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9권 6화 – 이어지는 인연

이어지는 인연

며칠 후, 국경을 넘은 묵향 일행은 길 안내를 하기 위해 비마대에서 파견된 막이첨(莫理甛)의 안내로 몽고 벌판 깊숙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몽고 여인과 중원 인의 혼혈아였는데, 그 때문인지 몽고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그쪽의 풍습에 대한 지식도 매우 해박했다.

몽고하면 떠오르는 것이 광대한 평원이겠지만, 그들이 이동하는 이곳은 몽고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싱그러운 초목이 여기저기에 우거져 있었다. 몽고 남쪽은 몽 고 전역에 비해 비교적 숲이 많이 우거져 있었고, 물도 흔한 편이었다.

막이첨은 이팔삼 대장하고 낮은 목소리로 뭔가 속닥거리더니 묵향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이 일대는 전부 케레이트 부족의 지배자 옹칸의 영역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송과 교역을 해 온 인물이기에 아무래도 그에게 몇 가지 선물을 주고 통행권을 얻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뇌물을 요구한 관리들을 어떻게 만들어 놨는지에 대해 이팔삼 대장에게 들은 막이첨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묵향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몽고에서도 강행 돌파를 시도하자고 한다면? 이번 일은 대단히 어려워지면서도 귀찮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본교의 힘이라면 그렇게 안 하고 강행 돌파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한다면 말을 구입하기가 힘들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묵향은 알아서 하라는 듯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몽고에 왔으면 몽고의 예법을 따르는 것이 순리겠지.”

뇌물을 주는 것은 순리가 아니었기에 쓰레기들에게 돈을 바칠 이유가 없었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는 묵향의 대답이었다. 묵향의 말에 막이첨은 고개를 숙이며 대 답했다.

“옛, 이팔삼 대장에게 전하겠습니다.”

뒤로 돌아서며 막이첨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자신들의 힘으로 돌파해 들어갈 수야 있겠지만, 문제는 말을 살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말을 훔치거나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케레이트 부족의 본거지에 도착한 후, 묵향은 이팔삼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네가 옹칸을 구워삶도록 하게. 선물은 준비해 왔겠지?”

“옛, 걱정 마십시오.”

명령을 받은 이팔삼은 수하 몇을 거느리고 옹칸이 기거하는 궁전으로 갔다. 대부분의 몽고 족장들은 궁전 따위를 건설하지 않았다. 궁전을 만들 물자도 없었지만,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족의 특성상 궁전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옹칸은 달랐다. 그의 수입원 중에서 가장 굵직한 것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역이었다. 시장은 언제나 한곳에 고정해서 열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상인 들이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보호해 줘야 했다. 그렇기에 작은 궁전을 만든 것이다.

이팔삼은 통역관으로 막이첨을 거느리고, 수하 몇 명에게 성대한 선물을 들게 하여 옹칸을 배알하러 궁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묵향은 이팔삼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수하들과 함께 마(馬) 시장으로 나갔다.

그렇게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묵향이 몽고어를 구사하며 상인과 거래를 시작하자, 그를 수행하고 있던 수하들은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천마신교에서 교주는 신적인 존재가 아닌가. 그런 분께서 몽고어를 구사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속사정은 다른 데 있었다. 과거 묵향이 기억을 잃었을 때, 옥영진 대장군 밑에서 일하면서 몽고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 거기에다가 하부르라는 몽고 처녀와 함께 생활하며 꽤 많은 몽고어와 함께 몽고의 풍습도 배워 둔 것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들은 묵향이 기억을 상실하며 잠시 잊혀졌었지만, 아르티엔이 기억을 몽땅 되살리며 모든 것을 되찾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막이첨이라는 통역관이 있었기에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았지만, 그가 없는 지금 묵향은 직접 상인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몽고마는 작고 다부지게 생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생긴 대로 아주 끈질긴 생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살아가기에 최악의 조건에 가까운 몽고의 대지에 적응해서 살아오다 보니 그런 식으로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몽고마는 그 작은 덩치 때문에 송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싸구려 짐말 정도로 쓰기 위해 수입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당당하게 전투마로 활용되고 있었다.

묵향이 사들인 몽고마의 수는 무려 3천 필. 그날 마 시장에 나와 있는 거의 대부분의 몽고마를 사들인 수였다. 묵향은 수하들에게 명령하여 각자 한 필씩의 말을 지 니고, 남은 말들에게는 중원에서 가져온 화물들을 실었다. 수레 1백 대분의 엄청난 분량이었지만, 2천5백 필에 달하는 말에다가 나눠 싣다 보니 각 말 등에 실린 분 량은 그렇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마차들은 모두 표국 등지에서 빌린 것들이기에 몽고 접경에서 주인에게 돌려보내야 했다. 묵향이 수하들에게 지시하여 마부들에게 품삯을 나눠 주고 있을 때, 이 팔삼이 돌아왔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

“예,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해 줬습니다.”

“수고했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일찍 출발하기로 하지.”

“옛.”

