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23화 – 고수를 몰라본 죄

고수를 몰라본 죄

토끼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름 방울이 숯불에 떨어질 때마다 치직거리며 연기가 올라왔다. 큼직한 토끼 두 마리가 숯불 위에서 잘 익고 있었다. 토끼가 골고루 익 도록 빙글 돌리면서 묵향이 투덜거렸다.

“젠장,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난 것까지는 좋은데,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군. 이럴 때 같이 있으면 좋았잖아. 드래곤 주제에 무슨 얼어 죽을 무공을 익힌다고 야단 이야. 그런 거 안 익혀도 충분히 강하면서……..”

맑은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박혀 있고, 대기에는 조금씩 찬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묵향은 품속에서 술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신 후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초류빈 녀석. 심부름 보낸 수하 녀석은 행방불명이고, 또 그놈은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고……. 따라가는 게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렇지, 감히 도망을 쳐? 본좌의 명령을 거역한 놈은 어떤 꼴이 되는지 이 기회에 확실하게 각인시켜야겠어.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는 놈이 없도록 말이야.”

다시 술 한 모금을 마신 후, 묵향은 토끼고기를 약간 옆으로 돌렸다.

“젠장, 생각할수록 더 열이 받는군.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나중에……. 그건 그렇고 배를 채운 다음에 곧바로 사천분타로 가는 게 가장 좋겠다.” 이때, 숲 속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더니 세 명의 남녀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주위를 주의 깊게 살핀 다음 묵향 혼자인 것을 확인한 후 안심한 듯했다. 그들 중의 한 명이 부상을 당했는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것을 보고 함께 있던 여자가 말했다.

“사형, 아무래도 지금 치료를 하는 게 좋겠어요.”

여인이 치료를 시작하자, 잠시 그것을 지켜보던 사내가 묵향에게로 다가왔다. 사내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지만, 상등품의 천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그는 묵향을 잠시 쏘아본 후 의심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주위를 주의 깊게 살펴봤다.

사내는 묵향을 향해 정중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의 목젖은 군침을 삼키는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시선은 숯불 위의 토끼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보시오, 토끼 한 마리만 파시면 안 되겠소? 아무리 봐도 혼자 먹기에는 양이 좀 많은 것 같은데…….”

묵향은 흥미로운 듯 그들을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만약 그들이 묵향을 알고 있었다면, 묵향의 그 표정만 봐도 소름이 끼쳤을 것이다. 안 그래도 무료하던 참에 이 게 웬 떡이냐 하는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가져가시오.”

“고맙소.”

그는 아직 채 익지도 않은 토끼 한 마리를 꼬챙이에서 빼낸 후,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때, 여인은 상처 입은 사내에게 금창약을 발라 주고는 깨끗한 천으로 상 처를 감싸고 있는 중이었다.

“사매, 사형의 상처는 좀 어떤가?”

“깊게 베이지는 않았으니 괜찮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지체하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따돌렸으니 약간 여유가 있을 거야. 그리고 저자는 숯불로 뭉근하게 토끼를 굽고 있으니, 발각될 우려도 별로 없어. 지금 좀 쉬어 두자구.”

그들은 곧 토끼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세 명이 먹기에는 양이 좀 적었는지, 뼈다귀까지 훑어먹은 뒤 그들 은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기력 회복에 운기조식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까.

일각 정도 운기조식을 한 후, 그들은 다시 일어섰다. 그런 다음 그들이 막 떠나려고 할 때, 뒤에서 무심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잊고 가는 거 없소?”

그들은 자신들이 앉아 있었던 곳을 휙 둘러봤다. 아무것도 흘린 것은 없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묵향을 다시 바라보자, 묵향이 퉁명스레 말했다. “토끼 값을 주고 가야 할 것 아니오?”

검을 든 무림인에게 토끼 값을 달라고 하다니, 배짱이 아주 좋은 놈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정파의 제자가 아닌가?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품 속에서 전낭을 꺼내며 말했다.

“얼마면 되겠소?”

“은자 한 냥.”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액수다. 은자 한 냥이면 한 가족이 몇 달은 쓸 수 있는 돈이 아닌가? 사내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농담하는 거요?”

