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권 6화 – 행운의 여신 II

행운의 여신 II

귀가한 옥영진은 국광과 옥항을 불렀다. 옥영진이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그의 서재였다. 서재는 언제나 그렇듯이 단출한 꾸밈새에 여러 가지 무기 들과 무구(武具)들이 놓여 있었다. 한 구석에는 몇 가지 새로이 가져다 놓은 것들이 있었는데, 두 벌의 갑옷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부속 장비들, 또 새로운 무기들이 몇 개였다. 옥영진은 그 앞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곧 몽고와의 전쟁이 벌어질 거야. 그때 나는 너희들을 데리고 가고자 한다. 둘 다 전쟁터는 처음일 테니… 노부가 몇 가지 준비해 온 것이 있는데,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보게나.”

옥항은 신품의 흑색 갑주 앞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살며시 손을 댔다. 옥영진이 그 모양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갑주는 국광의 것이고 네 것은 저것이다.”

옥영진이 지목한 갑주는 한눈에도 국광의 것보다도 더욱 두터운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슬며시 한번 만져 본 옥항이 항의했다.

“이건 너무 무겁다구요. 이걸 입고 어떻게 싸워요?”

“국광에게는 이미 물어보고 구해 온 게야. 국광은 워낙 무공이 높아 갑옷 따위가 별 필요 없지만 너는 달라. 이 정도가 아니면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살아남기 힘들지.”

그때 국광이 이것저것을 보더니 직경 1척 정도의 방패를 가리켰다.

“저건 뭔가요?”

“저건 손에 장착하는 ‘착완순着腕盾)’이라는 작은 방패야. 한번 사용해 보겠나?”

옥영진은 직접 국광의 왼손에 착완순을 붙여 줬다. 일반 방패와는 달리 이건 넓은 가죽끈으로 단단히 팔에 고정해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착완순 은 손목부터 시작해서 팔꿈치를 약간 벗어날 정도의 크기로, 손목을 자유로이 쓸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착완순을 부착한 상태에서도 활을 쏘거나 검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 크기가 작기에 방어할 수 있는 폭이 한정되므로 일반 어림군에서 는 사용되지 못하고 무공이 뛰어난 흑풍단의 무사들에게만 주어지는 독특한 방어 병기이다. 착완순으로 막을 수 없을 만큼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면 손목까지가 자유롭기에 말에 매어 놓은 넓은 방패를 잡아서 사용할 수도 있으므로 무사들에게 아주 호평을 받는 몇 안 되는 장비 중 하나였다.

국광은 착완순을 왼손으로 퉁퉁 쳐 보았다.

“뒤쪽에 부드러운 안감을 대서 충격이 적군요.”

이번엔 옆에 놓여 있는 5척 길이의 마상용(馬上用) 장도(長刀)의 긴 자루를 두 손으로 잡고 휘둘러 보았다.

“도를 사용하는데도 거의 착완순이 방해되지 않는군요. 잘 만들어진 방팹니다.”

“그렇지. 하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 면적을 크게 만들 수 없어서 동작이 느린 일반 사병들은 사용할 수 없어. 그래, 그 장도(長刀)는 마음에 드나? 항 아는 창을 사용하지만 자네는 오직 검밖에 안 쓰길래 마상용 장도를 가져왔네.”

“아주 좋군요. 무게도 알맞습니다.”

국광은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괴이한 물건을 보았다. 그건 착완순처럼 팔에 붙이도록 만들어져 있지만 착완순처럼 둥근 방패가 붙은 게 아니라 삼각형의 긴 쇠막대기가 붙어 있다는 점이 달랐다. 모양만으로 봤을 때 팔에 장치하여 사용하는 것은 분명했다. 길이도 다양 했다. 어떤 것은 길이가 반 척 정도 되었고, 어떤 것은 1척 정도 되기도 했다. 1척 3촌 정도 길이에 끝 부분이 유연하게 휘어져 올라간 이상한 것도 있 었다. 국광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뭡니까?”

“그건 검지판(劍止版)이라는 거야. 이렇게 쓰지.”

옥영진은 그걸 오른손에 감아 보여 주었다.

“착완순은 왼팔에 장착하지만 착완순 자체가 넓은 물건이라 검을 사용할 때 자연 속도가 떨어지지. 그래서 만들어진 게 이 검지판이야. 이건 검을 쓰는 오른팔에 장착해서 상대방 검이나 창을 막는 거지.”

국광이 검지판을 이리저리 만져 보고 있는데 옥영진이 덧붙였다.

“상대방의 검이 옆으로 흐르는 걸 방지하기 위해 검지판 위에는 요철의 문양을 만들어 놓았네.”

