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권 4화 – 기루와 금(琴)
기루와 금(琴)
그날도 격렬한 대련이 끝난 후 국광이 옥항에게 말했다.
“이제 제법 움직임이 갖춰지기 시작하는구나.”
“정말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검을 사용하는 게 너무나 제멋대로야.”
“예? 하지만 초식은 별로 신경 쓰지 말라고 사부님께서……………”
“그런 말이 아니다. 너는 검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어. 그냥 네 마음 내키는 대로 검을 휘두를 뿐이다. 조용히 검을 잡고 생각해 보거라. 검이 찌르 기를 원하는 부분을 찾아라. 그리고 검을 따라 그 부위를 찌르거나 베어 가는 거야. 검과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좋은 공격이 될 수 없지.” “신검합일(合一)이란 말씀인가요?”
“말을 만들어 붙이면 그렇게도 부를 수 있겠구나. 어쨌든 너는 전혀 그걸 생각하지 않고 있어. 앞으로는 주의하거라.”
“말은 쉽지만 신검합일을 하려면 어떻게?”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국광은 자신이 지금까지 옥항을 두들기는 데 사용하던 몽둥이를 들어 옥항이 내려치기 좋은 위치까지 들어 올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베어 보거라.”
옥항이 죽을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이 몽둥이는 잘리지 않았다. 아니 흠집도 낼 수 없었다. 그냥 튕겨 나와 옥항의 손아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옥항은 당황하여 검을 내려놓고 손을 주무르며 국광에게 말했다.
“이 몽둥이가 왜 잘리지 않죠?”
“나는 몽둥이와 하나가 되어 너의 힘을 막았고 너는 그냥 손아귀 힘만 믿고 쇳덩이로 내려쳤을 뿐이니 잘릴 리가 있겠느냐?”
“…..”
“무릇 검을 쓸 때는 그 한 동작 한 동작에 마음이 움직여야 하고 또 그 마음에 따라 기를 움직여야 한다. 기의 움직임은 곧 마음의 움직임. 검과 기가 동시에 뻗어 나가야 하는 거야.”
“그럼 처음부터 공력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시면 될 걸 가지고 무슨 마음이 어쩌고…………..”
“떽! 네 녀석은 몸통 위에 있는 이거는 사용 안 하고 뭐 하려고 붙여 놨냐?”
그러면서 국광은 옥항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너도 좀 더 실력이 쌓이면 느낄 거다. 공력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공력을 사용한다면 그건 별 볼일 없는 거야. 무의식중에 마음이, 또 육체가 움 직이면 기도 함께 일어나야 하는 거야. 이건 무술에 있어서 상당히 높은 경지다. 이걸 네가 익힐 수 있느냐 없느냐는 너의 노력에 달려 있어. 언제나 검을 사용할 때 검과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노력해라.”
그러자 옥항은 쑥스러운 듯 얻어맞은 머리를 과장되게 문질렀다.
“예, 가르치심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부님………….”
“왜 그러느냐?”
“저, 할아버지께서 같이 가실 데가 있다고 준비를 좀 하시라던데요.”
“준비? 준비할 것이 있냐? 옷은 이것뿐인데…….”
“잠시만 기다리세요.”
옥항은 나는 듯이 달려가더니 옷을 한 벌 가지고 돌아왔다. 연한 푸른색 비단옷으로 한눈에도 고급스럽게 보였다.
“이건 뭐냐?”
“수련이 끝나면 잘 차려입고 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오시랬어요. 아마 함께 같이 가실 곳이 있는 모양이던데요.”
“그래?”
옥항은 옥영진을 꼬드겨서 국광과 함께 기루에 가기를 권했다. 마침 수도인 중경에는 아주 그럴듯한 기루가 수없이 많았고, 그중에는 멀리까지 이름 이 알려진 곳도 몇 군데 있었다. 옥영진은 손자의 부탁을 받아들여 손자를 가르친다고 수고하는 국광을 데리고 분위기 좋은 기루에 가기로 했던 것이 다.
국광은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린 이래 최고로 화려한 복장을 하고 옥영진과 함께 집을 나섰다. 옥영진이 국광을 안내한 곳은 중경에서도 몇 안 되
는 아주 큰 기루 중 하나였다. 그 화려하고 거대한 집의 문에는 제법 격식을 갖추어成樓청성루)」라는 글씨를 써 놓은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여기는 어딥니까?”
