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8권 2화 – 묵향의 유희

묵향의 유희

어쩌다 보니 제령문에 오게 된 진팔은 매일매일 열심히 도법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가 도법 수련을 하고 있는 곳은 후원에 마련되어 있는 연무장. 말이 연무장이 지 그냥 넓은 공터일 뿐이었지만, 진팔에게는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제령문에 온 후 별로 할 일도 없었기에 시작한 무공수련이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더욱 열심히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저 두 눈이 자신을 지 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화경에 든 초절정의 고수가 자신의 무공을 무슨 이유로 살펴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혹시나 누가 아는가? 뭔 가 미비한 점에 대해 조언이라도 해 줄지 말이다. 진팔은 은근슬쩍 그런 기대를 가지며 오늘도 도를 잡고 연무장에 선 것이다.

먼저, 허공에 가상의 적을 눈앞에 그린다. 이때 진팔이 만들어 낸 가상의 적은 일전에 큰 위협을 줬던 남궁세가의 창궁18수였다. 진팔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서서히 도를 들어 올리고는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라. 네가 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도는 더 이상 너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도의 뜻을 꺾으려고 하지 말고, 도가 이끄는 대로 초식을 흘리거라. 그렇게 하면 또 다른 경지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진팔이 신도합일(身刀合一)의 경지에 들어섰을 때, 삼사저(三師姐)가 들려준 조언이었다. 그가 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며, 또 가장 좋아하는 삼사저는 천지문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다. 그리고 진팔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진팔의 도가 가상의 적들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짙은 도기를 뿌려 대며 흐르던 도는 어느샌가 진팔의 손을 떠나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빗살처럼 허 공을 가르던 도는 크게 원을 그리듯 목표인 가상의 적들의 몸을 스치며 지나갔다.

챙!

흐르는 물처럼 적들의 몸을 통과하던 도가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의 손에 튕겨져 나왔다. 진팔은 급히 도를 회수한 뒤 사내를 향해 있는 힘껏 도를 휘둘렀다. 그 순간 엄청난 도기가 허공에 뿌려지며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허어, 저런 2류도법이나 휘두르는 놈이 어떻게 저 나이에 신도합일을 깨달을 수가 있지?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군. 물론 저놈이 한 20년 정도 나이를 더 먹었다 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겠지. 하지만, 저놈 나이는 량이하고 비슷하지 않은가.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태어난 량이에게 좀 더 무공을 쉽게 익히라고 어렸을 때 노부 가 직접 벌모세수까지 해 줬지. 그리고 뛰어난 심법을 익히게 했으며, 최상승검법까지 노부가 직접 가르쳤어. 그런데 어떻게 저놈이 량이와 비슷한 수준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대성하기가 그렇게도 힘들다는 태허무령심법을 익힌 놈이 말이야. 이건 말도 안 돼!”

불신 어린 시선으로 한참 동안 진팔의 수련을 지켜보던 패력검제는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뭔가 있어. 그가 저 녀석에게 주목한 뭔가가 말이야. 심법만 가르쳐 줘도 저 정도까지 대성할 수 있는 1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천재적인 재목인 줄 한눈에 알아보고……..

그러나 곧 말도 안 된다는 듯 패력검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더 말이 안 돼. 아무리 무림이 낳은 최고의 천재라고 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저놈이 배운 것은 태허무령심법. 다른 심법은 익힐 수도 없고, 오로지 그 심법만으로 대성을 해야 해. 물론 일정량 이상의 내공을 쌓기만 하면 엄청난 능력을 뿜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술에도 걸리지 않는 현문 최고의 심법 이긴 하지. 하지만 이 심법이 지닌 최대의 단점은 연성 초기에 공력을 쌓기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이야. 그 때문에 결국 현문에서조차 그 누구도 익히지 않아 실전 되었다고 들었는데…….”

고개를 흔들던 패력검제는 다시 수련을 하고 있는 진팔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태어나면서부터 태허무령심법을 익혔다고 해도 대성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야. 뭔가가 있어, 뭔가가……. 도대체 그게 뭘까?”

