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5화 – 내 이름은 진팔이다
내 이름은 진팔이다
음식이 차려진 후, 사내가 막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상대가 입을 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아직 형장의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듣지 못했네요.”
사내는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잠시 늦추며,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이름은 알아서 뭐 하려고?”
뭔가 기분이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음식을 먹고 있는 사내를 보며 소년은 오히려 빙긋 미소 지었다. 조금씩 서로의 대화가 엇갈리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신경 도 안 쓴다는 듯 소년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만나 식사를 함께한 것이 벌써 두 번째인데, 형장의 이름조차 모른대서야 어디 말이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내 이름을 몰라도 서로 대화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는데, 굳이 이름을 알 필요는 없지 않나?”
이름을 알려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자, 소년은 체념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 보면 그의 어조에는 심술이 가득함을 느낄 수 있었다. “뭐 좋습니다. 형장께서 알려 주기 싫으시다면 할 수 없죠. 지금은 그냥 모르는 상태로 지낼 수밖에요. 형장의 이름을 알아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뭐 굳이 아 침부터 말다툼을 해서 상쾌한 기분을 망칠 이유가 있겠어요?”
이름을 알아낸다는 말에 사내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소년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무림에 수많은 문파가 있다고 들었지만, 첫째와 둘째가 권력 다툼을 하는 문파는 흔하지 않겠죠? 거기에다가 그 둘의 나이 차이가 15년이나 되는데도 둘째의 무 공이 높은 문파는 더욱 드물겠죠. 그리고 그 때문에 둘째가 권력 다툼이 싫다고 야반도주까지 했다면 하나나 둘밖에 없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사내는 잡아먹을 듯 소년을 노려보며 한 자 한 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강인한 인상을 지닌 사내가 그렇게 하자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가 따로 없는 듯싶었다. 하지만 소년은 별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대꾸했다. 아마도 그는 저 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부하들의 실력을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다 보면 금방 알 수 있겠죠. 물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장이 속한 문파에 대해서 악소문이 좀 퍼질 우려가 있긴 하겠지만, 뭐 큰일 이야 나겠어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유포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알리는 것뿐인데 말이죠.”
“죽고 싶냐?”
“그러니까 제가 그런 수고를 하지 않도록 지금 형장의 이름을 알려 달라는 겁니다.”
잠시 잡아먹을 듯 소년을 노려보기는 했지만,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술김이라고는 하지만 저 소년에게 떠든 것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진팔이다.”
순간 소년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찼다. 억지로 안면 근육을 굳히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 그대로 밖으로 다 드러나고 있었던 것 이다. 어떻게 저렇게도 촌스러운 이름일 수가? 그것도 저렇게 야성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며 노련해 보이는 무림고수의 이름이 말이다. 소년은 혹시 자신이 잘못 들 은 게 아닌가하여 다시 되물었다.
“예? 뭐라고요?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진팔의 안색은 팍 찌그러들었다. 하지만 진팔은 씹어 먹듯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뱉어 냈다.
“진·팔이란 말이다.”
그 말에 소년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여태껏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한껏 무게를 잡고 있던 무인이, 이렇듯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는 것도 재미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소년은 진팔을 좀 더 골려 줄 요량으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호오! 진형의 형제가 여덟이나 되는지 미처 몰랐군요.”
무식한 하층민들의 경우 자식들의 이름을 짓기 귀찮아서 혹은 알고 있는 글자가 별로 없어서 자식들의 이름을 낳은 순서대로 일, 이, 삼 등의 숫자를 붙여 짓는 경 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내는 무림의 한 문파를 이끌어 갈 후계자인 만큼 결코 그 부모가 이름을 짓기 귀찮거나 혹은 무식해서 진팔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리 없었다. 그 말에 진팔은 얼굴에 노기를 띠며 투덜거렸다.
“내 이름은 여덟 팔(八)자가 아니라 깨뜨릴 팔(捌) 자란 말이다. 내가 이래서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는데…….”
