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권 11화 – 텐령 평원 대회전의 서막

텐령 평원 대회전의 서막

본대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긴 줄에 손이 묶인 계집들과 아이들의 행렬이 지나갔다. 부근을 약탈한 부대들은 본대에서 진령골에 이르는 비교적 안전 한 보급로를 이용해서 약탈물들을 본국으로 수송했다. 그 때문에 국광은 보고 싶지 않아도 묶여서 끌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절망적인 눈빛을 봐야 만 했다.

닷새가 지나자 추격전에 나섰던 3개 천인대가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주변에 흩어진 모든 몽고 부락들을 약탈하느라 시간이 좀 더 걸린 것이다. 그들도 수많은 포로들을 끌고 왔으며, 노획한 물자들도 수레에 가득했다. 옥영진 대장군은 그것들을 모두 본국으로 출발시키고 나서 천인대장급 이 상만 소집하여 장시간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국광도 사방을 돌아다니며 약탈 사업에 열중인 40개 백인대에게서 주워들은 정보들이 있었다. 철진천이 비록 부상은 당했지만 후퇴하여 전력을 재 정비하고 있는 장소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국광이 멀리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뒤에서 마화가 천천히 다가왔다. 오랜 휴식 때문인지, 아니면 부근의 적은 모두 다 전멸 시킨 후의 안도감인지 평소와 달리 갑옷을 입지 않은 그녀는,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오똑한 콧날과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매를 갖고 있었다. 마화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찮은 듯이 쓱 넘기고 국광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갑작스런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국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뭐라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멍하게 하고 있냐구요.”

“아… 이놈의 전쟁이 언제 끝날까 생각하고 있었지.”

“그거야 철진천(鐵眞天)인지 동진천(銅眞天)인지 하는 양반이 언제 죽느냐에 달린 게 아닐까요?”

“꼭 그를 죽여야 한다면 빨리 진격해서 끝장을 내야지, 왜 여기서 이런 추악한 짓거리를 하고 있지?”

“그거야 이 부근은 모두 철진천의 부족들이 거주하는 곳이니까, 이들을 없애 버리면 그만큼 철진천의 입지가 약화되지 않겠어요?”

“과연 그럴까.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면 이 일대 부족들의 반감만 살 것 같은데………….”

“그건 너무 중원식으로 생각하는 거죠.”

“중원식이라고?”

마화는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어린애를 타이르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르는 종족이에요. 본때를 보여 주면 뭔가 결과가 나온다구요. 제가 듣기로 는 이미 다섯 개 부족이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전령을 보내 온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다음 작전은 몽고족들과 함께 할 것 같아요.”

“몽고족들과 함께…….”

“예, 이들은 한 국가를 이룬 적이 없어요. 그렇기에 동족(同族)이란 개념도 없지요. 자신의 부족에게만 피해가 오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라도 한다구 요. 다른 부족을 없애는 걸 도와서라도 자신들에게 화(禍)가 미치지 않는 걸 원해요. 지금 단장은 그 다섯 개 부족의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듣기로는 8만정도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확실한 거야?”

마화는 애교스럽게 귀를 잡아당겼다.

“예, 저는 아주 귀가 크다구요.”

국광은 빙긋 미소 지었다.

“너무 귀가 크면 명대로 못 사는 법이야. 예로부터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거든.”

그러자 마화는 한술 더 떠서 깔보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그게 아니에요. 큰 귀를 가져도 입이 무거우면 보탬이 된다구요. 뭘 모르시는군. 아는 게 힘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흠, 그럴지도. 그럼 언제 진격을 시작할지 아나?”

“사흘 후쯤에 출발할 것 같아요. 몽고족들과는 툴라이 벌판에서 합류한다고 하더군요.”

“벌판에서?”

“예, 그들의 속셈을 확실히 알 수 없으니 기습은 막아 보자는 게 단장의 생각이겠죠. 벌판에서는 기습이 될 턱이 없고 또 기습이 아니라면 우리 흑풍 단이 겨우 몽고족들에게 치명타를 입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도 그렇군.”

8일 후 몽고족의 대군과 흑풍단이 합류했다. 서로가 믿을 수 없는 사이였기에 관례에 따라 다섯 명의 부족장들은 자신의 아들들을 인질로 보내왔다. 그렇게 하는 편이 서로에게 신뢰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쪽은 이쪽대로 저쪽이 헛수작을 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고, 저쪽은 저쪽대로 이쪽에 인질을 보냈으니 자신들을 의심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몽고군 8만을 포함해서 이제 10만의 군세로 늘어난 정벌군은 철진천이 세력을 정돈하고 있는 마추하 부근의 텐령 평원으로 진격했다. 드넓게 펼쳐 진 몽고의 대 초원에서는 얄팍한 술수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또 양쪽이 기병이므로 기습은 거의 불가능하다. 야습이 좋기는 하지만 아군끼리 충돌할 위험도 있기 때문에 소규모의 정예만을 차출해 상대의 진지 를 휘저어 놓는 정도밖에는 할 수 없다.

