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8권 4화 – 검의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느냐?
검의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정자 한가운데, 고아하게 보이는 서탁을 앞에 두고 수묵화를 그리고 있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 중년 사내는 그림에 푹 빠져 들어 신들린 듯 붓을 놀리고 있었다. 때론 폭풍과도 같이, 때론 봄바람이 살랑거리듯.
“후~우.”
잠시 후, 만족스런 한숨을 내쉰 중년 사내는 뒤로 물러서서 화폭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길게 기른 턱수염을 매만지고 있었다. 흑단과도 같 이 탐스러운 수염을 매만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미염공(美髥公 : 삼국지의 관우를 말함)이 환생한 듯 고아하기만 했다.
“흐음, 근래 들어 그린 것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구먼.”
시원한 산들바람에 떠도는 묵향에 취해 있던 중년 사내의 여유로운 한때를 방해한 것은 부산스럽게 들려온 인기척이었다.
“허어, 내가 그림을 그릴 때는 이 주위에 함부로 얼씬거리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잠시 후, 허겁지겁 걸어오는 하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앞에 선 하인이 고개를 조아리자 중년 사내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질책하듯 물었다. “무슨 일이냐?”
“주인어른, 유운비화 님께서 오셨습니다.”
하인의 말에 중년 사내의 얼굴은 언제 찌푸렸냐는 듯 활짝 펴졌다.
“오오, 사매가? 얼른 이쪽으로 모시고 오지 그랬느냐?”
“두칠이가 이쪽으로 모셔 오는 중입니다. 아, 저기 오고 계십니다.”
“너는 빨리 가서 차를 준비하라고 이르거라.”
“예.”
하인을 보낸 후, 중년 사내는 재빨리 자신의 사매에게로 달려갔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인가.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온 사질은 몇 년 지난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 져 있었다. 전에 봤을 때는 풋풋한 소녀였는데, 지금은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중년 사내는 반갑게 손님들을 맞이했다.
“모두들 어서 오너라.”
“대사형을 뵙습니다.”
“사백님을 뵈옵니다.”
“그래, 모두들 잘 있었느냐?”
사매를 바라보는 중년 사내의 얼굴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가볍게 수인사를 하며 사매의 일행을 둘러보던 그의 두 눈이 일순 번쩍였다.
“허~, 한눈에 보기에도 하늘이 내린 무골이로고. 노부는 냉파천(冷擺泉)이라고 한다네. 무림의 동도들은 나를…….”
냉파천은 설취 옆에 멀뚱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묵향을 설취가 이번에 새로 제자로 삼은 녀석이거나, 아니면 뭔가 인연이 있어서 자신에게 소개하려고 데려온 무림의 후기지수인 줄 착각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명호를 밝히려고 했던 것인데, 그 말은 곧 설취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게 아닙니다, 대사형.”
설취는 묵향을 연신 째려보며, 그간 자신이 당했던 일을 냉파천에게 꼬치꼬치 일러바쳤다. 말을 하던 설취는 그동안 당했던 설움이 북받쳐 오르는지 두 눈에 눈물 마저 글썽거렸다. 사실 그녀 정도 되는 연배의 여고수가 이토록 극심한 수모를 당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제자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모든 사연을 다 들은 냉파천은 처음의 우호적인 표정과는 달리 묵향에게 싸늘한 눈빛을 던졌다. 재야에 숨은 선비처럼 한없이 고아해 보이던 그의 몸에서 일순 사 위를 짓누르는 듯한 일대종사의 기도가 뿜어져 나와 주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형형한 눈빛을 뿜어내는 그는 태양혈이 점차 안으로 갈무리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 으로 보아 대단히 뛰어난 고수임에 분명했다. 확실히 설취가 믿고 찾아올 만한 고수였다.
“네놈이 감히 사매를 괴롭혔다는 게 사실이냐?”
설취가 냉파천에게 그간 일을 일러바칠 때부터 묵향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묵향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면 그녀가 감히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아마 묵향에게 걸린 그 순간부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을 게 분명했다.
묵향은 냉파천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그간 설취와 송화를 구박했던 것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듯 심드렁하기만 했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 오해는 풀린 듯하니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오히려 그것이 더욱 냉파천의 심기를 건드렸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저토록 오만방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이 내린 근골을 지니고 있으면 무엇하리. 인성이 저 모양이니 장차 무림에 큰 화근이 될 것이 불
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내 이번에 저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무림을 위해 힘쓸 수 있는 인재로 만들어 줘야겠군.’
“이놈! 이런 고약한 놈! 네놈의 사부가 누구길래 그토록 오만방자하단 말이냐?”
그 말에 묵향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신을 두고 뭐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참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감히 사부를 들먹이다니. 그렇다 보니 묵향의 입에서 튀어나 온 말도 결코 곱지 않았다.
“본좌의 사부가 누군지 네놈이 알아서 뭐 할래?”
“도무지 말로 해서는 안 되는 놈이로다.”