“아, 예…….”

“자네처럼 무공이 강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대부분 무공이 그렇게 강하지 못한 사람은 마상 전투에서 갑자기 날아오는 적의 검을 피하거나 막기는 어려워. 그때 이 검지판을 이용하지. 말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벌어지는 전투라면 단순히 뛰어서 뒤로 물러설 수도 있지만 말이란 놈은 그 렇게 주인의 마음에 맞게 잘 움직여 주는 놈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만든 거야.”

“이건 왜 이렇게 생겼죠?”

이상하게 생긴 검지판을 보고 국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접 장착해 보면 알 수 있지.”

그것을 팔에 끼워 주자 국광도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과연…….”

이 검지판은 너무 길어서 손의 움직임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일부러 손목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완만하게 휘어져 올라가 손목의 움직임에 방해를 주 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검지판에는 검의 흐름을 방지하기 위해 요철의 문양 외에도 삼각형 쇠막대의 곳곳을 장식하는 우아한 음양각 문양이 품위를 더하고 있었다.

“노부도 이것 덕분에 목숨을 구한 적이 있어. 검지판과 착완순은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만들어 낸, 흑풍단만이 가지고 있는 방어 장비지. 보통 이 민족 정벌에 나서면 일대일의 대결은 꿈도 못 꿔…………. 대부분이 최소한 세 배, 네 배 이상의 적들을 상대하게 되니까 난전(亂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비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지. 마음에 드는 것들을 준비해 두게나. 아마 늦어도 닷새 이내에는 출동하게 될 테니까………….”

국광은 약간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이런 걸 꼭 해야만 합니까?”

“자네가 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모두 장비를 갖추니까 자네만 맨몸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러자 국광은 잠시 생각하더니 1척 정도의 짧은 검지판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러면 저는 이 두 개만 하죠. 그래도 걸리적거리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좋을 대로 하게나. 하지만 항아, 너는 이거, 이거, 이것들 모두 착용해라. 이건 할애비로서 명령이야.”

4일 후 황제로부터 무력 정벌에 대한 윤허가 떨어졌다. 송의 주력 부대는 요와의 국경선으로 급속도로 이동하여 재배치되기 시작했으며, 찬황흑풍 단은 요와 전쟁 중에 있을지도 모를 몽고의 변란을 사전에 억제하기 위해서 몽고 국경 지대를 소탕하는 임무를 띠고는 북상하기 시작했다. 흑풍단은 사전에 요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요와 전쟁이 시작된 후에 몽고를 치라는 지시를 받았기에 그 이동 속도는 느렸다. 중경에서 몽고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요까지는 멀어서 핵심 장수들이 급히 출발하여 국경에 배치된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는 데는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 다.

찬황흑풍단의 모든 장병은 검은색 갑주를 착용한다. 방패도, 말에 입히는 마갑(馬鉀)도 검은색………. 흑풍단이라는 이름에 맞게 검은색 일색이다. 흑 풍단의 군기(軍旗)마저도 검은색이다. 검은 바탕에 금실로 수놓은 ‘皇)’자가 흑풍단의 가장 호화로운 색깔이었다. 흑풍단은 1천여 명씩 열 개 부대 로 나뉘고, 그 천인대(千人隊)는 다시 열 개의 백인대(百人隊)로, 백인대는 열 개의 십인대(+)로 나뉜다.

각 부대에는 장(長)이 있어 자신보다 높은 장(長)의 명령을 전달받은 즉시 하부의 장(長)들에게 지시하기 때문에 어느 부대보다 빠른 행동력을 보인 다. 이건 찬황흑풍단만이 가진 독특한 구성으로, 상부의 명령이 신속히 하부까지 전달되도록 만들어진 장치였다. 흑풍단처럼 소수 정예 부대를 효과 적으로 활용하려면 상부의 명령에 따라 그 하부 병력들이 신속히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열 개의 천인대는 네 개의 전군(軍), 네 개의 중군(中軍), 두 개의 후군(後軍)으로 나뉘어 진격했는데, 후군은 휘하에 배속된 어림군 1만 명과 각종 보급 물자와 2만여 필의 말을 수송하는 수송대의 호위 임무도 함께 수행했다. 흑풍단은 기병대였기에 만일을 대비하여 각자 세 필씩의 전마(戰馬)가 배정되었고, 따라서 말들을 보호하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전군(前軍)은 그중 한 개의 천인대를 십인대 1백 개로 잘라 부챗살 모양의 정찰망을 펼쳐 불의의 기습에 대비한 정찰 진용을 훈련하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옥영진 대장군의 말대로 찬황흑풍단은 기습을 받지 않는 한 쉽사리 패배할 부대가 아니었기에 그 휘하의 장수들도 기습을 받지 않도 록 힘을 다했다.