막이첨의 인도로 묵향 일행은 몽고를 횡단하기 시작했다. 테무진이라는 족장이 있는 곳은 몽고의 동북부였다. 그런 만큼 오랜 시간 몽고 벌판을 가로지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 누구도 묵향이 지휘하는 자성만마대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가져가는 화물을 노린 몽고족들의 공격을 몇 번 받기는 했지만, 몽고족들은 막심한 피해만 입은 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력(武力)에서 쌍방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몽고족들의 공격을 가볍게 물리치는 것으로 그쳤지만, 그게 자꾸 반복되자 짜증난 묵향이 공격해 들어온 몽고족을 철저하게 응징해서 본보기를 보였다. 그때 죽인 수백 명이나 되는 몽고족의 시체를 갈기갈기 토막 내어 여기저기에 흩뿌려 놨던 것이다. 뒤에서 따라오는 또 다른 몽고족이 있으면 보라는 듯.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들을 건드리려는 간 큰 몽고 부족은 없었다. 설혹 그 와중에도 습격해 볼까 하는 마음을 가졌던 몽고 부족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중원 상 단과의 격전에서 가까스로 살아서 도망쳐 나온 생존자들이 그때의 참담한 전투 상황을 사방에 알렸다.

생존자들의 증언까지 듣고 나서도 중원 상단을 건드릴 뜻을 굽히지 않는 몽고 부족은 없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공포스러운 집단을 상대 로 감히 도박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전방에서 약 1천 기의 몽고병들이 접근 중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묵향은 피식 웃으며 이팔삼에게 명령했다.

“호오, 오랜만에 손님이 오시는군. 이팔삼 대장! 손님 맞을 채비를 해라.”

그 말에 이팔삼은 긴장된 표정으로 명령했다.

“모두들 전투 준비를 갖춰라. 8개 조는 앞으로, 2개 조는 말을 보호한다.”

묵향은 초류빈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씩 미소 짓고는 말했다.

“심심할 텐데 자네도 따라가서 몸 좀 푸는 게 어때? 요즘 할 일도 없었잖아.”

초류빈은 심드렁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공손한 어조로 대꾸했다. 사실 그처럼 뛰어난 고수가 덜떨어진 몽고 병사들하고 싸워 봤자 식후 운동거리도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부대로 시행합죠.”

초류빈은 4백의 자성만마대 대원들을 이끌고 앞서서 달려 나갔다. 하지만 짐작과는 달리 이번에 접근한 무리는 약탈을 위해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보급물을 싣고 오는 묵향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테무진이 부하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몽고 기병들은 상대에게 적의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몽고 병사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손을 위로 들자 그들은 일제히 멈춰 섰다. 우두머리인 몽고 병사는 말에서 내린 후 걸어서 초류빈에게로 다가왔다.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그것을 보고 초류빈도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우며 말했다.

“공격할 의사는 없는 모양인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초류빈의 말에 이팔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테무진의 영역이 멀지 않았다고 막이첨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테무진이 보낸 사람이 아닐까요?”

이때, 자신들에게 다가오던 몽고 병사가 그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말 사이사이에 ‘테무진’이라는 말이 끼어 있었다.

“자네 추측이 맞는 모양이군.”

초류빈은 말에서 내려 몽고 병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팔삼이 따르고 있었다. 몽고 병사는 처음 보는 중원풍의 복장을 한 사내에게 호기심 어린 눈 빛을 던지면서도 손에 쥐고 있는 가죽 부대를 초류빈에게 건넸다.

“이, 이게 뭐지?”

초류빈은 이팔삼을 곁눈질로 쳐다봤지만, 그라고 상관이 모르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몽고 풍속에 능통한 막이첨은 지금 뒤에 남아 있었다.

“젠장, 이걸 어떻게 하라고?”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몽고 병사는 손짓으로 그것을 마시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초류빈이 가죽 부대를 슬쩍 흔들어 봤다. 뭔가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듯 찰랑거림이 느껴졌다.

“아아, 먼 길을 왔으니 물이나, 술을 대접하는 것인 모양이군. 아주 독특한 풍습이네.”

기세 좋게 마개를 열고 한 모금 입속에 넣었던 초류빈은 하마터면 입속에 들어온 액체를 푸학하고 토해 낼 뻔했다. 이 느끼하면서도 괴이한 맛과 역한 냄새는 도무 지인간이 참고 마실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류빈이 누구인가. 그는 마시는 척하면서 입속에 들어온 액체를 다시 혀로 슬슬 밀어 가죽 부대 속으로 원 상복귀시켰다. 그런 다음 신나게 목젖을 움직여 벌컥벌컥 마시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마유주는 단 한 방울도 없었다.

몽고 병사를 향해 한껏 잘 마셨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뒤 초류빈은 이팔삼을 슬쩍 쳐다봤다.

‘망할 자식. 혹시 알면서 나한테 엿 먹으라고 가만히 있었던 거 아냐??’

이상한 의심이 들기 시작한 초류빈은 그 가죽 부대를 이팔삼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네도 한 모금 하게 환영의 표시니 맛나게 마셔 주는 게 예의겠지?”

말이야 그렇지만 초류빈의 어감은 이거 맛나게 안 마시면 반쯤 죽여 주겠다는 협박의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이팔삼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사실 이팔삼은 초류빈이 자신에게 가죽 부대를 건네주자 가슴이 뛰었다. 자신과 같은 하급 무사가 하늘 같은 부교주님과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영 광이 아닌가. 그런데 가죽 부대를 건네는 순간 초류빈의 말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이팔삼이었다. 그는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가죽 부대 를 받아들었다.