진팔의 기대와는 달리 패력검제가 그의 무공을 관찰하고 있는 목적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옥대진과 능비화가 있지도 않은 미행자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숨으며 무림맹 호북분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묵향은 홀로 야경을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현천검제는 벌써 자신의 문파로 돌아간 후였다. 아마도 그는 돌아가는 대로 장로들을 소집해 이번에 사로잡은 포로를 놔줄 것인지 어쩔 것인지 의논하기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을 놔 주지 않는다면 마교와의 충돌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 테니 말이다.

“화산에 오르기 전에 방은 잡아 놨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묵는 게 더 좋겠군. 이곳 음식이 썩 마음에 든단 말이야. 푹 쉰 다음 내일 출발하면 되겠군.” 타고 온 말은 사천분타에 그냥 놔두고 왔고, 이전에 잡아 놨던 방에 놔두고 온 물건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그냥 묵는다 해도 걸리적거릴 것이 하나도 없었 다.

묵향은 방 옆에 드리워져 있는 붉은 줄을 살짝 당겼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점소이가 들어오며 싹싹한 어조로 물었다.

“뭐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손님?”

“빈방이 있느냐?”

“예, 손님. 그런데 어떤 방을 원하십니까? 저희 객잔에는 모두 여섯 종류의 방이 있습니다.”

묵향은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간단히 말했다.

“가장 좋은 방을 다오.”

그 말에 점소이는 환하게 웃으며 더욱 비굴한 표정으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옛, 지금 방으로 드시겠습니까?”

묵향이 대답 없이 천천히 일어서자 점소이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손님. 묵으실 모란채는 후원에 있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안락하게 꾸며져 있어 손님의 마음에 쏘옥 드실 겁니다.”

그곳은 하룻밤 자는 데 무려 은자 넉 냥이나 하는 방이다. 이런 돈 많은 손님에게는 최대한의 친절로 모셔야만 뭔가 떨어지는 것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묵 향을 안내하는 점소이의 어조에는 애교가 담뿍 묻어 있었다.

점소이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던 묵향은 특이한 인물들을 보게 되었다. 객잔 1층의 한쪽 구석에서 때늦은 저녁식사에 몰두하고 있는 두 사람. 바로 점심나절에 봤 던 스승과 제자라던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을 보자 마치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발견한 것처럼 묵향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호오, 안 그래도 한 달 동안 뭐 하고 지내나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잘 걸렸군.”

묵향은 10년 만에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 활짝 미소 띤 얼굴로 여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반갑게 말하는 묵향과는 달리, 음식을 먹다가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들었던 두 여인은 묵향의 얼굴을 보자마자 뭔가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표정이 확 일그러졌 다. 그래도 중년 여인 쪽이 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소곳이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두려움 때문인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대협.”

묵향은 상대의 허락도 얻지 않고 의자에 턱 걸터앉은 후, 넉살 좋게 말했다.

“그래, 여기는 어쩐 일인가? 점심 때 본 후에 여기까지 오려면 아주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꽤 길을 서둘러서 온 모양이지?”

그 순간 스승이라던 중년 여인은 상대가 갑자기 뭣 때문에 자신들에게 관심을 나타내게 된 것인지 눈치 챈 듯, 화들짝 놀라면서 변명을 늘어놨다.

“저희도 급한 일 때문에 길을 서두르던 중이었습니다, 대협. 이곳은 아주 번화한 곳이긴 하지만 서안에서 낙양으로 들어가려면 이 관도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을 가지고 저희들이 마치 대협을 미행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묵향은 그것 보라는 듯 말했다.

“호오, 강하게 부정하는 것을 보니 꽤 찔리는 게 있나 보군. 노부를 미행하던 놈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다 그렇게 변명하곤 하지. 절대로 미행한 적 없다고 말이야. 좀 더 그럴듯한 변명 없나? 뭔가 새롭고 참신한 변명을 한다면 이번에 한해서 용서해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던 중년 여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였 다. 분명 자신들에게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성질대로 대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괜히 이곳에서 저자의 칼에 맞아 죽는다면 어디에다가 하 소연을 할 것인가?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가라앉히고 급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좀 해 보십시오. 제가 대협을 미행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대협과 저는 점심나절에 볼 때까지만 해도 일면식도 없었지 않았습니까? 서로 만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원수진 일도 없는데 제가 왜 대협을 미행한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묵향을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게다가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는 그녀가 이렇게 사정 하고 있는데,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생각이었고, 저 무례하기 그지없는 사내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음에 틀림없었다. 상대는 뭔가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을 뿐이다.

