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8권 10화 –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게 섯거라!”
묵향이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새롭게 추가되어 있었다. 수염을 길게 기른, 속 세를 저버린 것 같은 아름다운 용모. 저쪽에 머리띠와 목도리로 자신의 용모를 숨기고 있는 놈이 저 꼴이 되기 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노부를 불렀는가?”
“지금 여기에 네놈 말고 또 누가 있다는 말이냐?”
확실히 인적이 드문 곳이라 이곳에는 묵향과 묵향을 뒤쫓아 온 패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 그래? 그렇다면 노부를 찾은 이유는?”
“물론…….?
네놈과 비무를 하기 위해서, 아니 비무를 빙자한 구타를 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말하고자 했으나 아무리 봐도 뭔가 만만해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미서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무방비 상태인 듯 보였지만 아무리 봐도 일격을 가하기에 마땅한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허~참! 저런 놈을 향해서 검을 뽑아 들었다고? 안 죽이고 저 정도로 그친 것만 해도 엄청나게 많이 봐준 거였군.’
“자네가 노부의 못난 제자 놈을 손봐 주었는가?”
묵향은 피식 미소 지은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워낙 대가리가 단단한 놈이라 아집에서 좀 헤어 나오라고 손 좀 봐 줬지.”
미서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집에서 헤어 나오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검의 소리 운운하기에 그 다음 단계를 일러 줬을 뿐이야. 물론 씨알도 안 먹히기에 화가 나서 그만…, 조금 손 좀 봐 준다고 했던 게 저 모양이 되어 버렸지만.” “잠시만 기다리게.”
그는 묵향을 세워 놓고는 냉파천에게로 다가가 전후 사정과 상대가 격투 중에 무슨 말을 했는지 자세히 물어봤다. 과연 제자 놈의 말을 들으니 상대가 한 말에 거 짓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멍청한 녀석!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면 노부가 여기까지 쫓아올 이유가 없었지 않았느냐?”
자신이 생각해도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을 한 제자 놈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으며 분노를 희석한 그는 다시 묵향에게로 돌아왔다.
‘꽤 괜찮은 놈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묵향을 바라보고 있던 미서생은 문득 입을 열었다.
“나하고 술이나 한잔하겠나?”
갑자기 웬 술인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묵향은 쪼잔하게 그런 거 따질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술이라면 환장하는 그였기에 좋고 나쁘고를 따질 이유가 없었 다.
“술? 거 좋지.”
갑자기 술 얘기가 나오자 미서생을 따라온 제자들은 도무지 작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지 입을 헤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빨리 돗자리를 펴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그제야 제자들은 사부의 의도를 짐작한 듯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당인 사부를 위해 언제나 술 몇 병 정도는 가지고 다니는 그들이었기에 술자리는 금방 마련이 되었다.
안주는 없었지만 술만은 최고급이었다. 마개를 따자 향긋한 주향이 묵향이 앉아 있는 곳까지 전해져 왔다.
“좋은 술이로군.”
“물론이지. 나는 언제나 가장 좋은 술만을 마신다네. 자 한잔 들게나.”
커다란 찻잔 가득 술을 따라 주는 미서생. 묵향은 서슴없이 술을 쭉 들이켰다. 혹시라도 술 안에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거침없 는 행동이었다. 미서생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호오, 화통하게도 마시는구먼. 간뎅이가 작은 놈들은 이런 술을 마실 자격이 없지만, 자네는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치는군. 자, 한 잔 더 하게.”
향은 아주 좋았지만 엄청나게 독한 술이었다. 그런데 둘은 그 독한 술을 대화도 없이 쉬지 않고 들이켜고 있었다.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제자들은 처음에는 도무지 사부의 속셈이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술이 몇 병 단위로 비워지자 그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기 시 작했다.
‘아마도 사부는 놈을 취하게 하여 빈틈을 만들려고 하시는 모양이군. 확실히 능구렁이 영감이란 말씀이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는지 미서생은 묵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흠, 자네 노부의 탄주彈奏)를 한번 들어 볼 텐가? 술자리에 안주는 없어도 되지만, 음악이 없어서야 안 되지.”
