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9권 16화 – 한 가지 부탁 (19권 끝)
한 가지 부탁
무당파는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과거에도 검의 명가로서 9파1방 중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자랑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림맹주까지 배출했으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첫서리를 맞은 나무들은 저마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빛깔로 단장하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당소진과 능비화는 온몸에서 전해 오는 통증도 잊고 무당산의 절경 에 취해 사방을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그리고 7룡 중 세 명은 이제 마교 교주라는 찐드기를 털어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희희낙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 멀리 산문을 지키는 무당 문도들이 보이자, 가장 앞서가고 있던 황룡문도들 중의 한 명이 외쳤다.
“황룡문에서 왔소이다. 길을 열어 주시기를 부탁드리오.”
황룡문이라는 말에 도사들 중 한 명이 다급히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또 한 명은 내부에 통보하기 위해 달려 들어갔다. 1백여 명이나 되는 대단한 인원이다. 거기에 다가 앞쪽에는 황룡문주 황룡무제까지 보였다. 그런 판국이니 산문에 서 있던 도사들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무당파 내로 깊숙이 안내되어 들어가자, 그곳에는 무당파 장문인이 두 명의 장로를 대동한 채 나와 있었다. 황룡문이 그렇게 큰 문파는 아니지만, 상대는 화경의 고수였다. 그가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봤을 때, 이 정도 대접은 해 줘야 하는 것이다.
“허허헛,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예, 장문인께서도 건강하신 듯하여 안심입니다. 이 근처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문에는 별고가 없으신지요.”
“무량수불, 다행히 원시천존께서 보우하셔서 그런지 이곳은 무탈하외다.”
“오다가 보니까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한데, 모두들 양양성 쪽으로 가신 것입니까?”
“허허헛, 무림맹이 발 벗고 나서는 일인데, 본문이 동참하지 않을 수 있겠소? 자, 안으로 드십시다.”
“예.”
이때, 뒤쪽에 서 있던 젊은이들이 앞으로 우루루 달려 나와 무당 장문인에게 말했다. 그들은 앞 다투어 자기소개를 한 후, 묵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무당 장문인께 꼭 알려 드릴 것이 있어서 이렇듯 실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바로 저자는 마교의 교주입니다. 정사불립이라는 말이 있는데, 장문인께서는 저자 가 무당파 영내를 더럽히는 것을 방관하실 겁니까?”
“마교 교주라고?”
장문인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묵향의 아래위를 살펴본 후 묵향에게 말했다.
“이 아이들의 말이 사실이오이까?”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끄덕여 사실임을 인정했다. 장문인은 싸늘하기는 했지만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상대가 마교의 교주인 만큼 어느 정도 대우를 해 줄 필요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단히 죄송하지만 교주께서는 본문에서 묵으실 수 없습니다. 물론 무림맹과 마교가 협정을 맺은 것은 노도도 역시 잘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기거하기까지 해 드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 않겠소이까?”
“장문인의 말이 옳은 듯하군.”
돌아서서 몇 발자국 가던 묵향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뒤돌아서며 장문인에게 말했다.
“전대 장문인의 처소가 어딘지 일러 주겠는가? 아직 살아 있다면 한 번 만나 보고 싶구먼.”
그 말에 장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숙께서는 아직 생존해 계시오. 그런데 그분을 왜 만나겠다는 것인지 노도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구려.”
그 말에 묵향이 싱긋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아, 여기까지 온 김에 한번 만나 보려고 말이야. 그때 만났을 때는 정말 정파에도 이런 인물이 있는가 싶었지. 그동안 세월이 참 많이 흘렀으니 서로 간에 나눌 얘 기도 많을 듯하고……. 거기에다가 혹시 누가 아는가? 노부를 하룻밤 재워줄지 말이야.”
아니, 하는 얘기를 들어 보니 이건 완전히 전대 장문인인 장춘진인(樟春眞人)이 마치 자기 친구라도 되는 듯하지 않은가. 누군가 옆에서 들은 사람이 있다면 오해 하기 딱 좋을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장문인의 눈썹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교 교주에게 대놓고 분노를 터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숙께서 귀하와 같은 인물을 아실 리 없으니 농은 그만 하시고 돌아가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이때, 저쪽에서 장춘진인이 시동 한 명을 거느린 채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장춘진인은 황룡무제하고 절친한 사이였기에,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이곳 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마교 교주가 전대 장문인을 찾았기에 주위의 모든 이목은 장춘진인의 행동에 집중되었다.