“글쎄…, 있는지도 모르지. 노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껏 살아오며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됐지. 생판 본 적도 없는 놈들이 노부를 죽이겠다고 칼을 들이댄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그러니 솔직히 얘기해 봐.”

중년 여인은 어이가 없었다. 이건 전혀 얘기가 통하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참, 그러고 보니 노리는 놈이 많다고?”

이 말이 떠오르자 중년 여인의 머릿속에는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공격을 당하는 일도 물론 있다. 하지만 나쁜 짓을 하는 놈이 칼을 맞을 확률은 더욱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나 저 인간처럼 아무나 잡고 시비를 걸 정도라면 필히 저놈은 나쁜 놈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고도 이렇게 백주대낮에 거리낌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면 실력도 대단한 놈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저자가 누구냐 하는 것인데……. 적당히 휘어진 무기의 모양새를 본다면 쾌검이나 쾌도 종류를 익힌 자가 분명했다. 저자의 손 모양이나 또, 점심 때 객점에서 보여 준 한 수를 생각해 보면 그 추측이 틀림없었다.

사파면서 극악무도하고, 또 쾌검이나 쾌도를 구사한다. 그리고 엄청난 고수…….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인물이 있었다.

‘허억! 서, 설마 저자가 만악검귀(萬惡劍鬼)?”

순식간에 중년 여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만악검귀라면 수없이 많은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 사파의 고수였다. 물론 그가 무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는 자 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함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쾌검이 장기였지만, 굳이 검술로 승부하지도 않았다. 적의 수가 많으면 독을 사용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상대의 실력을 꿰뚫어 보고 불리하다 싶으면 재빨리 모습을 감추는 교활함에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직까지도 그 극악무도한 이름을 중원에 떨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자가 진짜 만악검귀가 맞다면 내가 이자를 알아봤다는 내색을 해서는 안 돼. 그렇다면 정말 끝장이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대사형께서 계신 곳으로 이자 를 유인하는 것만이 살길이야.’

상대가 말이 없자 묵향은 살짝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이봐, 변명하는 것을 포기했나? 쯧쯧, 그럼 어쩔 수 없군. 그러고 보니 밤새도록 누군가를 고문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겠군.”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대협? 저와 제자는 급한 일이 있어 길을 가던 중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중년 여인이 급하게 변명을 하자 묵향은 빙글거리며 계속 물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두 여인으로서는 묵향의 모습이 마귀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급한 일이 뭐지?”

“사형께서 급히 저를 찾으신다는 전갈이 왔거든요.”

“호오, 이제는 사형까지 등장하는군. 그래, 그 사형이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데?”

“개봉 인근에 살고 계십니다.”

“개봉이라……. 여기서 꽤 먼 거리군. 걸어서 가자면 며칠 걸리겠어. 그러니까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 말이로군.”

중년 여인은 묵향이 자신의 말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안 그래도 하남성분타로 갈 예정이었던 묵향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흠, 마침 잘됐군. 노부도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이었거든. 좋다, 만약 사형이라는 자가 있고, 또 너희들을 부른 게 사실이라면 그냥 풀어 주지. 하지만 거짓일 때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거기 있는 꼬마까지 덤으로 말이다.”

심심하던 차에 잘 걸렸다는 듯 환하게 웃는 묵향을 바라보는 두 여인은 마치 악마라도 본 듯 두려움에 부르르 떨었다.

“짐을 들고 따라와. 독채를 잡아 놨으니 너희들이 쉴 곳을 주마. 처음부터 잘못했다고 빌었으면 그냥 용서해 줄 수도 있었는데, 꼴에 잔대가리를 굴려!”