“나는 돈 가지고 농담해 본 적이 없다네.”

“그런데 무슨 토끼 값이 그렇게 비싸다는 거요?”

“이 밤중에 산속에서 토끼를 잡아다가 구워 파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나? 그런 만큼 내가 부르는 게 값인 거야.”

사내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미친놈이었군.”

그는 동전 몇 개를 꺼내 묵향에게 던진 후,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그들의 몸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땅바닥에 푹 쓰러져 버렸다.

상대가 무슨 수를 썼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혈도를 제압당한 것이다. 하지만 아혈은 제압당하지 않았는지 목소리를 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헉! 어, 언제 혈도를 제압당했단 말인가?”

“젠장. 이보시오, 제발 혈도를 풀어 주시오. 우리는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이오.”

묵향은 천천히 다가와서 각자의 품속에 들어 있는 전낭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돈을 꺼내어 이리저리 세어 보더니 중얼거렸다.

“호오, 제법 돈이 많구먼. 모두 합해 은자 다섯 냥 정도 되겠군.”

“젠장, 돈을 가졌으면 혈도를 풀어 주시오.”

애처롭게 사정하는 데도 불구하고 묵향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렇게는 못하겠는데? 자네가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토끼 값은 은자 열 냥으로 늘어나 버렸거든. 아직 다섯 냥이 모자라는 셈이지.”

묵향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불가로 돌아간 다음 이리저리 토끼고기를 찔러 본 뒤 중얼거렸다.

“이제야 다 익었군.”

저 뒤쪽에서 사정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나직한 목소리로 간청했지만, 묵향이 마지막 뼈다귀를 훑어먹고 내려놓을 때쯤에는 간청만으로는 안 되겠다 고 생각했는지 묵향을 설득하기 위해 정중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어디의 누구신지 모르지만, 혈도를 좀 풀어 주시오. 우리는 대진문의 제자들이오. 나머지 은자 다섯 냥은 대진문에 도착해서 드리면 안 되겠소?”

“지금 시간이 없단 말이오. 우리를 뒤쫓는 것은 극악무도한 마교 놈들이오.”

“……”

“당신도 무림인이라면 우리를 좀 도와주시오. 우리는 강호행을 하던 중 우연히 마교 놈들이 발호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알리러 가던 중이었소. 제발 좀 도와 주시오.”

그래도 상대에게서 돌아온 것은 묵묵부답이었다. 안 그래도 위급한 때에 이런 식으로 잡혀 있다니, 거기에다가 상대에게서는 단 한마디의 반응도 없고……. 이제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묵향을 향해 고함을 빽 질렀다.

“야, 이 개자식아. 뭐라고 말 좀 해 보란 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묵묵부답. 오히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나무등걸에 기대어 잠을 청하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게 더욱 그들의 울화를 돋웠는지, 이들은 아예 이 성을 잃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소리소리 질러 대기 시작했다.

분기탱천한 그들의 머릿속에는 상대가 자신들보다 뛰어난 고수라는 생각 따위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았다.

횃불을 밝히며 흑의를 입은 무리들이 도착했을 때쯤, 대진문의 제자들은 얼마나 고함을 질러 댔는지 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오 고 있는 욕설의 질은 더 한층 강화된 것이었다. 한밤중에 질러 대는 고성은 아주 멀리까지 간다.

흑의인들은 이 근처에 도착해서 그 소리를 듣고 곧장 달려온 것이었다. 흑의인들은 대진문의 제자들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란 듯했다. 그들로 서는 대진문의 제자들이 왜 그런 꼴이 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진문의 제자들은 흑의인들이 도착하자,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체념한 듯 두 눈을 감았다. 혈도까지 제압당한 상태니,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저자는 누구냐?”

흑의인들 중의 한 명이 잠자리에서 부시시 일어서는 묵향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나머지 흑의인들이 묵향을 둘러쌌다. 모두들 휴대하고 있던 병장기를 묵향에게 겨눈 것을 보면 증거 인멸을 하려는 것임이 확실했다.

묵향은 품속에 손을 넣어 작은 옥패 하나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딴 건 얘기해 줄 필요가 없겠고, 이게 뭔지 알겠냐?”

