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권 7화 – 단편적인 과거와의 만남
단편적인 과거와의 만남
흑풍단은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서 국경에 도착했다. 중간에 계속 기동 훈련을 펼치며 왔기 때문에 장병들에게 한가한 행군은 아니었다. 흑풍단 전원이 참여한 기동 훈련과 전군, 중군, 후군 각각의 훈련도 병행되었다. 거기에다 정북원수부로부터 지원받은 1만의 어림군과 통합 방어 훈 련도 함께 해서 하루하루가 화살처럼 지나갔다.
이 한 달여 동안 옥영진 대장군은 변해 가는 국광의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처음 행여나 하는 생각으로 사륙 백인대를 맡겼는데, 그는 의외로 잘 통 제해 나갔다. 거기에 하루가 다르게 수하들을 이끄는 솜씨가 좋아졌으며, 특히나 난전(亂戰)의 상태에서 수하들을 장악하여 지휘하는 실력은 탁월했 다. 옥영진 대장군은 얽히고설킨 난전의 상황에서 수하들을 이끌고 가상의 제5천인대의 중앙을 돌파하려고 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정도의 상황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수하들을 가장 피해가 덜 가도록 규합하여 이끄는 실력은 그저 타고날 수는 없어. 난전 속에서 주위 상황을 폭 넓게 관찰하고, 또 적의 집중 공격이 있을 때는 본대와 뭉쳐서, 공격해야 할 때는 본대와 이탈하며 전광과 같은 속도로 수하들을 휘몰아치는 저 솜씨. 아무래도 저자는 과거에 상당수의 수하들을 지휘해 본 경험이 있음에 틀림없어. 도대체 저자의 내력이 무엇이기에…………’
제5천인대와 제4천인대의 가상 대결은 제4천인대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제4천인대의 일부가 갑자기 중앙을 돌파하여 제5천인대의 대장을 거 꾸러뜨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옥영진 대장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무공은 뛰어나지만 너무 좋은 출신 배경 때문에 말썽이 끊이지 않던 사륙 백인대가 이제는 흑풍단의 최고 정예로 자리 잡은 것이다.
훈련이 끝나고 국광은 수하의 십인대장들을 불러 모았다. 한 달여가 지난 지금 국광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뛰 어난 무공 실력만이 아니라 그 지휘, 통제력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모두 모여 있는데 마지막으로 마화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대장?”
국광은 짐짓 목소리에 무게를 잡았다.
“대장군의 명령이다. 국경선과의 거리는 이제 120리(약 48킬로미터). 오늘부터 여기서 야영하면서 정벌이 시작될 때까지 주둔한다. 내일부터는 어 림군과의 통합 훈련에 더욱 역점을 둘 예정이라고 하니 그리 알고 있어라.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 1개 천인대는 적진을 정찰하기 위해 투입될 예정이 다. 우선 제7천인대가 갈 거야. 그러니 자네들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훈련이 끝나고 나면 수하들을 푹 쉬게 해서 정찰 활동에 대비하도록.”
제2십인대의 대장 정상(鄭想)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대장, 정벌은 언제 시작됩니까?”
“열흘 후다. 지금 들어오는 정보로는 철진천이 이미 대 병력을 소집하여 방어선을 치고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흑풍단이 국경 근처에 주둔 중이니 신경이 쓰이겠지. 대장군이 계속 훈련을 하는 것도 이게 침략이라는 걸 숨기려는 의도인 것 같으니까…………… 몽고에서 따지면 훈련 중이라고 대답하면 될 테고.”
여기까지 말했을 때 마화가 약간 기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정하는 투로 말했다.
“오랜만의 휴식이나 다름없는데… 술을 마셔도 되나요?”
“술?”
술이라는 말이 나오자 입속 가득히 침이 고이면서 냉정하던 국광의 생각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술이라.. 마시면 군율에… 하지만, 하지만… 술이라…, 좋지.’
잠시 동안의 머뭇거림이 사라지고 이성보다는 감정의 승리!
“흠……. 어디 구할 데라도 있나? 수하들에게도 나눠 주려면 한두 통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텐데..
그러자 마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국광의 얼굴을 보고 지금 그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챘다는 듯.
“하하, 수하들 생각은 끔찍이 해 주시는군요. 이미 제가 수하들을 풀어서 대량으로 준비 중입니다. 그 때문에 늦었죠.”
“자네, 마음에 드는군. 좋아! 술값은 모두 내가 내지. 나중에 술값을 계산해서 받아 가도록!…………. 그래! 좋아. 저녁에는 오랜만에 통쾌하게 마셔 보기 로 하지.”