“옛, 감사합니다, 부교주님.”

그는 가죽 부대를 받아 입가로 가져가며 슬쩍 냄새를 맡아 보았다.

‘허억! 이 무슨 이상야릇한 냄새더냐!”

이팔삼은 그제서야 초류빈이 가죽 부대를 건넬 때 퉁명스럽게 말했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냄새만 맡았어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애써 웃는 표정을 유 지하며 가죽 부대를 입가로 가져갔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부교주가 마시라면 마시는 거다. 설혹 이 안에 독약이 들어 있다고 해도 맛나게 마셔야만 한다. 이팔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가죽 부대를 곧장 입으로 가져가 사력 을 다해 벌컥벌컥 들이켰다.

곧이어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괴상한 맛과 향에 독극물이라도 들어온 듯 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토해 낼 수는 없었다. 이팔삼은 필사적으로 구토를 참아 냈다. 사나이 이팔삼, 여기까지 와서 상관에게 맞아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몇 모금이나 마셨는지 기억도 안 난다. 배가 불러올 때쯤 되어, 위장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는지, 아니면 헛된 저항을 포기해 버렸는지 잠잠해진 지 오래다. 이팔삼 은 가죽 부대를 몽고병에게로 다시 넘겼다. 트림이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괜히 트림을 하다가 마유주가 뿜어져 나올까 봐 이팔삼은 배에 힘을 꽉 주고 참아 버 렸다.

이팔삼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억지로 활짝 미소 지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곧바로 토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초류빈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았던 그 뭔가를 저놈은 아주 맛있다는 듯 벌컥벌컥 마시 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자신이 겪었던 그 고통을 네놈도 어디 한번 당해 봐라 하는 심정에서 가죽 부대를 건넸던 것인데 저렇게 맛있게 마시다니…….

“거참 이상하네. 혹시 냄새가 약간 고약해서 그렇지 맛은 아주 괜찮았던 게 아닐까?”

가죽 부대를 바라보며 별의별 생각이 초류빈의 뇌리를 떠돌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환영의 의미로 준 마유주를 이렇듯 호쾌하게 들이키자 몽고 병사는 아주 기분이 좋은 듯 환한 웃음을 되돌리며 자신도 벌컥벌컥 마유주를 들이켰다.

묵향이 거느린 본대가 도착한 후에야 막이첨이 달려 나와 몽고 병사들과 겨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교주님, 저자는 젤메라고 한답니다. 주군인 테무진의 명을 받들어 교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묵향도 그 말을 알아들었지만, 그는 모르는 척 막이첨의 통역을 다 듣고 난 후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좋아. 자, 가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하겠군.”

반나절 동안 벌판을 더 가로질러 간 후에야 묵향은 테무진을 만날 수 있었다. 테무진은 키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모든 근육이 잘 발달한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 다. 그는 묵향이 가져온 물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기에 놀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만 해도 수천 필이다. 이것만 해도 자신의 세력이 월등하 게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선물을 가져왔다면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테무진은 상대의 저의를 알고 싶다는 듯 길게 째진 눈으로 슬쩍 묵향을 살펴보았다.

“서로 간의 동맹을 위해 이렇듯 먼 길을 와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바이오.”

테무진은 묵향이 자신의 검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인이 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기회에 자 신이 지닌 검을 자랑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 검은 나의 아버지 예수게이께서 사용하셨던 검이오. 아주 훌륭한 보검이지 않소?”

물론 그 모든 말은 사이에 끼어 있는 막이첨이 즉시 통역해 줬다. 테무진의 말을 들은 묵향의 눈에는 짙은 감회가 서렸다.

어찌 그가 그 검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옥영진 대장군이 자신에게 사용하라고 줬던 청성(淸性)이라고 하는 검이었다. 황제가 공을 세운 신하에게 하사한 것인 만 큼 장식이 아주 호화로운 검이었다. 그렇다 보니 금방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 검을 과거 하부르를 맡긴 사내 녀석에게 줬었지. 용의 눈을 가지고 있던 뛰어난 아이에게 말이야. 저놈은 아마 그 녀석의 아들인 모양이군. 아무리 봐도 그 녀석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는 것 같은데…….?

옥영진 대장군의 휘하에서 싸우던 일이 마치 어제 일인 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용의 눈을 지니고 있던 그 아이는 요절하고 말았구나.

하부르.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가 그녀석이 다스리던 부족이라면 그녀 또한 이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그녀도 결 혼했을 테고 아마 아이도 있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너무나도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 묵향은 하부르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적인 감정은 제쳐 놓고 묵향은 테무진에게 말했다.

“쓸 만한 검이긴 하군. 하기야 황제가 준 검이라고 옥 대장군에게서 들었는데 나쁜 것일 리가 없지. 사실 그때 그놈에게 선물하기는 좀 아까운 검이었어. 그건 그렇

고, 멍청한 몽고 놈 주제에 본좌와 동맹을 맺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이만한 물자까지 힘들여 운반해다가 안겨 줬으니 목숨을 걸고 본좌에게 충성해야 해. 알겠나?”