그것은 묵향이 마교에 도착한 후, 잃어버린 묵룡패를 대신해 제작한 흑룡패(黑龍牌)였다. 그것이 제작된 후, 마교에 속한 모든 제자들에게 그 형상과 모양에 대한 자료가 자세히 알려졌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 놔야 나중에 착오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멀뚱한 표정으로 묵향을 바라봤지만, 처음에 말을 꺼냈던 그 흑의인은 그것을 알아본 듯했다. 그의 눈은 복면을 쓴 상태였기는 하지만 커다랗게 부릅떠 져 있었다. 그는 기겁해서는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듯 엎드리며 외쳤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묵향의 대진문 제자들의 옷에 나 있는 검로의 흔적을 보고, 그들이 마교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묵향은 안 그래도 심심한 김에 잘 됐다는 생각을 했고, 수하들이 올 때까지 그들을 잡고 장난을 쳤던 것이었다.

상관의 모습을 본 수하들은 지체 없이 땅에 고개를 처박으며 따라 외쳤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그것을 본 대진문 제자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핏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졌다. 마교 교주라니? 이것은 그야말로 뭣도 모르고 이리 떼를 피해 호랑이 아가리를 향해 달려든 꼴이 아닌가.

묵향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너 이리 와 봐.”

“옛.”

지명당한 자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엉금엉금 기어 묵향 앞에 도착했다. 묵향은 그의 뒤통수를 갈기며 말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길래 저런 놈들이 숲 속을 돌아다니는 거냐?”

“소, 송구하옵니다. 놈들의 무공이 원체 높아……..

분타 건설 현장을 경비하고 있는 무사들의 무공 수위는 대체적으로 낮았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쯧쯧, 이런 놈들을 믿고 일을 맡기고 있었다니.

그는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외쳤다. 그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묵향은 대진문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저놈들은 어쩔 거냐?”

“분타를 건설하는 것을 훔쳐본 자들이옵니다. 모두 다 척살하라는 지시가 있었사옵니다.”

잠시 궁리하던 묵향은 그에게 지시했다.

“뭐, 척살할 필요까지는 없고…, 분타가 건설될 때까지 어디 가둬 뒀다가 나중에 풀어 줘.”

“지시대로 행하겠사옵니다.”

“지금 저놈들을 죽여 버리면 은자 다섯 냥을 손해보잖아.”

엉뚱한 교주의 말에 흑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순간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예?”

묵향은 흑의인들을 따라가서 사천분타주를 만났다. 그는 묵향의 모습을 보자마자 기겁을 해 가지고는 머리통을 땅바닥에 쿵쿵 찍어 대는 아부의 극치를 보여 줬 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놓친 자들을 교주가 잡아 줬다는 것을 알고는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제, 제발 용서를……”

“이봐, 총단에 연락을 넣어서 각 분타에 실력 있는 고수 서너 명씩만 지원해 주라고 군사에게 알려라.”

“옛.”

“지금은 아직 분타가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일까지 책임을 물어 분타주들 목을 벨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앞으로는 좀 더 보안에 신경 을 쓰도록 해라.”

분타주는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외쳤다.

“추, 충성을 다하여 존명을 완수하겠나이다.”

“그리고 나중에 분타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놈들을 놔줘라.”

“예?”

“대진문에 연락을 넣어 그놈들을 살려 줄 테니 은자 다섯 냥을 내놓으라고 해. 그런 다음 대진문에서 돈이 도착하면 그놈들을 풀어 주라구. 알겠어?”

“옛.”

대답은 했지만 분타주는 궁금증을 참기 어려웠는지 교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겨우 은자 다섯 냥입니까? 1백 냥쯤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그놈들이 본좌한테 빚진 게 은자 다섯 냥이니, 그것만 받아. 알겠나?”

“옛.”

“오면서 보니까 공사는 꽤 순조로운 것 같더군. 고생이 많았겠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묵향은 사천성을 지나 섬서성으로 들어왔다. 일단 섬서성에서 일어난 일은 급히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화산파를 잠잠하게 만들어 놔야 공사를 재개할 수 있을 테 니까 말이다.

