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0권 13화 – 남양에 던진 미끼
남양에 던진 미끼
“장로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다급히 들어오는 거지를 바라보는 장로의 눈빛은 그의 깊은 수련도를 말해 주듯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바로 개방 최고수라는 부운걸개(浮雲乞) 장로였다. 그의 무공이 가장 강했기에 2천의 방도를 거느리고 이곳 양양성이라는 사지(死地)에 파견 나와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의 무공이 가장 강하다면 방주도 이길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그건 그가 초식의 묘리를 벗어난다는 화경에 등극했다면 모를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개방 방주에게만 내려오는 반룡장(反龍掌)이라는 무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개방 최강의 무공은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이다. 그 무공에 대해서 극성인 무공이 바로 반룡장인 것이다. 개방의 선대들은 개방 방주의 권위 를 높이고 항차 있을지도 모르는 모반 따위를 방지하기 위해 반룡장을 개발해서 방주에게만 전수하는 치밀함을 보였던 것이다.
거지는 다급히 말했다.
“방금 전에 교주를 만났습니다.”
부운걸개 장로는 나른한 듯 하품을 쩍 하더니 퉁명스레 대꾸했다.
“여기 교주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뭐 그게 큰일이라고…….”
“그게 아닙니다. 교주가 저한테 남양에 대해서 물어보더군요.”
부운걸개 장로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남양이라고? 남양이라면 금군이 군량미를 대량으로 쌓아 두고 있는 그곳 말이냐?”
“물론이죠. 금군의 포진 상황과 어느 정도 수준의 고수들이 배치되어 있는지 뭐 이런 세세한 것들에 대해서 묻더군요.”
“그래서?”
“총타의 지시대로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상세하게 대답해 줬습니다. 하지만 그놈은 그것만 가지고 만족하지 못한 듯, 2주일 이내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여 자신 에게 알려 달라고 하더군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재미없을 거라고 협박하면서 말입니다.”
부운걸개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놈이 왜 남양에 관심을 보이는 거지?”
“어쩌면 그곳을 기습 공격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흑풍대는 지금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금군과 전투를 벌여오지 않았습니까? 이곳에 수많은 무림 연합의 고수들이 와 있지만 그들만큼 금군에게 피해를 가한 단체는 없지 않습니까?”
잠시 그 가능성에 대해 궁리하던 부운걸개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그 말이 맞는 것 같구나. 너는 지금 당장 총타에 전서구를 띄워라.”
전서구야 띄우겠지만 그 전통에 무슨 내용을 집어넣으라는 말인가? 거지가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자 부운걸개 장로는 짜증난다는 듯 덧붙였다.
“교주가 원하는 정보를 최대한 빨리 파악하여 이곳으로 보내라는 것과 그놈이 그 정보를 이용하여 남양을 칠 생각인 것 같다고 알리란 말이다.”
“옛, 장로님.”
서둘러 달려 나가는 거지의 뒷모습을 향해 부운걸개 장로는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양양성에 파견 나가 있는 부운걸개 장로로부터 날아온 전서 한 장. 마교 교주가 남양에 배치되어 있는 금군 병력에 대한 세밀한 정보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전서에는 자신들이 이미 마교 교주에게 전달한 대략적인 정보의 내용을 밝히고, 이보다 더욱 상세한 정보를 2주일 내로 원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남양을 칠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밝히고 있었다.
남양이 지니고 있는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개방 수뇌부였기에, 처음 그 전서를 접하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어, 이거 교주가 마음에 드는 일을 계획할 때도 있군요. 남양만 불바다로 만든다면 금군은 어쩔 수 없이 철군할 수밖에 없을 거외다.”
“그러게 말이오. 하루라도 빨리 남양의 상황을 철두철미하게 조사하여 부운걸개 장로에게 보내라고 지시해야 하겠소이다.”
“놈들의 군량만 불사를 수 있다면 연경을 탈환할 수 있는 것도 꿈은 아니겠소이다.”
