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9권 4화 – 양양성으로 가는 길
양양성으로 가는 길
관도에는 대규모의 군세가 이동 중이었다. 9천 기에 달하는 인마가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훈련을 잘 받은 병력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거기에다 가 예비마 9천 필에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1백여 대가 뒤따르다 보니 그 규모는 엄청나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바로 이들이 관지가 이끄는 마교의 숨겨진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흑풍대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흑풍대가 드디어 위풍당당하게 강호에 그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해가 질 무렵,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는 흑풍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흑풍대와 싸우기 위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 대로 흑풍대를 돕기 위해 모여 있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커다란 솥단지에서는 먹음직스런 음식 내음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리 고 곳곳에는 커다란 건초 다발이 수북이 쌓여져 있었다. 물론 말먹이다. 옥화무제의 명령을 받은 무영문은 흑풍대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며 이동할 수 있도록 이렇 듯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먼 길을 달려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자들은 저마다 흑풍대 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말을 받아 끌고 갔다. 병사들이 식사하는 동안 말이 흘린 땀을 건초로 닦아 주고, 여물과 물을 충 분히 먹이기 위해서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도 흑풍대 대원들은 여기에 무영문도들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음식과 말먹이를 제공 하는 것에 당혹감을 표현했었지만, 매일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오히려 지금은 그것이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음식에 독이 있는지 살피고, 말의 건강 상태를 매일 점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보초병들을 세워 무영문도들의 동태를 철저히 감시했다. 어찌 되었건, 무영문으로부터 편의를 제공받게 된 후로 흑풍대의 이동 속도는 조금 더 빨라졌다. 사람과 말이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보다 좋은 음식물을 먹고 마 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급 대원들이야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흑풍대의 천인대장 이상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무영문이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 었다. 그들은 흑풍대가 하루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정확히 예측한 다음, 그곳에다가 음식과 여물 등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쉽지만 현재 이동 중인 흑풍대의 인원은 보급대의 일꾼들을 포함하여 1만에 가까웠다. 거기에다가 흑풍대가 보유한 말은 짐말까지 포함해서 2만 필에 가 까웠다. 그 많은 인마들이 충분히 먹고 마실 정도의 음식을 쉽사리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처음 며칠 동안은 준비가 좀 미흡했었다. 갑자기 그 많은 음식 및 건초를 확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식을 배급하는 데도 시간 이 꽤 걸렸었다. 그렇기에 모자라는 부분은 흑풍대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그게 하루하루 지날수록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모든 흑풍대원들이 식사를 끝내고 취침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리고 말들 또한 배불리 먹고 마신 후, 건강 점검까지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영문에서 고용한 대장장이가 말들을 둘러보며 편자의 상태까지 다 점검해 주고 있었 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강행군을 해오면서도 잃은 말은 단 한 필도 없었다.
“과연 정파의 힘은 무섭구나. 본교의 세력이 그토록 강성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과 전면전을 펼치지 않는가 궁금했었는데, 요즘에서야 그 이유를 알겠다.” 관지의 말에 마화도 찬성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 본교에서도 이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덕분에 식량과 건초의 소모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의 사기도 대단히 높구요.”
“시작부터 아주 좋군.”
“예.”
“천인대장들에게 지시해서 수하들과 말의 피로도를 세심히 살피라 일러라. 그곳에 최대한 빨리 도착할 필요성은 있지만, 피곤에 지친 상태로 도착하는 것은 아무 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옛, 명심하겠습니다.”
이때, 무영문도 중 한 명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관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보낸 후 입을 열었다.
“매일 강행군을 하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점은 있으셨습니까?”
관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듯 신경을 써 주어 무영문주께 고마울 따름이네. 그건 그렇고 전선에서 들려온 새로운 정보는 없는가?”
“예, 패력검제 대협께서 돕는 데다가, 양양성을 맡고 있는 악비 대장군도 대단히 뛰어난 인물입니다. 거기에다가 무당파의 도사들도 무림맹이 참전하겠다는 결정 을 내린 이후에 합류하여 사력을 다해 저항하고 있으니 쉽사리 함락되지는 않을 겁니다.”
