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권 12화 – 필승을 위한 작전
필승을 위한 작전
때늦은 점심 식사를 끝내고 천인대장 이상급 간부들이 모여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첫 번째 대회전에서 철진천의 몽고군을 이루고 있던 것은 대부분 타 부족의 지원군이었기에 이 정도로 뛰어난 기동력이 없어 흑풍단이 간단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막상 철진천의 주력 부대와 부딪치고 보니 무 식한 몽고 놈들이라고 깔보던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옥영진 대장군은 전군을 파멸에서 구해 낸 마길수 상장군을 치하하고는 침중한 어조로 말 다.
“적의 전력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니, 이것 참. 제장들의 의견은 어떻소?”
옥영진 대장군의 말에 마길수 상장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철진천은 이렇다 할 병법 책을 읽은 위인도 아니고, 그의 전술적 감각은 수많은 실전 경험에서 얻어 낸 겁니다. 거의 짐승과 같은 예리한 감각이 있 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러니 속 보이는 함정보다는 아주 치밀한 함정을 준비해야 합니다. 감각은 있되 그 감각을 쓸 수 없도록, 그러니까 뻔히 알고 도 당하도록………….”
마길수 상장군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옥영진 대장군이 물었다.
“어떤 방책이 좋겠소?”
마길수 상장군은 일부러 말을 약간 늦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천천히 설명했다.
“일단은 장군과 멍군을 불러 서로 비긴 셈이니, 오늘은 이만 작전을 종료하고 천인대 하나만을 동원해서 야습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정면 승부가 아니라서 전과는 그리 크지 않겠지만 동맹인 몽고병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는 도움이 될 겁니다.”
“흐음, 그도 그렇군.”
“그러면서 이 전투를 장기전으로 끌고 나가는 척하는 겁니다.”
옥영진 대장군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척?”
“예, 흑풍단의 두 개 천인대를 뽑아서 부근의 몽고족 마을들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철진천은 우리가 장기전으로 나가며 자신 의 주력 부대를 이곳에 잡아 두고 휘하 부족들을, 그것도 남자들은 거의 빠져나간 허약한 부족들을 쳐서 자신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한다고 생각하겠 죠. 그리고 휘하의 부하들도 가정이 박살 나니 사기도 떨어질 겁니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 일부 병력을 뽑아 내어 우리의 약탈 부대를 치기 위 해 병력을 분산할 것이고…………….”
“아하! 그때 적을 완전히 박살 낸다. 그것 꽤 괜찮은 생각이군.”
그 말에 관지 장군이 말을 이었다.
“대장군, 소장의 생각으로는 철진천의 동맹 부족의 마을에는 손대지 않는 것이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동맹 부족의 본거지를 공격하지 않으면 동맹 부족들은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지 않을 거고, 그러면 그만큼 철진천에 의해 단련된 병사들의 비율이 적어지는 결과가 나오게 되죠. 그러면 이번과 같이 신속한 대응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의 의견에 감탄했다는 듯이 옥영진 대장군이 무릎을 쳤다.
“그것도 묘책이로다.”
그 말에 장각 장군이 대꾸했다.
“하지만 대장군, 이건 너무 비겁한 술책인데요? 무식한 몽고병들을 상대로 이토록 비겁한 방책을 써야만 합니까?”
장각 천인대장은 정통적인 무인 가문 출신의 무장인지라 무엇보다 의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리 상대가 악하다고 해도 자신은 정통적인 수법으로 적을 상대해야만 그 공명정대함에 상대도 무릎을 꿇는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친구다. 이에 대해 노영(盧英) 장군이 반론을 제기했다.
“흐흐, 소장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몽고 오랑캐를 치는 데 꼭 정공을 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건은 그쯤 해 두고, 그래 이 부근에 있는 철진천의 부락은 조사를 했소?”
마길수 상장군이 답했다.
“예,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한 소장이 10개 십인대를 투입하여 부근을 조사했습니다. 몽고 부족 몇 명을 납치하여 고문도 했고, 이리저리 모든 정 보를 종합해 본 결과 부근에 네 개 부락이 있는 걸로 밝혀졌습니다.”
“좋아, 그럼 각 부락에 5개 백인대씩 보내기로 하지. 그들은 그 부락들을 멸하고 나면 회군하지 말고 주변의 또 다른 몽고 부락들이 있는지 조사하 여 모두 없애 버리는 것이 좋겠군.”
“누구를 보내시겠습니까?”
“공지! 노영!”
“예!”
“너희들은 지금 수하들을 거느리고 출발하라! 자세한 위치는 마길수 상장군이 지시할 것이다.”
“예.”
제7, 10천인대장들이 막사에서 나가자 마길수 부단장이 물었다.
“오늘 밤의 야습은 실행합니까?”
“그렇지! 오늘 야습은 꼭 해야겠군. 관지!”