이런저런 고무적인 말들이 장로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남양에 쌓인 군량미는 60만 대군이 몇 달씩이나 먹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양이 아닌가. 그게 모두 잿더미가 된다면 향후 금군은 그 정도 군량미가 비축되기 전까지는 그만한 병력을 끌어 모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취선개 장로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외다.”
“취선개 장로는 또 다른 의견이 있으시오?”
“여러 장로님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오. 다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자, 생각해 보시오. 이쪽에서 넘겨 준 정보만 해도 남양을 치는 데 무리는 없을 거외다. 하지만 그놈은 더욱 많은 정보를 요구했소. 경비 상태라든지 뭐 그런 자세한 것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남양을 칠 생각이 있긴 있되, 정 면 공격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소?”
취선개 장로의 지적에 다른 장로들도 생각을 다시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취선개 장로의 추측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으니까.
“그, 그렇겠지요. 하지만 어찌 되었건 성공만 한다면 남양의 군량미가 잿더미가 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 않겠소?”
그 말에 다른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이자, 취선개 장로는 화를 벌컥 내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겠소? 그놈은 소수의 고수들을 남양으로 침투시켜 군량미를 불태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 오. 놈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들이라고 못할 이유가 있겠소?”
그 말에 다른 장로들은 취선개 장로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과거 무림맹의 백량 장로가 황궁에 침입했다가 뜨거운 맛을 본 일이 있지 않소이까? 그런데…….”
“황궁과 그곳은 다르다고 노부는 생각하오. 거기에다가 무림맹에 가 있는 공수개 장로는 금군이 자랑하는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 바로 천마혈검대라는 전갈을 보 내왔소. 바로 마교 고수들이 상대라는 말이지요. 마공을 익힌 고수들이 지니고 있는 특징은 누구보다도 여러분들이 잘 알지 않소이까?”
그 말이 주는 의미를 파악한 다른 장로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옳거니! 취선개 장로의 지적이 옳소이다.”
“마기(魔氣)!”
“호오, 마기가 있었구료.”
취선개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교 고수들은 매복을 하지 않소. 왜냐하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은연중에 뿜어 나오는 마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척이 금방 드러나니까 말이오. 그 말은 천마혈 검대의 고수들이 그곳에 매복하고 있다고 해도 곧바로 알 수 있으니 그놈들만 피해서 군량미에 불을 지르는 것쯤 일도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오. 안 그렇소?” “호오, 맞구려. 그 말이 옳소이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교주 놈은 그 사실에 착안하여 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오.”
“그것이 분명하오. 그놈이 지금 거느리고 온 흑풍대는 마교로서는 드물게도 마기를 내뿜지 않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소. 그들을 이용하여 기습을 펼친다 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거외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방주는 심려 섞인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듣고 보니 취선개 장로의 지적도 옳구려. 하지만 그놈이 구상한 작전을 이쪽에서 가로챈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고 있다고 봐야 할 걸세. 안 그래도 그놈 은 개방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그런 좋은 건수를 안겨 준다면 아예 씨를 말려 버리려고 들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취선개 장로는 눈빛을 교활하게 빛내며 대꾸했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림맹에 그 죄를 뒤집어씌우면 되니까요.”
“무림맹에?”
“예, 무림맹에 작전의 전모를 밝히고 정보를 넘긴다면 무림맹은 본방을 더욱 중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또 본방에서 이 일을 처리하여 타 문파들의 질시를 받는 것 보다는 그편이 훨씬 좋고 말입니다.”
그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방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그는 결단을 내렸는지 장로들에게 지시했다.
“맹에 전서를 띄우게. 나머지는 공수개 장로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옛.”
방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본방이 무영문을 앞지를 날도 멀지 않았구먼. 크흐흐흣.”
한편, 양양성에서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허어, 자네 오랜만이로구먼.”