관지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기를 쓰고 달려갔는데 만일 그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성이 함락된다면 일이 훨씬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도착하기 전에 함락당한다면 아주 골치 아파지지. 그건 그렇고 무림맹의 세력은 패력검제가 거느리고 있는 인원이 다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한 방면에 대규모의 세력이 집결 중입니다. 아마도 서문세가의 수라도제 대협께서 지휘하게 되실 겁니다. 무림맹주께서 직접 나서시지 않는 한 그분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수라도제가 이끈다면, 그들은 꽤 도움이 되겠군. 무한을 방위하고 있는 송군의 세력은?”
“2만 남짓입니다. 아무래도 송군은 별로 보탬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이 본문의 추측입니다.”
잠시 양양성의 정세를 머리에 그려보던 관지는 무영문도가 더 물어볼 것이 없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닫고는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런가. 알겠네. 알려줘서 고맙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중히 인사를 건넨 후, 무영문도는 자신의 일을 보기 위해 가 버렸다. 아직도 그에게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끝낸 흑풍대는 또다시 길을 재촉하며 달려가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무영문도들은 어질러진 장내를 수습한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물론 그들 중에서 진짜 무영문도들은 거의 없었다. 먼 곳에서 품삯을 주고 고용한 일꾼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꾼들이 장내를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영문도들 중 한 명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말했다.
“휴우, 겨우 끝났군.”
이곳에 모인 수천 명의 인원들 중에서 진짜 무영문도는 겨우 네 명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돈의 힘으로 끌어들인 일꾼들인 것이다.
“그러게 말일세. 1만 명분의 음식과 말 2만 필이 먹을 사료. 그걸 시간 내에 구한다고 뛰어다닌 걸 생각하면 정말 식은땀이 나는구먼.”
“그래도 잘 끝나서 다행일세.”
사내 중 한 명이 흑풍대가 달려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얘기는 들었지만 흑풍대의 규모가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게 말일세. 저 정도 중무장이라면 군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동료 중 한 명이 맞장구를 치자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만약 저들이 마교 집단이라는 것을 몰랐었다면 아마 군대가 이동하는 줄 착각했을 거야. 이 변방에 저토록 잘 갖춰진 송군이 이동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 이 아니겠는가? 그 덕분에 저들이 이동하는 것을 수상히 여긴 제324첩보조가 연락을 보내 겨우 저들이 흑풍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
“그러게 말일세. 태상문주께서 왜 그렇게 마교에 관련된 정보라면 특급으로 취급을 하시는지 이제 알 것만 같군. 어지간한 문파는 저들만으로도 아작이 날 테니까 말일세.”
마교의 막강한 저력의 한 자락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사내는 불현듯 아직도 자신들의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에게 사내가 소리쳤다.
“자, 자네는 흑풍대가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을 총타에 빨리 알리게. 그리고 자네는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급하고 말이야. 자, 모두들 빨리 움직이세. 다음 일이 기다 리고 있지 않은가.”
언제나 바쁜 무영문도들이었다.
양양성을 지원하기 위해 마교와 정파의 정예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양성은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아직까지 무림의 주력이 당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양성을 포위한 금군은 초반에 워낙 큰 피해를 당해서 그런지 그다음부터는 그렇게 대규모의 공격을 가해 오지는 않고 있었다. 오히려 야음을 이용하여 성에서 무림고수들이 튀어나와 몇 번 휘젓자 금군은 강력한 방어망을 갖추는 데 더욱 신경을 썼다.
그런 다음 포위망이 완벽하게 갖춰지자 어쩌다 한 번씩 공격을 가해 양양성의 전반적인 방어 상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는 한편 매일같이 무력시위를 하 여 자신들의 막강한 세력을 보여 주며 적의 사기를 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요의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한 완옌 렌지에 대원수가 이끄 는 주력 부대가 남하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지자 그 시간을 이용해서 진팔은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자신에게 배정된 숙소에 앉아 끊임없이 명상을 하는 것이다. 그가 주로 떠올리는 것 은 패력검제가 보여 줬었던 놀라운 무공들이었다. 물론 상대의 무공을 훔쳐 배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초식 한 초식을 떠올리며 자신이 알고 있는 초식을 대입 해 보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는 자신과 패력검제간의 가상 대결을 끊임없이 해 오고 있었다.