동맹을 맺은 상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저놈은 한어를 단 한마디도 모르는데 말이다. 황당하다는 듯 교주를 멍하니 바라보던 막이첨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대로 통역할까요?”

“이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구. 그런 사소한 것까지 본좌가 일일이 다 가르쳐 줘야겠냐?”

막이첨은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교주님.”

그리고는 고개를 들고 테무진을 바라보며 유창한 몽고어로 말했다.

“저희 교주님께서는 당신처럼 뛰어나고 용맹스런 부족장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하셨소이다. 더불어 당신이 다스리는 부족과 동맹을 맺게 되어 마음이 든든하다 고 하셨소.”

막이첨의 통역을 들은 테무진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토록 많은 선물을 가져왔다면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이오?”

“우선, 본좌가 원하는 것은 타타르 부족의 멸망이야.”

막이첨의 통역에 테무진의 눈이 번쩍 빛났다. 타타르 부족이라면 불구대천의 원수였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그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대가라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소.”

“그게 다는 아니야. 타타르가 멸망하면 네 녀석의 영토는 금과 맞닿게 되겠지. 안 그래?”

테무진은 불신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금을 치라는 말이오이까?”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물론.”

“그건 터무니없는 요구요. 금은 워낙 강성한 제국이라 우리들이 감히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귀하도 잘 알지 않소.”

테무진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묵향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 이 멍청한 녀석이 아주 성급하게 판단하는군. 내 말은 금을 공격해서 멸망시키든지, 아니면 영토를 점령하라는 말이 아니야.”

테무진은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 달라는 말이시오?”

“금과 몽고의 국경선은 아주 길지. 이곳저곳 금군의 경계가 약한 곳을 골라서 약탈하고 도망쳐 달라는 말이야. 금군과 치고받으라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그 정도 도 생각 못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구먼.”

막이첨의 통역을 듣던 테무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 일이라면 이자가 부탁하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척박한 몽고는 모든 것이 부족하 다. 그렇기에 주위를 약탈해서 그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자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해 줄 수 있소이다.”

“하하핫, 좋아. 자네와 나의 이해가 합쳐졌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군. 나야 네놈이 금나라 놈들과 치고받다가 죽든지 말든지 별로 신경 쓰지는 않겠지만, 네놈 은 몸을 아끼지 말고 열심히 금의 국경을 괴롭혀야 돼. 알겠나?”

묵향과 테무진의 사이에 끼어서 열심히 통역을 하는 막이첨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묵향의 거친 말을 최대한 정중한 용어로 바꿔, 다시 테무진에게 통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협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테무진은 호탕하게 웃은 후 정중하게 말했다.

“물론이오. 자, 부하들에게 귀한 손님들을 위해 성대하게 잔치를 준비하라고 일렀소.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일단 여기에 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묵향은 지금껏 테무진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잠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혹시 이 부족에 하부르라는 여자가 살고 있나? 과거에 안면이 있기에 여기 있다면 만나 봤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테무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하부르는 매우 흔한 이름이기에 그것만 가지고는 그 여자를 찾기 힘들 거요. 우리 부족만 해도 그런 이름을 쓰는 여자가 몇 명이나 있소. 그 여자의 나이가 어느 정도 되오?”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마흔은 넘을 것 같은데?”

잠시 생각해 보던 테무진은 자신의 부하들을 불러들여 한참동안 쑤군거렸다. 그런 다음 그는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부족에 그 조건을 충족하는 여자가 세 명 있다고 하오. 지금 부하들에게 데려오라고 일렀으니, 곧 올 거외다.”

“허, 그놈 참 행동도 재빠르군.”

잠시 후, 테무진의 부하 한 명이 몽고 여자 세 명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묵향은 그들 중에서 하부르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전체적인 윤 곽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얼굴은 하부르와는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하나는 예순이 넘어 보일 정도로 팍삭 늙은 여자였다.

묵향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젠장, 아무래도 내가 아는 그녀는 여기에 없는 것 같군.”

“그렇소? 그거 유감이구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실망한 듯한 묵향의 기색을 살피며, 테무진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활달한 어조로 말했다.

“자자, 멀리서 오셨는데, 잔치나 즐기러 갑시다.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해 두라 일렀소.”

테무진은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살찐 말과 양을 잡고, 마유주에 취한 젊은이들이 하나 둘씩 나와 몽고식 씨름인 ‘버흐’를 즐기며 자신 의 용맹을 뽐냈다. 가죽으로 만든 꽉 끼는 반바지와 벗어젖힌 근육질의 상체가 그들을 더욱 용맹스럽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부족장인 테무진과 묵향이 가장 상석에 앉고, 묵향의 옆에 초류빈이 자리를 잡았다. 몽고 여자들이 각종 음식들을 가져왔다. 초류빈은 먼저 보기 좋은 모양으로 잘 라놓은 하얀 덩어리를 보고 약간 망설이다가 집어 들고 조금 맛을 봤다. 전체적인 향으로 보아 뭔가 동물의 젖으로 만든 것인 모양인데 고소한 것이 꽤 맛이 괜찮았 다. 그걸 몇 개인가 집어먹고 있던 초류빈의 눈에 문득 커다란 가죽 부대가 보였다. 방금 전에 맛본 음식이 꽤 마음에 들었던 초류빈은 이번에는 가죽 부대에 든 음 식물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사발에 조금 따른 후 냄새를 맡았다.