교주를 발견한 팽대성의 안색은 한순간 샛노래졌다. 양양성으로 오면서 그에게 당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그의 잠을 설치게 만들고 있었다. 악몽이라는 형태를 빌어 서 말이다. 그런 자를 또다시 보고 싶겠는가?
기골이 장대한 팽대성이었지만, 오늘 그는 생긴 것 답지 않은 일을 하고야 말았다. 그는 얼굴 가득 거짓 웃음을 지으며 교주를 환대했던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지 옥을 경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런 떠그랄! 왜 이 새끼가 여기 있는 거야??”
“노야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팽대성은 워낙 솔직담백한 위인이라 기껏 꾸민다고 꾸민 표정이었지만, 싫은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묵향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척 부드럽게 말했 다.
“그러게 말일세. 그때, 양양성으로 올 때는 본좌가 좀 과했지? 그냥 따끔하게 충고나 한마디 한다는 게, 조금 심했었던 것 같아서 그게 마음에 걸리더구먼.”
교주가 자신의 속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듯하자 팽대성은 자신의 교활함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더욱 연기의 질을 높이고 있었다.
“개새끼! 알기는 제대로 아는군.’
“과하다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황실을 위해 그리고 무림의 앞날을 위해 목숨 걸고 일어선 자네들이 아닌가? 그런 사소한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그렇게 손을 썼었는지…….”
뒷말을 슬쩍 흐리는 묵향이었다.
“아닙니다, 저희들로서도 많은 공부가 되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팽대성을 잡고 시간을 끌며 묵향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애롭게 보이는 척하면서 말이다.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던 묵향은 문득 한 가지 를 들고 나왔다.
“팽가의 본거지는 하북이지?”
그 질문에 팽대성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물론 팽씨세가는 여기저기에 있다. 그렇기에 편의상 그들과 구분 짓기 위해 하북팽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팽가들의 힘을 하나로 합친다고 해도 하북팽가 하나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하북팽가의 힘은 막강했다. 그렇기에 팽가하면 하북팽가를 말하는 것이 되어 버렸 다. 그런데 하북팽가의 적자를 눈앞에 두고 본거지가 하북이라니? 그 말은 자신이 누군지 안중에도 없었다는 말이 아닌가?
슬쩍 열이 뻗쳤지만 그렇다고 발작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팽가 따위 물로 봐도 하등의 이상이 없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예, 지금은 오랑캐가 점령하고 있어 남쪽으로 터전을 옮긴 상태입니다만,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겠지요.”
“허어, 참. 자네 본좌를 만난 것을 천행으로 여기게.”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거하고 네놈 만난 거 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팽대성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건 간에 교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2주일 내로 본좌는 남양을 칠 거야.”
교주가 남양을 치건말건 그거하고 자신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여겼기에 팽대성은 시큰둥한 어조로 장단을 맞춰 줬다.
“예? 그러십니까? 축하드립니다.”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묵향은 기가 막혔다. 척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멍청한 놈일 줄이야. 어떻게 이런 놈이 최고의 후기지수들 중의 한 명이라 는 평을 듣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묵향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상대에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네 남양이 어떤 곳인지 아는가?”
“제가 미흡하여.
“그곳은 금군이 군량을 대량으로 쌓아 놓은 곳이지. 본좌는 그걸 모두 다 잿더미로 만들 계획이야. 먹을 게 떨어진 그놈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만한 군량 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두 번 다시 남하해 올 엄두도 못 내겠지.”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 방비 또한 만만치 않겠군요.”
“그렇지는 않지. 자네도 알다시피 상대는 무공도 모르는 졸개들이다 그 말이야. 고수 몇이 숨어 들어가서 군량에 불 지르는 것쯤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손쉬운 일 이 아니겠나? 그리고 그런 식으로 군량에 큰 타격을 받으면 금군은 막상 60만 대군을 먹여 살리기가 힘들 테니 상당한 곤욕을 치르게 될 테지. 굶주린 병사들은 힘 을 쓰지 못하니 연경을 탈환하는 것도 이제 꿈이 아니란 말이야. 이제 내 말을 이해하겠나?”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팽대성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그렇습니까?”