“아주 괴상한 법칙이 존재하는 기루지.”
“괴상하다뇨?”
“이 기루는 아주 화려하고 거대하게 세워졌기에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꽤 화제가 되었던 곳이야. 현판이 말하듯이 청성루, 즉 뭔가 뜻을 이룬 사람 을 청한다는 곳인데 술값도 비싸지만 손님을 가려 받기로 유명한 곳이지. 돈만 많다고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이곳에는 아주 좋은 술 과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아 고관대작들도 권세를 믿고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만 원체 까다로워서………….”
“뭐가 까다롭다는 겁니까?”
“손님을 받는 조건이지. 아까도 말했잖아? 뭔가를 이뤄야만 한다고. 그 손님이 가진 재주 중에서 뛰어난 것을 시험해서 그 실력에 따라 술시중 드는 여인들이 들어오지. 이곳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계집들을 만나 본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고…………. 루주(樓主)를 만난 사람은 한 명도 없어.”
“어떤 재주라도 상관없습니까?”
“그렇네. 시, 서, 화, 금, 무공, 진법 등…………. 아부하는 재주 말고는 대상이 되지 않는 재주는 거의 없지. 어때, 자네도 들어가 볼 텐가?”
“원래 그러려고 오신 게 아닌가요?”
“허허, 그래 이곳 손님 대접이 제법 쓸 만하지. 계집들이 지나치게 음란하지도 않고 상당히 재간 있는 아이들이 많아. 내 이름만으로도 꽤 괜찮은 계 집들을 만날 수 있어. 노부도 처음에는 시험을 거쳐서 지금의 위치를 받아 냈거든…………. 자, 들어가세나.”
그들이 문으로 들어서자 위사인 듯 장검을 찬 사내가 길을 막았다.
“손님, 검은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국광은 다시 돌아 나가며 옥영진에게 말했다.
“저는 이 검이 없으면 마음을 놓지 못하니, 검을 가지고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가죠.”
이때 옥영진 대장군의 얼굴을 알아본 한 사내가 쫓아 나왔다.
“왜 그러십니까요, 대장군 나으리?”
“노부의 동행에게 약간 문제가 있는데, 좋은 방법이 없겠나?”
“무슨 문제이십니까?”
“검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이렇게 하죠. 본채로는 들어가실 수 없고, 저쪽에 별채가 있는데 그리로 가서 즐기시면 어떻겠습니까요?”
“좋네, 안내해 주게나.”
국광은 옥영진과 방에 들어가서는 묵혼검을 풀어 한 구석에 치워 뒀다. 국광은 언제나 묵혼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지만 묵영이라 불리는 비수는 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옥영진이 국광을 데리고 사냥을 갈 때는 묵영을 가지고 갔는데, 옥영진은 그 좋은 비수를 사슴가죽을 벗기는 데나 쓴다고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나서 잠시 기다리자 아름다운 여인 둘이 들어왔다. 국광은 말투나 시중드는 자세, 그리고 금을 타는 솜씨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의 옆에 앉은 여자가 몇 등급 떨어진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옥영진은 그의 상전이었으므로 처음 온 국광으로서는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제법 깔끔하게 차려진 맛깔스런 안주상과 풍미가 넘치는 술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국광은 옆에 계집이 앉아 있는 게 이상하게 어색해서 그녀에게 금을 타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금을 타는 동안 국광은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국 광이 말도 않고 급히 술만 마시자 자신을 취월(月)이라 소개한 여인이 그를 비웃듯이 힐끔 바라보았다. 옥영진은 민망스러워서 국광을 나무랐다.
“술이란 천천히 그 향기와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 거지 그렇게 마구 마시는 게 아닐세.”
“술이란 통쾌하게 마셔야지, 뭘 그렇게 좀스럽게 마신다는 겁니까?”
“허어, 이 사람이…………….”
“이 술은 맛이 깊고… 향기가 진한 걸로 보아 볕이 잘 드는 땅에서 수확된 작물로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왜 볕이 잘 드는 땅에서 만들어졌다는 건가?”
“볕이 잘 안 들면 오곡백과가 충분히 익지 못하니, 이 정도 풍미를 풍기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좋은 술이 계절을 잘못 만나 나으리께서 맛을 제 대로 못 보시는 것 같으니 그게 아쉬울 뿐이지요.”