“으윽! 정말 이 냄새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군.’

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그는 조금 맛을 봤다. 냄새와는 달리 맛은 아주 좋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입속에 그것을 집어넣은 초류빈의 안색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그것을 마신 것을 후회하며 몰래 옆에다가 뱉어 버렸다. 맛은 냄새보다 더욱 고약했던 것이다.

“젠장, 이따위 걸 마시고 있다니……?

이때, 기가 막힌 생각이 초류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혼자 즐거워하다가 이윽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짐짓 커다란 사발을 묵 향에게 권하며 말했다. 물론 표정 관리를 충분히 하면서 말이다.

“아까 막이첨의 말을 듣자 하니 여기서는 이 술을 잘 마시면 아주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교주님께서도 한잔하시죠. 동맹을 축하하는 자린데, 테무진이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묵향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오오, 자네가 그런 소소한 것까지 신경 쓸 줄이야, 제법이군. 그럼 따라 봐라.”

“옛.”

따르라면 못 따를 줄 알았는가. 초류빈은 커다란 가죽 부대를 가져와서 사발이 넘치기 직전까지 따랐다. 느글거리는 묘한 역한 냄새를 흘리는 희뿌연 액체가 찰랑 거렸다.

저걸 한 사발 들이켠다면 뱃속이 아마 뒤집힐 거다. 물론 자신은 가죽 부대 덕분에 마시는 척만 할 수 있었지만, 저렇게 사발에 담아 줬으니 어쩔 수 없이 몽땅 다 마셔야만 한다. 더군다나 지금 이 자리는 동맹을 맺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가 아닌가. 아무리 제멋대로인 교주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초 류빈은 몇십 년 동안이나 묵혀 두었던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 것만 같은 통쾌함을 느꼈다.

초류빈이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모르는지 묵향은 정중하게 테무진에게 사발을 들어 보인 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오잉?! 저럴 수가……. 아, 아니야. 억지로 참고 있는 걸 거야. 암, 그렇고 말고.’

묵향은 숨도 쉬지 않고 그걸 다 들이킨 다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활짝 미소 짓고는 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말은 조금 엇갈려 있었다.

“젠장, 그래도 옛날처럼 역겹지는 않군.”

묵향의 호쾌한 모습에 테무진이 엄청나게 좋아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초류빈은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왜냐하면 묵향이 환히 웃으며 빈 사발을 자신에게 건넸던 것이다.

“자, 자네도 한 사발 하지. 이거 냄새는 좀 그렇지만 일단 적응만 하면 그런대로 참을 만할 거야. 나도 옛날에 어쩔 수 없이 엄청 먹었었지.”

그때가 생각나는지 묵향이 미소를 지었다. 하부르 때문에 과거 그가 얼마나 많은 마유주를 마셔야만 했던가. 그 맛이 고소하다고 최면까지 걸며 마셨었다. 역한 냄 새기는 했지만, 그때의 추억을 마시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그런 추억 따위가 있을 리 없는 초류빈에게 마유주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았다. 묵향이 넘치게 따라 준 마유주를 억지로 한 사발 마신 초류빈은 찡그러 지는 얼굴 표정을 억지로 바로 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테무진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제, 젠장.”

입을 열면 마유주가 쏟아져 나올까 봐,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하지만 초류빈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테무진은 활짝 미소 지었다. 뭐라고 그가 말

했지만 초류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뱃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라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아 급하게 자리를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초류빈은 이를 악물며 재빨리 장내에서 벗어난 후, 경공술을 전개하여 멀리멀리 이동했다. 그리고 그 순간!

“쿠어어억!”

묵향이 테무진과 반쯤 설익은 고기를 맛나게 씹어 먹고 있는 동안, 초류빈은 뱃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다 땅바닥에 토해 내고 있었다. 한참을 토했건만 아직도 그 빌어먹을 마유주의 역한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위장이 뒤집어졌는지 씁쓸한 신맛까지 느껴졌지만 계속해서 헛구역질만 나왔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초류빈의 눈가에 살짝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빌어먹을 그 새끼는 인간도 아니야! 이걸 참고 마시다니…, 우욱!”

열심히 구역질을 하면서 초류빈은 생각했다. 역시 그 인간과 가까이 있어 봐야 좋은 일이라고는 절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묵향은 이팔삼 대장을 호출했다. 묵향은 부리나케 달려온 이팔삼 대장에게 명령했다.

“내일 출발할 것이다. 준비해 두도록 해라.”

이곳에 온 지 며칠이 흘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방에게 실례되지 않을 정도로 머물렀다고 판단한 묵향의 명령이었다. 그 명령에 이팔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 가 어렸다.

“옛, 교주님.”

이제 이 지긋지긋한 몽고족들의 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팔삼 대장의 대답은 평소보다 더욱 기운찬 것이었다.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초류빈의 안색도 환하게 밝아졌다. 그 역시 이 황량한 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야, 소기의 목적을 다 완수한 지금 이곳에 남아 있 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때, 밖에서 막이첨이 들어와 보고했다.