은근히 으름장을 놓은 묵향은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는 묵향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두 여인의 눈에서 독기 어린 눈빛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뭘 생각했는지 중년 여인은 곧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호호, 이놈 어디 두고 보자. 사악한 짓만 일삼던 마두의 최후가 어떤 건지 대사형께서 톡톡히 가르쳐 주실 게야.”

그날 밤, 살그머니 잠자리에서 나온 두 여인은 주섬주섬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도둑이라도 되는 듯 그들의 행동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짐을 완전히 다 챙기고 살며시 밖으로 나올 때까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행동한 그들이 막상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옆방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참, 잊어버리고 말을 안 해 줬군.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했다가 잡히면 분근착골을 당할 거야. 처음 잡혔을 때는 1각, 그 다음은 2각, 4각……. 이렇게 두 배씩 늘어나지. 이번에는 경고를 안 해 줬었으니 그냥 넘어가지만, 이다음에 걸렸을 때는 국물도 없을 줄 알거라.”

젊은 여인은 시선을 돌려 중년 여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을 고심하던 중년 여인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으며 방으로 되돌아갔다. 아무래도 도망치는 것은 무리가 따르니 훗날을 기약하기로 한 것이다.

두 여인이 일그러진 얼굴로 털썩 침상에 주저앉았을 때, 그 옆방에서 묵향은 고개를 돌려 군사에게 보낼 명령서를 쓰기 시작했다.

「특급 지령.

이 명령서를 받는 즉시 염왕대 5개 대를 출발시킬 것을 명한다. 염왕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달 26일까지는 화산 인근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염왕대의 지휘자는 행적이 무림맹에 포착되지 않도록 은밀히 행동할 것을 명한다. 만약 무림맹에 행적이 포착되었을 때는 즉시 본교로 귀환하라.

천마신교 교주 묵향」

염왕대 5개 대라면 절정고수가 무려 5백 명이었지만, 그 정도 전력을 가지고도 화산을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들에다가 묵향이 포함된다면 화산 파는 하루아침 해장거리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묵향은 이것을 암호로 작성한 후, 흑룡패(黑龍牌)를 꺼내어 인장까지 찍었다.

만약 사제와의 협상이 결렬된다면 묵향은 아예 화산파를 쓸어버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쓸어버리지 않고 협상씩이나 해 줬으니 돌아가신 사부께 제자로 서의 도리는 다한 셈이었다.

“될 수 있으면 사제 녀석이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군. 화산파야 멸문당해도 싸지만 하나밖에 없는 사제를 괴롭히는 게 좀 찜찜하니 말이야. 그건 그렇고, 이걸 어

떻게 본교에 보내야 하지?”

호위 무사랍시고 따로 데려온 놈도 없었고, 또 본교와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준비해 놓은 것도 없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젠장, 별게 다 속을 썩이는군. 좋아,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묵향은 슬며시 옆방의 기척을 살폈다. 보아하니 으름장을 놓은 뒤로 탈출을 포기하고 꿈나라에 들어간 모양이다. 어느샌가 묵향의 모습이 방에서 사라져 버렸다.

묵향이 달려간 곳은 화산파 인근에 있는 섬서표국이었다. 표국주 장영달은 그날 저녁 일 처리를 끝낸 후, 아늑하기 그지없는 비단 침상에 들어 달콤한 꿈속을 헤매 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잠을 깨야 했다.

“으윽!”

장영달이 눈을 떠 보니 복면을 뒤집어쓴 웬 괴한이 침상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억!”

괴한은 조용히 하라는 듯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댄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쉬~, 이봐. 은밀하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왔는데, 소리를 내면 좀 곤란하지 않겠어?”

장영달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섬서표국은 이 일대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큰 표국이었다. 표국에는 비싼 표물이 많이 쌓여 있는 관 계로 경비 또한 엄중했다. 그런데 어떻게 괴한이 이렇게 쉽게 침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표국의 주인인 자신의 침실에 말이다.