반나절 동안 계속 달려온 묵향은 허름한 객잔이 하나 보이자 곧장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의 경우 경공술을 시전하기에 알맞도록 산길을 주로 애용했으므로, 객잔을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서옵쇼.”

역시 겉에서 본 만큼이나 허름한 객잔이었다. 묵향은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오리탕 한 그릇. 그리고 술을 내오너라.”

점소이는 먼저 엽차를 가져왔다. 잠시 후 그는 간단한 소채와 함께 술을 가지고 나왔다. 음식이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약간 필요했기 때문이다. 묵향은 술을 따라 천천히 마시며 주위를 둘러봤다.

완연한 봄이라서 그런지 객잔 안은 파리들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묵향은 소채에 앉으려고 윙윙거리는 파리를 내쫓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법 괜찮은 객잔을 고른 모양이군.”

중원은 원체 넓은 곳이라 치안이 형편없는 곳이 너무나도 많다. 특히 이런 외진 곳에 위치한 객잔들의 경우 손님이 먹을 음식에 독약을 탄다든지, 수면제를 타서 먹이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뻗어 버린 손님의 물품을 강탈하는 데는 아주 좋은 방법이 아닌가?

더군다나 수면제를 먹은 손님을 아예 해부해서 인육 요리를 만들어 파는 객잔까지 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도는 형편이었다. 그런 만큼 객잔 안에 파리가 왕성 하게 서식하고 있다는 것은 음식이 안전하다는 반증이었다.

이때, 객잔 문이 열리며 중년 여인과 아리따운 묘령의 아가씨가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챙이 넓은 모자에다 면사까지 끌어 내려 자신 들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아가씨의 허리에는 값비싸 보이는 장식을 한 장검이 메여 있었다. 그녀는 허름하기 그지없는 객잔 안을 두리번거리며 눈살을 찌 푸렸다.

“어서 옵쇼.”

점소이의 환대와는 달리, 그녀는 중년 여인에게 짜증 어린 어조로 조잘거렸다.

“사부님, 딴 데로 가면 안 될까요? 이곳은 너무 지저분해요.”

“이 근처에 객잔은 이곳밖에 없다. 자리에 앉자구나.”

아가씨가 사부라고 부른 중년 여인은 자리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봤다. 객잔에 앉아 있는 손님이라고는 묵향뿐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슬쩍 묵향을 봤을 뿐이었지 만, 아무래도 뭔가 미심쩍은 것이 있는지 묵향을 지그시 바라봤다.

점소이에게 간단한 음식을 주문한 후, 할 일이 없어진 아가씨는 사부에게 나직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사부가 저쪽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내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글쎄…, 왠지 낯이 익은 것 같은 얼굴이기는 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제자는 묵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시큰둥한 어조로 이죽거렸다.

“흔해빠진 인상이라서 그렇겠죠. 눈썹도 굵고…, 대체적으로 선이 굵게 생겼다는 것 말고는 특징이 없는 얼굴이잖아요. 그렇게 미남이라고 할 수도 없구요.” “그럴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녀는 제자에게 전음을 날렸다.

<그의 손을 한번 보거라. 그런 다음 그의 직업이 뭔지 생각해 봐.>

제자는 사부가 시키는 대로 상대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내의 손은 백어(魚)와 같이 하얗고 투명했다. 도대체 무슨 직업에 종사하면 저렇게 계집애같이 예 쁜 손을 가지게 될까?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고 해도, 남자의 특징상 예쁜 손을 유지하기는 대단히 힘들다.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아무리 궂은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 도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무공을 연성한 경우였다. 제자는 재빨리 시선을 탁자 밑으로 향했다. 역시 그의 허리에는 작은 검이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검신이 살짝 휘어진 것으로 보아, 극도의 쾌검술을 익힌 것 같았다. 그는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상대가 무림인인 걸 알고, 제자는 사부에게 전음을 날렸다. 하지만 상대가 전음 정도쯤은 언제나 엿들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림인이었군요. 쾌검을 익힌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무공을 익힌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정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태양혈이 솟아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그것 때문에 그를 살펴보고 있었던 거란다.>

이때, 점소이가 묵향의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묵향은 입맛을 다시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객잔에 들어설 때만 해도 음식의 이상 유무를 알려 주던 아군 이었던 파리 떼는 이제 그를 귀찮게 만드는 적군으로 바뀌어 있었다.