물론, 이때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큰 힘을 보태 주고 있었다. 안될 듯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 흘러가다 보면 그 초식을 막아 낼 묘 안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럴 때의 진팔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떠올랐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패력검제의 다음 초식이 그를 숨 막히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럼 다시 진팔은 그 초식을 상대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흐음, 이렇게 반격해 들어올 때 과연 막을 방법이 있나?”
진팔의 머릿속을 떠도는 각종 초식들은 대부분 급조해서 만든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사문의 도법으로는 패력검제의 단 1초식도 감당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 다. 그렇기에 그는 별의별 꼼수를 다 동원하여 상대의 공격을 막는 데 급급해 있는 중이었다.
‘그 순간 도를 던진 다음, 튕겨 나온 도를 붙잡고 재차 휘두르며 영감탱이의 다리를 노린다면……. 으음, 그렇게 했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가겠군.’
열심히 머리를 굴려 가며 초식을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진팔은 거칠게 방바닥을 주먹으로 후려갈기며 투덜거렸
다.
“에잇, 젠장. 어떻게 방법이 없나?”
패력검제와 다투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하다고 할 정도로 사문의 도법이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떠오르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한두 수는 막을 수 있었고, 또 역공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 한두 수를 사용하게 되면, 전체적인 초식의 운용이 엉망진창으로 뒤엉키게 된다.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젠장, 누구야? 금군이라도 쳐들어왔나?”
이런 생각을 잠시 하고 있는데, 밖에서 흥분한 조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여기 있죠? 빨리 문 좀 열어 봐요.”
진팔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칠게 문을 열며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
문밖에는 조령과 쟈타르가 함께 서 있었다. 진팔은 조령과 쟈타르를 번갈아 쳐다봤다. 쟈타르의 한심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봤을 때, 급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그 렇다면 저토록 흥분한 조령은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 궁금증은 조령의 한마디에 곧바로 풀렸다.
“이겼다구요. 내가 내기에 이겼어요.”
순간 진팔의 이마에 퍼런 핏줄 하나가 튀어나왔다. 무슨 전쟁이라도 난 듯 호들갑을 떨기에 나와 봤더니 겨우 내기 바둑에 이긴 것 때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가 좋아라 웃는 모습을 보니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기에 진팔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아, 패력검제 영감과 시작한 그 내기 바둑을 말하는 모양이군. 축하하네.”
김빠진 목소리로 진팔이 말하자, 조령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따지고 들었다.
“이봐요. 그 얼굴, 별로 축하하는 표정이 아닌데요.”
사실, 매일매일 바둑을 둬서 수백 번을 깨졌으면,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지금쯤 바둑판의 한쪽 귀퉁이에 자기 집을 마련할 때도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 대로 얘기했다가 무슨 귀찮은 꼴을 당할지 잘 아는 진팔이 아닌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무슨 그런 말을…, 나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거야. 자, 볼일 다 끝났으면 들어가 봐도 되겠어?”
“그러지 말고 자, 가자구요. 이긴 기념으로 한턱 크게 쓸게요. 진 소협도 술 좋아하잖아요? 한잔하자구요.”
“글쎄…,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술을 파는 곳이 있을까?”
철없는 조령이야 아무 생각 없었지만, 진팔의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 양양성은 적에게 포위당한 상태다. 그리고 그 포위가 언제 풀릴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이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식량을 통제하게 된다. 먹을 식량도 없는 상황에서 술을 빚을 쌀이 있을까?
조령은 마치 꼬마 애에게 말하듯 한껏 으스대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쯧쯧, 겉보기와 달리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하시군요.”
‘뭐시라?!’
진팔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건 말건 조령은 신경도 안 쓰고 넉살 좋게 말했다.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돈만 있으면 웬만한 건 다 구할 수 있다구요.”
진팔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잔 안에는 투명하면서도 독하기 그지없는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바로 술. 조령의 말대로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양양성에 금주령이 내려지고, 식량이 통제되기 전에 만들어진 술이었다. 새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야 통제를 가하겠지만, 이미 만들어진 술을 식량으로 바꿔 놓으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물론 이런 술은 암암리에 거래되었고, 그 가격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었다. 흔하디흔했던 백주도 지금 에 이르러서는 아주 귀하신 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진팔은 술잔을 목구멍 안에 털어 넣었다. 찌르르한 느낌이 오장육부를 진동한다.
