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24화 – 묵향 사형 아니십니까 (17권 끝)
묵향 사형 아니십니까
묵향은 엄청난 속도로 경공술을 전개하여 산을 넘고, 들판을 달렸다. 가급적 빨리 화산파에 도착해서 일을 마무리 지을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저녁나절쯤 화산 근 처에 도착한 묵향은 일단 허기를 달래기 위해 객점을 찾았다. 저녁 식사를 배불리 한 후, 방을 하나 잡아서 간단하게 목욕을 했다.
묵향은 품속에서 서책 한 권을 꺼냈다. 책에는 장중한 문체로 ‘태극혜검법’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물론 이것은 진품이었다. 과거 마교의 고수들이 무당파의 본거지를 털고 노획한 무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무당파에 태극혜검법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그 검법을 익힌 고수가 살아남았던 모양이다. 묵향은 꼼꼼히 서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검법으로 놈을 없애려면, 그 검법을 익혀야 할 테니까. 비급을 앞에서 끝까지 쭉 한번 훑어본 다음, 묵향은 잠시 명상에 잠겼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묵향의 머릿속에는 태극혜검법의 전반적인 초식의 전개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묵향은 눈을 번쩍 떴다.
“제법 쓸 만한 검법이로군.”
묵향은 창가로 걸어가 화산을 바라봤다. 화산은 중원오악(中原五嶽)의 하나로 꼽힐 만큼 높고 험준했다. 산이 깊고 수려하다 보니, 자연 외부인의 출입은 힘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곳에 화산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놈을 어떻게 처치하느냐 하는 것인데…….”
묵향은 화산 장문인을 어떻게 없애 버리느냐를 가지고 궁리하기 시작했다.
원래 암습을 한다면 장문인이 혼자 떨어져 있을 때, 혹은 그 주위에 사람이 별로 없을 때 하는 것이 최고였다. 그편이 그를 처치하기도 편할뿐더러 탈출하기도 용 이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화산 장문인이 제법 강하다고 해도 묵향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건 강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가서 쓱싹 죽여 버린 다음 탈출해도 충분할 텐데, 괜히 그놈의 행적을 조사한다고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한참을 생각하던 묵향은 침상 옆에 놔뒀던 검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시간을 끌 필요가 뭐가 있겠어.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이 네놈 제삿날이다.”
보름달이 떠올라 주위가 환한 가운데, 화산파의 담장을 넘는 시커먼 인영이 있었다. 이렇게 밝은 보름밤에 침입을 하는 것은 모두들 금기로 삼는다. 왜냐하면 너무 밝기에 자신의 행동이 쉽사리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의 얘기고, 묵향 같은 고수에게는 그 어떤 장애도 될 수 없었다.
“저곳인가?”
목표물은 현 화산의 장문인.
‘용하게도 화경에 올랐다마는, 네놈은 상대를 잘못 고른 거야.’
묵향은 품속을 뒤적여 두건을 꺼내 뒤집어쓴 다음, 장문인의 처소를 향해 몸을 날렸다.
화산 장문인은 아직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그는 읽고 있던 서책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허, 오늘따라 왜 이리 가슴이 뛰는고? 참으로 이상하도다…….”
이때, 뭔가 이상한 기척이 그의 미세한 감각에 잡혔다. 화경의 경지에 이른 후, 그의 감각은 그전보다 월등하게 발달해 있었다.
“응?”
그가 눈길을 돌렸을 때, 그곳에는 복면을 쓴 괴한이 서 있었다. 이렇게 늦은 밤중에 좋은 일로 찾아온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자객인가?”
하지만 장문인은 곧이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객이라면 벌써 기습 공격을 가해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는 아직까지 검조차 뽑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상대할 것인가? 자신의 이목을 숨기고 이곳까지 들어온 놈이다. 자신이 아무리 화경을 깨달았다고 하나, 아무래도 검이 없는 상태에서 상대하기에는 벅찬 놈인 듯싶었다. 그렇기에 장문인은 상대의 눈을 노려보며, 상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때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뽑을 여유를 주겠다.”
복면에 가려 상대의 얼굴은 알 수 없으나, 그의 눈에는 강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걸 보면 뭔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혹시 검을 가지러 가는 그 순간을 노리겠다는 것인가?”
장문인은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놀라운 자신감이로다.”
장문인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하여 좌대(座臺)로 다가갔다.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장문인의 시선은 단 한시도 복면괴한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좌대 위에는 두 자루의 검이 놓여 있었다. 위쪽에 놓여 있는 고색창연한 보검은 장문인이 되며 물려받은 화산파의 신물이었다. 그리고 아래쪽에 놓여 있는 평범해 보이는 검은 자신 이 그동안 줄곧 써 왔던 그의 애검이었다. 장문인은 슬쩍 뒤로 손을 뻗어 좌대의 위 칸에 놓여 있는 보검을 집어 들었다.
스르르릉……
자신이 얼마나 좋은 검인지 증명이라도 하듯 보검은 투명할 정도로 맑은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화산파 무공의 주축은 검법이다. 물론 권법이나 조법, 장법 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보조적인 무공일 뿐이다. 그렇기에 일단 검이 자신의 손에 쥐어지자, 화산파 장 문인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장문인은 자객에게 검을 겨누며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지나친 자신감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가르쳐 주겠노라.”
“호오, 검을 드니까 자신감이 생기는 모양이지?”