“계절을 잘못 만나다니?”
“지금은 국화가 쑥쑥 자라나는 여름이라 밤낮으로 무더우니, 이 술을………….”
국광은 술을 한 잔 꿀꺽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리 지하의 서늘한 곳에 보관했다 하더라도 꺼내 와서 시간이 지나면 뜨뜻해져 제 맛을 못 내죠. 이 술은 약간 차게 해서 마셔야 더욱 좋습니다.”
“그걸 어찌 아나?”
“뭔가 모자라기에 좀 술을 데워서도 먹어 봤고 차게도 먹어 봤고…, 여러 가지로 해 보니 역시 약간 차게 마실 때 가장 좋은 맛이 나더군요. 나으리 도 그렇게 드시겠습니까?”
“그러세나.”
“그럼 잔을 비우시죠.”
국광이 술을 직접 따라 주었다.
“찬 기운이 가시기 전에 드시죠.”
“과연……. 맛이 더욱 뛰어나군. 훌륭해.”
취월은 국광 앞에 놓인 술병을 슬쩍 쥐어 보고 그 술병이 아주 차다는 것에 놀랐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국광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음공(陰功)을 익히신 분이셨군요.”
“뭐, 음공이랄 것도 없고 그냥 술병을 차게 했을 뿐이야. 그러니 술이 미적지근해지기 전에 열심히 먹어야지. 다시 술잔을 잡고 차게 만들며 마시기 는 귀찮거든. 이봐, 자네도 이리 와서 한잔하게나.”
여태 금을 타던 혜영(慧瀛)이라는 여인이 그의 옆에 와서 앉았다. 국광은 그녀에게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지금까지 금을 타느라고 수고했으니 쭉 마시게.”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할 건 없어. 계산은 저 나으리가 하는 거니까…………….”
그의 노골적인 말에 혜영은 약간 아미(蛾眉)를 찌푸리는 것 같았지만 두말 않고 술을 쭉 마셨다.
“어때, 술맛이 괜찮나?”
“예.”
“그럼,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건데…, 왜 저 안주에 해주분(解酒粉)을 뿌려 놨는지 대답을 해 주실까?”
그녀는 잠시 경악하더니 곧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건, 소첩들이 술에 취해 버리면 제대로 시중을 못 들기에 저희들이 술을 깨기 위해 준비해 둔 겁니다. 그건, 그건・・・ 나으리들께서 드시라고 준 비한 게 아니죠.”
“그래?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있겠어.”
또다시 국광이 직접 술을 따라 쭉 마시자 취월이 말했다.
“나으리, 혜영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다른 아이를…..”
국광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야, 나는 이 아이로 충분해. 혜영아, 금을 이리 다오.”
“여기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국광이 금을 달라고 하자 옥영진이 궁금해서 물었다.
“그사이에 금도 배웠나?”
“아뇨, 한번 만져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묵향은 기분 내키는 대로 현을 튕겼다. 보다 못한 혜영이 국광에게 금의 현을 어떻게 다루는지 조금 가르쳐 줬다. 조금 지나자 국광은 아주 자연스럽 게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소리를 내 보더니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그 튕기는 소리가 하나의 곡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두 여자는 처음에는 장난 같던 국광의 솜씨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걸 보고, 처음에는 금을 잘 타는 사람이 장난 삼아 못 타는 척하며 자신들을 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경악하기 시작했다. 약 한 시진 정도 뜯어 대니 그 실력은 이미 보기 드문 명인(名人)의 수 준에 올라 있었다. 국광이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동을 현을 통해 분출해 나가자 급기야는 혜영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였다. 그런데 갑자기 국광이 연 주를 중단했다. 모두 곡에 취해 있다가 음악이 멈추자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국광은 금을 혜영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정말 아주 좋은 소리가 나는군.”
“이렇게 잘 타는 줄 몰랐는데, 내 다음에 좋은 금을 선물함세.”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때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며 아름다운 여인이 금을 가지고 들어왔다.
“혜영아, 너는 나가거라.”
그 여인은 국광에게 깊숙이 인사를 했다.
“고인(高人)을 몰라 뵙고 소녀가 맞이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네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저 아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내보내는 거지?”