냉파천이 손을 쓱 뻗자 정자 한편에 세워 놓았던 그의 애검이 둥실 날아와서 그의 손에 잡혔다. 어기동검술을 이용하여 검을 자신의 손으로 끌어당긴 모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르릉.
맑은 소리를 울리며 휘황한 광채를 뿜어내는 보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듯 냉파천은 한동안 투명하기 그지없는 검신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사매, 사매는 검의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냉파천은 싸가지 없는 후기지수를 혼내 주면서, 이 기회를 빌려 자신의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 사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설취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사매가 미흡하여 아직 그 정도까지는…….”
“사매도 알다시피 몇 년 전에 만났을 때, 나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무공에 절망하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어. 처음에는 그게 누군지 몰랐는데, 이 녀석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게야.”
냉파천은 자신이 들고 있는 보검을 가리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날의 감동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지. 굳이 표현하자면, 사모하는 여인을 몇 날 며칠 동안 따라다니며 사랑을 애걸하다가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느낌이랄까……. 그 소리를 따라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의 검술이 한 단계 더 발전했음을 느낄 수 있었 지. 나는 드디어 껍질을 깨고 창공을 노닐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게야.”
“축하드립니다, 대사형.”
설취가 말하자 그 옆에 서 있던 송화도 재빨리 입을 열었다.
“사백님의 대성을 축하드리옵니다.”
냉파천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사매, 내가 근래에 터득한 검술을 견식하고 그 오의를 가슴 깊이 새겨두도록 하거라. 네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에 서 있는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는 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있는 멍청한 놈이 하는 짓이 꼴같잖아서 묵향은 그냥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지켜보는 것 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이건 해도 너무하는 것이 아닌가.
“이봐,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냉파천은 심기가 상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인간성도 형편없지만, 인내심은 더욱 없는 놈인 모양이었다. 오냐, 오늘 내가 저놈을 잡고 개 값을 물리라.
“크흠, 오늘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내가 손수 가르쳐 주마. 자, 오너라.” 빡!
“끄악!”
오라는 말을 마치는 순간 냉파천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그에 수반된 엄청난 통증, 냉파천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의 눈에는 아직까지도 저쪽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저놈은 저기에 서 있는데, 여기서 내 머리를 가격하고 있는 놈은 또 누구란 말인가?”
찰나의 시간이 흐르자 저쪽에 서 있던 사내의 몸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머리에 정통으로 한 대 맞은 냉파천은 허공을 날아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 후, 냉파천이 이마를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고 있는 이마의 상처에서는 한 줄기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형환위幻位)? 서, 설마 그럴 리가…….”
이형환위라면 신법에 있어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전설적인 신법.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이기에 착시로 인해 잔상 을 남기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대, 대사형, 괜찮으십니까?”
“오냐, 나는 괜찮다. 조금 방심했을 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제야 상대가 엄청난 고수란 것을 알아차린 냉파천이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지는 사매를 뒤로하고 냉파천은 다시 검을 들었다. 사매에게는 조금 방심했다고 했지만, 이건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인물에게 방심해도 패배할 가능성이 있는데, 뛰어난 인물에게 방심했다니……. 죽으려고 환장을 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행위였다. 냉파천은 상대를 향해 검을 겨누며 정신을 집중했다. 어쩌면 상대는 사매의 말과는 달리 썩 괜찮은 놈인지도 모르겠다. 그 기회를 노려 자신을 죽이지 않고, 이렇 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줬으니 말이다.
아무리 이형환위라도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냉파천은 최대한 공력을 끌어올렸다. 눈으로 보고 움직이면 늦다. 기로 상대의 움직임을 느껴야만 한다.
순간, 냉파천이 선공을 가했다.
“호오, 이번에는 좀 낫군.”
냉파천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검식의 움직임에 따라 그의 검에서는 엄청난 강기의 회오리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검에는 어느새 푸른빛이 희미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이번 공격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검식으로써 그런 것들을 구현하려면 엄청난 내공의 소모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냉파천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엄청난 강기의 회오리를 간단히 헤치고 접근해 오는 인물. 어기충검으로 그 공격력이 배가된 냉파천의 검이 그를 베었으나, 간단하게 막히고 말았다.
“허억! 이럴 수가…….”
냉파천은 자신의 검을 맨손으로 잡아낸 상대를 보며, 더 이상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냉파천의 머리를 향해 시커먼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접근 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혼이 빠져 버린 그는 그것을 감지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빠각!
“크흑!”
방금 전 맞았던 곳을 또 맞아서 그런지 냉파천은 정신을 못 차린 채 머리를 부여잡고는 끙끙거릴 뿐이었다.
“검의 소리가 어쩌구저쩌구 한 것 같은데, 지금 결과를 보아하니 자네가 한 소리는 모두 개소리였던 모양이군.”
“제, 젠장.”
묵향은 쓰러져 있는 냉파천의 탐스러운 수염을 한 손으로 틀어쥐어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수염 위에 붙어 있는 머리통도 함께 위로 따라 올라왔다. 적당한 높 이까지 냉파천의 머리통이 올라왔다고 느낀 순간, 묵향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반대편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는 검집 채로 묵혼검이 들려 있었다.