“하하하, 통 한번 크십니다. 대장이 오시고 처음 술자린데 함께 마시죠. 수하들에게는 술을 적당량 나눠 주겠습니다. 그 녀석들은 있는 대로 마셔 대 니 많이 주면 오히려 내일의 후환이………….”
“좋을 대로 하게나. 술을 구하는 대로 본인의 막사에서 만나기로 하지.”
그러자 제7십인대의 대장인 창룡객(蒼龍客) 임충(任充)이 나섰다. 그는 무림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 적도 있는 검객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잔머리 굴리는 게 제법이었다.
“아뇨, 대장의 막사는 대장군의 막사와 너무 가깝습니다. 제 막사에서 하기로 하죠.”
“좋아, 술이 준비되는 대로 기별을 하게나.”
“예.”
국광은 잠에서 깼다. 어제저녁 수하들과 통쾌하게 술을 마신 후 마화를 비롯한 네 명의 십인대장이 주량을 이기지 못하고 뻗어 버리자 그들을 각자 의 막사에 던져 넣고 돌아와서 잠시 잠이 들었다. 그의 단잠을 깨운 것은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스산한 기분이었다. 국광은 정신이 들자마자 소리 나지 않게 살며시 묵혼검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신법을 전개하여 막사 사이로 몸을 감추며 이동했다.
“방향이 틀린 것 같은데?”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전방의 막사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던 흑의를 입은 자는 기겁을 해서 잠시 굳어 버렸다. 그걸 보고 국광이 다 시 입을 열었다.
“대장군의 막사는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야. 하기야 그 사실도 여기서 살아나가야 필요하겠지만…….”
국광은 소리가 거의 나지 않게 검을 천천히 뽑았다.
스르르르릉………….
흑의를 입은 사내는 국광을 돌아보고 묵빛 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을 만나러 온 겁니다. 묵혼(墨魂)의 주인을요. 속하는 자객이 아닙니다.”
국광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뭐? 크흐흐…………. 원, 농담도……..”
그러면서 천천히 검을 올리는데, 상대의 애원하는 듯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상대의 몸에 무기가 없다는 것도 알아냈다.
“요즘은 무기도 없이 암살을 하나? 권이나 장을 이용하면 시끄러울 텐데…………. 하기야 극음(極陰)의 장법이나 암기도 있으니…………….”
흑의를 입은 사내는 문주의 지시에 따라 비무장인 상태로 이리 들어온 것을 신께 감사했다.
“저는 비무장입니다. 대인께서도 느끼실 테지만 저는 암살자로 키워진 인물이 아닙니다. 첩자 교육만 받았을 뿐…………. 제가 익힌 검법은 정통 검법이 라구요. 검은 저쪽에 풀어 놓고 왔습니다. 속하는 문주의 지시를 받고 당신을, 묵향(香) 대인을 만나러 온 겁니다.”
“묵향…이라고?”
‘왠지 친근한 이름이군.’
“예, 저희 문주께서는 대인께 말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문주께서는 대인의 과거를 다 알고 계십니다. 묵향 대인께서 본문에 들어오신다면 당 신의 과거를 모두 알려 드릴뿐더러, 최선을 다해 대인에게 암해를 가한 자들에 대한 복수를 도울 것입니다.”
국광은 검을 천천히 검집에 집어넣었다.
“재미있는 제안이군.”
“문주께서는 묵향 대인께 부문주의 자리를 제안하셨습니다. 본문의 규모로 봤을 때 대인께도 별로 손해되는 제안은 아닐 겁니다.”
“자네 혼자 왔나?”
“예.”
“그럼, 이렇게 하는 게 더 쉬울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어떤?”
“내가 자네를 족쳐서 내 과거를 알아내는 것이 번거롭지도 않고 더 빠를뿐더러 더욱 쉽지.”
복면 속 상대의 두 눈에 공포가 어렸다. 누구보다도 상대가 어떤 괴물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멋쩍은, 공기 빠지는 것 같은 웃음을 흘렸다. “헤헤헤, 소인은 대인의 과거를 잘 모릅니다. 소인을 족쳐 보셔도 얻는 건 별로 없을 겁니다.”
국광도 지지 않고 낮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흐흐흐…, 그래도 시도는 해 보고 싶군.”
국광이 천천히 다가오자 그의 눈에는 더욱 공포가 짙게 배어들었다. 최후의 희망을 걸고 그는 말했다.