상대가 전혀 긴장감을 가지지 않는 것이 의외라는 듯 잠시 상대를 바라보더니, 곧이어 장문인은 자객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노부에게 검을 들게 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순간, 안 그래도 엄청난 예기(氣: 날카로운 기운)를 흘리고 있던 보검에서 푸른빛줄기가 줄기줄기 어리기 시작했다. 화경을 증명하는 무공, 어기충검(御氣充 劍)이 보검에 사용되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장문인이 격돌하는 순간, 상대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검을 들고 그에 대응했다. 두 고수의 검이 흘러가며 검강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장문인은 화산파 최고의 검 식들이라 할 수 있는 구궁반천검법(九宮反天劍法)과 무극태을검법(無極太乙劍法)을 절묘하게 섞어 가며 공격해 왔다.
쌍방이 뿜어낸 검강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장문인이 기거하던 처소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사방에서 화산파의 문도들이 검을 뽑아 들 고 벌 떼처럼 쏟아져 달려왔다.
장문인의 처소가 박살 난 후, 그 잔해를 뚫고 두 인영이 튀어나왔다. 장문인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태극혜검이란 말인가? 그런데 어찌하여 무당에서…….”
묵향은 주위 사람이 들으라고 일부러 냉혹한 어조로 외쳤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해 놔야 더욱 무당파가 의심받을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헛소리!”
그리고 또다시 두 고수는 서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대결이 시작된 직후부터, 장문인의 머릿속에는 끊임없는 의문이 솟아올랐다. 왜 상대는 무당파의 비전검법인 태극혜검을 쓰는가? 그리고 암습을 하지 않고 정공 법으로 나온 이유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딱히 괜찮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자가 태극혜검법을 사용해서 무당파와 자신을 이간질하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 가정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었다. 태극혜검을 이토록 깊이 깨우친 자가 무당에 서 수련한 검수가 아닐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극혜검의 경우 극소수의 선택받은 제자들에게만 전수되는 비전절기(秘傳絶技)가 아닌가. 평생 동안 태극혜검을 익힌 무당의 검객들도 화경의 벽을 깨지 못하는 자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자는 저토록 완벽하게 태극혜검을 구사하는가.
또 상대가 무당에서 자신을 암습하기 위해 파견한 검수라는 가정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허점이 있었다. 처음부터 정면 대결을 할 이유도 없었지 만, 무당의 검법을 대놓고 쓸 리도 없었다. 태극혜검을 쓴다는 것은, 아예 대놓고 자신이 무당파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이때, 장문인의 뇌리에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현재 무림맹의 맹주는 무당파가 낳은 전설적인 고수 태극검제였다. 그리고 그가 자랑하는 절기는 태극혜검이 었다. 오죽하면 그의 명호가 태극검제겠는가. 그렇다면 그가 비밀리에 키운 제자가 화경을 깨달았다고 치고, 그 제자의 실력을 시험도 할 겸 외부에 자랑도 할 겸 외 부의 고수와 대결을 붙인 것이라면?
그 가정에도 약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가정들보다는 허점이 작았다. 장문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것이었군. 하지만 노부와 화산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다는 말인가? 내, 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준 후 맹주에게 따질 것이다.”
일단 생각이 정리되고 나자, 장문인은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모든 잡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자마자, 그가 지금껏 구사한 것 중 최고의 검식을 뿜어내기 시 작한 것이다.
수백 초식이 흘러간 후, 묵향은 뭔가 일이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산 장문인의 실력이 자신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의 본신 무공을 사용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태극혜검만을 사용하여 그를 처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벼락치기로 대충 익힌 검법으로, 화경의 고수를 꺾어야 한다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냥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죽여 버린 후, 시체에다 대고 태극혜검의 흔적을 남겼어야 했다. 하지만 묵향은 지금껏 이런 식으로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뛰어난 상대에게는 그만큼의 대접을 해 준 무인인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보다 무공이 훨씬 떨어지는 놈이었다. 거기에다가 그놈은 비무장이었다. 그런 놈을 향 해 암습을 가한다는 게 너무 찝찝했다.
그리고 여기에 오기 전까지 묵향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지내는 따분한 생활만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화끈한 싸움을 하고 싶었다. 게다가 이쪽은 태극혜검법만 을 써야 한다는 제약 사항까지 붙어 있으니, 꽤 괜찮은 대결이 되지 않겠는가? 저런 괜찮은 상대를 그냥 죽여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묵 향은 상대에게 검을 뽑게 해 줬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제길!”
처음에는 그냥 태극혜검으로 놈을 황천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게 여의치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도망친 후 다음 기회를 노린다는 것도 그의 자존 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상대의 몸에 남을 흔적, 즉 마지막 일격만 태극혜검으로 하기로 생각을 바꾼 것이다.
순간적으로 상대의 검식이 바뀌었다. 검로의 틀을 깨고, 완전히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상대의 검이 그리는 궤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오막측한 것이었다.
“헉!”
경악성을 내지르며 장문인은 간신히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장문인의 눈은 경악감으로 부릅떠져 있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구사한 검법과 유사 한 검법을 자신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장문인은 상대가 지니고 있는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무스름한 광택을 내는 짧은 검. 오랜 세월 뇌리에 남아 있었 던 자신의 기억과 그것은 일치했다.
장문인은 몸을 뒤로 날려 서로 간의 거리를 순식간에 벌렸다. 그런 다음 다급히 포권하며 외쳤다.
“사형을 뵙습니다.”
그 말에 묵향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놈이 갑자기 못 먹을 거라도 처먹었나? 검을 높이 쳐들며 묵향이 외쳤다.
“싸우다 말고 뭔 개소리야?”
하지만 장문인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묵향 사형이 아니십니까?”
『<묵향18 – 묵향의 귀환>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