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9화 – 천지문을 잊으셨습니까

천지문을 잊으셨습니까

묵향은 일단 무한(武漢)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교로 가기 위해서는 송의 수도가 위치하고 있는 중경(中京), 그러니까 개봉을 통과하는 쪽이 도로의 여건도 좋을 뿐더러 거리도 짧다. 하지만 그쪽 길은 서주(徐州), 정주(鄭州), 낙양(洛陽) 등 대도시들이 많기에, 안 그래도 구경하기 좋아하는 아르티어스와 함께 가기에는 별로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한까지 배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일단 배를 타기만 하면 빠르면서도 쾌적하게 무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를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놈의 뱃멀미가 묵향의 발목을 잡았다. 그 때문에 구경할 게 별로 없는 한적한 시골길을 골라서 행로를 잡게 된 것이 다.

그들이 한참 길을 가고 있는데, 앞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호기심이 인 아르티어스는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묵 향 일행이 가 보니, 그곳에는 20여 명의 검객이 세 명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 중 남루한 옷을 입은 장한의 무공은 눈부신 것이었다. 그 혼자서 거의 대부분의 적을 상대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천천히 그를 몰아붙이며 힘을 빼고 있었다.

이른바 다수로서 소수의 고수를 상대할 때 가장 유효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차륜전車輪戰)이었다. 앞에서 힘껏 싸운 자들은 뒤로 빠지고, 뒤에서 힘을 비축한 자 들은 앞으로 나서서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장시간 공격을 당하면, 결국은 내력이 고갈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항복해라.”

진팔은 피에 젖은 몸을 힘겹게 추스르며 악을 썼다.

“남궁세가의 개들아, 이러고도 네놈들이 정파임을 자부하느냐?”

물론 이 말은 창궁18수에게 한 말이 아니라, 저쪽에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세 명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무림인 같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들이 보고 들은 일을 저잣거리에 퍼뜨려 주기만 한다면 이 곤경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있을 듯싶었던 것이다.

또다시 창궁18수의 연합 공격이 가해졌다. 쌍방 간에 치열한 격투가 벌어졌지만, 아무래도 창궁 18수 쪽에서는 아직까지도 이들을 생포하려는 마음이 강한지 결정 적인 공격을 가해 오지 않고 있었기에 쌍방 간에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균형은 머지않아 무너졌다. 진팔의 뒤를 맡아 주고 있던 흉터 있는 무사의 오른팔이 피보라를 일으키며 잘려 나갔다. 무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멍한 시선으로 잘려 나간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자신의 발치에 나뒹굴고 있는 그의 손. 그 손은 아직도 묵직한 검을 꽉 쥐고 있었다.

창궁18수들 중 한 명이 돌진해 와 그 무사를 막 베려고 할 때, 진팔이 도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항복하겠소.”

진팔은 최후의 희망을 걸고 있는 행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지금 있었던 일을 주위에 소문만 내준다면, 남궁세가의 마수에서 풀려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세 명의 행인 하나하나에게 소망을 담아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그는 말 위에 앉아서 따분한 듯 하품을 하고 있는 청년을 보자마자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렸을 때 일이라고 하지만, 어떻 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창궁18수 중에서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수장인 듯한 인물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만큼 한계 상황에서 보여 준 진팔의 실력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저런 녀석이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놈의 동행이 없었다면 잡기 힘들었을 거야……”

그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이들을 본가로 끌고 가라.”

“옛.”

지시를 받은 자는 흠칫 굳은 채 묵향에게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진팔을 거칠게 밀며 재촉했다. 방금 전까지 진팔의 엄청난 무위에 가슴 졸였던 것이 그의 화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봐, 빨리빨리 걸어. 젠장! 쓸데없이 탈출을 해서 일거리를 만들고 있어.”

수장의 명령은 계속되었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천천히 되짚어 가며 증거들을 없앤다. 단 하나라도 흔적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옛.”