냉파천은 수염이 이런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기르지 않았을 것이다. 냉파천이 황당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묵향의 사정 없는 매질이 시작되었다.
퍽퍽!퍽! 퍽퍽!
“끄아아아악!”
한동안 사정없이 두들겨 패던 묵향은 잠시 매질을 멈추고 음흉스런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오호! 소리 좋~고.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에게는 이게 최고지. 이제 좀 정신이 드느냐?”
냉파천은 독기가 가득한 눈길로 상대를 쏘아보며 외쳤다.
“바, 반드시 복수를 하고야 말 것이다!”
“복수? 좋아. 네놈의 그 눈빛을 보니 훗날이 기대가 되는군, 그래. 오냐, 내가 한 가지 일러 주지. 한낱 쇠붙이에 무슨 주둥이가 있어서 나불나불 떠들어 대겠냐?” 묵향은 상대를 도와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그걸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그게 아니었다. 완전히 자신을 놀리는 말로 들리는 것이다.
“젠장, 노부가 이런 꼴을 당하게 될 줄이야, 크흐흐흑!”
냉파천이 분노에 가득 차 눈물을 떨구건 말건 묵향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건 검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형(形)을 벗어나려는 네 마음의 움직임인 것이야. 형이라는 것이 뭐냐? 적을 살상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고정화하여 만든 것이 아니더냐? 반복하여 수련하는 데는 그것이 최선의 길이겠지만, 이 세상에는 완벽한 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지. 자네는 지금 형을 깨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거야. 두꺼운 알을 깨야 창공을 노니는 독수리가 될 수 있듯 형을 깸으로써 더욱 깊은 경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왠지 현기 어린 말이었지만 상대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냉파천에게 묵향의 조언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심득(心 得)을 이렇듯 쉽게 복수를 다짐하는 인물에게 가르쳐 줄 리 있겠는가. 어쩌면 냉파천의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따위 헛소리 듣고 싶은 맘은 없으니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런 빌어먹을 녀석! 정말 대가리에 똥밖에 안 들어 있는 놈이로군.”
모처럼 친절을 베풀었는데,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오자 묵향은 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퍽!
“크헉!”
분노에 찬 마지막 일격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냉파천은 1장여를 튕겨 날아간 다음 볼썽사납게 땅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냉파천을 날려 버린 후 묵향이 자신의 왼손 을 내려다보니 피 묻은 수염 뭉치가 한 움큼 잡혀 있는 것이 보였다. 결국 최후에 가해진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몽땅 뽑혀 버린 모양이었다.
묵향은 수염 뭉치를 발치에 던져 버린 후 손바닥을 탁탁 털며 중얼거렸다.
“젠장, 괜히 쓰레기를 붙잡고 시간 낭비만 했군.”
이제 볼일은 다 봤다는 듯 묵향은 밖으로 나가려다가 한쪽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설취 등을 보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나를 이곳으로 슬그머니 유인하다니, 생각은 좋았다만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것 같군. 그럼 잘 있으라구.”
묵향은 말이 끝나자 아주 느긋한 걸음걸이로 되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남의 장원에서 이런 행패를 부렸음에도, 자신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해질 리가 없음을 확신 하는 듯이 말이다. 설취는 아직까지도 쓰러져서 끙끙거리고 있는 냉파천을 향해 달려갔다.
“대사형! 괜찮으세요?”
쓰러져 있는 냉파천을 안아 일으키면서도 설취는 이것이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이 대사형이 누구던가. 저 무림맹의 핵을 이룬다는 9파1방의 장 로와 겨뤄도 손색이 없는 무예를 익힌 절정의 고수가 아니던가. 그런 그를 이토록 무참하게 박살 내 버리다니…….
설취는 멀어져 가는 묵향의 뒷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저자의 진정한 무공은 그렇다면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서, 설마 저자가 화경의 고수는 아니겠지?”
이때, 설취는 자신의 옷섶이 축축하게 젖어 옴을 느꼈다. 얼마나 분했던지 냉파천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설취는 대사형의 그런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시선은 무의식중에 묵향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실로 들어서는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뿌드드득 하는 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원독이 서린 목소리가 냉파천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두고 보자. 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복수를 하고야 말 테다.”
무림을 떠돌다 보면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날 수 있고, 또 패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언제 이토록 치욕적인 패배를 당해 본 적이 있었겠는가. 패자의 수염을 잡 고 끌어 올려 머리통을 마구 두들겨 패다니. 단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악독하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사 매와 사질이 보는 앞에서 그런 천인공노할 만행(蠻行)을 당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패자를 희롱하다니, 그놈이 사람이란 말인가? 내 그놈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개자식이나 진배가 없지 않겠는가.’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 대사형을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설취는 부드러운 어조로 설득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대사형, 일단 노기를 가라앉히시고 상처부터 치료하셔야 해요. 복수를 하시려고 해도 몸이 회복되셔야 할 것 아니에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설취의 가슴속에는 과연 대사형의 복수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방금 전에 사형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만 봐도 상대가 얼마나 뛰어난 고수인지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