“자, 자네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수고해 주고 계시는 본좌를 위해 오늘 술 한잔 사는 게 어때? 응?”
“…..”
갑자기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자 팽대성은 황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교주는 팽대성을 끌고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무려 한 시진에 가깝게 질퍽하게 퍼마신 후에야 교주는 떠났다. 그리고 그 뒤 에 남겨진 팽대성은 교주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지닌 힘을 자랑하는 철부지 같은 모습이었고, 어떻게 보면 술 한잔 얻어 마시기 위해 공갈을 일삼는 파락호 같은 모습이었지 않은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주 정도 되는 사람이 술 한잔 마실 돈이 없어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또, 그런 거짓말을 해 봐야 무슨 이득이 있다고……. 아무리 팽대성이 미래에는 팽씨세가를 물려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한동안 교주의 술 상대를 해 준 팽대성은 기분 전환도 할 겸 친구인 옥대진을 찾아갔다. 술을 마시며 교주의 비위를 맞춰 주고 있자니 오장육부가 뒤집어질 것 같 았던 것이다. 간단하게 차를 나누며 얘기를 하던 팽대성이 방금 전까지 자신을 황당하게 만들었던 교주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여튼 별 미친놈을 다 봤다니까.”
하지만 그 말을 자세히 들은 옥대진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단순한 팽대성에 비해 그는 매우 교활했으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조금 움직이세. 그 말이 사실인지는 금방 알 수 있지 않겠나?”
옥대진은 팽대성을 이끌고 양양성에 파견 나와 있는 개방도를 찾아갔다. 평소에 친분이 있는 개방 제자였기에 그들은 일의 전말을 어느 정도 자세하게 들을 수 있 었다. 물론 그 개방도가 겨우 4결 제자라서 가장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개방도와 헤어진 후, 그들은 그제서야 놀라움에 가득 찬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교주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정말 사람 놀라게 만드는군.”
“그러게 말일세. 그게 사실일 줄이야……. 어쩌면 고향으로 돌아갈 날도 그리 멀지 않은 듯하이. 오늘 기분도 좋은데 같이 술이나 한잔하겠나?”
팽대성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지만, 옥대진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이건 정말 엄청난 기회였다. 사문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자신의 무 명(名)을 무림에 알릴 수 있는 두 번 다시 찾기 힘든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 둘만 마시기는 뭣하니, 친구들을 모두 다 모으는 것이 어떤가?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구.”
그 말에 팽대성은 시원스럽게 동의했다.
“그거 좋지. 바로 연락하겠네.”
반 시진이 흐른 후, 양양성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객잔에 7룡4봉의 젊은이 다섯 명이 모였다. 폭풍검 서량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옥대진이 팽대성에게 말했 다.
“폭풍검은 언제 온다고 하던가?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모였는데…….”
“아, 그는 오지 못한다고 사람을 보내왔네. 요즘 워낙 수련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모양이야.”
묵향이 진팔을 수련시키는 데 자극받은 패력검제는 요즘 들어 더욱 수련에 정진하도록 아들인 서량을 닦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 해 가는 진팔의 모습을 본 상태에서 자신의 아들을 가만히 놔둘 패력검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자, 모두들 바쁜 와중에 이렇듯 시간을 내주어 고마워.”
오랜만에 청춘남녀들이 또다시 한자리에 모였으니 분위기 좋은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이곳 양양성에 도착한 후에는 각 문파별로 흩어져서 저마다 바쁘게 움직였 기에 서로 할 말들이 많았다. 거기에다가 종남파와 공동파가 박살이 났고, 소림까지 봉문했으니 화제 또한 풍성했다. 술잔을 나누며 얘기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 러갔다.