물론 뛰어난 실력을 지닌 무림인이라면 자신의 무공을 믿고 침입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간 큰 녀석이 없었던 이유는 섬서표국의 배후에 화 산파가 있기 때문이었다. 섬서표국과 화산파의 사이가 매우 돈독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심지어 표국주의 첫째 아들이 화산파의 속가제자로 들 어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해마다 엄청난 재물을 화산파에 헌납하기는 했지만, 화산파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섬서표국에 엄청난 혜택을 안겨 주었다. 일단 아무리 간 큰 산도적이라 도 섬서표국의 물품에는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신용 등급도 대단히 상향 조정되어, 수많은 표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섬서표국은 화산파에 퍼다 주는 것의 수십 배가 넘는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 섬서표국에 숨어 들어와 자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는 간 큰 놈이 존재할 줄이야.

어느 정도 놀라움에서 벗어난 장영달은 괴한을 바라보며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상대가 여기까지 은밀히 침입한 것으로 보아 고수인 것은 확실했지만 그 의 마음속에서는 화산파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컸던 것이다.

“노, 노부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침입한 것이냐?”

“섬서표국 국주 아니었나?”

“알고도 감히 노부의 침실에 침입했다는 말이냐? 네놈이 대 화산파의 비호를 받고 있는 노부를 건드리고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호오, 이거 아주 재미있군.’

화산파의 비호를 받는 표국이, 화산파를 멸문시킬 연락을 마교에 전달하게 되었으니 재미있을 만도 했다.

묵향은 말없이 품속을 뒤져서 전표 한 장을 꺼내어 장영달에게 건네줬다.

“이게 뭣이냐? 무슨 협박…. 헉! 은자 2백 냥!”

전표를 보자마자 표국주의 안색이 획 바뀌었다. 한 가족의 1년 생활비가 은자 다섯 냥이 넘지 않으니, 2백 냥이면 그야말로 엄청난 금액인 것이다.

그 순간 장영달은 화들짝 일어서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자신이 속옷 바람이라는 것도 잊은 채.

“비밀스런 표행을 원하신다면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무슨 일이라도 맡겨만 주신다면 최대한 은밀하고 빠르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전표를 보는 순간 장영달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이 괴한은 자신에게 뭔가 비밀을 요하는 표행을 맡기려고 온 손님이라는 것을. 이런 직업에 종사하다 보면 간혹 그런 일을 부탁해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던 장영달이었기에 앞에 있는 괴한이 흉악한 도둑이나 강도에서 순식간에 표국에 커다란 이익을 안겨 줄 고귀한 손님으로 보였던 것이다. 괴한은 재미있다는 듯 대꾸했다.

“자네, 장사하려는 마음가짐이 되었구먼. 좋아, 내 한 가지 일을 부탁함세. 청해성의 성도(省都) 서녕(西寧)에 가면 환성루(奐晟樓)라는 곳이 있네. 혹시 알고 있는 가?”

만약 작은 시골 문파라든지, 뭐 그런 곳이라면 그가 잘 모를 수도 있었다. 표국주의 머릿속에 중원 전체의 지도가 들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 게 괴한이 말한 그곳은 아주 유명한 곳이었기에 장영달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입니다요, 손님. 서녕 최고의 기루가 아닙니까?”

“호오, 제대로 알고 있군. 바로 그곳에 이 서신을 전하는 것이 자네 일일세. 최대한 빨리 전한다면 언제까지 전할 수 있겠는가?”

서신 한 장이다. 그렇다면 무거운 짐을 나를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보낼 수 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라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기에 국주 는 자신이 생각한 날짜에 하루 정도를 더해서 대답했다.

“적어도 10일은 걸릴 것입니다.”

“흠, 10일이라.”

괴한은 옆에 있는 서탁으로 다가가 붓을 꺼내 들고는 서신 봉투에 뭔가를 쓱쓱 쓰면서 말했다.

