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8권 15화 – 뜻밖의 방문객

뜻밖의 방문객

묵향은 회의가 끝난 후 마화를 호출했다.

“찾으셨습니까, 교주님?”

“응,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는데 말이야.”

“무슨 일이십니까?”

묵향은 화산파에서 있었던 일을 마화에게 어기전성으로 설명했다. 묵향의 설명에 마화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현천검제가 누구인가. 현재 3황6제 중에서 6제에 속하는 거물이 아닌가. 그가 교주의 숨겨진 사제라니, 정말이지 놀라울 뿐이었다.

호사가들은 지금 3황6제를 거론하고 있었다. 3황은 불계불황과 현 무림맹주인 태극검황 그리고 곤륜무황을 이른다. 그리고 6제는 옥화무제, 수라도제, 만통음제, 패력검제, 현천검제, 황룡무제를 이르는 말이다. 과거 3황에 속했던 무극검황과 뇌전검황이 죽은 후, 새롭게 패력검제, 현천검제와 황룡무제가 나타났으니 하나 더 늘어서 3황제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천…, 아니 사제님과 함께 오신 겁니까?”

마화는 혹시나 현천검제의 신분이 새 나가면 묵향에게 곤란한 일이 있을까 봐 급히 사제라는 말로 바꿨다.

“아니, 나 혼자 먼저 왔어. 그 녀석은 내일쯤 올 거야.”

“경치 좋으면서도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서 기거하실 곳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눈치 빠른 하녀 둘 정도를 붙여 드리면 지내시기에 불편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해 줘. 내가 모르고 그 녀석 제자들까지 몽땅 다 죽여 버렸거든. 나중에 그놈에게 제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지. 하지만 어쩌겠어. 죽은 놈을 살려 낼 재주는 나한테 없는데 말이야. 그 녀석, 말은 안 했지만 많이 상심했을 거야. 그러니 잘 보살펴 주라구.”

마화는 살며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참, 아버지는 아직도 안 나오셨나?”

“예, 그때 들어가신 다음 한 번도 안 나오셨습니다.”

“이런 젠장. 어쩔 수 없지, 내가 가 보는 수밖에.”

묵향은 마화와 헤어져 자신의 연공실로 갔다. 천마대전 지하로 들어가는 어두운 통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니 갑자기 길이 끝나고 거대한 강철 문이 모습을 드러냈 다. 묵향은 다짜고짜 철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쾅!쾅! 쾅! 쾅!

“아버지! 문 좀 열어 봐요! 방해 안 할 테니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줘요.”

아무리 두들겨도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젠장! 드래곤 주제에 진짜 운기조식이라도 시작한 거 아냐?”

문을 몇 번 더 두들긴 후, 어쩔 수 없이 묵향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아르티어스가 내공을 수련하고 있는 중이라면 옆에서 약간의 충격만 줘도 비 명횡사로 연결되는 수가 있으므로 조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먹을! 더러워서 부탁 안 한다! 안 해! 컴컴한 연공실에서 잘 먹고 잘 살아 보라구요!”

사실, 연공실 안에 있는 존재가 아르티어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묵향은 문을 때려 부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안에서 무슨 큰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기 때 문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드래곤, 지상 최강의 생명체였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생명에 그 누구도 해를 입힐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나 오기를 기다리며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린 것이다.

묵향이 아르티어스를 찾은 것은 현천검제의 치료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묵묵부답이니 어쩔 것인가?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나중에 아르티어스가 수련하는 것도 지겨워서 튀어나오면 그때 부탁해도 하나도 늦을 것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손발이 잘린 것은 자신이 아니니 묵향으로서는 답답할 것 이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연공실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정사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왜국과의 밀무역에 대한 일 처리를 마무리 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정사대전이 시작되고 나면 마교에서 외부로 통하는 통로들은 전부 차단될 가능성이 컸다. 그 전에 왜국으로 보낼 모든 인원을 현지에 보내 놓는 게 좋을 것이다.

묵향은 자신의 방구석에 놓여 있던 검들을 집어 들었다. 후지와라 영주에게서 선물 받은 크고 작은 검 한 쌍이었다. 썩 좋은 검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신분을 상징 하는 검. 그렇다면 이 검을 사용할 곳이 있었다.

