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8권 19화 – 양양성 전투

양양성 전투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뭔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것이 틀림없소.”

“불구대천의 원수 놈들과 동맹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그놈들이 황실에 대한 충성을 운운하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군!”

옥화봉공의 말을 들은 무림맹 장로들의 반응이었다. 안 그래도 옥화 봉공이 마교와 뭔가 뒷거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판인데, 그 상황에서 이런 제 의를 하다니…….

옥화무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쪽에 선택의 여지는 없어요. 만약 이쪽에서 제의를 거부한다면, 그는 금에 똑같은 제의를 하겠다고 말했어요. 만약 그가 금과 연합한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 해 보고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건가요?”

그 말에 장로들은 모두들 입을 꽉 다물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이후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으니 말이다.

옥화무제는 맹주에게 말했다.

“사실 본녀도 그가 왜 이런 제의를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가 있어요. 일단은 그가 금의 멸망을 원한다는 것. 이유야 어떻든 간에 그들과 의 제휴를 고려해 볼 수는 없을까요?”

맹주는 잠시 생각해 본 후 대답했다.

“노부는 그가 금의 멸망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금과 모종의 뒷거래를 하면서 간세로서 무림맹에 접근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소. 그런 만큼 좀 더 시간을 두 고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소.”

판단은 맹주가 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맹주가 판단하기 편리한 자료만 전해 주면 끝인 것이다. 그렇기에 옥화무제는 고개를 조아리며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공수개 장로.”

“예.”

“공수개 장로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고 할 수 있겠소. 꼭 노부의 신뢰에 보답해 주기를 바라겠소이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맹주와 공수개 장로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옥화무제의 안색은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맹주가 개방을 이렇게 신뢰하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돌 아가는 대로 수하들을 시켜 조사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그녀였다.

금이 건국되었을 때, 그들은 수도를 만주 벌판에 있는 상경(上京)으로 정했었다. 하지만 동북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 연경을 손에 넣은 지금, 구태여 수도를 계속 상경으로 고집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금제국의 전체적인 인구나 생산력을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연경을 수도로 삼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볼 수 있었다. 더 군다나 연경의 경우 현재 금군의 가장 큰 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 황하 일대와 가깝기에 최전선의 병사들을 통제하기에도 알맞았다. 그에 비하면 상경은 너무 멀었 다.

또한 금제국의 경우 상경에 거대한 궁전을 지어 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대로 제국의 모양새를 갖췄다고 새로이 대규모 궁전을 짓느니 연경에 있던 요의 황궁을 접수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사실 연경에 있는 요의 황궁도 송의 왕부를 뜯어 고쳐 만든 것이니, 장대했던 연경 왕부 건물이 꽤 많은 민족에게 혜택을 주고 있었던 것 이다.

허연 수염을 흩날리며 여섯 명의 장수가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이 거느리고 온 병사들은 황궁 밖에 대기시켜 뒀기에 이들 여섯 명만이 다급히 걸음을 옮기 고 있는 것이다.

황제의 집무실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장수가 그들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며 군례를 올렸다.

“어서들 오십시오. 발극렬(勃極烈)들께서 갑자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발극렬이라 하면 금의 가장 강력한 여섯 부족의 부족장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금제국의 영토는 급속도로 확장된 상태인 데 비해 그 정치 형태는 아직까지 원시적 이라고 할 수 있는 부족 연합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발극렬들의 발언권은 대단히 강력했다.

“급한 일로 폐하를 뵙고자 한다. 빨리 고하거라.”

“예.”

장수는 황제에게 고한 후 발극렬들에게 전했다.

“드시지요.”

호화로운 용상에 앉아 발극렬들을 내려다보는 금 황제 아구다. 이민족의 황제라고는 하지만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위엄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조아 리게 만들었다. 과연 여진족을 통합하고, 대 제국 요를 멸하고, 또 송의 대군을 격파하여 연운16주를 차지한 맹호의 기상을 지닌 영웅이라 할 수 있었다.

황제는 발극렬들의 인사를 받은 후 자리를 권했다.

“자, 모두들 자리에 앉으시오. 그래, 무슨 일이 있기에 여섯 발극렬께서 함께 오시었소?”

발극렬들 중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인물이 입을 열었다.

“황제시여, 지금 연경에는 대원수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미 들어 봤소.”

“그런데 어찌 이리 태평하게 앉아 계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만약 대원수가 배신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갓 태동하기 시작한 이 나라는 풍전등화나 다름없지 않 겠습니까?”