“오오, 어서 오시게나, 황룡문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문내의 일이 바빠 자주 찾아뵙지 못하여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허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빈도도 한 문파를 이끌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일세. 소소한 일이 많아, 짬을 낼 틈이 없음은 잘 알고 있다네. 오랜만에 자네를 보니 해 줄 말이 참 많을 듯하이. 자, 어서 내 방으로 가세나.”
하지만 주위의 공기가 좀 심상찮음을 느낀 장춘진인은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아직 얘기가 다 끝난 게 아니었던가?”
무당 장문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마교(摩敎) 교주가 사숙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오랜 친구라면서 말입니다. 사숙,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장춘진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마교 교주가? 이상한 일이로다. 노도는 그를 알지 못하는데….
이때 묵향이 쓱 앞으로 나서며 음흉스런 어조로 말했다.
“도장은 노부를 모르겠소? 은원을 갚겠다고 그 난리를 친 것이 엊그제 같소만. 노망에 걸리지 않은 이상 그 일을 잊을 수는 없었을 텐데?”
처음에는 잘 모르겠다는 듯 묵향을 바라보던 장춘진인. 하지만 은원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동의를 구하는 듯 황룡무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룡무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그의 기억이 맞다고 알려줬다.
“시주는 그때 그…….”
“맞소. 겨우 은자 40냥 가지고 그 난리를 부렸던 묵향이외다.”
은자 40냥이라는 말에 장문인의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사실 대 무당파에 단신으로 난입해 들어온 간 큰 자가 그때 그자 말고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 기억을 떠 올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장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교주를 다시금 노려봤다. 그때 저자가 마교도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가만히 안 놔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렸었다니…….
“허어, 참. 그 후에 시주에 대한 소식이 없어 궁금해하던 참이었소이다. 나중에 황룡문주에게 시주에 대해 물어봐도 당혹스런 표정으로 대답을 거부하기에 좀 이 상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주가 마교에 계셨을 줄은 생각도 못했소이다. 참으로 만나서 반갑구려.”
그 말에 묵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교주가 된 것이 뭔 자랑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겠소? 그건 그렇고 여기 장문인은 나를 재워줄 수 없다고 하는데, 도장은 어떻소이까? 하룻밤 재워 주실 수 있겠 소?”
그 말에 장춘진인은 소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깟 게 뭐 큰일이라고 손님을 내치겠소이까? 자, 따라오시오. 며칠이라도 기거하시게 해 드리리다.”
손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앞서가는 노도장의 모습은 온갖 세상의 명리를 초탈한 완숙된 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걸 난들 알겠소?”
묵향에게 모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하니 그자가 장춘진인과 면식이 있을 줄이야. 이런 식이라면 그를 이곳에서 떼어 놓자는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절실함이 옥대진만 하겠는가. 그들의 경우 마교 교주와 함께 가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을 뿐, 그 외의 감정은 없었다. 묵향이 그날 밤 그들을 구타한 것도 선배 고수로서의 예우를 안 해 줬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닌가. 마교도라서 그런지 자신의 감정을 좀 화끈하게 배출한 것이었을 뿐, 다른 선배 고수들이라도 그 런 경우를 당했다면 화를 냈을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옥대진과 능비화는 지어 놓은 죄가 있다 보니, 속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혹시 자신들이 밀고자라는 사실을 교주가 눈치 챈다면, 그날로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 아니겠는가. 현천검제만 한 고수를 간신히 포섭해 놨는데, 그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놨으니 만약 그 사실을 마교 교주가 알아내기만 한다면 그들은 죽은 목 숨이나 진배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놀라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어떻게 그자가 무당파의 전대 장문인까지 알고 있을까요?>
<낸들 알겠소? 어쩌면 전대 장문인도 그자에게 포섭되었던 인물들 중 하나였는지도 모르지.>
능비화는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수십 년 전에 만났다고 하고, 전대 장문인도 저렇게 거리낄 것 없이 자신의 처소로 안내하는 것을 보면……. 혹시 과거에 서로 무림 행을 하다가 잠시 면식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 말에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옥대진이 마지못해 대꾸했다.