“예.”
“너는 지금 본대에서 이탈하여 기회를 노리다가 밤에 기습을 감행하라.”
“예.”
“물이 있는 곳까지 뒤로 80리(약 32킬로미터) 정도 이동해야 하니까 오늘 밤 장작불을 여기저기 피워 놓고 동시에 야습을 감행하면 적은 그 소란통 에 우리가 빠져나갔는지조차 알기 힘들 거야.”
“좋은 작전입니다.”
“오늘 저녁에 일정 거리 후퇴하여 다시 진지를 구축한다고 몽고 족장들에게도 통보해 두게.”
“예.”
“빌어먹을…………. 이번에는 완전히 죽다가 살아난 기분이군.”
임충의 투정에 마화도 약간은 동의한다는 투였다.
“이번 몽고군의 움직임은 정말 멋지던데? 안 그래요, 대장?”
마화의 물음에 국광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의 용병술도 대단하더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흑풍단을 멸할 수 없어. 이쪽은 무공이 강한 집단이니 저쪽도 무림인들을 투입하지 않는 한, 아무리 해도 흑풍단에 타격을 주기는 힘들지. 그래도 이번 전투로 몽고병들이 타격을 입었으니 그게 문제라면 문제군.”
“하지만 우리 연합군에게 몽고병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들 아닙니까? 그들의 사기가 좀 떨어진다고 해서 문제될 게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아. 처음부터 흑풍단만으로 전투를 벌이는 것과 저들과 함께 연합군을 구성해서 전투를 벌이는 건 아무래도 큰 차이가 있지. 아무리 무 용지물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저들 족장의 비위를 맞춰 줘야 하는 게 현실이야. 둘이 손발이 맞지 않으면 혼자 해도 될 일까지 안 되니까. 최악의 경우 족장들의 배신으로 양쪽에서 공격을 당해 전멸할 수도 있지.”
“그도 그렇군요. 참, 이제 전투도 끝났는데 하부르한테 안 가 봐도 돼요?”
“끅…….”
그래도 신경 쓴다고 말해 줬는데 국광이 갑자기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마화가 괴이하게 여겼다.
“왜 그래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마화와 질린 듯한 표정의 국광…………. 이들의 표정을 보며 재미있어진 임충이 자신은 다 안다는 투로 국광에게 말했다.
“하하, 요즘은 하부르 생각만 해도 마유주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날고기가 함께 떠오르는 모양이죠?”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꿈에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가 입속으로 뛰어드는 게 보이니. 이 일을 어찌 하면 좋을까?”
“잠시 떨어져서 지내면 어떨까요?”
“떨어져서? 말은 쉬운데 그게 좀…….”
“왜 그러십니까? 뭐 약점이라도 잡히셨나요?”
“약점?”
국광은 속으로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부르는 처음에는 흑색 갑주에 안면 보호대를 착용하고 싸늘한 눈만 드러낸 국광의 공포스런 분위기에 압도되어 찍 소리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갑주를 벗으면 드러나는 문약한 서생과 같은 모습과 약간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정이 많고 여자에게 강하게 나가지 못하는, 치열한 생존 경쟁을 뚫고 나가는 몽고 남자에게서 느낄 수 없는 부드러움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을 본능적으로 포착하자 그다음부터는 하부르의 세 상이었다. 수하들도 어린 하부르에게 휘둘리는 국광을 보고 매우 재미있어 하면서 ‘남자의 속성’이니 ‘남편은 이렇게 교육시켜야 한다느니 하면서 옆에서 부추기며 바람을 넣어 지금의 국광으로서는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어린 계집애 하나 데리고 살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국광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전령이 시근벌떡 달려오더니 외쳤다.
“관지 대장께서 출동 준비를 하시랍니다.”
갑작스런 전령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국광이 물었다.
“왜?”
“작전상 준비가 되는 대로 본대에서 이탈한답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구요.”
그러자 국광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공교로운 일이…………. 돌에 걸려 넘어져도 동전 있는 곳에 얼굴을 처박는군. 그래, 잘됐다. 마화!”
국광의 혼잣말에 못 말린다는 듯 마화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예.”
“출동 준비를 하라고 지시해라. 혹시 모르니 며칠 먹을 건량도 같이 준비하라고 일러라. 나는 막사에 다녀오겠다.” 그러자 마화가 씩 웃었다.
“하부르한테 보고하시게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쑥스러워진 국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 봐!”
“예!”
국광이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하부르가 쫓아와 국광을 끌어안았다.
“이제 끝난 거예요?”
“오늘 싸움은 그럭저럭 끝났어.”
“피곤하시죠? 앉으세요. 식사 준비할까요?”
국광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식사는 됐고, 지금 출동해야 하거든…………. 한 며칠 못 볼지도 몰라.”