연합군은 드넓은 텐령 평원에서 철진천의 12만 군세와 마주쳤다. 전번의 패배는 벌써 잊었다는 듯 몽고족들은 아직도 투지에 불타고 있었다. 사실 상 전쟁이 시작된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서전에서 치명타를 입긴 했지만 그들에게는 여력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신뢰하는 철진 천이 비록 부상을 입긴 했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옥영진 대장군은 당당하게 대오를 유지하고 있는 몽고병들을 바라보며 부단장에게 말했다.

“저 자식들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

“예, 그만큼 철진천이란 인물에 대한 신뢰도가 대단하다는 거겠지요. 그리고 사실 전번 전투에서 투입된 주력은 철진천의 동맹 부족들이라고 봐야 하니까요. 지난번의 대패로 동맹을 맺었던 부족들이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세 부족 정도만 그를 돕겠다고 병사를 보낸 모양입니다.”

“그래? 이번에 패하면 그나마도 끝나겠군.”

“그럴 겁니다.”

“흠, 이번에는 정면 공격을 하기로 하지. 사실 이런 대 평원에서 따로 얄팍한 전술을 써 봐야 통할 리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약간은 술수를 써야 합니다. 안 그러면 피해가 클 겁니다.”

“바로 그거야. 피해가 커야 해.”

“예?”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옥영진 대장군은 검 끝으로 땅에다 쓱쓱 선을 그으며 설명했다.

“우선 여기에 넓게 어림군을 포진시키는 거야. 그런 다음 다섯 부족의 부족장들에게 어림군의 뒤편에 주둔하도록 명령해.”

“하지만 저쪽에서 먼저 공격해 올까요?”

“글쎄………….”

“전에는 저들의 수가 많기에 정면 돌격을 해 왔지만 어림군의 활과 쇠뇌에 많은 병사들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병력이 엇비슷한 상태, 아니 보 병인 어림군을 빼면 이쪽은 9만이니까, 이쪽의 보병과 싸우지 않기 위해 선제공격은 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위해 어림군은 포진시켜야 하니까 이렇게 하고 그 뒤에 몽고병을 놔둬. 적이 공격하면 좋고 안 그러면 이쪽에서 공격하면 되 니까…………. 그리고 저쪽의 몽고병들이 배신하면 일단 어림군이 진형을 짜고 있는 곳까지 후퇴해서 어림군을 의지해서 싸우면 도움이 되지.”

“예.”

“적이 공격해 오지 않으면 먼저 몽고병들을 어림군의 양쪽으로 출동시켜 적진으로 돌격해 전투를 벌이는 거야.”

“…….”

“그리고 흑풍단의 5개 천인대가 좀 더 진격해 들어가서 적의 뒤를 치면 아주 광범위한 포위망이 형성되지. 하지만 우리는 뒤에서 들어가게 되고 다 섯 개 부족은 정면을 감당하니까 당연히 다섯 개 부족의 피해가 엄청날 거야. 그러면 철진천도 잡고 몽고족들끼리 서로 싸워 전력도 약화되고, 일거 양득이지. 이번에는 완전히 포위해서 철진천의 목을 확실히 베어야 해.”

“좋은 작전입니다. 하지만 전처럼 철진천이 후군을 구성해서 뒤로 빠지면 어떻게 하죠?”

“전에는 전군과 후군 간의 간격이 커서 분리되어 격파당했기에 이번에는 함께 행동할 게 확실해. 후군이 있다면 미끼일 가능성도 있지.”

다음 날 아침, 양군(兩軍)은 진형을 급히 짜기 시작했다. 흑풍단 쪽에서는 계속해서 몽고군을 유인했지만, 한 번 패배를 맛본 철진천은 쉽사리 선공 (先攻)을 취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쪽의 보병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보병은 후퇴하면 자중지란으로 전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보병에게 있어 후퇴란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적이 앞에 있다면 사수(死守)만이 있을 뿐이 다. 그 속도 때문에 일부 기병이 달려나와 상대를 약 올리거나 화살을 쏘는 등 도발 행위를 하다가 적이 달려 나오면 재빨리 후퇴하여 매복, 또는 진 형을 갖추고 대기 중인 보병들을 유인하곤 한다.

그 외에 전군이 퇴각할 때는 보병이 앞서 퇴각하고 기병은 언제나 뒤에 남아 퇴로를 확보한다. 기병은 언제라도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에 항상 먼저 나서고 나중까지 버티는 것이다.