그들은 시체를 등에 업기도 하고, 여기저기 무공을 사용한 흔적들을 없애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몇 개인가 땅에 떨어져 있는 병장기를 회수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주변의 상황이 정리된 후, 수장은 창궁18수 중의 한 명을 호명했다.

“장진(張)!”

 “옛!”

수장은 묵향 쪽을 턱짓으로 가리킨 후 차가운 어조로 지시했다.

“결코 증거가 남아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묵향 일행의 앞에 선 후, 스르릉 검을 뽑으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들에게 죄가 없으나, 이 현장을 본 것은 재수가 없었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해 주시구려.”

이렇게 말을 하면, 보통 사람들이라면 말을 타고 있으니 재빨리 도망치려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 이들의 복장을 보고 남궁세가의 인물인 것을 알고 있는 자라면 도주를 포기하고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장진의 예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우선 나이든 노인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별 떨거지가 다 까부는군.”

그러더니 젊은이에게 턱짓으로 자신을 쓱 가리키며 말했다.

“얘야, 처리하거라.”

그 말에 젊은 쪽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뭐라구요? 아버지가 하세요.”

“아냐, 네가 꼭 해야만 해.”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이유가 뭐예요?”

“왜냐하면 나는 그 동남동녀들의 정혈을 빨아들인다는 흡성대법이 과연 어떤 것인지 너무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거든. 이 아비를 생각해서 구경 좀 시켜 주라. 나도 나중에 좀 써먹게 말이야.”

그 말에 젊은 쪽이 발끈해서 대꾸했다.

“이런, 젠장! 그거 순 엉터리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이런 식으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하자, 황당해진 것은 검을 뽑아 들고 서 있는 장진이었다. 처음에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줄기줄기 뻗쳐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렇듯 무시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더럽게 시끄러운 놈들이군. 오냐! 네놈들의 모가지가 떨어져나간 후에도 그놈의 주둥이를 나불댈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그는 경쾌한 속도로 몸을 날렸다.

캉!

“허억!”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남궁세가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들 중의 하나였다. 아무리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가문의 비전인 창궁무애검법(蒼空無 涯劍法)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렇듯 무력하게 튕겨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가 그의 애검은 흡사 강철이라도 두들긴 듯 부러져 있었다. 그가 때 린 것이 상대의 병장기도 아니고 머리통이었는데 말이다.

그는 뒤로 비칠비칠 물러서며 경악한 듯 부르짖었다.

“이, 이게 뭐야?”

이 상황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수장이 주위에 흩어져 있는 창궁 18수들을 재빨리 불러 모았다. 저들이 주고받던 대화 중에 ‘흡성대법’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 었음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청년의 대꾸로 보아 마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저런 해괴한 사술(邪術)을 익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교도임이 분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의 모습이 수상쩍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만 없었다면, 평범한 젊은이로 치부할 정도로, 그 어떤 무공을 익힌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반로환동(反老換童)한 마물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사술을 이용해서 그렇게 보이도록 위장하는 것인가?”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질문을 던졌다. 상대의 내력을 알 수 없기에 그의 어조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본인은 남궁세가에 적을 두고 있는 천풍검(天風劍) 곡추(曲抽)라고 하오. 귀하의 성함을 말해 주시오.”

“내 이름을 알 자격이나 있을까나?”

묵향의 삐딱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곡추의 안색은 노기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구 성질을 부릴 만큼 만만한 대상도 아니라는 게 문제였 다. 뭔가 믿는 게 있지 않고서야 저렇게 나올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귀하는 마교(魔敎)에 소속되어 있소?”

그 말에 묵향은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 세상에 마교(魔敎)라는 단체가 어디 있다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교라고 떠들어 대는 거지?”

“그럼 뭐요? 소속을 밝히시오.”

“이 몸은 마교(魔敎)가 아니라 천마신교(天摩神敎)에 적을 두고 계신 분이시다. 어때? 불만 있냐?”