“10일에서 하루 단축될 때마다 은자 2백 냥씩 지급할 것이고, 한 시진이 단축될 때마다 은자 열 냥씩 더 주라고 써 놨네. 물론 자네가 약조한 10일을 초과해서 도 착하면 더 이상의 보상은 없을 거야. 최대한 빨리 전달하면 할수록 더욱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겠지. 수고가 큰 만큼 그만한 대가를 주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장영달은 자신의 탁월한 상술로 하루를 더한 것을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은자 2백 냥을 날로 먹었지 않은가. 역시 사람은 머리를 잘 써야 하는 것이다. “무, 물론입니다, 손님. 정말 통이 크시군요. 손님 같은 분을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좋아, 그럼 잘해 보게나.”

“예, 맡겨만 주십시오. 틀림없이 만족하실 겁니다.”

장영달이 인사한 후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그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자신의 손에 쥐어진 은자 2백 냥짜리 전표와 서신이 없었다면 한바탕 꿈이라도 꾼 줄 알았을 것이다.

“참, 그러고 보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 순간부터 시간은 바로 돈이었다. 장영달은 여전히 자신이 속옷만 입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봐라! 진 표사는 어디에 있느냐? 당장 그 녀석을 찾아와라. 빨리!”

“옛!”

사람들이 표국 내에서 가장 기마술이 뛰어난 진 표사를 찾으러 달려 나간 후에야 장영달은 자신이 방금 전에 당한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참! 그러고 보니 침입자가 있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밥버러지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물론 장영달은 표국의 경비 무사들이 지닌 얄팍한 실력으로 좀 전의 괴한의 침입을 막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 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에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감히 나 장영달이 누군 줄 알고 머리를 툭툭 때려? “멍청한 녀석들! 일주일치 급료는 없을 줄 알아라.”

자신의 결심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속이 조금 풀리는 장영달이었다.

장영달이 서신을 전달해야 하는 환성루는 마교의 하급 단체들 중의 하나인 혈화궁(花宮)의 본거지였다. 여인들로만 구성된 혈화궁은 화류계에 진출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데, 그 수입이 마교 전체 수입의 무려 3할이나 차지할 정도였다. 그 외에 돈벌이 말고도 마교 내의 각 고수들에게 향락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해소시켜 주는 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외부 고수들의 포섭이나 정보 입수, 요인 암살 등과 같은 은밀한 일도 했다. 그런 만큼 묵향의 서신 이 그곳에 도착하면 지급으로 마교의 총타에 전달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묵향과 그에게 사로잡힌 두 여인은 개봉을 향해 길을 떠났다.

사실 묵향으로서는 의심이 가는 이들을 해치워 버리면 간단하게 끝날 일이었지만, 화산파의 일이 마무리 지어질 때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그동 안 뭔가 할 일이 필요했다. 그녀들은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같이 길을 가게 되었는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설취(?)라고 합니다. 강호의 동도들은 저를 유운비화(遊雲飛花)라고 부르지요. 그리 고 이쪽은 제 제자인 송화(松花)입니다.”

설취가 이렇듯 소개를 한 것은 상대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어 내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상대가 만악검귀라고 생각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왜냐하면 만악검귀는 소문에 의하면 아주 극악무도한 마두라고 했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예의가 없는 더러운 성격이기는 했지만. 그 렇기에 은근슬쩍 이름을 물어보아 정체를 알려 했던 것이다.

상대가 누군지를 정확히 알아야 현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세워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상대는 묵묵부답,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저희들의 소개를 했으니 그쪽도 신분을 밝히는 것이 예의가 아닐는지요.”

“이미 다 알고 미행을 했을 텐데 소개를 할 필요가 있을까?”

“자꾸 미행 미행 하시는데 저희들은 귀하를 미행한 적이 없다니까 그러시네요.”

“뭐, 그건 나중에 대사형이라는 사람을 만나 보면 자연스레 알 수 있겠지.”

그렇게 대답한 후, 묵향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차분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먼저 건설 중인 하남성분타에 들러 분타주를 치하하고 독려한 후, 남하하여 호북분타 에 들르는 것이 괜찮을 듯했다. 그런 다음 다시 북상해서 화산파로 간다면 얼추 한 달 가까이 될 것이다.

‘사제 녀석이 잘해 줘야 할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초류빈을 끌고 오는 건데 그랬군. 사제의 목을 내가 직접 베기는 아무래도 좀 그렇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