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6화 – 왠지 정감이 가더라니
왠지 정감이 가더라니
마사코는 두려움에 질려 아르티어스의 뒤편에 서서 덜덜 떨고 있었다. 아무리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껏 주인과 함께 다니는 아르티어스라는 이방인을 거의 입만 살아 있는 덜떨어진 인간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말만 많았지 실제 행동이 필요할 때는 거의 모든 것을 주인에게 팔밀이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에서야 그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덩치의 황금빛 괴물. 머리와 꼬리는 전설상에 나오는 용과 닮았지만, 어마어마한 몸통에 커다란 날개까지 돋아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등에 주인과 그녀를 태우고 이곳 대국까지 단숨에 날아온 것이다.
정신이 핑핑 돌 정도의 엄청난 속도, 그리고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와 육지…….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도대체 이것은 꿈인 것일까?”
주인은 항상 이곳 대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그리고 대국이 바로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주인은 바다에 자주 나갔다. 그는 하염없이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에게 주어진 일이 없었기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주인은 바다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 사마와의 대화를 통해, 그 원인이 뱃멀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알고 그녀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꿈에 도 가고 싶어 하시는 고향 땅에 뱃멀미 때문에 못 가시다니, 얼마나 불쌍하신 분이란 말인가? 그분의 강인함을 생각한다면 웃음이 터져 나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 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바다를 건너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는데,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일까?”
두려움에 떠는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깨비라도 나타나듯 회색 물체가 퍽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깜짝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은 회색의 이상하게 생긴 옷을 입고 있는 주인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후지와라 가의 사무라이야. 어떻게 이렇게 깜짝깜짝 잘 놀란다는 말이야? 저 주인을 만나고 나서부터 그런 횟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그건 나의 모자람을 드러내는 거야. 더 침착하자. 너는 해낼 수 있어, 마사코. 그리고 꼭 해야만 해. 벌써부터 이러면 어떻게 주군께서 내린 명령을 완수할 수 있겠 니.”
마사코는 시선을 주인에게로 돌렸다.
짙은 눈썹, 각이 진 턱선,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강인한 인상이었다. 물론 몸매가 나약하고 가늘게 보였기에 그 인상은 크게 완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처음 그 모습 을 봤을 때, 마사코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금발의 그 아름답던 주인이, 여기에 도착한 후 갑자기 그 모습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런 다음, 비명을 지르고 있는 마사코를 멀뚱하게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내 모습은 원래 이래. 잊어버리지 말도록!”
너무 당황해서 그녀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주인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녀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그건 벗어 버리고 이 옷을 입어라.”
마사코는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옷을 벗어 버렸다. 그런 다음 바닥에 떨어져 있는 허름한 옷으로 재빨리 갈아입었다. 갈아입으라고 명령을 받았으면 장소가 어디건 곧바로 실행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렇게 교육받으며 성장했으니까 말이다.
몇 가지 사소한 장식물 따위를 달 때는 그것을 어디다 다는지 헷갈리기 십상이겠지만, 다행이 주인이 던져 준 옷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마사코는 옷을 다 갈아입은 후,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뭐 하고 있어요? 아버지도 빨리 변하시라구요.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너무 티가 나서 안 된다니까요.”
곧이어 아르티어스의 몸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그 빛이 사라진 순간, 아르티어스는 없어지고 한족의 옷을 입고 있는 웬 중년의 남성이 서 있었다. 왼쪽 눈을 중심으로 훑고 지나간 긴 검상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검은 수염을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때? 멋있지?”
사부 유백의 모습을 또다시 보게 된 것이다. 묵향은 처음에는 매우 놀란 듯하더니 갑자기 왼손에 들고 있던 검집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놀람은 한 번으로 족하다. 아르티엔에게 느껴지던 정감……. 그리고 그를 잃었을 때의 슬픔.
이제 더 이상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어요?”
무시무시한 살기.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 엄청난 살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묵향의 슬픔을 느꼈다. 슬쩍 장난 삼아 해 봤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아들
이 이렇게 나오자 아르티어스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멋쩍은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쳇, 아버지는 통했는데, 나는 안 되는 모양이군.”
또다시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쭈글쭈글한 피부에 허연 수염이 덮여 있는 촌로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묵향이 아랫마을로 옷을 훔치러 내 려간 사이, 이곳에서 기다리다 그 노인을 봤던 모양이었다.