마교도들은 절대로 자신들을 칭할 때 마교(魔敎)라고 하지 않는다. 천마신교(天摩神敎)라고 칭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면 진짜 마교도임이 분명했다. 곡추 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단일 문파로서 가장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문파가 마교였다. 사파니 뭐니 하며 멸시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막강한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에 상대방이 쓴 괴이한 사술(邪術)까지 본 후가 아닌가?

그리고 곡추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강력한 무공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교도와 노닥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 일대는 남궁세가의 영역임을 귀하도 잘 알 것이오. 하지만 이번만은 못 본 것으로 해 줄 테니 빨리 가시오.”

곡추는 남궁세가의 체면을 슬쩍 세우면서, 상대에게 피해 갈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역효과였다.

“뭣이? 이번만은 못 본 것으로 해 주겠다고?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제발 가 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시원찮은데, 그따위로 말해? 그래, 못 가겠다면 어쩔 건데?”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런 젠장, 그렇게 나온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곡추는 무심결에 욕설을 내뱉은 후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소창궁무애검진(小蒼胄無涯劍陳)을 펼쳐라.”

곡추의 명령에 따라 검수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검진을 펼쳤다. 검진이 발동되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기에 마사코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이런 식의 공격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당해 봤던 것이다.

그리고 저쪽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서 있는 진팔 일행도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 상태로 도망가 봐야 결과는 뻔했다. 그들로서는 저쪽에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이 창궁18수를 물리쳐 주기만을 간절히 빌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아르티어스는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창궁무애검진은 대창궁무애검진과 함께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최고의 검진이다. 그 둘은 하나의 뿌리에 근간을 두고 있기에 비슷한 점도 많았다. 하지만 결정적 인 차이는 그 자유성에 있었다.

소창궁무애검진은 소수의 강력한 고수에 의해 발동됨으로 인해, 그 공격과 수비에 있어 개인에게 훨씬 더 많은 자유를 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변화의 폭이 훨씬 더 심했고,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운 진법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사방에서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에도 묵향의 안색은 태평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본 후, 품속에서 동전들을 꺼냈다. 말안장에 묶어 놓은 검까지 끄집어내기는 귀찮았기 때문이다.

웬만한 고수라면 진법과 마주쳤을 때 생문(生門)과 사문(死門) 등 그 진의 특성을 집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생문은 그 진법이 지니고 있는 최대의 약점이 다. 그곳을 공격해야만 진법을 깨뜨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멋모르고 사문을 공격한다면 진법을 펼치고 있는 자들보다 몇 곱절 강한 실력을 지닌 고수라 해도 그곳에 뼈를 묻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이야기였고, 묵향의 경우 그들과 실력 차이가 나도 너무 나는 상황이었다.

묵향의 손에서 동전들이 차례차례 던져지기 시작했다.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남궁세가가 자랑하던 검객들이 피를 뿜으며 바닥 에 길게 드러눕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여기저기서 당황한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되어 가는지 이유를 알아채기도 전에 다섯 명이 피를 흘리며 드러누웠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의 10여 명의 동료가 쓰러진 후에야, 그들은 동료들을 해치고 있는 자가 누군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만큼 묵향의 공격이 은밀했던 탓이다. 이제 검진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살려면 도망치든지,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돌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곡추는 살아남은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나를 따르라!”

곡추는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 보기 위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검수들의 행동은 양분되었다. 다섯 명이 곡추를 따라 돌진했지만, 나머지 둘은 그 명령을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면 간혹 배신자가 나오는 법이지. 그런데 하나는 모르겠지만 둘은 좀 많군…….

묵향의 손에서 여덟 개의 동전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돌진해 들어오던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묵향의 지척에도 이르지 못하고 한꺼번에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그 리고 도망치던 둘의 신세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게 흡성대법이야? 이게 뭐가 극악하다는 거야. 그냥 동전 몇 개 날린 것뿐이잖아!”