“젠장, 귀찮아 죽겠군.”

묵향은 젓가락 하나를 잡고는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오리탕 주변을 맴돌던 파리들이 이리저리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내공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기 에 그렇게 빠른 속도로 휘두른 것도 아니었는데, 파리들이 젓가락에 쫓아와서 두들겨 맞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한 대씩 두들겨 맞고 죽은 파리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붕붕거리며 귀찮게 굴던 파리들이 사라지자, 묵향은 그 젓가락을 옆에 놔두고 새로운 젓가락을 집어 들 었다.

묵향이 보여 준 한 수를 경탄 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제자는 놀랍다는 듯 사부에게 전음을 날렸다.

<정말 대단했어요. 어떻게 내공도 쓰지 않고 파리를 저렇게 잘 잡죠?>

<글쎄다. 파리의 움직임을 예측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구나.>

이때, 엽차를 한 모금 마시려던 제자의 안색이 확 찌그러들었다. 자신의 찻잔에 죽은 파리가 한 마리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벌떡 일어서며 노기에 찬 음성으로 뾰족하게 소리쳤다.

“이봐, 너 일부러 그랬지? 지금 시비 거는…….”

이때, 사부가 제자를 제지했다.

“가만히 앉아 있거라.”

울분을 삼키고 있는 제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녀는 묵향을 향해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고인께서 식사하시는 데 저희들이 실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자는 사부의 언동에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잘못은 저쪽이 했는데 왜 이쪽이 숙이고 들어간단 말인가?

상대는 그녀들 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고 오리탕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상대가 뭐라고 말은 안 했지만 그것을 용서한다는 뜻으로 스승은 해석했다. 만약 진짜 심 통이 났다면 검을 빼들던가 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스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 앉았다. 스승은 손을 들어 자신의 찻잔을 가리켰다. 스승의 손짓을 따라 제자의 눈이 스승의 찻잔 쪽으로 돌아갔다. “헙!”

제자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승의 찻잔 안에는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10여 마리가 넘는 파리들이 둥둥 떠 있었다. 한 마리를 어떻게 찻잔 속에 떨어뜨리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많은 파리를 한순간의 젓가락질로 한 지점에 쳐 넣는다는 것은 신기에 가까운 실력이었다. 스승은 찻물을 손가락에 찍어 탁자 위에 글을 썼다.

「상당한 실력의 고수가 아니라면 절대로 이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니, 그 무공의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구나.」

그 이후, 스승과 제자는 내뱉는 숨소리까지 조심하며 쥐죽은 듯 앉아 있었다. 음식이 나온 후에는 먹는 소리마저 크게 날세라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상대에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원래 이렇게 조심해야만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 그 순간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묵향은 식사를 마친 후, 탁자 위에 동전 몇 개를 놔뒀다. 그런 다음 저쪽 구석에 앉은 여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객잔을 나가 버렸다.

제자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푹 내쉰 후, 혓바닥을 쏙 내밀며 중얼거렸다.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어요.”

스승은 나직한 어조로 제자에게 말했다.

“강호를 떠돌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되겠지. 하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와 맞서는 실수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단다. 외모만으로 상대의 실력을 평가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오늘 깨달았겠지? 너도 고수를 알아보는 안목을 좀 더 키워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가슴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제자는 스승에게 고개 숙여 감사한 후,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부님,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군가요? 설마, 반로환동의 고수는 아니겠죠?”

사부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거기까지 생각했다니, 참으로 대견하구나.”

제자는 경악감을 감추기 어려운 듯 뾰족한 목소리로 외쳤다.

“예에? 진짜 반로환동의 고수였다구욧?”

사부는 빙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나도 그 가능성을 생각해 봤었다는 말이었지. 그가 파리를 잡을 때, 젓가락이 흘러가는 길을 봤단다.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 로 높은 수준의 검로(劍路)를 밟고 있더구나. 그런 사람이 저렇게 젊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주안술을 익혔거나, 아니면 반로환동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