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3화 – 옥화 봉공 매향옥

옥화 봉공 매향옥

당당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다가오자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황급히 예를 올렸다. 그런 무사들을 힐끗 바라보며 여유로운 어조로 중년 사 내가 질문을 던졌다.

“맹주님께서는 계시느냐?”

“옛, 기별을 넣어드리겠습니다.”

무사들 중의 한 명이 문 쪽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맹주님, 매화문검(梅花雯劍) 장로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시라고 해라.”

“옛.”

무사들은 문을 활짝 연 후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드시지요.”

문이 열리자 드러나는 대전은 너무나도 넓고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금과 은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용과 봉의 형상이 대전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뭔가 허전한 듯 한 공간에는 어김없이 고금 명필들의 글이나 그림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대전의 한쪽에는 높직한 단상에 호화로운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그 의자는 이 무림맹에서 오직 한 사람, 맹주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맹주는 거기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실내로 들어서고 있는 매화문검 장로 를 향해 위엄 있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맹주는 포권을 올리는 장로의 손을 포근히 감싸 쥐며 말했다.

“무량수불, 원로(元老)에 묘강 땅까지 들어가서 얼마나 수고가 많았는가. 자 이쪽에 앉게나.”

맹주라는 지위로 봤을 때, 이것은 과분할 정도의 환대였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매화문검 장로라는 사내는 그 정도의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 다. 그가 바로 실종된 전대 맹주의 아들인 옥진호(玉振湖)였기 때문이다.

맹주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옥진호 장로는 공손하게 말했다.

“맹주님의 과분하신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량수불, 과분하다니 당치도 않소이다. 혈교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그토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맹주님의 치하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옥진호 장로는 저 멀리 묘강에서 있었던 격전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를 올렸다. 물론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맹주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 작전을 지휘했던 옥진호 장로보다도 더 자세하게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맹주라는 직책상 옥진호 장로가 보내온 보고서는 물론이고, 감찰이나 첩자들이 보내오는 각종 정보를 종합적으로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혈교 토벌의 최고 책임자였던 옥진호 장로가 한참 최종 보고 겸 자신의 공적에 대해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 밖에서 경비 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옥화 봉공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말에 보고를 올리고 있던 옥진호 장로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옥화봉공. 바로 옥화무제(玉花武帝) 매향옥(梅香玉)을 일컫는 명칭이 아닌가?

전대 맹주인 무극검황(無極劍皇) 옥청학(玉靑鶴)이 실종되자 무림맹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무림맹을 이끌어 나가는 수장이 실종되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새로운 맹주를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옥청학이 심어 놓은 무림맹의 장로들은 그 시기를 계속 뒤로 미루고 있었다. 무공이 높은 옥청 학인 만큼 혹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맹주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서둘러 폐관수련에 들어간 옥청학의 아들 옥진호가 화경을 깨닫게 되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이다. 장로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우며 몇 년 동안이나 계속 시간을 끌었다.

맹주의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각 문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저마다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렇기에 그에 따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우선, 무당파의 은거고수인 태극검제(太極劍) 청영(淸瑩)과 곤륜의 은거고수 곤륜무제(崑崙武帝) 진량(陳亮), 그리고 서문세가의 가주인 수라도제(修羅刀帝) 서문길제(西門吉制)가 거론되었다.

모두 다 명문의 고수들이다. 하지만 이들 중의 한 명이 맹주가 된다면, 옥청학 맹주의 입김으로 인해 공동파가 독식하고 있던 무림맹 수뇌부 자리는 대폭 물갈이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게다가 특히나 수라도제의 경우 명문이라고는 하지만 방계인 5대세가의 가주였다. 지금까지 무림맹주는 최고의 명문이라 자부하는 9파에서만 배출되었다. 아무

리 세력이 강성하다고 하지만 서문세가 따위에게 맹주의 자리를 양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옥화무제(玉花武) 매향옥(梅香玉)은 후보들 중에서 가장 약한 세력권을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장로들이 원하는 최적의 맹주감이었다. 지닌 세력이 별 볼일 없으니 적당히 뒤에서 요리하기에 안성맞춤이지 않겠는가? 또 무영문에는 무림맹의 정예들을 이끌 만한 막강한 고수도 거의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맹주가 된다면 현재의 수뇌부들이 자리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게 될 공산이 컸다.

하지만 무림맹의 장로들은 그렇게 드러난 겉모습만 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별의별 욕을 다 듣고 있기는 했지만, 정말 뛰어난 여걸이었다. 강호에 서 ‘범죄의 온상’ 정도로 치부되던 무영문을 당당한 1류문파로 재탄생시켰다. 이것만 해도 아무나 이룩하기 힘든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시간을 쪼개어 무공연마에도 힘썼다. 물론, 무영문이 정보 단체인 만큼 우수한 비급을 획득한 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비급 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화경의 대열에 올라서는 것은 아니다.