물론이었다. 황제가 거느린 병사들의 수가 더 많다고는 하지만 대원수가 거느린 병사들은 금나라 최고의 정예들이었다. 게다가 대원수는 많은 장수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현 상태에서 맞붙는다면 승산이 전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호기롭게 말했다.

“크하하핫, 저 드넓은 요동 평야를 호령하던 그대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간덩이가 작아졌단 말이오? 짐은 그를 믿소. 그는 지금껏 마음만 먹었다면 여러 번 황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오. 짐의 형님 오야속(烏雅束)께서 돌아가실 때 그분이 후계자로 점찍은 것도 그였소. 하지만 그는 후계자 자리를 짐에게 양보했소. 그 후 그는 짐 에게 가장 친한 벗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신하였소. 짐이 여진의 대족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가 짐의 곁에 있어 줬기 때문이오. 그런데도 짐이 그를 믿 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다는 말이오? 짐은 그의 모반을 고하고 있는 그대들은 못 믿어도 수천 리 밖에 떨어져 있는 그는 믿을 수 있소.”

“하지만 조사는 해 보심이 옳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가 행동을 개시한 이후라면 늦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조사는 해 봐야겠지. 국론홀로(國論忽魯 : 제2부족장)!”

국론홀로는 부복하며 외쳤다.

“예, 황제시여.”

“그 소문을 퍼뜨린 자가 누군지 철저하게 조사해라. 한 달의 시간을 주겠다. 만약 그때까지도 소문의 출처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그대의 목을 걸어야 할 것이다. 알 겠는가.”

“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폐하의 명을 완수하겠나이다.”

한 달 후, 금 황제는 연경에 떠돌던 소문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족에게 매수된 자들이 꾸민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금 황 제의 분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배후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수한 자가 한족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금 황제는 곧장 전 병 력을 휘몰아쳐 송의 수도인 개봉을 함락시켜 버렸다. 그리고 송 황제와 상황제, 3천에 이르는 조정 대신을 포로로 잡아 만주로 압송해 버렸다.

그러고도 금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일격에 송제국을 멸망시키려는 듯 금군은 노도와 같이 하남을 집어삼킨 후 남쪽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그들의 앞을 가로 막은 것이 있으니 바로 회하(淮河)였다. 강의 폭이 워낙 넓어 강을 건널 엄두조차 내지 못한 금군은 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상류로 가면 당연히 강의 수량은 줄어들 것이고, 도하 작전을 감행하기가 손쉬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만난 것이 회하 상류, 한수(漢水) 연안에 위치한 전략 요충지에 세워진 양양성이었다.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된 성인만큼 양양성은 한눈에 척 보기에도 대단히 튼튼하고 견고하게 건설되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성벽과 그 주위로 둘러쳐진 깊은 해자(垓字 : 성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깊은 구덩이로 안에 물을 채워 둔다) 때문에 공격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피해를 우려해 그냥 지나쳐 전진해 버리자니 보급로가 문제였다. 드디어 결단을 내린 금군은 서서히 양양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금군의 병력은 무려 30만. 양양성을 몇 겹으로 포위해도 사람이 남을 정도였다.

진팔은 패력검제와 그가 거느린 제령문도 50여 명과 함께 성의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포위진을 갖추고 있는 금의 병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것을 느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처음 봤던 것이다.

“저, 저게 도대체 몇 명이야?”

저도 모르게 도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인데, 뒤쪽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겉에 드러난 수에 현혹되지 말거라. 그건 단지 허상일 뿐이다. 눈앞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적 몇 명만 상대하면 된다. 꾸준히 죽이다 보면 자연 이 전쟁은 끝나게 될 게야. 너희들은 이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가 아니다. 그런 만큼 적의 전체 수를 따질 이유가 없다. 알겠느냐?”

“예!”

진팔 같은 무림인들도 살이 떨릴 지경인데 성벽에 도열해 있는 일반 병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급 군관들이 오가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병사들은 지시에 따라 커다란 돌덩이라든지 화살 뭉치, 창, 갈퀴 같은 것들을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여기저기에 쌓아 놓고 있었다.

포위를 완료한 금군은 이상하게 생긴 수레 같은 것을 끌어다가 앞쪽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패력검제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저것이 바로 쇠뇌다.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들어 본 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 그것을 오늘 처음 봤는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에서는 활을 든 자를 구경하기도 힘든 판 에 쇠뇌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모두들 아무런 대답이 없자 패력검제는 나직한 어조로 덧붙였다.