모두들 적당히 술을 마셨을 때, 옥대진은 자신의 가슴에 묻어 두고 있던 계획을 밝혔다.
“이번에 마교가 남양을 기습한다는 극비 정보를 입수했지.”
“뭣? 그게 정말인가?”
“개방 쪽 사람에게 물어봐서 그 진위 여부까지 확인했어. 기가 막히게도 그게 정말이지 뭔가.”
“허어, 마교가 이번 전쟁에 꽤나 적극적으로 나서는군. 사파라는 것들은 쓰레기라고 들으며 컸는데, 요즘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
“황보 오빠 말이 맞아요. 오히려 마교 쪽에서 훨씬 더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있잖아요? 정파라고 콧대만 세우고 있지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모두들 몸만 사리고 있는 데 말이에요.”
방금 전에 입을 연 황보룡과 당소진의 의견이 지금 현재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만큼 양양성 공방전에서 세운 마교의 공이 컸으니까. 하지만 옥대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런 말 할 것은 아니지만, 마교는 상당히 실리적으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사실 그들은 큰 테두리는 보지 않고, 한곳에 전력을 집중하여 전공만 세우고 있다고 봐야 할 거야.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런 건 뻔히 알 수 있잖아. 전번 전투에서 정파는 양양성을 사수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어. 하지만 마교는 양양성에 얽매 이지 않고 외부에서 싸웠지. 결론은 그놈들에게 좋게 흘러갔지만,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지. 만약 양양성이 무너졌으면 정파는 치명 타를 입었겠지만…, 마교는 슬쩍 뒤로 후퇴하기만 하면 되었잖아. 그것만 생각해도 그놈들은 아주 교활하기 짝이 없어. 사실 그놈들에게 있어서 양양성 따위 함락 되나 안 되나, 대 송제국이 무너지느냐 안 무너지느냐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고 봐야 해. 내 말이 틀렸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모두들 고개만 주억거릴 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것에 자신을 얻은 옥대진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밝혔 다.
“지금 마교가 남양을 치려는 것은 정면 도발을 말하는 게 아니야. 소수의 고수만을 보내어 적의 군량을 불사르겠다는 거지. 남양을 10만에 달하는 대군이 철통같 이 수비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잡졸들이잖아. 그들의 이목을 속이고 침투하는 것쯤은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지. 안 그래?”
“허, 그럴 수도 있겠군.”
“일단 불만 지르고 나면 모두들 불끄기에 정신이 없을 테니 그 혼란을 틈타 탈출하기도 쉬울 거야. 마교는 이렇게 아주 손쉬우면서도 전공은 크게 세울 수 있는 일 거리만 찾고 있다는 말이지. 치사한 새끼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황보룡이 외쳤다.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마교도들은 전공에만 목숨을 걸고 있는 소인배들이 아닌가!”
“바로 그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걸 우리들이 해치우면 좋지 않겠나?”
“그건 무슨 말인가?”
“우리들이 남양을 불사른다면 얼마나 큰 공을 세울 수 있겠나? 그리고 여기에 오면서 그 망할 교주 놈에게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말이야.”
“크흐흐흣, 그거 좋은 생각이네. 마교 교주 놈은 남양을 불사른다고 계획만 실컷 세우고 있다가 헛물만 켜는 게 되겠군.”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하지만 남양에 포진한 금군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데, 우리들만의 힘으로 그게 가능할까?”
“허어, 그건 걱정하지 말게. 그 정도는 내가 어떻게 해 보지. 자, 오늘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실컷 마셔 보세.”
옥대진의 뒤에는 무림맹의 장로 옥진호가 있지 않은가. 마교 교주는 정보를 정식으로 개방에 요청한 모양이지만, 옥대진은 나름대로 정보를 취득할 방법을 이미 생각해 두고 있었다.