마사코는 묵향이 자신의 거처로 들어오자 황급히 일어서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노부가 없는 동안 잘 지냈는지 모르겠군. 여기 있는 녀석들은 모두 다 무공에만 미쳐 있을 뿐 그 외에는 거의 백지 상태거든. 그래서 손님 대접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지.”

“아닙니다.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건 그렇고, 너에게 줄 것이 있어서 들렀다. 자, 받거라.”

마사코는 묵향이 건네주는 물건이 뭔지 확인한 순간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예? 이…, 이건..

“이 검은 후지와라 영주가 나에게 준 검이다. 이걸 네게 주마. 너는 이 검을 가지고 나를 대신해 후지와라 영주와의 무역을 행하거라. 이 검은 네가 나의 대리인임 을 증명하는 신물이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옛!”

마사코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한 후, 두 손을 높이 들어 검을 받았다.

“교역할 물품들 외에 1천 명의 수하를 준비하라 일렀다.”

“예?”

“물론 배가 세척밖에 없으니 이번에 전부 다 데려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만간에 형편이 되는 대로 다 보내 줄 거라고 후지와라 영주에게 전해라. 모두 무 공이 뛰어난 우수한 무사들이다. 게다가 군에서 활동한 경험도 있기에 전쟁에도 익숙하다. 그런 만큼 영주가 영토를 넓히는 데 큰 힘이 될 거다.”

“주인님의 배려에 영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출발은 내일이니, 마음의 준비를 해 두도록 하거라. 절강성분타까지는 대단히 멀다. 긴 여행이 될 거야.”

다음 날 새벽, 흑풍대 2개 대 1천 명과 마사코는 절강성에 위치한 비밀 분타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준비가 되는 대로 왜국으로 떠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묵향이 후지와라 영주와 좀 더 원활한 무역을 하기 위한 배려였다. 후지와라의 세력이 커질수록 더욱 많은 물품을 수출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세력이 커진 후지와 라 영주가 다음에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지 그건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

묵향은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마련된 탁자에 앉아 현천검제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현천검제의 숙소는 교내에서도 꽤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인 적이 없고, 조용해서 좋았다. 아마도 그런 분위기와 사부와의 추억담을 나눌 수 있는 대작 상대가 있기에 묵향이 자주 이곳을 찾게 되는 건지도 몰랐다.

“사제한테 혹시 사부님이 시, 서, 화 뭐 이런 것들을 가르친 적이 있나?”

“아뇨, 소제의 미천한 실력으로는 검술 하나만 배우기에도 벅찬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사부님께선 사형에게 더 이상 가르치실 것이 없으니 그쪽으로 유도하신 게 아닐까요?”

“글쎄…, 지금 생각해 보면 사부님이 가르친 것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어. 얄팍한 지식에, 엉터리도 많았지. 하지만 그때는 어떻게나 사부님이 존경스러워 보 였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구먼. 나도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었거든.”

묵향이 과거 옥영진 대장군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할 때, 그 분야에 뛰어난 수많은 사부를 초빙하여 깊이 있는 공부를 했다는 것을 현천검제가 알 리 없었다. 그리 고 아르티엔에 의해 모든 기억이 되살려졌을 때, 그때 배운 지식들이 서서히 자신의 밑바탕에 깔리게 되었음을 묵향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는 전혀 사형께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강한 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폭넓은 식견으로 저를 감탄하게 만드시거든요.” 묵향은 자신의 앞에 놓인 커다란 사발에 든 독한 화주를 쭉 들이켠 후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크흐흐흣, 사제도 아부가 많이 늘었군. 나도 내 주제 파악 정도는 하고 있지. 그 정도는 누구나 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거야.”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묵향은 육포 한 조각을 집어서 질겅질겅 씹으며, 커다란 술독에서 술을 떠서는 사발에 채웠다.

“노부는 처음에 살수로 키워진 소모품이었다네. 보통 살수들은 일회용이나 다름없기에 그렇게 수준 높은 교육은 시키지도 않지. 조용히 침투해서 목표물만 암살 한 후, 거기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그렇기에 대부분의 살수는 길어봐 야 20대 중반쯤이면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게 되지.”

살수의 생활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도 없었기에 현천검제는 사형의 과거가 아주 뜻밖이라는 듯 대꾸했다.

“그, 그렇습니까?”