“혜영이가 잘못한 게 아니라 혜영이의 능력으로는 나으리가 힘에 부친지라 제가…”
“나는 혜영이 나으니 자네는 돌아가게.”
“하지만 이건 저희 루에서………….”
“자네가 꼭 나를 대접해야 하는 것이 루의 규칙인가?”
“루의 규칙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술자리에서 옆 사람이 바뀌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 아이를 다시 불러다 주게.”
“그렇지만 금에 있어서는 혜영이보다 낫습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는지요.”
“내가 원하는 건 금 실력이 아냐. 혜영이는 각법(脚法)만 익혀서 내가 기습당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하지만 너 같은 애가 옆에 있다가 기습하면 나는 감당하기 힘들지.”
금을 든 여인의 얼굴색이 노래졌다. 옥영진도 대경해서 물었다.
“저 아이가 무공을 할 줄 안단 말인가?”
“그럼요, 제가 검을 풀지 않겠다고 한 것도 이 술집에 원체 고수들이 많아 만약에 어떤 일이 벌어지면 제 짧은 무공 실력으로는 검 없이 나으리를 보 호하기 힘들기 때문이지요. 여기 같으면 그래도 밖으로 탈출하기가 쉽기에 따라 들어온 겁니다.”
“몰랐군. 여태껏 오면서도 여기에 고수들이 있다는 건 전혀 짐작을 못 했는데………..”
“그건 나으리 탓이 아니죠. 남자의 경우 무공을 익히면 태양혈이 불쑥 튀어나오지만 여자는 아니니까요. 거기다 자신의 내력(內)이나 무공 정도를 숨기는 방법들이 많지 않습니까? 혜영도 일부러 장법이나 그런 손을 사용하는 무공을 익히지 않아 보통 손이나 얼굴, 눈만 보고는 알아내기 힘들죠.” “그럼 자네는?”
“저요? 참 설명하기 힘들군요. 그냥 느낌이랄까… 여기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이곳에 고수들이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 아이들이 들어올 때 저 아이들도 무공을 익혔다는 느낌이 오더군요. 특히나 제 옆에 앉은 아이는 그래도 각법만 익힌 것 같아서…………. 이봐 너는 나가라구. 나는 금음도 좋 지만 마음 놓고 술을 마시고 싶어.”
여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고 혜영이 다시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을 다시 불러 주어 감사한 마음과 엄청난 고수인 것 같은 정체 모를 사내에 대한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술을 마셨지만 이곳이 무림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걸 눈치 챈 사람은 없 었기 때문이다. 혜영은 용기를 내어 국광에게 말했다.
“나으리는 참 불가사의한 분이군요. 처음에는 옥 나으리가 데리고 오신 무관인 줄 알았는데…………….’
“왜 무관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관부에 있는 사람은 그 정도로 무공이 고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라고 생각하나?”
“혹시… 무림의 어떤 방파에?”
“아냐, 나는 그냥 옥 나으리의 수하일 뿐 어떤 무림인도 아냐. 그런데 너는 왜 각법만 익혔냐?”
“저희 루에서는 모두 처음에는 각법을 익힙니다. 어렸을 때부터 각법을 익히면 다리가 날씬하고 탄탄해서 손님들이 좋아하시거든요.”
“오호…, 공력이 충분히 쌓여 손의 모양이 망가지지 않을 때쯤 손을 사용하는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는 거군. 기루의 여인이 무공을 배워서 뭘 하려 고?”
“그냥 호신과 미용을 위해섭니다.”
“호신을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과한 편이지만. 그냥 그렇다고 해두고, 참, 술을 마시니 국화 생각이 나는군. 혹시 여기 국화가 있으면 가져다주겠 나? 한 송이라도 좋아. 안 되면 국화 그림이라도 좋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혜영은 밖으로 나가더니 국화 한 송이를 물병에 담아 가지고 왔다. 물병을 탁자 위에 놓자 국광은 추억에 잠기는 듯 평안한 눈으로 국화를 지그시 바 라보며 술을 마셨다. 국광이 술만 마시자 혜영이 안주를 집어 주었다.
“술만 드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안주도…….”
“나는 안주는 안 먹어…………. 너는 지붕 위에 있는 녀석보고 지금 사라지지 않으면 몸통 위에 머리가 붙어 있기 힘들 거라고 전해 줘.”
“예?”