국광의 말을 들은 하부르는 약간 서운한 듯했지만 곧 기운을 차려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전장으로 떠날 때는 마음 편히 가도록 해 줘 야지 앙탈을 부리면 안 된다고 죽은 엄마에게 배웠던 것이다. 하부르는 한 대접 가득히 마유주를 담아 와서는 생긋이 웃으며 권했다.
“지금 가더라도 식사는 하고 가야 하잖아요? 고기는 아직 준비된 게 없고 마유주라도 드시고 가세요.”
하부르의 말에 국광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사양했다.
“괜찮은데………….”
하지만 전장으로 떠나는 남편을 든든히 먹여 보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하부르로서는 자신에게 들르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된 이상 뒤치다꺼리를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좀 드세요. 초원의 밤은 춥다구요. 마유주를 든든히 마셔 두면 몸도 따뜻해지구요.”
생긋이 웃으며 마유주를 한 대접 가득 담아 성의껏 권하는 데야 뿌리칠 재주가 없다. 국광이 사발을 받아 들고 꿀꺽꿀꺽 마셔 버리자 미소를 지으며 국광을 바라보고 있던 하부르는 한 잔 더 따라 줬다.
“더 드세요. 장정은 많이 먹어야 해요.”
“이제 배부른데……………”
국광은 한 잔을 비운 다음에야 마유주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국광은 하부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자신이 죽을 가능성은 없다고 굳게 믿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전쟁의 경험이 없는 국광은 전장으로 떠날 때면 늘 이게 마지막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곤 했기 때문에 언제나 하부르에게 인사를 하고 갔다.
“얌전히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착한 아이지.”
“예.”
끝이 보이지 않는 텐령 평원…………. 하지만 말이 평원이지 완만한 둔덕들이 군데군데 솟아 있다. 그중 한 귀퉁이에는 흑풍단 대원들이 옷을 갈아입느 라 정신이 없었고 또 한쪽… 둔덕 위에서는 흑색 갑주를 입고 저마다 큰 칼을 허리에 차거나 등에 멘자들이 지평선의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멀리 돌아서 왔으니 상대가 눈치 채지는 못했겠지?”
“그렇겠죠. 하여튼 관지 대장도 기습전에는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에요.”
“흐흐흐, 놀라운 일이야.”
“뭐가요?”
국광이 비꼬는 어투였다.
“대(大) 찬황흑풍단이 알고 보면 기습전에나 도가 튼 집단이라니.
그러자 마화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피, 그건 할 수 없잖아요. 소수 정예의 묘를 살리려면 기습이 최고라구요.”
“그건 그렇고, 25리(약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서 보니 정말 인마가 개미만 하군. 파오는 완전히 장난감 같은데?”
이때 아래쪽에서 임충이 몽고 옷을 입고 헐떡거리며 달려오더니 국광과 마화에게 옷을 한 벌씩 건넸다. 그걸 무심결에 받아 들면서 마화가 물었다. “이게 뭐야?”
임충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뭐긴 뭐야, 몽고 놈들 옷이지. 이걸 입고 야습한다는 관지 대장의 명이야. 그리고 이 하얀 천을 왼팔에 감아서 아군이라는 표시를 하는 거지.”
마화는 갑주를 벗고 주섬주섬 받아 든 몽고 옷을 입으려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크・・・ 이게 무슨 냄새야?”
마화의 반응에 당연하다는 듯이 임충이 미소를 지었다.
“몽고 놈들은 거의 목욕을 안 하니까 당연히 옷도 뻔한 거 아니겠어? 그래도 대장과 너를 위해서 특별히 냄새가 덜 나는 걸로 골라 왔다구.” 그러자 성의는 생각하지도 않고 마화가 열을 내면서 따졌다.
“골라 가져온 게 이거냐? 이거냐구!”
“할 수 없잖아. 갑자기 내려진 명령이라 옷도 3백 벌 정도밖에 못 구했어. 이걸 세탁할 시간이 어디 있었냐?”
“그러고 보니…………. 이럴 줄 알았으면 하부르 것을 한 벌 얻어 오는 건데.”
“좋은 생각이지만 본진은 저쪽으로 몇십 리는 돌아서 가야 해. 너 혼자 다시 갔다 올래?”
“잔말 말고 입어. 누군 코가 없어서 이걸 그냥 입은 줄 알아?”
말없이 몽고군 진영을 바라보던 국광이 임충을 돌아보았다.
“기습은 언제라고 하던가?”
“예, 삼경에 시작한다고 하셨습니다. 옷이 3백 벌뿐이라 천인대 안에서도 무공이 뛰어난 순서로 옷을 입고 나머지는 갑주를 지키며 이곳에 매복해 있다가 기습조의 퇴각을 도우라는 지십니다. 남는 매복조는 맹각(孟覺) 대장이 지휘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