시간은 충분했으므로 옥영진 대장군은 일종의 기동 훈련도 겸해서 이동했는데, 그 와중에 옥영진의 골치를 썩이는 부대가 사륙(四六) 백인대(百人 隊)였다. 흑풍단에서는 각 부대들을 지칭할 때 숫자를 사용한다. 각 부대들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잘라져 있기 때문에 그 위쪽부터 숫자를 붙여서 나가면 하나의 부대 이름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칠칠(七七) 백인대라고 한다면 제7천인대(第七人隊) 소속의 제7백인대(第七百人隊)가 되는 것이 다. 그리고 그중의 제8십인대를 말하려면 칠칠팔 십인대라고 하면 된다. 전투 중에도 이런 식으로 손쉽게 구체적으로 소부대까지 지칭할 수 있기에 이런 약식 명명법은 꽤 인기리에 사용되고 있었다.

옥영진 대장군의 골칫거리인 사륙 백인대는 개개인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나지만 고관의 자제라거나 아니면 무림에서 약간 명성을 얻었다고 위세를 부리느라 대체적으로 말 안 듣는 녀석들만 모아놓은 부대다. 거기에 다루기 힘든 여자 애들까지 25명이나 속해 있었다.

원래 무공의 자질로 단원을 뽑는 것이 흑풍단이다 보니 무공이 뛰어나면 여자라고 안 받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을 받고 보니 제멋대로인 계 집들이 몇 있어서 후회막급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대장 자리를 비워뒀다가 국광에게 맡겼는데 역시나 통제가 안 되고 있었다. 하기야 국광 자체도 통제 불능의 인간이었으니…………. 그렇다고 다시 백인대장을 갈아 치우기도 뭐하고 해서 속만 끓이고 있는 것이 다.

처음 기동 훈련이 끝나고 국광에게 세 명의 여자가 포함된 열 명의 십인대장들이 몰려왔다. 갑주를 입혀 놓고 보니 껴입은 것이 많아서 그런지 사낸 지 계집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모두 돼지만큼 뚱뚱한 모양으로 숨을 쉴 때마다 비늘 갑옷이 약간씩 부풀어 올랐다가는 다시 가라앉았다.

계집들은 역시 계집인지라 약간의 모양을 내긴 하지만 그래도 검에 장식한 수실을 좀 화려한 걸 쓴다거나 아니면 검지판이나 착완순의 문양이 화려 한 정도이다. 그나마 그건 모두 다 검은색에서 음양각의 문양이나 차이가 날 뿐인 데다가 사내 녀석들 중에서도 그 정도의 화려함을 즐기는 인간들은 많으니………….

상대를 알아낼 것이라고는 갑옷에 그려진 각 천인대, 백인대, 십인대를 표시하는 숫자밖에 없었다. 국광은 제4천인대, 제6백인대에 속해 있어서 그의 갑옷에는 「四六사륙)」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흑풍단에서는 그 문양이나 숫자가 적게 그려진 사람이 가장 끗발이 높은 사람이었으니, 단주 나 부단주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각 천인대장들은 한 자리 숫자만 쓰인 갑주를, 백인대장들은 문양 뒤에 두 자리 숫자, 최고 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인대의 대원들은 무려 네 자리 숫자의 번호를 달고 있었다.

솔직히 국광의 수하로 있는 자들에게 국광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전술 기동에 대해 상세히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무공이 높아 보이지도 않는다. 송에서 무장들은 검을 단전 옆, 그러니까 완전히 옆구리는 아니고 그렇다고 정면도 아닌 조금 앞쪽에 착용한다. 하지만 이 녀석은 건방지게 도 야만족들처럼 검을 엉덩이 부분에 걸릴 정도로 뒤로 달고 있었다. 거기에 모두 착용하고 다니는 착완순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검지판 두 개만 덩그러니 감고 있는 데다가, 갑주를 입은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엄심갑이나 기타 보호구는 입지도 않고 얄팍한 경갑주만 ‘체면상 입어 준다’는 듯 입고 있었다.

이런 꼴을 보니 묵직한 철갑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그들로서는 뱃속이 뒤틀리지 않을 수 없다. 옥영진 대장군의 후광으로 들어와서 대장 노릇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들도 믿는 구석들이 있어 그런 것에 주눅 들 사람들이 아닌지라 한판하러 온 것이다.