“교주님께 아룁니다.”

“무엇이냐?”

“테무진이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며 교주님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래? 어디로 가면 되지?”

“자신의 숙소에서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막이첨의 보고에 묵향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래? 젠장, 또다시 마유주를 마셔야 하나? 생각만 해도 속이 느글거리는 것 같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놈에게 나중에 찾아가겠다고 전해라.”

“옛.”

자신의 숙소에 불러들여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을 보면 묵향을 그만큼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만큼 막대한 물자를 실어다가 줬는데, 그 정도 신뢰 는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날 저녁 묵향은 막이첨과 함께 테무진의 숙소로 갔다. 커다란 몽고식 파오 안으로 들어가자 테무진이 반기며 맞이했다. 테무진은 자신의 식구들을 묵향에게 소 개했다. 테무진의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부인이었다. 그중 한 명은 테무진의 첫 번째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다.

묵향이 인사를 하는데, 아무래도 테무진의 어머니라는 인물의 행동이 수상쩍다. 묵향을 보고는 흠칫하는 것 같더니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었다. 주름이 깊게 파인 그녀의 얼굴로 봐서 나이가 쉰은 넘어 보였다. 그녀는 묵향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서야 자신이 손님을 앞에 두고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는지 갑자기 허둥지둥 서둘러 며느리에게 마유주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맛이기는 했지만, 묵향은 마유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유주 한 사발을 묵향이 단숨에 들이키자, 테무진은 환히 미소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앉은 후, 그의 부인들이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몽고의 음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흰 음식과 붉은 음식이다. 물론 흰 음식이라는 것은 유제품을 말하는 것이고, 붉은 음식은 육고기를 말하는 것이다. 가축들 이 젖을 생산할 때는 유제품이 음식의 주를 이룬다. 가을부터 봄까지, 즉 유제품이 생산되지 않을 때는 육류를 섭취하게 된다. 가을에 살찐 가축들을 잡아 고깃덩이 를 잘 말려 가루로 만들어 보관했다가 요리해 먹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주된 겨울 음식이 된다. 하지만 오늘처럼 중요한 손님을 초대한 경우에는 살찐 가축을 잡 아 요리해서 내놓는다. 물론 요리라고 해 봐야 대충 삶는 정도다.

테무진은 손님들이 음식을 베어 먹을 작은 칼을 지니고 있는지 힐끗 바라봤다. 손님들이 그런 칼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알고 그는 칼을 가지고 와서 손님들에게 권했다. 칼을 가지고 있어야만 식사를 할 수 있는 몽고. 마음만 먹으면 상대를 찔러죽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몽고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는 것은 서로에 대한 대단한 신뢰의 표시였다.

설익은 고기를 썩썩 베어 먹으며 테무진은 묵향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실, 이 초원 구석에 박혀 있는 그로서는 나중에 자신의 적이 될 대 금제국에 대해 들어 본 적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막연하게 엄청나게 강하고 거대한 제국이라는 소문만 들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라도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열심이었다.

마유주를 조금씩 들이켜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깊도록 얘기를 하고야 말았다. 물론 중간에서 그들의 대화는 막이첨이 계속 통역을 했다. 술자리가 파한 후, 묵향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파오를 나섰을 때, 그를 부르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있었다.

“저, 중원에서 오신 손님.”

막이첨이 뒤로 돌아선 순간, 묵향도 함께 돌아섰다. 막이첨이 통역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묵향도 안 해서 그렇지 어느 정도 몽고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누가 자신 을 부르는 것인지 궁금했던 묵향이었기에 막이첨이 통역하지도 않았는데 뒤로 돌아선 것이다.

그곳에는 테무진의 어머니라고 소개받았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난처한 듯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손님께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기다렸다오.”

묵향은 자신과 막이첨을 번갈아서 손짓했다. 둘 중 누구와 얘기하고 싶냐는 뜻이었다. 그녀는 묵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님 말이오.”

묵향은 막이첨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한 후, 그녀에게 약간 어눌하기는 해도 몽고어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사실 그녀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살아온 묵향이다. 하지만, 겉으로 봤을 때 자신은 새파란 청년이고, 저 여인은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여인이 아닌가. 그것도 동맹을 맺은 인물의 어머니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이유도 없었으므로 묵향은 공손하게 물었던 것이다.

“혹시, 손님의 아버지께서는 대 송제국의 장군이 아니시오?”

내 아버지가 장군이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 아버지라면 여러 수십 년도 전에 죽었을 것이 확실한데.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묵향의 대답을 그녀는 그의 아버지가 장군이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미안하군요. 바쁜 사람을 불러 세워서……. 하지만 그 사람과 너무나도 닮아서.”

닮았다고?

그 말에 묵향은 혹시나 싶어 뒤돌아서는 그녀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하부르?”

그 말에 그녀는 멈칫하더니 뒤로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두 눈에는 조금씩 물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여, 역시 그분의 핏줄이셨군요.”

황당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말이었지만 묵향은 격정에 찬 눈빛으로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하부르라는 이름이 아니시오?”

그러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묵향을 빤히 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 처녀적 이름을 알고 계시다니 정말 그분의 핏줄이 맞는가 보군요.”