“아, 실례. 소제가 본의 아니게 진·팔 형의 아픈 데를 건드렸군요. 하지만 음이 똑같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누구나 오해할 수 있는 그런 단어를 쓴 것이 잘못이죠.” “그래, 이름을 알았으면 이제 된 건가?”
“물론이죠. 그런데 진 형께서는 소제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전에 알려 드렸는데 말이죠.”
“그, 글쎄…….”
“아하! 소제의 미천한 이름 따위는 기억할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까?”
상대가 비비 꼬인 어조로 이죽거리자, 사내는 약간 당황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 그건 아닐세. 내가 기억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게나.”
“좋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알려 드리죠. 제 이름은 조령입니다. 여자 이름 같지만 뭐, 어머니께서 지어 주신 것이니 어쩔 수 없죠. 그건 그렇고 전에 말씀드린 것 말인데요, 같이 길동무나 하자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사내는 그 말을 귓등으로 듣고 투덜거렸다.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길동무는 필요 없다고 말이야.”
“아아, 그렇게 반대만 하실 게 아니라구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제 얘기를 들어 보니 속에 끓는 것도 많으신 것 같은데,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구요.” 진팔은 차갑게 응대했다.
“어떻게?”
“아무래도 속에 울분이 쌓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가게 되거든요. 술을 드실 때마다 그런 것을 옆 사람에게 떠들어 댄다면 큰일 나겠죠? 중원 전체 에 진 형의 사문에 대한 소문이 쫙 퍼질 수도 있잖아요. 차라리 그럴 바에는 저한테만 술주정을 하시는 게 어때요?”
그러면서 조령은 자신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보기보다 상당히 입이 무거운 편이거든요.”
이런 뻔뻔한… 어쩌구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진팔은 초인적인 의지력을 동원하여 참아 내는 데 성공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이마에는 굵은 힘줄 까지 솟아올라 있었다.
이 꼬맹이를 죽도록 두들겨 팬 다음 그딴 소리하면 파묻어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면 끝이겠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여자 애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손대기도 난감 한 노릇이었다. 울화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어쨌건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젠장,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나는 너의 그 입을 못 믿겠어.”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죠. 저는 그럼 진 형의 기대에 힘입어 진 형네 문파의 모든 것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는 수밖에요. 진 형께서 소제를 그렇게 입이 가벼운 인 물로 치부하시는데, 그 기대에 호응해 드리는 것도 재미있겠군요. 안 그래요?”
그와 동시에 뿌드드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팔이 무의식중에 얼마나 주먹을 힘껏 쥐었는지 관절들이 아우성을 질러 댔기 때문이다.
“너, 죽을래?”
하지만 그런 위협은 애당초 먹혀 들어가지도 않았다. 조령은 진팔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진 형께서 바라시는 게 뭡니까? 제 입은 못 믿겠다면서, 설마 조용히 있으라는 것은 아니겠죠? 그건 아주 커다란 모순이라는 것을 모르세요?”
그 말에 진팔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말발에서 밀리다 보니 성질이 마구마구 솟구쳐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망할! 그래! 네 입은 아주 무겁다. 나는 너를 믿어! 결코 그딴 소리를 소문내지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마. 이제 됐냐?”
“물론이죠. 이런 믿음직한 동행자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진 형의 복이 아니겠어요? 자, 그럼 어디로 여행하실 건지 말씀해 주세요. 계획을 세워 보기로 하죠.” “왜 내가 너하고 여행을 해야 하는데?”
황당하다는 듯 퉁명스럽게 묻는 진팔에 비해, 조령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진팔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는 쪽은 조령이었기 때문이다.
“그야 당연히 진형께서는 입이 무거운 동반자를 필요로 하시니까요. 그래야 술주정도 받아 줄 거고, 이리저리 말벗도 되어 줄 것 아닙니까? 만약 저를 거부하시는 이유가 제 입이 너무 가벼울지도 모른다는 오해 때문이라면, 진 형을 위해 그 오해를 진실로 만들어 드릴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진팔의 안색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