묵향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이제 가죠.”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아들의 깊은 슬픔을 느꼈다.
‘생각보다는 정이 많은 놈이란 말씀이야. 저런 놈들이 이용당하기 딱 좋지. 위대하신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객사하기 딱 좋았을 거야. 아무 렴, 흐흐흐흐.
묵향은 번화한 거리로 들어서자 전장(場: 은행과 유사함)부터 찾기 시작했다.
大陸錢場(대륙전장)」
묵향은 간판을 보고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대륙전장은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중원에 있는 수많은 전장들 중에서도 꽤 신용 있는 곳 중의 하나였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중년의 점원이 다짜고짜 화부터 냈다.
“아니, 이것들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빨리 나갓!”
묵향은 단숨에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멱살이 잡혀 있는 점원이 자신이 어떻게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빠름이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점원의 목을 놔 주며 묵향은 차갑게 말했다.
“모르고 한 것은 죄가 되지 않는 법, 하지만 두 번째는 용서하지 않는다.”
점원의 옆에는 경비 무사도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마디 참견도 하지 않았다. 점원의 멱살을 쥐는 그 빠름. 자신들의 눈으로 따라가지도 못할 고수였다. 그런 고수가 거지일 리는 없는 법.
거지와 고객을 알아보지 못한 멍청한 점원이 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고수가 이곳을 털러 들어왔다면 얘기 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묵향은 경비 무사들을 지나쳐 쇠창살이 쳐져 있는 창구 쪽으로 갔다. 그는 커다란 궤짝을 창구 위에 턱 올려놨다. 아르티어스가 둥루젠 족장에게서 받았던 바로 그 궤짝을 말이다.
쿵!
묵향이 가볍게 한 손으로 올려놓은 궤짝이 낸 소리였다. 경비 무사들의 안색이 조금 더 창백하게 질렸지만, 그들보다 좀 더 허옇게 질린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바 로 창구에 쳐진 쇠창살 뒤쪽에 서 있던 뚱뚱한 중년인이었다. 그는 궤짝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이 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묵향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 실 전장에 들고 올 물건이야 대충 정해져 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 어떻게 해드릴 깝쇼?”
묵향은 중년인에게 짤막하게 대답했다.
“은자 50냥은 현금으로. 그중 한 냥은 동전으로 주게.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전표로 줘.”
그 말에 중년인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궤짝을 열어 봤다. 묵직한 궤짝. 그 안에 은이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하지만 궤짝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은괴가 아니었다.
궤짝이 열리는 순간 그 안에서 쏟아지는 황금빛 광채.
세상에……! 이 모든 게 황금이라니! 그 엄청난 양에 기가 질린 중년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렇게 많이?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손님. 뭐, 뭣들 하는 것이냐? 빨리 셈을 시작해라.”
한동안 창구 뒤쪽에서는 금 덩어리들의 전체 무게를 재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 금괴의 전체 무게가 나오자 중년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묵향에게 말했다.
“저, 손님, 저희 전장에는 황금 1천 냥을 바꿔 드릴 만큼 전표가 없습니다.”
중년인의 목소리에는 짙은 아부가 깔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걸 전부 전표로 바꿔 준다면, 이곳에는 엄청난 양의 황금이 고스란히 남게 되는 것이다.
황금 1천 냥을 굴릴 수 있다면, 엄청난 파생 수입이 발생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이 시골구석이 아닌 좀 더 근사한 곳으로 진급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까지 생각한다면 아부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꿔 줄 수 있는 만큼만 바꿔 주게.”
“옛, 손님.”
중년인의 지휘 하에 또다시 창구 뒤쪽에서는 난리가 벌어졌다. 창구 위에 1백 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전표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은자 한 냥짜리 전표까지 간혹 보이는 것을 보면 정말 있는 대로 닥닥 긁어모은 모양이었다.
중년인은 작은 은덩이 마흔아홉 개와 동전들을 전표 옆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점원과 함께 낑낑거리며 궤짝을 창구 위에 다시 되돌려놓은 후, 숨을 헐떡거리는 것을 보면 궤짝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자~, 모두 해서 은자 2천 냥입니다. 나머지 금괴는 여기 있습니다. 저희 전장은 신용과 정확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는 만큼, 확인해 보실 필요도 없으실 겁니다. 저 희 전장은 시골의 작은 분점이라서 황금 1백 냥분밖에 교환해 드리지 못한 점, 너무나도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묵향은 확인해 보지도 않고 궤짝을 가볍게 들어 아르티어스에게 넘겼다. 그런 후 창구 위에 쌓인 전표와 현금들을 품속에 쑤셔 넣은 다음 뒤돌아서려고 하는데 중 년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미련이 남았던 것이다.