“그러다가 내 나이 스물둘에 사부를 만났지. 그것으로 살수 생활은 끝이었어. 안 그러고 계속 살수를 했다면, 나는 서른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거야. 그걸 보면 사부님은 참 대단하신 분이셨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형.”

요즘 현천검제는 자신이 얼마나 복 받은 환경 아래서 살아왔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사형은 지금 교주가 되어 온 무림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지만, 그 의 인생은 너무나도 황폐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이토록 큰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정말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묵향은 일어서서 커다란 나무로 다가가 바지춤을 풀며 말했다.

“뛰어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복 받은 일이지. 노부는 제자를 키워 본 적이 없기에 잘 모르지만,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훌륭한 제자들을 키운다는 것 도 기분 좋은 일일 거야. 어찌 되었건 화산파 멸문에 자네 제자들이 휩쓸린 것은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오줌 줄기가 시원하게 뿜어져나가 나무에 부딪치는 소리와 묵향의 말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저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천검제의 생각은 달랐다. 방금 전의 말은 언제라도 할 수 있었다. 꼭 오줌을 누면서 얘 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사형은 자신에게 대놓고 이런 말을 하기 힘들었기에, 자신과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될 일, 즉 오줌을 누면서 얘기를 한 것이리라. 묵향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결과 사형의 속마음은 의외로 여렸다. 전형적인 외강내유형의 성격이었다. 만약 그때, 자신이 화산에 남아 있어 사형의 바지라 도 붙잡고 늘어지면서 사정을 했다면, 결코 화산을 멸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형은 그런 사람이니까.

오줌을 누고 있는 묵향의 뒷모습을 보며, 현천검제의 눈가로 존경심이 가득 차올랐다. 저런 위대한 무인이 자신의 사형이라니,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외곽 호위대에서 보내온 전갈입니다. 이것을 지니고 온 자가 교주님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어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경비 무사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어 묵향에게 바쳤다. 묵향이 보니 그것은 얼마 전에 자신이 직접 써서 만통음제에게 준 통행증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온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예, 일단 통행증을 가지고 있기에 귀빈을 모시는 숙소로 안내했습니다.”

“잘했다. 안내하거라.”

“옛!”

묵향은 경비 무사를 따라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교에도 귀빈을 위한 숙소는 존재한다. 물론 귀빈 숙소라고 해서 그렇게 호화찬란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 여행을 한 손님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안락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사실이었다. 중원 곳곳에 산재한 사파의 거두들도 많았기에, 그런 자들이 마교를 방문했을 때 이용하도록 배려해 놓은 것이다.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시다니, 오랜만입니다 형님.”

만통음제는 인사를 받은 후, 간단하게 이런저런 세상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었지만,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 처음부터 언성을 높여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차를 마시며 담소하던 만통음제는 기회를 보아 서두를 꺼냈다.

“그런데 동생, 들리는 소문으로는 동생이 화산파를 멸문시켰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그것 때문에 오셨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네. 하지만 이 우형(愚兄)이 화산파를 두둔하고자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시게.”

“물론 다짜고짜 오해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형님의 얘기를 다 들어 본 후에 판단할 일이죠.”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먼. 화산파를 멸문시키면 무림맹과 전면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한 것인가?”

“물론이죠.”

“혹시 괜찮다면 화산파를 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뭐 말씀 못 드릴 것도 없죠. 제가 그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멸문시킨 것입니다. 그놈들도 이쪽의 제의를 거절하면 어떻 게 될지 뻔히 알면서 저지른 일이니, 저를 탓하시면 안 되죠.”

무림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힘이 있다면 빡세게 나갈 수 있는 것이고, 힘이 없다면 강자의 눈치를 보며 알아서 기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간단한 이치조차 행하지 못했다면, 멸문당해도 싼 것이다.

“동생이 억지를 부려 화산파를 자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네. 그런데 우형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화산파 장로들을 왜 그렇게 처참하게 살해했느냐 하 는 것일세. 이 우형에게 숨길 생각은 하지 말게. 개방에 있는 친구 녀석이 다 알려 줬으니 말이야.”

묵향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숨길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당한 만큼 돌려준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으니까요.”

그 말에 만통음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당한 만큼이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나 한잔하시죠. 그리고 제 사제도 소개해 드릴까 하는데, 그 녀석에게 화산파 얘기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러지.”