기대감이 깨진 아르티어스가 괴성을 질러 대건 말건, 묵향은 무시하고 말을 천천히 몰아 앞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추정되는 나이에 비했을 때, 제법 쓸 만한 경지에 오른 녀석이야. 생긴 것도 마음에 드는군. 모름지기 무인의 모습이 저 정도는…….

진팔 일행에게 다가서던 묵향의 눈빛이 묘하게 번쩍였다. 진팔의 체내에 쌓인 공력의 근원을 읽었기 때문이다.

“태허무령심법?”

묵향은 진팔의 앞에 서서 그를 노려봤다. 진팔의 일행은 방금 전에 벌어졌던 사태에 거의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여기까지 쫓겨 오며 창 궁18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뼈저릴 정도로 느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을 단 한순간에 전멸시키다니,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묵향은 잡아먹을 듯 진팔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가 아는 한 태허무령심법은 이미 무림에서 잊혀진 심법이었다. 그리고 묵향이 그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극 히 소수였다. 게다가 그 사람들에게 몸으로 직접 체득하도록 해 줬지, 절대로 내공의 구결 따위를 알려 준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누군가에게 심법을 전수해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녀석은 그것을 배웠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익히고 있는 심법을 누구한테 배웠지?”

아직까지도 얼이 빠져 있는 진팔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묵향은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어~쭈. 내 말을 무시해? 이게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상대의 기세가 험악해지자 조령이 재빨리 진팔의 앞을 가로막으며 애원했다.

“저, 대협. 그러니까…, 그냥 말로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폭력은 절대로 사절입니다.”

묵향은 가소롭다는 듯 조령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이죽거렸다.

“꼴을 보아하니 사절할 만도 하겠군.”

묵향의 말대로 조령의 꼴 또한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자신의 피, 남의 피 가릴 것 없이 서로 엉겨 붙어 검붉은 얼룩을 형성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새, 거기에 다가 군데군데 찢어진 옷. 그녀가 방금 전까지 얼마나 막심한 고생을 했는지 간단히 짐작할 수 있었다.

“비켜라. 너 같은 꼬맹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원래 막말을 들었을 때, 상대가 어느 정도 만만한 상대라야 화가 나는 법이다. 묵향의 매서운 눈초리가 가해지자, 조령은 자신도 모르게 말 잘 듣는 멍멍이처럼 재 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상대의 눈빛을 본 순간, 치가 떨릴 듯한 미지의 공포가 엄습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비켜서자, 그 공포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묵향이 그녀에게 가하고 있던 압력을 거둬 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끽 소리도 못 하고 물러났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녀는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자신의 작태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것인가? 조령은 오히려 그 분노를 진팔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진팔을 툭 치면서 말했다.

“이봐요.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저 사람이 그렇게 겁나는 거예요? 여태까지 강호의 고수랍시고 행세를 했잖아요. 고수 값을 좀 해 보라구욧!”

조령이 옆에서 호통을 치자, 진팔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의 공포심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것도 다 자신이 천지문의 제자였기에 얻어들을 수 있는 정보였다. 바로, 마교와 유일하게 협정을 맺고 있는 천지문의.

상대는 이미 20여 년 전에 무림 최강이라는 공포스러운 칭호를 부여받았었던 인물이다. 그런 괴물의 신경을 건드려서 득이 될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묵향은 짜증 어린 어조로 말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그 심법을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느냐고 묻고 있잖아. 만약 거짓말을 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본좌는 거짓말 하는 놈을 용서해 줄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거든.”

과연 그럴 것임에 틀림없었다. 저 많은 사람들을 눈 깜짝하지 않고 죽인 것을 보면 말이다. 그것도 저들과 무슨 원수를 진 것도 아니고 말 몇 마디 마음에 안 들게 했다고 저 모양을 만든 것이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이 교차되며, 진팔은 평생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짓을 하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살 길이었으니까.

진팔은 넓죽 엎드려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며 정중하게 외쳤다.

“천마신교의 지존이시여.”