그분의 핏줄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묵향은 눈앞의 여인이 자신이 찾던 하부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를 바라보는 묵향의 눈빛은 어느새 아련하게 바뀌어 있었다. 묵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묵향의 말에 하부르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런 하대도 그렇지만, 자신을 알아보는 듯했기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네 아들이 테무진이었구나. 용의 눈을 가진 그 아이에게 너를 부탁하긴 했지만, 설마 그녀석이 너와 결혼했을 줄이야…….”

그녀는 뭘 생각했는지 갑자기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묵향을 살펴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큰 소리로 말하면 상대가 사라져 버리기나 하는 듯.

“서, 설마……. 진짜로 당신이십니까?”

“맞아. 나야, 묵향…, 아니 국광.”

그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그럴 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계절이 바뀌었는데, 하나도 늙지 않다니…….?

묵향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중원에는 늙지 않도록 해 주는 무술도 있지. 배우기가 쉽지는 않지만, 나는 그걸 익혔거든. 물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오래 살기는 하겠지만, 내가 불로불사의 신체를 지닌 괴물이라는 말은 아니야.”

“저, 정말인가요?”

“내가 왜 네게 거짓말을 하겠니?”

묵향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들려줬다. 그녀와 자신이 아니라면 알 수가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말이다. 그것을 듣고서야 그 녀는 그가 묵향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묵향에게 다가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만지며 말했다.

“그랬군요.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당신을 워낙 닮았기에 당신이 남기신 핏줄인 줄 알았답니다.”

하부르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헤어진 지 벌써 몇십 년이 흘렀거늘 사람이 어떻게 하나도 변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정말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동안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져요. 그렇지만…….”

그러면서 그녀는 쭈글쭈글한 자신의 손을 봤다. 그것을 보면 이게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런 하부르를 바라보며 묵향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나한테도 많은 일이 있었거든. 예수게이가 죽고, 네가 그토록 고생하고 있는 줄 진작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 도 달려왔을 텐데…, 정말 미안하구나.”

하부르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예수게이는 없지만, 대신 그와 나의 핏줄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주저 없이 말하는 그녀의 말 속에는 후회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당당함이 묻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묵향은 대견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 다 곧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묵향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 테무진은 하부르라는 이름의 여자를 찾을 때 너를 소개시켜 주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벌써 만났을 텐데.”

“저, 이름을 바꿨어요. 예수게이와 결혼하며 호에룬이라고…….”

그 말에 묵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그렇게 된 거였군.”

하부르는 묵향과 오랜 시간 옛 이야기를 나눴다. 예수게이와의 결혼, 아이들을 낳은 것 그리고 남편의 죽음. 그 후 엄청난 고생을 하다가 첫 아들인 테무진이 이토 록 성장하기까지의 과정. 그녀의 추억담은 한편의 잡극(雜劇 : 송 대의 연극)을 보는 듯 너무나도 극적이었다. 그녀가 나이에 비해서 이토록 겉늙은 것도 다 그때의 고생 탓이리라.

묵향은 애정이 담뿍 묻어 있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주며 중얼거렸다.

“이제 더 이상 너를 고생시키지 않을 거야. 두고 보거라. 네 아들은 몽고 제일의 강자로 거듭나게 될 거야. 내 말을 믿어도 좋다.”

그 말은 하부르에게 들려준다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이팔삼 대장은 묵향을 찾아와 출발 준비가 다 되었음을 보고했다.

“준비는 이미 끝마쳤습니다, 교주님. 언제 출발하실 것인지 하명해 주십시오.”

이제 이 지긋지긋한 몽고 땅을 벗어난다는 생각에서인지 이팔삼 대장의 목소리는 아주 밝고 힘찼다.

“오늘은 출발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짐을 풀라고 지시하도록.”

묵향의 명령에 이팔삼 대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계획을 변경하겠다.”

이팔삼은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옛, 하명하십시오.”

“본좌는 조금 더 이곳에 머물 것이야. 알겠나?”

“존명!”

이팔삼 대장은 갑자기 교주가 왜 생각을 바꿨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묵향 외에는 하부르, 아 니 호에룬뿐이었으니 말이다. 이팔삼은 교주의 갑작스런 지시에 의문을 가졌지만 애써 그것을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자신에게는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교주의 지 시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완수해 내야만 하는..

바로 그날부터 묵향의 테무진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각종 전략과 전술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과거 옥영진 대장군 휘하에 서 엄청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묵향의 지식은 그야말로 방대한 것이었다. 묵향은 테무진에게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주변 부족과의 전투에 참가하여 어떻게 병력을 운용하는 것이 최적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인지 눈으로 보여 주기까지 했다.

영특한 두뇌를 지닌 테무진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상대는 자신을 필요에 따라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몽고의 패자로 키우기 위해 이런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말이다. 야만의 대지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몸으로 부딪쳐 가며 배워 나갔을 뿐, 체계적인 지식을 정립하지 못한 그였다. 그때그때 닥친 일 에 대한 임기응변에는 능했지만, 전체적인 전략을 수립하여 꾸준히 밀어붙이는 것은 아무래도 취약한 테무진이었다.