<그… 그럴지도 모르지.>
<황룡무제 대협도 그렇고, 전대 장문 어르신도 그렇고……. 그렇다면 어쩌면 저희 장문인께서도 저자와 개인적 친분이 조금 있었을 뿐, 내통한 것이 아닐 수도 있 었잖아요.>
그 말에 옥대진은 화들짝 놀랬다. 사실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걸 인정하면 자신은 천고의 죄인이 될 것이 아닌가. 죄도 없는 현천검제를 모함한 죄인 말 이다. 그렇기에 그는 슬그머니 그 죄를 지금은 사라진 화산파에다가 전가시켰다.
<그, 그럴 리가 있겠소? 무림맹은 그분을 축출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소. 화산파에다가 그 사실을 통고한 후에, 그 사후 보고만 들었을 뿐이오. 그분을 축출한 것은 순전히 화산파 장로들이 내린 결정이었소. 그분들이 죄도 없는 장문인을 축출할 정도로 어리석을 리가 있겠소?>
<그렇기는 하지만…….>
옥대진은 앞쪽에서 가고 있는 묵향의 눈치를 살피며 전음을 날렸다.
<자자,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두고, 이곳을 조용히 벗어날 궁리나 좀 해 봅시다.>
무당 장문인은 갑자기 장춘진인이 자신을 부르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달려왔다. 장춘진인의 처소에는 묵향과 황룡무제가 술상을 앞에 놓고 한창 담소를 나누고 있 는 중이었다.
“어서 오시게나, 장문인.”
“예, 무슨 일이십니까? 사숙.”
“한 가지 일러둘 일이 있었기에 장문인을 부른 것이네. 장문인도 기억하고 있을 걸세. 과거 교주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를 말일세.”
장춘진인의 말에 장문인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는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예.”
“그때 노도는 한 가지 약속을 했었네. 무당파의 장문인으로서 말이야. 그 약속의 내용은 교주가 청하는 부탁 한 가지를 꼭 들어주겠다는 것이었지. 물론 무당이 할 수 있는 일에 한해서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말일세.”
장문인은 이미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숙,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때 상대가 마교도라는 것을 몰랐을 때 한 약속이었지 않습니까? 마교도를 상대로 무슨 약속을 지킨다고 그러십 니까? 그 약속은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말입니다.”
장춘진인은 잠시 안타까운 눈빛으로 장문인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허, 답답한 일이로고. 장문인, 내 얘기를 한번 들어 보겠는가?”
“예, 말씀하십시오.”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장문인도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정(正)의 길을 걷는 자는 마음이 한결 같아야만 하네. 상대에 따라 가 변적으로 변하는 것은 장문인이 말하는 사(邪)를 좇는 무리들이 하는 일이지. 더군다나 도(道)를 이루려는 장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상대가 누구건 약속이라는 것은 천금과 같이 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장문인의 생각은 어떤가?”
장문인은 잠시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숙.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리고는 묵향을 바라보며 딱딱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 본문에 청하고 싶은 게 무엇이오?”
묵향은 피식 웃은 뒤 말했다.
“그런 것 없소. 또, 앞으로도 청할 일은 없을 거외다.”
왠지 묵향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은 장문인이었다. 안 그래도 전대 장문인의 부탁 때문에 억지로 한 가지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까지 자신이 양보를 했거늘, 그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본 후 그게 필요 없다니. 꼭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장문인은 발끈해서 외쳤다.
“그건 무슨 말씀이오? 뭐든지 한 가지는 들어준다고 빈도가 말했잖소.”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때, 내가 도장에게 한 가지 청을 들어 달라고 한 것은, 그 순간에 무당 장문인을 죽이지 않고 물러날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소. 그렇게 해야 함께 동행하고 있 던 내 수하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테고, 또 그 당시 본교의 교주였던 흑마대제(黑魔大帝)를 납득시킬 수 있었을 테니 말이오. 하지만 지금은 본좌가 교주요. 본좌는 그런 청 따위 안 해도 충분히 무당을 제어할 수 있소. 수틀리면 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이제 대답이 되었소?”
너무나도 광오한 묵향의 대답에 장문인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지, 지금 그 말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오?”