왜 그런 조건을 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만통음제는 일단 묵향의 말에 동의했다. 그 사제를 만나면 자연히 알게 될 테니 말이다.

만통음제가 본 묵향의 사제는 불구자였다. 그것도 보통 불구자가 아닌, 어떤 놈인지 지독한 독수를 써서 손과 발의 힘줄을 잘라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불구자였 다. 하지만 만통음제를 놀라게 한 것은 그 불구자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도였다. 상대의 무공 수위는 놀랍게도 화경에 달해 있었다. 그런데 어찌 화경 의 고수가 이 모양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인사 드리거라. 이쪽은 내 의형이시다.”

묵향의 소개에 만통음제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노부는 석량이라고 한다네. 사람들은 나를 만통음제라고 부르지. 잘 부탁하네.”

현천검제는 마주 포권하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고천(古闡)이라고 합니다. 사형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들은 만통음제는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고천? 설마 자네가 현천검제라는 말인가?”

현천검제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미천한 검술로 허명만 얻었을 뿐이지요.”

그의 대답을 들은 만통음제는 화산파의 몰락에는 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뒷얘기가 있음을 눈치 챘다. 화산파를 멸문시킨 당사자와 화산 장문인이 사형제지간이 라니, 말도 안 된다. 게다가 더욱 말이 안 된다고 느낀 것은 현천검제의 몸이 왜 저 모양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통음제는 자신의 궁금증을 삭이며 묵 향을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내, 동생에게 이렇게 훌륭한 사제가 계신 줄은 미처 몰랐구먼.”

“뭐라구요? 사제만 훌륭하고 저는 아니라는 식으로 들리는 그 묘한 어감은 뭡니까? 제가 잘못 이해한 겁니까?”

“설마, 그럴 리가 있는가. 동생이 잘못 이해한 걸세.”

그러면서 그는 현천검제에게 시선을 돌려 말을 이었다.

“원래 동생이 검술에는 통달했는지 모르지만 인간성은 영 꽝이거든. 그러니 자네도 사형하고 함께 생활하려면 참 힘들겠구먼. 노부가 그 마음 이해하지.” 셋이 함께한 술자리는 더없이 통쾌한 것이었다. 그리고 만통음제와 묵향의 합주는 현천검제가 지닌 가슴 아픈 마음의 상처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 었다.

현천검제와 헤어진 후, 만통음제는 언제 그렇게 유쾌하게 떠들고 놀았냐는 듯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제 때문이었나?”

“뭐가 말씀이십니까? 형님은 다 좋은데 한 번씩 대가리를 떼고 말씀하셔서 알아듣기 힘들다니까요.”

“화산파를 멸문시킨 것이 사제 때문이었나?”

묵향은 피식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런 시시한 원한 때문에 일개 문파를 박살 내지는 않습니다.”

“화산 장로들을 그렇게 지독한 방법으로 죽인 것이 사제 때문인 모양이로군.”

만통음제의 말에 묵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당한 만큼 갚는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만들었지만, 별로 통쾌하지도 않았고 귀찮기만 하더군요.”

“화경의 고수를 저 모양으로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 먼저 단전부터 파괴했을 텐데, 어떻게 치료했나? 아, 그렇게 보지 말게. 저 정도 고수를 단전부터 파괴하지 않았다면 어찌 손발의 힘줄을 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지.”

“놈들이 파괴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파괴한 것이었죠. 한 가지 경고해 줄 것이 있어서 사제를 찾아갔던 건데, 그 일이 빌미가 되어 파문당한 모양입니다. 그런 다음 저 모양을 만든 다음 치료도 제대로 안 해 놓고 토굴 속에 가둬 놨더군요. 사실, 저놈이 멍청해서 그 꼴을 당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경고한 것 을 무시한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죠. 화산파의 멸문은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잠시나마 동생을 오해한 것 같아 너무나도 미안하구먼.”

“뭐 어쩔 수 없죠. 워낙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그런 거 신경도 안 씁니다. 오히려 요즘은 일부러 상대가 오해하도록 만들고 있죠. 그거 생각 외로 재미있거든요. 형 님도 한번 해 보시죠.”

묵향이 조금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만통음제는 두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대꾸했다. “됐네. 우형은 아직까지 동생만큼 얼굴 가죽이 두껍지 못해서 그렇게까지는 못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