약간이라도 대가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면 이 점을 놓치지 않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바로 그런 이유로 장로원은 처음부터 그녀를 맹주로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무공을 고려하여 후보자 명단에만 올려놨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론된 후보가 매화문검 옥진호였다. 명문인 공동파의 후예일 뿐 아니라 실종된 옥청학의 아들이었다. 그렇기에 무림맹 수뇌부로서는 그가 맹 주가 되기를 가장 원했다.

하지만 옥진호에게는 무공이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무림맹주가 되려면 최소한 그 무위가 화경은 되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그때 마교를 장악하 고 있던 교주는 흑살마제(黑殺魔帝) 장인걸(張仁傑)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묵향이었다. 극마도 아닌 탈마의 경지에 다다른 자가 교주가 되었다는 소문이 떠돌 고 있는데, 어찌 그것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옥진호가 옥화무제에 대해 편치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데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정식적인 경합을 벌여 맹주 후보에서 탈락했다면 그녀에 대해 안 좋은 감 정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그녀가 옥진호가 맹주 후보에서 탈락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맹주 선출을 질질 끌고 있던 장로회에 맹주가 사망했음을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확실한 물증까지 가지고 말이다. 그 물증이 라는 것은 그녀가 묵향으로부터 건네받은 맹주의 신물(信物) 빙백수룡검(氷白水龍劍)이었다.

그 시점에서 옥진호는 맹주 후보에서 탈락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화경에도 들지 못한 상태였다. 어느 날 한순간 화경에 들 수도 있 었기에 마냥 기다리고 있던 장로원도 더 이상 기다릴 명분이 사라졌다. 이제 바야흐로 네 명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때,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해도 맹주가 되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장로원과 뒷거래를 시작했다. 맹주 후보에서 자진 사퇴하고, 또 신물인 빙백수룡검을 줄 테니 봉공의 자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봉공’은 모든 무림의 원로들이 받기를 바라 마지않는 가장 영광스러운 명예직이었다. 현재 단 두 명밖에 없는 봉공은 무림맹주에 버금갈 정도의 권위와 발언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명예직인 만큼 실질적인 힘은 없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장로원에서는 선뜻 그것을 승낙했다. 그녀가 제시한 조건은 너무나도 거절하기 힘들 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장로원의 우려와 달리 옥화무제가 원했던 것은 힘이 아니었다. 저 음지에서부터 커 나온 무영문이 양지에 우뚝 서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옥화무제가 맹주 직이라는 권력을 버림으로 해서,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무영문은 정파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으로 세인들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옥화 봉공께서 오셨으니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미 보고서들을 통해 상세한 것은 아실 테니 더 이상 보고드릴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맹주는 옥진호 장로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지 선뜻 허락했다. 하지만 맹주의 대답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듬뿍 배여 있었다.

“허어, 이거 그러고 보니 먼 길을 원정하고 돌아온 사람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구먼. 무량수불…, 먼 여정에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고 다음에 시간 나면 묘강 땅에서의 무용담이라도 들려주게나.”

옥진호는 맹주의 따뜻한 배려에 감격했다.

“마음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주님.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옥진호 장로가 나간 후 곧이어 옥화무제가 들어왔다. 그녀는 옥이 구르는 것 같은 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맹주님.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무량수불, 무슨 말씀을……. 여러 가지로 바쁠 텐데, 이렇듯 늙은이를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구려. 자, 이쪽으로 앉으시게나.”

“예.”

옥화무제는 자리에 앉아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오늘 찾아뵌 것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량수불…, 무슨 일이기에 직접 오셨는가? 나쁜 소식이 아니면 좋으련만…….”

옥화무제는 잠시 맹주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쁜 소식입니다. 마교의 군사였던 마뇌(腦) 설무지가 두 달 전에 병사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맹주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량수불, 뛰어난 인물이 세상을 등진 것은 분명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마교의 두뇌가 죽었다는 것이 어찌 나쁜 소식일 수가 있는지 노부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드

오.”

“왜냐하면 그는 마교의 중원 진출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맹주도 깨닫는 바가 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침중한 안색을 띠었다.

“그가 죽었으니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무림의 정세는 크게 바뀔 것입니다. 어쩌면 벌써 누군가가 실권을 쥐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죠. 만약 호전적인 인물 이 마뇌의 뒤를 잇게 된다면 무림은 피에 잠기게 될 거에요. 그래서 오늘은 그에 대한 대비도 조금은 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 몇 가지 의논드리려고 찾아뵌 것입니다.”

잠시 맹주의 안색을 살피던 옥화무제는 요 근래에 무영문이 수집한 정보에 대해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호숫가에 서서 하염없이 수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홍택호(洪澤湖)는 너무나도 큰 호수라서 그런지 꼭 바다처럼 파도가 치고 있었다. 물론 바다의 파도 에 비한다면 그 규모가 작았지만, 도무지 호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 가슴이 탁 트이도록 드넓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내의 가슴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때,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투명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어? 또 만났네요.”