“내일, 내일 한번만 더 방문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때까지는 전표를 마련해 놓겠습니다.”
하지만 묵향은 생각해 볼 가치도 없다는 듯 곧바로 출구로 걸어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중년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년인은 지금껏 배어 있던 습관에 따라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음에 또 오십시오.”
잔돈이 마련되자 묵향은 일행을 이끌고 옷가게로 갔다.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른 다음 그가 발길을 돌린 곳은 그 마을에서 가장 큰 음식점이었다. 확실히 번드르르한 옷을 입고 들어서자 점소이의 반응부터 차이가 있었다.
“어서옵쇼.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아르티어스는 의자에 앉자마자 기대가 된다는 듯 점소이에게 뭐가 이 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들놈에게 수없이 들어왔던 중원에서 의 첫 식사인 것이다. 과연 이곳의 음식 맛은 어떨까나? 아르티어스의 두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묵향이 주위를 둘러보니, 객잔 한구석에는 웬 장님 늙은이가 어떤 소녀의 부축을 받으며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 늙은이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전문적인 이야기꾼인 모양이다.
묵향은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본 결과 대충 자신이 중원을 떠난 지 20년쯤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무 림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이야기꾼 노인의 입담은 아주 재미있게 이어지고 있었다. 전설적인 무림의 영웅담이 전개되기도 했고, 또 요 근래에 있었던 무림의 비화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렇기에 20여 년의 공백을 안고 있는 묵향에게는 주옥과도 같은 정보였던 것이다.
묵향이 가장 재미있게 들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가 옥화무제에 얽힌 비사였다. 그 간교하기 그지없는 계집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무림맹의 봉공이 되어 있었 다. 그리고 매우 겸손하면서도 지혜로운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묵향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마자 주위에 앉아 있던 험악한 인상의 젊은이가 시비를 걸어 왔다.
“이보시오. 옥화 봉공님의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는데, 왜 그렇게 경박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오? 뭔가 저 이야기에 잘못이 있다는 거요?”
그 말에 묵향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일행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기에 웃는 것일 뿐. 신경 쓰지 마시오.”
“이봐, 시기와 장소를 봐 가면서 웃으라구.”
청년은 단 한마디의 이야기라도 더 들을 욕심인 양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시비를 더 이상 걸었다면, 이 객잔을 걸어서는 나가기 힘들었을 거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이야기꾼 노인은 또 한 편의 이야기를 끝낸 후,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허흠, 이거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나? 목이 마르구먼. 이래서야 나만이 알고 있는 비장의 전설을 들려줄 수가 없겠는데?”
노인이 그런 식으로 능청을 떨자, 손님들 중에서 꽤나 돈이 있어 보이는 중년인이 점소이에게 외쳤다.
“이봐! 빨리 술과 안주를 가져다 드리거라.”
노인은 술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켠 다음, 안주를 한 점 집어서 씹어 먹었다. 그런 다음에야 목청을 가다듬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흠, 지금은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숨겨진 옛 이야기를 들어 보시구려. 이 이야기는 저 사악하기 그지없는 악마들의 단체에 대한 이야기라오. 1백여 년 전, 평화롭기 그지없던 무림을 뒤흔들어 놓을 악의 씨앗이 음습한 대지에서 태어났다오. 바로 그가 저 사악하기 그지없는 악마들의 지배자, 암흑마제(暗黑魔帝)라는 마 인이지요.”
여기까지 이야기가 전해지자 아르티어스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는 듯 묵향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20년쯤 전에는 여기에 살았다고 했지?”
“예.”
“암흑마제가 누구냐? 저 정도 욕을 들을 정도면 너도 알 거 아니냐?”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보통 정파에서 마교의 뛰어난 고수들을 부를 때, 뒤에 ‘왕(王)’ 자를 붙이는데, ‘제(帝)’ 자까지 붙은 걸 보면 대단한 놈인 모양이네요.” 그사이에도 노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암흑마제는 무림에서 금기시되고 있던 가장 사악하고도 추잡하기 그지없는 악마적인 무공을 연성했다고 전해지고 있소. 얼마나 극악무도한지 그 무공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무공이지요.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그 무공을 어떻게 수련했는지는 곳곳에 증거가 남아 있 기 때문에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소. 암흑마제의 탄생 후 무림에는 대규모 납치 사건이 자행되었다고 하오. 뛰어난 자질을 갖춘 수천 명의 동남동녀가 실종된 것이지요. 그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악마적인 내공의 원천은 동남동녀들의 정혈(精血)임이 분명하지 않겠소?”