“아, 지금 도망갔으니 전할 필요는 없겠군. 여긴 편히 술 마시기는 정말 힘든 곳이야.”
국광은 열심히 술을 마셔 댔다. 혜영이나 그곳에 있는 다른 여자들도 이 정도 주광(酒)은 본 적이 없었다. 국광은 혼자서 거의 열 병의 술을 마셨
다. 그가 마시는 술은 아주 향기롭고 맛있지만 상당히 강한, 미옥주(迷玉酒)라는 술이다. 그 맛과 향기에 취해 마시다 보면 정신을 잃기 십상이다. 그 런데도 국광은 보통 무림인들이 하듯 내공을 통해 술기운을 몸 밖으로 토해 내지도 않고 그냥 술을 마셔 대는 것이다. 보통 내력이 강하지 않고서는 여섯 병을 넘기기 힘든 술을 이렇듯 마시는 걸 보고 그들은 놀랐다. 혜영이 말했다.
“천천히 드시지요. 미옥주는 아주 독한 술입니다.”
“상관없다. 돈 계산할 나으리와 가까운 친구, 그리고 좋은 술이 있으니 망설일 게 무어냐? 또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술을 마셔 보겠나?”
“자네, 이 술맛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내 몇 통을 구해다가 집에 가져다 두지.”
“뭐… 그렇게 마음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 술이나 마시면 되죠. 그리고 제일 좋은 건 안 마시는 거죠. 술을 마시는 건 몸에만 안 좋을 뿐입니 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폭주를 할 필요는 없잖나?”
“살펴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정말 대단한 고수로군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본문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해요.”
“노력은 해 보겠지만 거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지금 옥영진 대장군의 밑에 있는 것은 구명에 대한 은혜 갚음 때문입니다. 저자를 떼어 놓으려면 옥 영진을 없애는 수밖에 없죠.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번 시도를 해 보세요.”
“벌써 해 봤습니다. 본문의 1급 살수를 보내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옥영진은 살아 있다는 건가요?”
“예, 밤에 잡입하는데 뒤에서 갑자기 강렬한 살기가 느껴지더니 곧바로 목에 싸늘한 검이 와 닿더랍니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기에 기절할 만큼 놀 랐다고 하더군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지금 당장 사라지지 않으면 몸뚱이 위에 있는 물건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죽자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미행은?”
“미행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살수만 쫓아냈을 뿐 더 이상의 행동은 없었습니다.”
“거의 짐승에 가까운 감각을 지니고 있는 자로군요.”
“예, 적이 된다면 가장 상대하기 힘든 부류죠. 그 때문에 마교의 교주도 그를 없애려고 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여간 어떤 변화가 없는지 그를 감시하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과거에 대한 정보 제공을 미끼로 본문에 가입할 의사가 없는지 물어보세요. 그가 복수하는 데 본문이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거라는 말도 함께 하세요. 그런데 마교의 상태는 전과 같나요?”
“예, 지금도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는데, 어떤 계기만 있으면 사건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누가 유리한가요?”
“장인걸 부교줍니다. 묵향이란 희대의 고수를 없애는 데 대단히 비열한 방법을 동원했기에, 교내의 핵심 고수 상당수가 교주에게 등을 돌렸거나 아 니면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상탭니다. 장인걸은 묵향과 처음부터 끝까지 정면 대결을 펼쳤기에 이번 암살이 그의 명성에는 별 지장을 주지 않 았던 모양입니다. 교주의 교체에 있어 가장 강력한 열쇠를 쥐고 있는 자들은 원로원이라고 봐야 합니다. 원로원에서 지금의 사태를 방관할지 아니면 누군가의 손을 들어 줄지에 따라 주인이 결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전대 교주가 간섭할 가능성은?”
“전대 교주는 지금의 난국이 교주의 치졸한 암습에 의해 벌어진 일이기에 중립적인 위치에서 관망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속하의 판단으로는 나서 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교주를 폐하고 현재 소교주를 올릴 수도 있겠지만, 소교주의 무공은 아직 부교주들과 겨룬다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 다.”
“누가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현 무림의 정세가 결정될 테니까 신경 써서 감시하세요. 지금까지의 정보로 볼 때 장인걸은 최악의 상댑입니다. 그는 상당히 호전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고, 혈교의 무공을 흡수한 전례가 있는 만큼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