그 말에 조령은 깜짝 놀랐다는 듯 진팔을 바라봤다. 여태껏 그와 함께 다니면서 대화를 할 때 이토록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 만히 생각해 보니 ‘지존’이라니……. 그렇다면 저 사람이 마교의 교주라는 말인가? 조령의 시선은 급히 묵향에게로 되돌려졌다.

진팔의 말을 듣고 묵향은 깜짝 놀란 듯했지만, 곧이어 기특하다는 듯 싱글거리며 말했다.

“너, 혹시 사파냐? 어느 문파야. 허, 그것 참. 쫄따구 교육을 아주 제대로 시켰구먼. 나를 알아보다니 말이야.”

“사파는 아닙니다.”

묵향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뭐냐?”

“천지문을 잊으셨습니까?”

“엇! 천지문이라고?”

“그때 제게 그 망할 놈의 심법을 강제로 가르쳐 주셨죠. 제가 그것 때문에 무슨 꼴을 당했는지 당신은 알기나 하십니까? 왜 바라지도 않은 그런 일을 해서 저를 괴 롭히시는 겁니까? 물론, 교주님 같으신 분들은 장난 삼아 돌을 던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돌에 맞은 사람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은 있으신 겁니까?”

말을 하다 보니 울분이 치솟아서 진팔은 마지막에는 거의 절규하듯 외쳤다. 무림에서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따져 봐야 목숨만 잃기 십상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며 당한 일이 너무도 억울했기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원래 이런 식으로 말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묵향의 안색은 핼쑥해졌다. 물론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 꼬마가 저렇게 성장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묵향은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그 꼬마였냐? 이런, 내 정신 좀 보게나. 내가 가르쳐 주고도 잊어버렸다니,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묵향은 뒤쪽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 중인 아르티어스를 향해 외쳤다.

“아버지, 빨리 이리 와 봐요.”

묵향의 말에 진팔 일행은 화들짝 놀랐다. 도대체 마교 교주가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자가 있단 말인가?

아르티어스가 마지못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자 묵향은 다짜고짜로 말했다.

“저기 있는 저 팔 있죠? 저 녀석한테 붙여 주세요. 그리고 상처 치료도 좀 해 주고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왜 내가 해 줘야 하는데?”

“아들의 부탁이니까요. 만약 들어줄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실 거라면, 호된 경험을 하시게 될지도 몰라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투덜거렸다.

“쩝…! 팔 하나 없어도 밥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는데, 귀찮게스리…….?”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사와 시녀의 시체 옆에 놓여 있는 팔을 주워 들었다.

“야, 너 이리와 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아르티어스가 부르자 그의 언행을 지켜보고 있던 무사는 그야말로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무사에게 있어서 팔을 잃는다는 것은 거의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치료하라고 하니까 귀찮다느니 뭐라느니 하며 이죽거리고 있으니, 무사의 성질 이 팍팍 치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조령은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한 듯 무사에게 명령했다. 사실 통째로 잘려져 나간 팔을 다시 붙인다는 것은 그녀가 생각하기에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불구자가 된 자신의 수하를 놀리고 있다고 단정했던 것이다.

“그따위 팔 없어도 상관없잖아. 가지 마!”

하지만 무사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더러워도, 치사해도, 팔을 붙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마교의 교주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비실비실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갔다.

“이 자식이! 오라면 빨랑빨랑 와야 할 거 아냐! 너, 다리까지 병신이 되고 싶어! 엉?”

아르티어스는 잘린 팔을 원래 있던 자리에 붙인 다음 주문을 외웠다. 푸르스름한 광채가 상처에서 흘러나왔다가 사라졌을 때, 무사의 눈은 화등잔만 해져 있었다. 자신의 팔이 원상태로 되돌아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사는 이리저리 오른팔을 움직여 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더니 갑자기 쓰러지듯 아르티어스를 향해 부복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오른팔을 되돌려 준 상대가 아닌가? 만약 자신에게 주군이 없었다면 평생 상대의 종이 되겠다는 의식까지도 치렀을 것이다. 그만큼 무인인 그에게 있어서 오른팔은 소중한 것이었 다.