얼굴이 시뻘개져서 따지는 장문인에게 묵향은 가소롭다는 듯 대꾸했다.
“왜? 본좌가 못할 것 같나? 본교에는 본좌 외에도 극마급 고수가 둘은 더 있다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수들이 있지. 그럼 묻겠네. 무당에는 그 정도 세력이 있는가?”
당연히 있을 턱이 없다. 무당을 대표하는 유일한 화경급 고수는 지금 무림맹주가 되셔서 무림맹에 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무당파의 세력이 강하다고는 해 도 단일 문파로 마교에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장문인이었기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묵향은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화산파를 본좌가 어떻게 끝장냈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본좌에게 있어서 무당 하나 박살 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쉽다는 점을 명심해 주었으면 좋겠소 이다. 알겠소?”
장문인은 얼굴색이 울그락불그락 변하는가 싶더니 치미는 화를 도저히 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어딘가 가서 화풀이라도 할 심산인 모양이다.
장문인이 나가고 난 후, 묵향은 언제 자신이 그랬냐는 듯 능청스럽게 장춘진인에게 말을 건넸다.
“그건 그렇고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흐른 것 같소이다. 도장의 머리카락이 이렇듯 새하얗게 변한 것을 보면 말이오.”
“허허,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를 따라 변하는 것. 빈도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한 것이야 세월의 흐름에 순응한 것이 아니겠소.”
말을 하다 잠시 멈춘 장춘진인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묵향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빈도야 그렇다 치고 시주에게는 세월의 흐름조차 비켜 가는 듯하구려. 참으로 무림의 홍복(洪福)이 아닐 수 없소이다, 무량수불.”
묵향은 무슨 소리냐는 듯 피식 웃으며 반박했다. 상대가 무림의 홍복이라고 치켜세우는 저의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본좌가 생존하고 있음이 복이라는 말은 도장에게 처음 듣소이다. 도장의 말씀을 무림맹의 떨거지들이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료.”
“허허, 그 무슨 겸양의 말씀을……. 무림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나선 시주에게 그 누가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말이오. 빈도가 비록 힘없는 늙은 도인에 불과하나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오.”
묵향은 그제서야 전대 장문인의 저의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음흉스레 말했다.
“호오, 금군의 세력이 워낙 강성하다 보니 지금 본좌에게 아부를 하는 게요?”
그 말이 당치도 않다는 듯 장춘진인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천지만물의 모든 것이 흥하기도 하고 또 언젠가는 쇠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소. 비록 지금은 금의 세력이 융성하다 하나 그것이 세세토록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오. 거기에 시주가 한팔 보태는 것뿐인데, 빈도가 왜 아부까지 한다는 말씀이시오?”
“참나, 자신의 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까지 들고 나오다니…….”
장춘진인은 묵향의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어, 어찌 심오한 도가의 사상까지 알고 계시다는 말씀이시오? 빈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오.”
장춘진인이 놀랄 만도 했다. 대립전화의 법칙은 노자의 사상 중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사상으로 어지간히 도가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알기 힘든 용어였던 것이 다. 그런데 극악무도의 대명사인 마교의 두목 묵향이 그 용어를 들먹이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은 묵향도 노자의 사상을 최소한 겉핥기에 불과할지라 도 공부했었다는 말이 되니까.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묵향의 한마디에 장춘진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본좌보고 금군과 박 터지게 싸우라는 소리를 뭐 그렇게 어렵게 빙빙 돌려서 말하는지. 참내, 어이가 없어서.”
애써 웃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장춘진인은 묵향이 정말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마교 교주를 무당파에서 떼 놓겠다는 젊은이들의 야무진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무당파를 나서는 인원의 수는 들어갈 때와 비교해서 하나도 더해지지도, 빠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젊은이들은 교주와 헤어질 수 있다는 야무진 꿈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까지 그들이 지나 온 거리를 따져 본다면, 무당산을 지나 고 나서 양양성까지는 지척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래, 양양성에만 도착하면 우리는 해방이야. 거기에는 정파의 많은 원로 고수 분들이 계실 테고, 엄청난 수의 고수들도 있을 거야. 교주가 거기에서까지 절대로 깝죽거리지는 못할걸??