“쇠뇌는 커다란 화살을 아주 멀리까지 쏘기 위해 만든 기계다. 노부가 들은 얘기로는 3백 장이나 되는 거리를 쏜다고 하더구나. 저것으로 쏘는 화살을 보통의 화살 처럼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날아오는 힘이 몇 배는 더 강하다고 생각하거라. 놈들과 싸우는 와중에도 언제나 저 쇠뇌가 날아올 것에 대비해라. 그 정도 파괴력이 라면 호신지기 따위는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모두들 알겠느냐?”

“문주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아마도 공격하지 않을 게다. 전투는 내일 아침에 시작될 게야. 그러니 오늘은 푹 쉬어 두거라. 내일은 힘든 하루가 될 테니 말이다.” “예!”

패력검제의 예상대로 적들의 공격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시작되었다. 무림인이 늘상 벌이는 그런 소규모 칼싸움만 보아왔던 진팔에게 그날의 전투는 충격 그 자체 였다. 진팔은 그날 이후로 군대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대부분의 무림인이 그렇듯 진팔도 무공이라고는 모르는 병졸들이 창과 칼을 가지고 다니 는 것을 비웃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병졸들이 모이고 모이니, 이건 감당이 안 될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힘은 약하지만 뭉치면 강하다 는 말을 확실히 이해하게 만들어 준 사건이었다.

쉬이익!

쇠뇌에서 발사된 수천 개가 넘는 화살들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오기 시작했다. 앞쪽에 포진하고 있는 병사들이 황급히 두터운 나무 방패를 꺼내 막아 보았지만, 방패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파괴력이 넘치는 화살이었다. 그런 강력한 힘을 지닌 화살을 무림인들이 저마다 자신이 지닌 병장기를 꺼내 막아 내는 것을 보고, 송군 병사들은 감탄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쇠뇌를 퍼붓기 시작하면서 적들의 병력이 전진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두들 커다란 자루를 하나씩 등에 지고, 한손에는 방패를 들고 앞을 가린 채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송군 병사들은 그들을 향해 사력을 다해 화살을 날렸다. 수많은 적병이 쓰러졌지만, 그래도 적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들은 성벽 아래 도착해서 등에 지고 있 던 자루를 해자(垓字)에다가 던져 넣은 후, 재빨리 뒤로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양양성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그 양양성을 둘러싸고 있는 깊고 넓은 해자의 규모 또한 작은 강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런 해자를 사람 의 등에 진흙자루로 메우려고 하는 것은 정신이상자나 생각할 만한 일이 아닐까라고 판단할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30만 명의 병사가 한꺼번에 움직이면 흙자루의 수는 무려 30만 개가 된다. 그 흙자루의 무게가 5관(약 19킬로그램)이라고 가정한다면, 일거에 150만 관(약 5천6 백 톤)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대단히 단순무식한 방법이긴 했지만 효과만은 확실했다. 그 넓디넓은 해자를 단 한 시진 만에 완전히 메워 버렸으니 말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팔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인간이 지닌 힘은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커다란 수레를 동원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순식간에 그 일을 해치워 버린 것이다.

해자가 메워진 후, 적들은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흙자루를 지고 달렸던 짐꾼들이 순식간에 용맹한 병사들로 탈바꿈했다. 그들은 방패를 앞세 우고 보무도 당당하게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 많은 병사가 아주 기다란 사다리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모양이었다.

성벽 위에 포진하고 있던 송군 병사들은 그들이 다시금 사거리 안에 들어오자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금군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동료들이 쓰러지는 데도 진격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모두들 흩어져서 성벽 위로 올라오는 적들을 없애라!”