그 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괴이한 사술을 익혀 잘려진 자신의 팔을 붙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풍문은 간혹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남의 팔을 붙이다니…, 도대체가 전설로라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괴이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진팔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을 때, 묵향이 슬그머니 다가와 은근슬쩍 진팔에게 말을 걸었다. 그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친절을 베푼 이유가 바로 이것을 위한 포석이었다. 묵향은 천지문에 있는 수양딸의 안부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진양 문주는 잘 있냐?”

진팔은 아르티어스의 행동에 경악한 상태였기에 묵향의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질문한 인물이 누군가? 없는 기억이라도 짜내야 했다.

“예…? 예. 지금은 은퇴하셔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계십니다.”

“호, 너무 빨리 은퇴했군. 그 망할 놈의 할망구는 아직까지도 일선에서 뛰는 모양이던데. 그래, 천지문에 별일은 없느냐?”

그래도 협정을 맺은 문파라고 신경을 조금은 써 주는군. 하지만 천지문의 문주가 바뀐 게 얼마나 오래전의 일인데, 그런 것도 모르는 것을 보면 마교는 천지문 따 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라고 진팔은 생각했다.

“아직 이렇다 할 큰일은 없습니다.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르지만요.”

“하하핫, 앞으로 벌어질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 필요하겠느냐. 그건 그렇고, 진양 문주가 키운 제자들이 몇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변을 당한 사람은 없냐?”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나 당황하면서도, 진팔은 아는 대로 성심껏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그런데 대사형과 둘째 사형은 따로 문파를 세워 독립하셨기에, 그 속사정까지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제가 듣기로는 잘해 나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없단 말이지. 허허헛.”

진팔의 말을 토대로 유추해 보면, 자신의 수양딸은 천지문에서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고는 웃음을 터뜨리던 묵향의 뇌리를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가 오래전 자신을 헤치기 위해 들어왔던 자객 흑월야사(黑月夜死) 전룡(全龍)에게 자신의 수양딸을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임무는 3 개월을 기한으로 한 것이었다.

“설마, 흑월야사(黑月夜死)가 내가 없는 동안 계속……?”

“네……?”

“아, 아니야. 너는 알 필요 없는 일이다.”

수양딸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자, 묵향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이 녀석은 딸과 같은 문파에 소속된 제자가 아닌가? 묵향은 진팔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 본 후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옷이 이게 뭐냐? 대 천지문의 제자가 그런 꼴을 하고 다니면 안 되지.”

묵향은 품속에서 집히는 대로 전표 몇 장을 끄집어내어 진팔에게 줬다.

저 옛날, 이 인물에게 걸려 끔찍한 경험을 한 진팔이다. 그는 주는 대로 받았다. 안 받는다고 한다면 기필코 받게 만들고야 만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런데 받고나서 보니 전표의 액수가 예상보다 훨씬 컸다.

‘헉! 은자 1백 냥?”

“저…, 이건…….”

“왜? 너무 적냐?”

다시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있는 묵향을 향해, 진팔은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니요. 은자 1백 냥이라니! 이건…, 너무 많습니다.”

“아냐, 그따위 푼돈 가지고 신경 쓰지 말거라. 그건 그렇고, 저 소저하고는 일행인 모양이지? 소개나 시켜 주거라.”

원래가 주인이 예뻐 보이면, 그가 기르는 개가 설혹 잡견이라 해도 예쁘게 보이는 법이다.

“예, 제 동료인 조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쪽은 그녀의 호위 무사입니다. 그리고 저쪽은…….”

진팔은 더 이상 소개할 수가 없었다. 나머지 인물들은 시체가 되어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신기한 듯 마교의 교주와 진팔이 주고받는 이야 기를 경청하고 있던 조령은 그제야 수하들이 죽었음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부하들의 주검에 비틀비틀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신이 이번 유람(遊覽)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꼴을 당했을 리 없는 그들이었다. 조령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눈물을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