모두 다 그런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며 양양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때 황룡무제가 저 지평선을 가리키며 묵향에게 말했다.
“저기가 바로 양양성입니다. 아직까지 송군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보면 무사한 모양이군요.”
“그런 것 같군.”
다른 사람들은 이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룡무제가 가리키는 곳을 봐도 보이는 것은 없었고, 아주 눈이 좋은 사람들이라야 겨우 양양성이 있다는 것 정 도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위에 나부끼는 깃발이라니.
‘저 둘은 저기서 뭔가를 봤다는 말인가?’
7룡4봉의 젊은이들은 저 두 사람이 얼마나 엄청난 고수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진팔은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작은 깨우침을 얻은 이후 진팔은 더욱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모든 초식이 물 흐르듯 연결될 것만 같은데, 막 상 실행을 해 보면 그게 안 되는 것이다. 애써 노력은 해 봤지만 초식이 뒤엉키거나 내력의 흐름이 불안하여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도 진팔은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하면 뭔가를 양손에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잡힐 듯 잡힐 듯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 것이다. 미친 듯이 수련하고 있는 진팔에게 소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무공이란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 것, 그런 식으로 무리하게 초식을 연결하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몸을 상할 수도 있음이야.”
진팔은 소연의 말에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몸을 세웠다.
“뭔가 될 것도 같은데, 그게 잘 안 되니 정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사저.”
소연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미 그녀도 그 길을 가 봤기에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것이다. 만약 초식같이 고정화되어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이라 면 조언이라도 해 주련만, 이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초식의 틀을 깬 후의 몸놀림은 같은 천지문의 고수라도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각자 초식을 깨는 와중에 깨달은 것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조급해할 것 없다. 나도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한단다. 마음은 앞서 가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니 정말 안타깝겠지. 하지만 무턱대고 도를 휘두른다면 몸만 상할 뿐 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 보거라. 초식의 틀을 완전히 깨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니 말이다.”
소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구슬픈 금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만통음제가 타는 금음이었다. 지음(音)을 찾아 애절하게 흐르는 그의 선율은 너무나 도 애달파서 듣는 이의 마음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다며 악비 대장군이 제발 밤에는 금을 타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지만, 전혀 지 켜지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도 슬픈 곡이로구나.”
왠지 감상에 젖은 듯한 소연의 중얼거림에 진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음(音)이라고는 잘 모르지만, 저 곡을 들으면 만통음제 어르신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누군가를 정말 그리워하시는 것처럼 아주 애절한 음률이라, 듣 기에 참으로 안타깝군요.”
어느새 소연의 눈가에는 살짝 이슬이 맺혀 있었다. 애절한 금음을 듣고 있자니 가슴 속에 고이 묻어 두었던 과거의 상처가 조금씩 파헤쳐지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래,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야.”
과거 소연은 장진(張) 사형을 사모했었다. 하지만 그는 문주의 둘째딸과 결혼해 버렸다. 워낙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벌써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저 곡을 듣고 있으니 자꾸 그가 생각나는 것이다.
소연이 과거의 사랑을 생각하고 있을 때, 진팔은 그런 소연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팔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첫사랑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사저였 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하지만 진팔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건 그렇게도 사랑하는 사저가 가슴 아파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사저를 바라보던 진팔은 거칠게 머리를 흔든 뒤 입을 열었다. 뭔가 말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어르신께서 그토록 그리워하시는 분을 꼭 만났으면 좋겠군요.”
한동안 양양성을 휘감고 돌던 애절한 금음이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다. 잠시 사저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의 늪에 빠져 있던 진팔은 이를 악물고 연무장으로 걸어 나 갔다. 미친 듯이 수련이라도 해야 사저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팔 다리를 푼 뒤 다시 수련을 시작하려던 진팔은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것을 느꼈다.
‘흐억!’
이게 뭐란 말인가? 너무 쉬어서 몸이 차가워졌나? 그렇게 날씨가 차가워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소름과 함께 갑자기 떠오르는 이 기묘한 불안감은 또 뭐란 말인가. 한참 동안 수련에 마음을 집중하지 못한 진팔은 자신도 모르게 성문 쪽을 바라봤다. 마치 불안함의 근원이 그쪽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묵향20 – 묵향의 귀환>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