그랬기에 묵향의 가르침은 그에게 있어서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고, 모래에 물이 스며들 듯 묵향이 가르쳐 주는 것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모자라는 부분을 아낌없이 채워 주는 상대에 대해 테무진은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왜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의 세력이 엄청나게 크다고 하면 상대의 행동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테무진이 거느린 정도의 작은 부족이라면 몽 고 벌판에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이다.”

테무진과 친밀해진 묵향은 아예 막이첨을 빼고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테무진의 물음에 묵향은 마치 아들에게 말하는 아버지의 그것처럼 인자한 어조로 대답했다. 테무진을 하부르의 아들로 인정한 후부터 테무진에 대한 묵향의 태도

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뭐든지 말해 보게. 내가 아는 한도 안에서는 대답해 줄 테니.”

“왜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소. 사실 그대가 거느리고 온 부하들을 봤을 때, 당신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인지조차 의심스럽소. 직접 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동원하는 거요?”

“그건 자네가 호에룬과 예수게이의 아들이기 때문이지.”

그 말에 테무진은 의문에 가득 찬 시선을 보냈다. 그렇다면 이자는 나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자기보다도 어려 보이는데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 다는 말인가? 자기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말이다.

“예수게이는 정말 뛰어난 용사였어. 내가 하부르, 아니 호에룬의 미래를 맡겼을 정도로 말일세. 그리고 그 둘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자네야. 그런 자네에게 내가 이 정도 해 주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는가.”

너무나도 간단한 설명이었다.

“어머님을 맡겼다고? 그럼 저자의 말이 사실인지 어머니께 물어보면 되겠군.’

어머니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다고 생각하는 테무진이었다. 사실 어머니가 이방인을 위해 아들인 자기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날 저녁, 테무진은 틈을 보다가 어머니 호에룬에게 자신이 묻고자 하는 것을 밝혔다.

“이번에 온 대국인 말입니다. 그에 대해서 어머님께 조언을 청하고 싶습니다.”

평소에도 테무진이 ‘지혜로운 분’으로 칭하며 대소사에 있어서 조언을 청해 왔던 호에룬이었다.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 것이냐?”

“예, 그가 어머니를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알고 있는 듯하더군요. 이건 중요한 일입니다. 그가 왜 그토록 제게 많은 것을 베푸는 것인지 그 이유 를 알아야 대처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그것 말이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응대했지만 호에룬은 속으로 저으기 당황했다.

사실, 그 근원부터 얘기하자면 찬황흑풍단이 몽고를 침략한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한 것은 테무진의 할아버지 철진천의 목이었다. 그렇게 따진다 면 묵향은 자기 아들의 할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아들에게 밝혀, 쓸데없는 복수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호에룬은 생각했다. 그만큼 그가 알고 있는 묵향이라는 사내는 훌륭한 인물이었 다. 그리고 자신이 한때 사랑했었던 사람이었다.

“그분은 네 아버지의 안다이시기 때문이지.”

설명은 짧았지만, 그 한마디로 테무진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몽고에는 ‘안다’라는 풍습이 있다. 목숨을 맡길 만한 친구를 칭하는 명칭이다. 안다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특별한 의식까지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어떤 이를 안다로 삼으면 그가 위급할 때 목숨을 걸고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다. 사실, 예수게이의 안다였던 옹칸의 경우 그 안다가 죽음을 당한 것에는 애석해했는지 모르지만, 안다의 아들인 테무진에게 해 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안다건 뭐건 어찌 되었건 사람이 하는 일이다. 자신의 이익과 부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묵향이라는 자는 어떤가. 저 멀리 송제국에서 온 아버지의 안다임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자신에게 베풀지 않는가. 세상의 인심이라는 것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는 것임에도 말이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말이 있다.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다. 바로 이자는 아버지의 진정한 안다 일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안다라면 자신에게 이렇듯 모든 것을 베푸는 것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테무진으로서는 절대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아주 젊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가 어떻게 아버지의 안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호에룬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분의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단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 그분의 행동을 보면 짐작하기 힘든 깊은 연륜이 느껴지지 않느냐? 그것이 그분이 지닌 매력 중에 하나니 까 말이다.”

묵향을 생각하며 테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다. 이 지독한 몽고에서 살아남은 그와 비슷한 연령임에도 불구하고, 묵향의 언행에는 알 수 없는 노숙함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분의 언행은 바로 그분의 연륜을 나타내는 거란다. 그분의 나이는 생각보다 아주 많지. 내가 처녀일 때 그분과 처음 만났었는데, 그때도 그분은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어.”

그 말에 테무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인간은 불로불사의 괴물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호에룬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단다. 대 송제국에는 사람을 젊게 만드는, 그러니까 늙는 것을 억제하는 이상한 무술이 있는 모양이야. 그분은 그것을 익혔다고 하시더구 나. 물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오래 살 뿐,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그, 그것이 정말이십니까?”

아들의 말에 호에룬은 미소 띤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왜 네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나도 그분을 여기서 처음 봤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지. 아버지와 나를 처음 만나게 해 줬던 그분과 꼭 빼닮은 모습에, 그분의 핏 줄인 줄만 알았던 거였지. 그래서 망설이다 말을 걸었는데, 옛날 그분과 나만이 알고 있는 추억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니. 그래서 그분의 핏줄이 아니라 진짜 로 그분인 것을 알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