“크으으~.”
“어때요? 비싼 돈값은 하죠? 자, 한 잔 더 하라구요.”
안 그래도 무공을 수련하며 마음대로 잘 안 풀려 답답하던 참에 술을 마시니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술을 따라주겠다며 옆에 달라붙어 애교를 떠 는 조령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허구한 날 귀찮게만 하더니 가끔은 이쁜 짓도 하는군.’
진팔은 자신을 바라보며 환히 웃는 조령의 모습이 왠지 예쁘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좋게 보면 겉모습도 달라 보이는 모양이다. 하기야 지금까지 진팔은 그녀를 반 쯤은 애물단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진팔이 화통하게 술을 들이켜고 있는데, 조령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봐요, 술 파는 곳이 있는지 찾아보기를 잘했죠? 해 보지도 않고, ‘이러이러할 것이다’하는 지레짐작에 포기하는 것은 못난 사내나 하는 짓이라구요.”
진팔은 힐끗 조령을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못났다고 말하는데 어느 누구가 기분이 좋겠는가. 하지만 술까지 마시게 해 주었는데 화를 낼 수도 없 는 노릇이라 그냥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령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팔이 자신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진 소협은 그게 문제라구요. 너무 고지식한 거 말이에요. 사람이 좀 유연하게 사고를 할 줄도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조령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진팔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엄청난 충격에 가슴이 뻥 뚫린 듯했다. 진팔은 조령의 말을 듣는 순 간 깨달았던 것이다. 어린애한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더니, 역시 그녀의 말대로 자신의 마음가짐이 더욱 큰 문제인지도 몰랐다. 패력검제가 무림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고수라는 점은 그도 인정하는 바이다.
머릿속으로 대련하면서 패력검제는 기기묘묘한 수를 동원하여 자신의 공격을 막고, 또 공격해 온다.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을 흘리면서…….
그러면 자신은 그것을 막는 것만도 벅차다. 공격은 엄두도 내기 힘들다. 모든 초식이 뒤엉키고, 손발이 따로 놀다가 자멸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속 대련의 기준은 누가 잡은 것인가? 왜 그런 기기묘묘한 초식을 패력검제만 쓸 수 있고, 자신은 사문의 초식만 써야 한다고 누가 정해 놓은 것인 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껏 자신이 뭐 하고 있었나 싶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지는 진팔이었다.
조령은 진팔이 술을 마시다 갑자기 멍하니 생각에 빠진 듯하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 해요? 술 마시다 말고.”
하지만 진팔은 지금 한가하게 술 마시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일순간에 도를 깨닫는다고 하더니, 진팔은 지금 그것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 그의 손발은 어디로든지 뻗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괴이한 초식이라도 사용 가능할 것만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순간 환골탈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지만, 이것이 화경의 깨달음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것 을 통해 자신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화경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설 것이다.
진팔은 꿈꾸는 듯 몽롱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아, 나는 아직까지도 내면의 목소리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구나. 너무나도 미숙했어.”
백주를 홀짝거리고 있던 조령이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내면의 목소리라니, 그건 무슨 소리예요? 진 소협.”
“아아, 조 소저는 알 필요 없어. 그걸 알 정도 수준이 되려면 20년은 검을 더 휘둘러야 할 테니까 말이야.”
조령의 아미가 꿈틀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곧이어 미소 띤 표정으로 애교스럽게 말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가르쳐 줘요~.”
하지만 진팔의 대답은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 자기가 아무리 싫어도 필요한 단계를 밟아 나갈 수밖에 없어. 지금 조 소저는 가르침을 받는 초식을 정확히 이해하고 따라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단계야.”
마음이 상했는지 조령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칫, 사내가 쪼잔하기는……. 그냥 가르쳐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내가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자신이 익혀야 할 단계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한 상태에서 높은 단계를 알아 봐야 허사라구. 오히려 수련에 방해가 되고 몸만 망칠 뿐이야. 알겠어?”
하지만 조령의 입이 오리 주둥이마냥 삐죽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면 진팔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조령을 진팔은 귀여운 여동생을 대하듯 바라봤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를 때가 오히려 더 좋은 거야. 경지가 높아질수록 골치만 아프지. 조금 지나고 나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