미서생의 말에 묵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물론이지. 하지만 엉터리 탄주라면 사양하고 싶군. 괜히 이 좋은 기분 망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미서생의 입에서 묵향을 만난 후 처음으로 활달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핫! 물론 엉터리 탄주라면 자네에게 권하지도 않았을 걸세.”
미서생은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보퉁이를 주섬주섬 풀어 고색창연한 금(琴)을 꺼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제자들은 손에 땀을 쥐어야만 했다. 사부가 애 용하는 저 금에는 혈영비(血影比)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혈영비는 저 옛날 오왕 료를 암살하는 데 물고기의 뱃속에 숨겨 들어가 살해했다고 해서 어장검(魚腸劍)으로도 불리는 전설적인 비수였다. 손잡이의 길이 3촌을 합하여 모두 5촌밖에 안 되는 매우 짧은 비수였지만, 상대의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최고의 기습 병기였다. 그렇기에 세인들은 그 짧은 비수를 10대 기병 의 여덟 번째로 꼽고 있었다.
과연 언제 혈영비가 그 살인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애간장이 타 들어가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서생의 탄주가 시작되었다.
미서생의 탄금 솜씨는 정말이지 뛰어났다. 탄주를 하기에 앞서 큰소리를 칠 만했다. 때로는 폭풍우가 치듯, 때로는 나비가 꽃을 희롱하듯 흘러나오는 그의 가락은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침내 한 곡이 끝나자 묵향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그 정도 탄주가 안주라면 술이 더 있어야겠소.”
이 말이 미서생을 매우 기쁘게 했는지, 그는 제자들에게 호령하여 숨겨 놓은 모든 술을 다 꺼내 놓게 하였다. 제자들이 주섬주섬 보따리를 뒤져 꺼내 놓은 술은 모 두 다섯 병. 술병은 다시 빠른 속도로 비워지기 시작했다.
“내 탄주를 한번 들어 보겠소?”
묵향의 말에 미서생은 놀란 듯했다.
“호오, 놀랍군. 노부의 탄주를 들은 자들은 감히 내 앞에서 탄주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데…, 역시 배포가 다르군. 좋아, 여기 있네.”
미서생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자신이 들고 있던 금을 묵향에게 넘겼다. 그것을 본 제자들의 인상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부는 지금 이 곳에 뭐 하러 온 것인지 그 목적을 망각했음에 틀림없었다. 사부가 애용하는 금은 뛰어난 장인이 만든 최고의 명기였다. 제자들에게조차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 게 했던 금을 저놈에게 그냥 선선히 넘겨 주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그들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사부 외에 이토록 뛰어나게 금을 탄주할 수 있는 인물이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음을 표현해 내는 세부적 인 기교는 사부에게 떨어질지 몰라도, 그 힘이 넘치는 탄주는 듣는 이로 하여금 거대한 힘에 압도되는 자신을 느끼게 해 주었다.
탄주를 들은 후, 미서생의 말은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묵향을 대하는 말투도 한 단계 격상되었다. 더불어 상대가 속한 단체도 ‘마교(魔敎)’가 아닌 ‘천마 신교(天摩神敎)’로 격상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구려. 내 천마신교에 이토록 뛰어난 음의 대가가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소이다. 역시, 사람의 선입관이라는 게 얼마나 헛된 것인지 오늘에서야 깨닫게 되는구려.”
“과찬이오.”
“노부의 이름은 석량(席亮)이라고 하오. 강호의 동도들은 노부를 만통음제(萬通音帝)라고 부르지요.”
기껏 무게를 잡고 자신을 소개했건만, 상대는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표정을 보면 말투와 달리 그렇게 크게 놀라는 것 같지 않았으니 말이 다.
“호오, 귀하가 만통음제셨소? 현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금의 대가 앞에서 멋모르고 탄주를 했다니,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었구먼. 쩝, 어찌 되었건 탄주는 이미 해 버렸으니 어쩌겠소.”