그 순간 사내의 안색이 팍 일그러졌다. 주점에서 홍택호까지 걸어오는 동안 일정 거리를 두고 그들이 뒤따라온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홍택호 일대 또 한 동정호에 못지않은 유명한 장소였기에 우연히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사내는 자신의 옆에 푹 박혀 있던 거대한 도를 한 손으로 쑥 잡아 뽑은 후, 다시금 등에 걸쳐 멨다. 그는 상대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따라오며, 소년의 맑은 음성이 이어졌다.

“이봐요, 인사를 했으면 최소한 대꾸는 해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닙니까?”

“혼자 여행한다면 말벗이 필요하지 않아요?”

사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대답은 기대도 안 한다는 듯 소년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여기 경치 참 좋네요. 이렇게 넓은 호수는 처음 봐요. 바다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넓죠?”

소년의 말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사내의 인내심도 천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이 사내의 인내심이 바닥났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진다 는 것을 소년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내는 갑자기 뒤로 획 돌아서며 소년을 노려봤다. 인상을 쓰지 않더라도 사내의 얼굴은 매서운 뭔가를 풍기는 인상이었다. 텁수룩한 수염에다가 다부진 턱선, 게 다가 무공을 얼마나 연마했는지 태양혈이 불끈 솟아올라 있었다.

그 매서운 눈빛에 소년은 찔끔한 듯한 기색이었지만 곧이어 지지 않겠다는 듯 밝은 어조로 말을 걸었다.

“오늘 밤은 어디서 잘 거죠? 기왕이면 경치가 좋은 곳이었으면 좋겠는데요.”

“너 오늘 죽고 싶어서 작정했냐?”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나 여행이나 같이 하자는 건데 말이에요.”

“이런 젠장! 나는 지금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단 말이다. 그리고 너 같은 꼬맹이를 데리고 여행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 알겠나?”

사내가 뒤돌아서서 다시금 걸어가기 시작하자 또다시 말발굽 소리가 뒤따라왔다.

“그러면 잠시 생각하실 여유를 드릴게요. 그런 다음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잔 나누면서 얘기를 하죠.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술이 최고가 아니겠어요?”

“이런 썅!”

사내는 확뒤돌아서며 소년이 타고 있는 말의 머리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갈겨 버렸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흑마가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이 철퍼덕 뻗어 버렸다. 소년이 주저앉는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 뒤편에서 말을 타고 따르고 있던 무사들이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재빨리 말 등을 박차고 올라 몸을 날렸다. 뺨에 흉터가 있는 무사는 우아하면서도 날렵한 몸놀림으로 날아오르더니 소년의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의 수련 상태를 말해 주듯 매끄러운 몸놀림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소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며 사내를 향해 덮쳐 갔다.

갑작스런 무사의 공격을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사내는 등 뒤의 도를 슬쩍 뽑아 들었다. 물론 도를 완전히 뽑을 시간적 여유는 없었기에 몸을 옆으로 비틀며 아직 등에 메여 있는 도를 이용해 적의 공격로를 차단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캉-!

사내의 도를 검으로 찍고 그 반동을 이용해서 한 바퀴 몸을 날린 후 착지한 무사가 재빨리 돌진하며 두 번째 공격을 가하고 있을 때였다.

“그만!”

횡으로 그어지던 무사의 육중한 검이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멈췄다. 놀라운 숙련도였다. 소년은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소년을 품에서 내려놓은 무사는 무릎

을 꿇고 말했다.

“갑작스런 일이라서 손을 쓰게 되어 죄송합니다. 흑아(黑娥)를 해친 저놈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명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무사의 어투는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러웠지만, 그의 눈은 불에 타는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상관이 큰일을 겪을 뻔한 것이다. 소년의 발이 쓰러지는 말의 몸통에 깔렸다면 틀림없이 부러졌을 것이다.

설혹 그런 화를 피한다고 해도, 그 높이에서 아래로 곤두박질쳤을 때의 충격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무사는 그런 위험한 일을 행한 상대를 가만히 놔둘 수 없었 다. 그만큼 그의 상관은 귀하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무사에게 지시를 내리기 전에 먼저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에 받은 충격을 말해 주듯 소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사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에는 등에 메고 있던 그 거대한 도가 매우 가벼운 소검이나 되는 듯 가볍게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또 다른 무사가 사내의 뒤편으로 보였다.

사내는 잠시 소년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속 귀찮게 굴면 기절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리겠다.”

그런 다음 사내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도를 등에 걸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소년은 멀어져 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창백해진 입술을 꼭 깨물고 서 있 었다. 그 두 사람 사이로 살며시 미풍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