“소인을 족치셔도 정말 알아낼 것은 단편적인 정보뿐……. 소인은 정말 대인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합니다. 원하신다면 소인이 아는 것을 모두 다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라.”
“대인의 이름이 묵향이라는 것, 그리고 엄청난.. 그러니까 현경의 경지에 든 고수이니 최대한 조심하고, 그냥 기척을 죽이고 잠입만 해도 대인께서 눈치 채고 나오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과연 대인께서는 이렇게 나오셨구요.”
“그리고?”
“대인께서는 아주 가까운 인물들에게 해를 당하셔서 기억을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살아서 탈출하신 것은 천행이라고 그러시더군요.”
“그 외에?”
“대인께서는 여자와 동침을 안 하셨죠?”
“그런데?”
“문주께서는 대인의 상승무공의 원천이 동자공童子功)이기에 여자와 동침을 하시면 모든 공력을 상실하게 되니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거라고 전하 라 하셨습니다.”
“사실인가?”
“어느 안전이라고……………
“동자공이라, 과거의 나도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는 녀석이었던 모양이군. 큭큭, 동자공이란 말이지………. 그 외엔?”
흑의인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사정했다.
“더 이상은 모릅니다요, 제발….”
국광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돌아가라.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으나 충고는 고맙게 듣겠다. 그리고 문주께 전해라. 본인을 그 정도로 좋게 봐 주셔서 고맙다고.. 하지만 사실 그따위 과거의 기억 정도는 없어도 그만이고 있어도 그만이야. 기억을 되찾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상대에게 내 과거에 대해 들으면, 나 는 나를 해쳤는지 기억도 없는 사람에게 복수를 해야만 해. 나는 그러기 싫어. 나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만을 행하고 싶다. 그럼 잘 가거라.” 흑의인은 운 좋게도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간다는 생의 환희를 뼛속 깊이 느끼며 쏜살같이 도망쳤다.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국광은 느릿느 릿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잠을 청했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끊임없이 쓸데없는 생각만 떠올랐던 것이다.
‘내 이름이 묵향이라고? 진짜일까? 하지만 내가 가진 묵혼검이나 묵영비하고 잘 어울리는 이름이긴 하군. 과연 나를 기습한 가까운 친구들은 누구일 까? 그리고 나의 진정한 신분은? 가족이 있을까? 그리고 부인과 자식들…………. 후훗, 생각을 해 보면 부인 따위는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자식들도, 동 자공…, 그 더러운 무공을 익혔다니 나는 평생 가도 계집을 품기는 글렀군.
맞아, 옥 대인과 청성루에 갔을 때 공연히 계집이 가까이 오는 것이 기분에 거슬리더라니………….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모양이군. 앞으로 조심해야겠 어. 잘못하면 모든 걸 잃고, 어쩌면 내 생명까지도 잃을지 몰라. 그리고 옥 대인을 보살피겠다는 약속마저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니…………… 그러고 보 면 오늘 아주 많은 것을 얻은, 운이 좋은 날이군.’
국광이 황궁무고에서 많은 비급들을 읽으면서 흥미를 느꼈던 것 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 동자공……………. 이것은 일종의 내공심법으로, 그 하나만으로 는 쓸모가 없지만 다른 내공심법과 병행해서 사용했을 때 대단한 성취를 얻을 수 있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으로서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하지 만 평생 동안 여색을 가까이 할 수 없으니 그것이 가장 큰 단점이다. 일단 여자와 성합(合)을 벌이면 그 즉시 동자공이 파괴되기 시작하며 여태껏 동자공을 기반으로 쌓아 둔 진신내공이 흩어진다. 만약 약간의 흡정술(吸精術)을 익힌 여자라면 빠져나오기 시작한 상대의 내공을 손쉽게 흡수할 수 있다.
흡정술 계통의 각종 사악한 무공들은 그 위력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걸 시전하는 데는 중요한 선제 조건이 있다. 그건 상대보다 내공이 강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상대에게 자신의 공력을 완전히 흡수당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상대의 동자공이 파괴되어 내공이 빠져나 올 때는 약간의 기술만 알고 있으면 손쉽게 흡수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봤을 때는 동자공을 익힌 남자 고수들이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된다.
국광도 이 사실을 황궁무고의 비급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흑의인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과거를 기억할 수 없기에 상대가 거짓을 말했을 것이 라는 생각이 들어도 감히 실험해 볼 엄두를 못 냈다. 만에 하나라도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