그들 중에서 선두에 선 인물이 말했다. ‘四六三(사삼)’이라는 숫자로 보아 제3십인대의 대장인 냉비화녀(飛花) 마화(馬花)임이 분명했다. 투구 속에서 여자의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와 국광의 짐작이 정확했다는 걸 말해 줬다. 마화는 북동원수부 부원수인 마룡 대장군의 손녀로서 대단한 무공 을 지닌 여걸이었으며, 외호와는 달리 성격이 급하면서도 호탕했다. 국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사륙 백인대의 대장이 될 것이 확실시되는 여걸이었 기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서생 같은 국광이 대장 자리를 차지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십인대장들을 이끌고 항의하러 온 것이다.

“이봐, 신참! 너 전투교본(戰敎本)을 읽어 보기나 한 거야? 흑살천마진(黑殺千馬陣)을 아예 모르고 있잖아?”

“흠…, 이제부터 읽어 볼 생각이다. 그러니 그런 잔소리라면 집어치우고 해산해.”

“뭐라고? 이게 정말, 단장 나으리의 후광을 믿고 까부는 거냐!”

마화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검 손잡이 끝에 묶인 붉은 수실에는 비취로 만든 작은 꽃송이가 매달려 있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외호가 만들어진 기 원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 검은 대단히 좋은 보검으로 그녀가 검을 뽑자 싸늘한 예기가 뻗어 나왔다. 모두 흠칫하는 표정들이었으나 정작 국광은 무 표정하게 마화를 쳐다볼 뿐이었다.

“어쭈, 내가 찌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네가 찌르고 안 찌르고는 상관없고, 너희 모두가 다 덤벼도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어. 모두들 닥치고 돌아가!”

싸늘한 대답을 남긴 국광이 몸을 돌리자 분기탱천한 마화가 검을 찔러 들어왔다. 국광의 비웃는 듯, 깔보는 듯한 대답을 듣자 자신이 한가락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머지 십인대장들도 심화가 치밀어 말릴 생각은 접어 두고 두 사람의 격돌을 지켜보았다.

국광은 왼편으로 몸을 틀어 마화가 찔러 오는 검을 살짝 피하면서, 흥분한 나머지 너무 깊이 들어온 마화의 투구 뒤통수를 손목까지 올라와 있는 왼 손의 검지판으로 후려쳤다.

퍽!!

엄청난 소리와 함께 마화는 거의 1장여나 날아가서 저쪽에 철퍼덕 떨어졌으나 곧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아무리 검지판을 이용한 일격이었다고 해 도 투구를 때린 것이기에 그녀에게 큰 타격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심한 충격으로 뒷부분이 찌그러든 그녀의 투구는 날아가 버렸고, 안면보호대 위 로 오똑한 콧날과 아름답지만 타고난 성깔을 나타내는 쌍심지 돋은 두 눈과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흥! 태극권(太極拳)? 제법 재주가 있었군. 검을 뽑아랏!”

엄청난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건조한 대답뿐이었다.

“알아서 뽑을 테니 좋을 대로.”

“흥! 적수공권이라고 봐줄 거라는 생각은 마랏.”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국광의 왼쪽 가슴을 향해 섬전과 같은 일초가 날아왔다. 국광이 왼손의 검지판을 이용해 막는 그 순간 검은 방향을 바꿔 원을 그리며 그의 허리 아랫부분을 쓸었다.

“제법 괜찮군.”

국광은 왼손을 내려 검지판으로 검을 막으면서 그대로 오른발을 마화의 아랫배를 향해 날렸다. 마화는 급히 몸을 왼편으로 틀었으나 국광은 피하는 마화에게 두 번째 발차기를 날렸다.

퍽!

단전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마화의 몸이 붕 날아 다시 1장여를 날아오르더니 뚝 떨어졌다. 두터운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각법에 의한 충격은 그렇 게 크지 않았으나 갑옷의 무게를 더해서 떨어져 내린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화에게는 그 충격보다도 자신의 자존심이 패대기쳐진 것이 더욱 억울했다. 다시 일어서는 마화의 몸에서는 짙은 살기(氣)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화가 검을 꽉 잡고 자세를 가다듬는 순간 국광의 태도가 달라졌다. 국광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 검은 짙은 묵빛의 특이한 검으로 장식 없는 수 수한 검집이 형편없는 싸구려처럼 보여 아무도 주의하지 않았으나 언뜻 봐도 대단한 보검이었다. 천천히 검을 뽑아 앞으로 내밀며 대강의 수비 자세 만 잡았는데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검이 없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엉성하게 보이는데도 빈틈이라고는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 쩐 일인지 압도되어 빈틈이 보여도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네가 살기를 품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엉성하게 앞으로 뽑아낸 묵빛 검에서는 더욱 강렬하게 묵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던 십인대장들 중 한 명의 입에서 힘 빠진 듯한 목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기충검(御氣充劍)………….”