만통음제라면 ‘음공(音攻)’의 고수였다. 그런 만통음제에게 상대가 금의 대가라고 칭한 것이 오히려 그를 더욱 기쁘게 했다. 왜냐하면 음공이라는 것은 그 기본 원 리를 알고 있는 내공의 고수라면 누구나 시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시전자의 무공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살상력도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기 를 아주 잘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만통음제처럼 금을 잘 다루는 사람에게는 음공의 고수라는 말보다 금의 대가라는 말이 훨씬 마음에 드는 것 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하핫, 겸손하기도 하시구려. 그대의 금 솜씨도 나 못지않게 뛰어나오. 특히 금음에 섞여 흘러나오는 내공의 조화는 너무나도 훌륭한 것이었소. 살생만을 위해 서 금을 익힌 자는 그렇게 세밀한 내공의 조절을 할 이유도 없고, 또 그런 기법을 익힐 필요도 없지요. 그대는 정말로 금을 사랑하시는 모양이구려. 내 오늘 잃어버 렸던 지기(知己)를 다시 만난 듯하여 너무나도 기쁘구려.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려 주실 수 있겠소이까?”
“묵향이라고 하오.”
묵향은 이름을 밝혔지만 만통음제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보고 뒷말을 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매우 재미있었다. 자신에게 붙여진 명호를 아주 싫어하고 있다
는 것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세인들은 노부를 암흑마제라고 부르지요.”
순간,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암흑마제라니……. 바로 마교의 교주를 칭하는 명호가 아닌가. 온갖 나쁜 말을 다 붙여도 오히려 뭔가 부족한 듯한 그런 놈. 그런 악질적인 놈을 일컫는 명호였다. 모두들 그 말이 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만통음제만은 곧 냉정을 회복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악인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크하하핫! 노부도 암흑마제에 얽힌 기괴한 소문은 들어 보았소. 하지만 그대의 탄주를 듣고 그것이 모두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겠소이다. 마음이 메마른 악독한 자라면 결코 그대와 같은 탄주를 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오.”
만통음제는 묵향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혹시 갈 길이 바쁘지 않다면 나하고 술이라도 한잔 더 하지 않으시겠소? 천마신교의 교주처럼 높으신 분의 발길을 오랫동안 붙잡고 싶은 마음은 없소. 하지만 내 오늘 이토록 마음이 통하는 벗을 만났으니 그대와 함께 조금이라도 더 술잔을 나누고 싶어서 그러니, 나를 이해해 주시구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그제야 묵향의 퉁명스럽던 어조도 한층 누그러져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그럽시다. 나도 오랜만에 음악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자, 가시지요.”
멀어지는 스승과 마교 교주의 뒷모습을 보며 남은 제자들은 기가 막혀서 한동안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스승께서 정사 중간 쯤의 성향을 가지신 분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마교 교주와 친구를 하자고 드신다면 도대체 어쩌시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 이다.
“대, 대사형, 아무래도 복수는 물 건너 간 것 같네요.”
“지금 복수가 문제냐? 분위기를 보아하니 사부님께서 마교 교주하고 호형호제(呼兄呼弟)하게 생겼는데. 젠장! 빨리 쫓아가서 사부님을 말려야겠다.”
다급히 뒤따라가려는 냉파천을 붙잡으며 설취가 입을 열었다.
“그만 두시죠. 괜히 이마에 혹 하나 더 붙이시지 마시구요.”
“이런 젠장! 처음부터 복수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거야?”
그 길로 술집에 가서 의기투합해 버린 묵향과 만통음제. 둘은 냉파천의 우려대로 아예 의형제까지 맺어 버렸다. 물론 뒤쫓아 온 제자들이 한사코 만류했지만, 그런 다고 자신의 뜻을 굽힐 만통음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앞장서서 만류하던 냉파천의 머리빡에 혹이 몇 덩이 더 생겼을 뿐이다.
묵향이 인근 호북성에 건설 중인 호북분타를 둘러보기 위해 가야 한다고 하자, 만통음제는 묵향을 따라나섰다. 화경의 고수인 그에게 남아도는 시간은 주체를 할 수 없는 것. 오랜만에 마음이 맞는 벗을 만났는데, 호북성에 함께 가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사부가 마교 교주와 함께 가는데, 그것을 그냥 놔둘 제자들도 아니었다. 혹여나 이 악독한 마두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 그들도 사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 일행 전체가 묵향의 행동에 따라 움직이게 된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식사 후 금을 꺼내는 사부를 잠시 바라보던 냉파천은 슬그머니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이때, 뒤에서 들려온 사부의 목소리.
“어디에 가는 게냐?”
“아, 예. 잠시 뒷간에 좀…”
그런 다음 그는 슬며시 밖으로 나왔다.