어쩌구저쩌구, 노인의 이야기는 재미있게 이어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갖가지 악질적인 행동이 나열되는 것을 듣고,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세상 어디를 가 봐도 저런 때려죽일 놈이 꼭 한두 놈은 있기 마련이지.”
묵향은 황당해하면서도 맞장구를 쳐 줬다. 그 때려죽일 놈의 목록에 아르티어스도 능히 포함되고도 남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제 파악을 좀 하시죠.’
하지만 그대로 말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므로, 묵향의 입에서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러게 말이에요.”
“암흑마제라는 놈, 정말 악랄하기 그지없구먼. 내가 소싯적에 하던 것보다 더 하잖아. 쩝, 나도 저런 방법이 있는 줄만 알았다면 해 봤을 텐데 말이야.” 아쉬운 듯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표정에는 약간의 존경심마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보고 묵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투덜거렸다. “농담도 골라가면서 하세요. 그딴 짓을 한다고 무공이 올라갈 리가 없잖아요.”
“그럴까?”
“당연하죠.”
이야기가 끝나자, 술과 안주를 제공했던 그 중년인이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보시오. 그런데 그 암흑마제라는 사람이 누구요? 그 별호를 듣는 것이 처음이라서 그렇소만.
중년인의 말에 노인이 딱하다는 듯 반문했다.
“아니, 마교의 절대자 암흑마제를 모른다는 말씀이시오?”
탁자에 앉아 있는 손님들 중 몇몇은 ‘마교의 절대자’라는 말에 뭔가 떠올랐는지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묵향의 머릿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교차하고 있었다.
‘그 암흑마제라는 놈이 내가 실종되고 난 뒤에 본교의 실권을 잡았나? 능히 그럴 수 있지. 힘만 강하다면 교주가 될 수 있는 곳이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본교에 귀 환한 후 그놈의 목을 따는 것으로 축하 인사를 대신해야겠군.’
뿌드드득!
묵향의 결심을 드러내는 듯, 그의 꽉 쥔 주먹은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노인은 객잔에 모인 손님들을 쭈욱 둘러본 후,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댔다.
“암흑마제는 마교가 낳은 최강의 고수지요. 가장 사악하고, 가장 무자비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아마도 그건 그의 이름이 피 냄새 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라고 노부는 생각하고 있소이다. 그의 이름은 바로…….”
결정적인 순간에 암흑마제의 이름은 말하지 않고 노인은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느긋하게 한잔하고 있는 노인을 청중들은 애타게 지켜보고 있었다. 분위기를 좀 더 고조시킨 후에야 노인은 비밀스런 얘기를 하듯 소근소근 말했다.
“그의 이름은 묵향(墨香)이라오.”
푸헉!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묵향은 식후 입가심으로 마시고 있던 차를 뿜어내고야 말았다. 왜 거기서 갑자기 자기 이름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묵향은 재빨 리 마사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묵향의 예상대로 그녀의 눈은 화등잔만 해져 있었고,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번에는 아르티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오랜 시간을 보낸 아르티어스라면 저게 거짓말임을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여 지없이 무너졌다. 아르티어스도 마사코만큼이나 놀란 듯했지만, 그가 놀란 이유는 그녀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아르티어스는 곧이어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감탄스럽다는 듯 묵향에게 말했다.
“너도 옛날에는 정말 대단했던 모양이구나.”
그 말에 묵향은 발끈해서 대답했다.
“너·도라니요? 아니,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를 아버지하고 동급으로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아주 불쾌하니까요. 빨리 가자구요. 여행을 하려면 말도 사야 하고, 아주 바쁘단 말입니다. 젠장, 괜히 듣고 있었네.”
묵향은 투덜거리며 일어서서는 서둘러 계산을 한 다음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르티어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왠지 처음부터 정감이 가더라니…….”
아르티어스가 묵향의 뒤를 따라 일어선 후, 그 뒤를 새파랗게 질린 마사코가 고개를 푹 숙이고 뒤따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묵향을 따라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 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