그때부터 지독한 난전이 시작되었다. 밑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질러 대는 자들도 있었고, 위에서 던진 돌덩이에 맞아 떨어지는 자들도 있었다. 송군이 긴 막대기를 이용해서 사다리를 밀어 버려, 성벽 밑으로 떨어지는 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송군의 피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들의 쇠뇌 사격은 계속되고 있었기에,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했다가는 화살에 맞아 죽기 십상이 었다. 적병에게 활을 쏘려다가 오히려 화살에 맞아 죽는 병사들도 있었고, 돌을 던지려다가 죽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적병들이 성벽 위에까지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성벽 여기저기에서는 격렬한 칼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시작된 전투는 그날 밤에야 끝이 났다. 얼마나 많은 적병을 죽였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성벽 밑에는 수많은 적병의 시체가 널려 있었 고, 송군 병사들은 성벽 위에서 죽은 적병들의 시체를 아래로 던지고 있었다. 따로 묻어줄 곳도 없었고, 그냥 놔두자니 썩어서 냄새가 진동할 게 분명했기에 그냥 성 벽 아래로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진팔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퇴각하는 금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공격해 오는 적을 격퇴하면 승리의 함성이라도 들려올 법 하건만, 모두들 하루 종일 싸웠기

에 진이 빠져 저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채 퇴각하는 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많이 힘들었을 걸세.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피 묻은 손이 자신의 어깨에 올려지는 순간, 진팔은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자신의 어깨에 올라와 있는 이 손. 바로 이 손에 의해 얼마나 많은 금군 병사가 죽어나갔는지를 직접 목격했기에 일어나는 거부 반응이었다.

패력검제는 진팔의 몸을 휘휘 둘러보더니 중얼거렸다.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군.”

그런 다음 패력검제는 자신의 문도들 가운데 부상당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때 진팔의 등 뒤로 슬그머니 접근해 오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진팔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자네가 대단한 줄은 익히 알았지만, 오늘 보니 정말 대단하더군.”

쟈타르였다.

“대단한 사람은 따로 있네. 바로 저 영감 말이야.”

진팔의 손은 저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패력검제를 향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싸웠음에도 그의 다리에는 힘이 넘치고 있었다.

신검합일의 경지에 든 진팔 같은 절정고수조차 나중에는 내공이 딸려 호신진기니 뭐니 그런 사치스러운 것은 아예 사용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물며 그보다 실 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하루 종일 맨땅에 박치기를 하며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벽 밑에서 쏴댄 활과 쇠뇌 들이 폭우가 쏟아지듯 성 안으로 날아들었었다. 끊임없이 성벽을 타고 기어 올라온 적병들과 칼부림을 하는 와중에도 화살에 대한 주 의를 늦추지 않아야만 했다. 장거리에서 발사하는 쇠뇌들의 위력은 엄청났지만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적 아군을 가리지 않고 그 범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죽였 던 것이다. 자기편이 쏜 화살에 맞아 죽는 오랑캐들도 많았지만, 송군이나 그에 가담한 무림인들의 피해도 막심했다.

진팔이 그런 지독한 난전 속에서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남은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도객인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진팔을 질리게 만든 인물이 있 었으니, 그가 바로 패력검제였다. 그런데 그런 진팔을 보고 질려 하는 인물이 여기 있으니, 세상은 재미있는 것이다.

‘도대체 저게 인간인가? 나는 하루 종일 싸웠더니 다리가 다 후들거리는 판인데…

진팔의 말에 쟈타르는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하하핫, 저 영감은 논외로 쳐야지.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으니 말일세.”

“나 말고 저 친구도 대단하지 않던가?”

진팔은 패력검제의 아들 폭풍검 서량을 가리켰다.

“물론일세. 하지만 아무래도 저 사람한테는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더군. 그래도 자네는 꽤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한 동료가 아니었나.”

“물론이지. 그건 그렇고 자네가 모시는 상관은 어떤가? 많이 놀랐을 텐데…….?

사실 조령과 쟈타르는 이번 전투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조령은 부상자들을 돌본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쟈타르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보호자의 임무를 충 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멋도 모르고 그녀를 향해 달려든 금군 네다섯을 벤 것이 오늘 그가 수행한 전투의 전부였다.

쟈타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이걸 기회로 제발 정신을 좀 차리셨으면 좋을 텐데…….”

“자네도 참 고생이 많구먼. 그건 그렇고, 나는 아직까지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

30만에 달하는 적들의 공격을 겨우 3만도 안 되는 수로 막아 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무리 무림인들이 가세했다고 하지만, 양양성의 성벽이 워낙 높아 적들이 전 병력을 쏟아 붓기가 곤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첫날 공성전에서 그렇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금군은 후퇴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을 포위한 채 아예 지구전으로 들어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양양성 안에 1년 동안 버틸 식량이 있다고는 하지만, 무작정 계속되는 농성(籠城)은 포위하고 있는 자들보다는 포위당한 자들에게 더욱 가혹한 조건을 안겨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