양양성에는 외부로 전서구를 보낼 수는 있지만, 전서구가 날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키운 비둘기가 단 한 마리도 없었으니까. 지금 개방도들이 뒤늦게 우 수한 품종의 비둘기들을 가져다 키우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결실을 보려면 최소한 6개월은 족히 필요했다. 그런 상황이기에 지금 현재 양양성 일대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곳은 개방의 하남분타였다.
옥대진은 바로 이 하남분타에 직접 찾아가 남양 일대의 금군 포진상황에 대한 정보를 알아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남분타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도 몇 있었기에 우선 그들을 통해 알아 보고, 그것이 안 된다면 자기 할아버지의 이름이라도 팔 작정이었다. 무림맹 옥진호 장로의 이름을 팔면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었으 니 말이다.
아직 남양에 침투할 세부적인 계획이 짜진 것도 아닌데 그들은 마치 그 일이 성공이라도 한 듯 기분 좋게 술잔을 나눴다. 일의 성패를 떠나서 자신들끼리 뭉쳐서 어떤 일을 결행한다는 것만으로도 햇병아리들인 그들은 신이 났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만약 이 일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자신들의 명성을 무림에 크게 떨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팽대성에게 수작을 부린 묵향은 진팔이 기다리고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얼큰하게 술을 퍼마신 탓인지, 아니면 애송이들을 상대로 함정을 파놓 은 탓인지 그의 마음은 흥겹기 그지없었다. 묵향의 말을 빌리면 남의 불행은 곧 자신의 행복이었으니까. 그것도 특히나 원한이 있는 상대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라, 웬일이래? 이렇게 늦게 나타나다니 말이야.’
진팔은 묵향이 늦게 나타나자 한 대라도 적게 맞게 되었기에 매우 기분이 좋았다.
“오, 열심히 수련하면서 기다리고 있었구먼. 제법이야.”
“당연하지. 한 대라도 적게 맞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하지만 그걸 표정에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진팔은 가능한 한 무표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평상시라면 이 상태에서 곧바로 진팔과 비무를 시작했을 묵향이었다. 하지만 그는 술기운 때문인지 평상시에는 하지 않던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차 한잔 줄 수 있겠느냐?”
“예, 교주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연이 차를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며 묵향은 옛날 생각이 났다. 그 작고 연약했던 아이가 지금은 우아한 여인으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그녀를 곁에서 계속 지켜본 것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씩 만난 것이었기에 묵향이 느끼는 소연의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웠다.
“이제 제대로 된 짝만 하나 구하면 모든 게 완벽하겠구나. 정말 너 같은 딸을 둬서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이게 딸을 가진 부모들의 공통적인 심사일까? 어떤 녀석이 괜찮은 배필일까 이리저리 생각하던 묵향의 뇌리에 갑작스럽게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과거 여자의 모습이었을 때, 아르티어스도 이런 생각을 했었을까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피식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남자인데 말이야.’
생각을 고치며 묵향은 소연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한테 듣자 하니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가 있다면서?”
묵향은 소연의 배필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지만, 소연의 안색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확 일그러졌다. 매파 노릇을 해 오는 만통음제에게 그토록 정중히 거절했건만, 그게 먹히지 않자 본인이 직접 수작을 걸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답하는 소연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예, 교주님.”
하지만 묵향은 아직까지도 소연의 기분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미소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 행운아가 누군지 내게 알려 줄 수는 없겠나?”
“죄송합니다, 교주님.”
소연의 냉정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묵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소연은 차를 묵향에게 가져다준 다음 벌레를 피하듯 서둘러 자리에
서 떠나 버렸던 것이다. 홀로 찻잔과 함께 남겨진 묵향은 허탈한 듯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원했구나. 만족할 줄 알았어야 했거늘……..
한꺼번에 차를 쭉 들이켠 묵향은 옆에 세워 놓은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손아귀 가득 몽둥이의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자 묵향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떠 올랐다. 그녀의 무공을 완성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서 진팔은 희생양이었다.
‘뭐 죽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
그날 진팔은 평상시의 두 배는 더 두들겨 맞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