 생각났는지 입을 열었다.

“혹시 그것이 태허무령심법이 아니던가? 노부의 기억으로는 현문이 낳은 최고의 심법들 중에서 태허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은 그것뿐이네만.”

“예, 맞습니다. 바로 그거에요. 누구한테 배웠는지 따지더라구요.”

“그래서?”

“진 형은 여태껏 소생과 유람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 주더군요. 극존칭을 써 대면서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 주는 거예요. 저는 일순간 사람 이 바뀐 줄 알았다니까요.”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패력검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흐음, 그 소형제가 그런 특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

“노선배님도 진 형에게 들어서 아시다시피, 교주는 자신이 과거에 가르쳐 줬었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친절하게 대해 줬어요.”

“허~참, 그래서?”

“그래서 제가 나중에 교주와 헤어진 다음에 물었죠. 사람이 바뀐 줄 알았다구요. 그랬더니 진 형이 하는 말이 그렇게 안 하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하던데요. 곧바로 대답을 안 하면 고문을 해서라도 알아낸다고 말이에요.”

“거참 성질도 급한 사람이로군.”

“참, 그리고 교주를 만난 후 진 형이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뭔가?”

“혹시, 노선배께서는 암흑마제라는 명호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세요?”

패력검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있다네. 마교 교주의 명호가 아닌가?”

“예, 그런데 교주 앞에서는 절대로 그 명호를 안 쓰는 게 좋대요.”

패력검제는 매우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왜냐하면 그 명호를 썼다가 초우가 박살 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고?”

“그건 마교 교주가 강호에서의 활동을 그만둔 후, 남을 씹기 좋아하는 쓰레기들이 퍼뜨린 명호래요. 그렇기에 아마 그 내력을 교주가 들었다면, 그 성질머리로 봤 을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하던데요? 특히, 그의 앞에서 그 명호를 말했다간 그 한마디에 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노선배님께서도 조심하시는 게……. 아, 참! 노선배님께서는 이미 만나셨다니 아시겠군요.”

패력검제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자네들을 좀 더 일찍 만났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건 그렇고, 보아하니 딱히 정해진 행로가 있는 것도 아닌 듯싶은데…, 이것도 인연인 데 본문에 놀러오지 않겠나? 한 며칠 푹 쉬면서 노부의 말벗이나 되어 주게.”

패력검제의 정중한 제안에 조령의 마음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것도 혹시… 함정 아닐까?’

관제묘의 뜰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거지들의 수가 급증해 있었다. 주위에서 증원 인력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분타주의 표정은 씁쓸하 기 그지없었다.

“젠장, 어중이떠중이 다 모아 놓으니까 숫자는 많지만 영 마음이 안 놓이는군. 그리고 저놈들이 처먹는 걸 무슨 수로 감당하지?”

식량 공급을 비럭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개방의 비애가 분타주의 어조에 묻어 있었다. 갑자기 식구가 늘었다고 해서, 구걸해서 들어오는 식량이 덩달아 증가하 는 게 아니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때, 관제묘 안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거지 하나가 그를 불렀다.

“타주님, 이것 좀 보십쇼.”

“뭐냐?”

“이상한 걸 발견했는뎁쇼.”

분타주가 그리로 가자, 거지는 수많은 점과 깨알만큼 작은 글자들이 기록된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암흑마제로 추정되는 인물이 지나간 행로입니다. 그놈이 지나가면서 형제들을 고문했던 장소들이 표시되어 있죠.”

그 점은 어느 정도는 일정하다고 할 수 있는 행로를 그리고 있었다. 묵향이 지나가다가 개방도가 보이기만 하면 잡아다가 족쳐 버렸으니 그렇게 흔적이 남은 것이 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그가 갈 행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예, 그런데 무영문의 옥화 봉공님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보내온 형제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분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지. 지금 무영문도 무영신마 척살 작업에 적극 동참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 만큼 그분께서도 현장을 지휘하기 위해 달려오신 것이겠지.”

“그런데, 이걸 보십시오. 암흑마제의 이동로를 기준으로 예측한다면 이런 식으로 그가 이동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리고 옥화 봉공님의 이동로를 기준으로 봤을 때 이렇게 움직인다면?”

그것을 보고 분타주의 안색이 희한하게 바뀌었다. 뭔가 봉 잡았다는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엄청난 배신감을 당한자의 얼굴인 듯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중얼거렸다.

“서, 설마 그렇지는 않을 거야.”

거지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지만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 무슨 증거 말이냐?”

“이 두 점이 교차했을 거로 추정되는 시간 이후에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입니다. 무영문에서는 본방에서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한 무영신마를 찾아낸 겁니다. 그가 하남성을 향해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있다는 연락을 보내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든 고수들이 지금 하남성으로 집결 중이죠. 그리고 암흑마제로 추정되는 그놈은 더 이상 본방의 형제들을 괴롭히지 않고 빠른 속도로 호북성을 향해 이동 중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진짜 옥화 봉공이 그놈과 만나서 모종의 뒷거래를 했단 말인가?”

이리저리 궁리하던 분타주는 거지에게 말했다.

“총타에 관련 자료와 함께 그 사실을 전해라. 하지만 이 사실이 밖으로 새 나가서는 결코 안 된다.”

“옛! 특급 기밀로 처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