“젠장,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지. 사부께서 계시니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인 마교 놈과 한자리에 어울려야 하다니…….”
냉파천이 뒷간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자네 생각이 어찌 그리 본좌의 생각하고 같은지 모르겠군.”
“허억!”
냉파천이 황급히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묵향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게 아닌가. 그가 자신의 뒤에 있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냉파천은 식은땀이 등 뒤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만통음제와 동행을 하면서 묵향의 심사는 별로 좋지를 못했다. 사실 음에 대해 논할 수 있는 만통음제와의 시간은 너무도 만족스러운 것이었지만 뒤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자신을 째려보는 냉파천 때문에 흥이 깨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 한두 번이야 참았지만 아무래도 버릇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슬그머 니 냉파천의 뒤를 따라 나온 것이다. 당연히 묵향의 말투가 부드러울 수 없었다.
“너 말이야. 본좌가 네놈이 좋아서 데리고 다니는 줄 알아? 짜식이 어디 본좌 앞에서 계속 인상을 구기고 있어. 죽고 싶어서 작정했냐? 응? 어디 한번 죽어 볼래?” 순간 묵향의 몸이 움직였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냉파천의 몸도 움직였다. 현경의 고수 앞에서 방어 동작을 본능적으로 행한 것은 그의 무위가 높아서라기보다는 생존에 대한 본능의 발로였다. 하지만 냉파천의 몸짓은 공허한 것이었다.
퍼버벅!
“끄어어억!”
복부를 거칠게 두들겨 맞은 냉파천은 뱃속에 있는 것을 전부 게워 낼 수밖에 없었다. 숨이 끊길 정도로 아득한 고통에 냉파천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묵향은 냉파 천이 토해 낸 토사물이 그의 몸에 묻지 않도록 머리끄뎅이를 붙잡아 뒷간 구멍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또다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구타를 가하기 시작했
다. 묵향이 구타하고 있는 곳은 모두 다 옷으로 가려져서 밖으로 별 표시가 나지 않는 부위들뿐이었다.
“다음에 한 번만 더 내 기분을 상하게 하면, 그때는 알지? 이것들이 형님 얼굴을 봐서 본좌가 참고 넘어가 주고 있었더니, 주제 파악을 못해. 네 녀석은 본좌가 그 렇게 만만하게 보였단 말이냐? 계속 본좌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아예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알겠어?”
만통음제의 나이가 훨씬 더 많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묵향이 그를 형으로 대접한 것은 탄금에 대한 그의 뛰어난 재능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형으로 대 접한다고 해서 그 형의 제자 놈까지 자신의 제자로 대접해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는 묵향이었다.
그걸 몰랐던 냉파천은 그날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는 뒷간 구멍 위에 볼썽사납게 나자빠진 채 방금 전에 위장 속에 채워 넣었던 것을 몽땅 다 토해 내야만 했다.
냉파천의 눈에서는 힘없는 자의 설움이 방울방울 눈물이 되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크흐흐흑, 어찌 이럴 수가……..”
뒷간에서의 교육이 제대로 통했는지 그날 이후로 묵향을 향하는 냉파천의 대접은 아주 깍듯해졌다. 그 전에는 싫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었는데, 그 후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 그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할 만통음제가 아니었다.
‘허어, 동생의 심기를 건드리더니 기어코 매운 맛을 본 모양이구먼. 그렇다고 해서 동생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이 일을 어찌할꼬? 잠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 자 놈이야 안 되면 나중에 한 놈 더 키워도 되는 거잖아. 그런데 내 음악을 이해해 줄 지기를 어디서 다시 찾는다는 말이냐.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상책이겠 군.’
아무리 자신이 음의 대가면 뭣 하겠는가. 듣고 이해해 줄 사람이 없다면 그건 혼자만의 광대 짓거리에 불과했다. 음을 타면 그 속에 담긴 슬픔과 기쁨 그리고 수많 은 이야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묵향을 만난 만통음제는 요즘 너무나도 행복했던 것이다.
그 후부터 묵향이 무슨 짓을 하든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런 사부의 속마음을 모르는 냉파천은 사부가 야속했을지 모르지만, 그도 만약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알아줄 벗을 만나게 된다면 사부의 마음을 조금쯤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