몇 번의 도발이 통하지 않자 옥영진은 두 번째 작전을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곧장 휘하의 전 기병들이 적진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자 상대도

함께 돌격해 들어와 대규모 기병전이 벌어졌다. 상대방도 이쪽이 기병들을 대량으로 투입하자 더 이상 보병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 다. 정신 나간 지휘관이 아니라면 양군이 얽혀 있는 상태에서 보병들에게 쇠뇌를 발사하라는 명령은 할 수 없을 것이므로……

수많은 기병들이 텐령 평원에서 충돌하며 장관을 연출했다. 몽고병과 몽고병, 또 몽고병과 흑풍단의 전투를 지켜보던 옥영진 대장군은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한 전세에 경악하여 옆에 서 있는 마길수 부단장에게 외쳤다.

“남은 4개 백인대를 이끌고 적의 퇴각을 저지해, 빨리!”

흑풍단이 교묘히 뒤로 돌며 철진천의 군단을 포위하자 위기감을 느낀 철진천이 측면 돌파를 지시했고, 그에 따라 몽고병들은 비교적 약하다고 생각 되는 측면의 몽고 연합군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마길수 상장군이 예비 병력으로 남겨 두었던 4백 명의 흑풍단을 이끌고 적의 돌파를 저지하려고 했 으나, 한 번 새기 시작한 둑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듯 적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옥영진 장군을 비웃기나 하듯 몽고의 대 병력은 거대한 포 위망을 깨끗이 돌파하여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대회전의 첫 번째의 전투는 연합군의 판정승이라고 볼 수 있었으나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항아리 모양으로 적을 포위했던 옥영진 대장군의 연합군은 항아리 속의 쥐 떼가 도망치자 자연히 항아리의 면적을 좁히며 도망치는 후위의 쥐 떼와 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철진천이 부상을 무릅쓰고 몸소 지휘하는 몽고병들은 한쪽을 돌파하자 예상과 달리 후퇴할 생각은 않고 양방향으로 나뉘며 쫓아 들어오는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안과 밖이 뒤집혀 도리어 연합군이 철진천의 대 군단에 포위된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일단 포위되면 그 중앙에 갇힌 쥐들은 양 옆이 우군이니 칼을 놀릴 도리가 없어 쉬어야 한다. 대신 원의 밖에 있는 쥐 떼와 대치하고 있는 항아리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사실 충돌하는 면적은 같으므로 서로가 죽자고 싸운다면 포위가 되건 말건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일단 포위되면 사방이 적인 것 같아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지므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작전은 옥영진 대장군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한 번의 포위 작전에서 궤멸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적에게 포위되어 버리자 철 진천의 무서움을 아는 몽고 연합군 내에서 제일 먼저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옥영진 대장군은 흑풍단과는 떨어져 보병들과 함께 있으니, 그들을 이끌 장수가 없는 연합군과 비록 부상은 당했을망정 지휘관이 함께하는 몽고병. 이건 처음부터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 몽고의 대 병력에 포위되어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연합군의 마길수 부단장이 휘하의 4백 기와 부근의 몽고 연합군을 몰아쳐서 정면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마길수 상장군은 전 기병대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어림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까지 후퇴하라!”

“흑풍단은 몽고군의 후퇴를 지원해라!”

9만의 연합군이 날아다니듯 후퇴하기 시작하자 12만의 몽고군이 추격전을 개시했다. 사실 철진천의 몽고병은 숫자도 많았지만 철진천 하나만을 믿 고 의지하는 단일한 군사 집단인데 비해, 9만의 연합군은 흑풍단의 위력 때문에 그들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는 있으나 각기 따로 움직여서 대규모 기 병전에서 벌어지는 뜻밖의 사태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기에 이런 낭패를 당한 것이다.

9만의 기병대가 전속력으로 후퇴하자 옥영진 대장군은 어림군의 진형(陣形)을 더욱 튼튼히 짜서 적의 난입에 대비하는 한편 보병대의 양옆으로 퇴 각해 들어오는 기병들을 재편성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윽고 흑풍단에 이어 철진천의 추격대가 들이닥치자 쇠뇌들이 일제히 발사되어 수없 이 많은 화살들이 몽고병들에게 날아갔다. 일진이 화살에 무너지자 철진천도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생각이 없는지 퇴각하기 시작했다.

기나긴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병사들은 치열한 기동전(起動戰) 덕분에 밥을 먹을 시간도 없어 칼을 휘두르며 간신히 입속에 육포나 우물거리며 허기를 모면했는데, 서로가 떨어지자 먼저 솥부터 걸고는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