살기를 내뿜고 필살의 검법을 펼치기 위해 자세를 잡았던 마화의 검은 어느새 슬금슬금 내려오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으로 저 정도의 고수를 상대하 기는 힘들다는 것을, 아니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어기충검이라면 신검합일은 통과했고 어검술(御劍術)에는 못 미치는 절정고 수들이 펼치는 절예다. 화경(化境)에 근접한 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는 고급 검법이었던 것이다. 마화의 살기가 사라지자 국광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 검을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싸울 의사가 없으면 해산해라.”

돌아서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는 국광을 경악한 눈으로 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마화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는 누구냐…………..”

국광이 아무 말 없이 멀어져 가자 째지는 음성으로 악을 썼다.

“누구냔 말이다!”

하지만 국광은 가 버렸고 멍청히 서 있는 마화에게 주위에 남은 십인대장들이 모여 들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위로했다.

“저 정도의 고수라면 져도 창피할 거 없어.”

“맞아요. 저 정도 고수라면 무림을 10년간 헤매고 다녀도 만나기 힘들어요. 비무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구요.”

“실망하지 마요.”

그들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마화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정도의 고수가 무슨 할 일이 없어서 흑풍단에 들어온 거지? 겨우 장군이란 칭호를 받고 싶어서? 무림에 나가면 부귀와 공명이 함께할 텐 데, 겨우 그것도 백인대장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마화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니…, 믿지 못하겠어. 저 녀석이 누군지 단장에게 물어봐야겠어.”

그러자 옆의 십인대장이 말했다.

“미쳤냐? 대장군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너를 만나 준다는 거야?”

“내 성격에는 안 맞지만 할아버지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물어봐야겠어.”

“휴…, 어쩔 수 없군. 모두 같이 가자. 그러면 만나 주실 거야.”

옥영진 대장군은 십인대장들의 요청을 물리치고 싶었지만 그들의 배후에 대단한 인물들이 많았기에 만나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군례를 올리는 십인 대장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둘러보며 옥영진 대장군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마화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사륙 백인대장은 도대체 누굽니까?”

옥영진 대장군은 이해가 간다는 눈초리로 덕지덕지 흙먼지가 붙은 마화의 갑옷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미 한판해 보고 알았을 텐데 뭘 물어보나?”

“하지만 소장(小長)은 알아야겠습니다. 그런 고수가 왜 여기 있는지.”

그러자 옥영진이 빙긋이 웃었다.

“나에게 빚이 있다면 이해하겠느냐?”

“빚이요?”

“그렇지…………. 그는 너희들도 보았듯이 무림인이다. 하지만 개인의 무공만 강할 뿐 집단전에는 별 경험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너희들이 그를 잘 이 끌어 주어라.”

잠시 멍청하게 있던 마화가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저 정도의 고수가 대장군께 빚이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그와 동시에 마화의 귀에는 전음이 들려왔다.

〈그는 지금보다 더 대단한 고수다.〉

마화는 경악했다.

“예?”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나 강하다는 말이야?’

<어쩐 연유인지 모르나 그는 매우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로 본좌의 아들에게 발견되었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하지만 모든 기억은 잊어버린 상태…………. 그래서 근래에 다시 무공을 익혀 저 정도까지 올라간 거다. 하지만 본좌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가진 바 모든 실력을 다 발휘하는 것 같지 않 아. 이런 사실을 전음으로 말해 주는 이유는 그의 상처를 검사한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그가 암습을 당했다고 하기 때문이야. 그것도 대단히 가까운 상대에게…………….>

마화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전음으로 반문했다.

<대단히 가까운 상대라구요?>

〈그렇다. 너같으면 친밀하지 않은 상대에게 네 검을 맡기고 등을 보이겠냐? 그의 상처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상대를 모르는 만큼 이 사실을 절 대로 외부에 유출시키지 마라. 알겠느냐?>

마화는 포권을 하며 전음으로 말했다.

<목숨을 걸고…….>

옥영진의 막사에서 나온 그들은 옥영진 대장군과 마화의 전음을 이용한 대화에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언니는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어 낸 거예요?”

“응…….”

“그래, 대장군께서 뭐래?”

“말할 수 없어. 안 그랬으면 전음으로 말할 필요가 없잖아? 하지만 이건 단언할 수 있어. 우리가 만난 대장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

“어째 우리가 이번 원정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지극히 높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래, 행운의 여신이 우리에게 다가온 건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