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0권 14화 – 덫에 걸린 옥대진
덫에 걸린 옥대진
묵향이 장인걸을 슬며시 끌어들여 무림맹과 개방 그리고 7룡4봉을 상대로 장난질을 시작했을 때, 장인걸은 자신을 이용하여 장난질을 할 인물이 있을 거라는 생 각은 해 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 또한 강호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잘난 인물이었기에.
사실 장인걸은 지금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바로 마교와 무림맹의 이간질이었다. 그것을 위해 장인걸은 천마혈검대 고수 다섯 명을 선택하여 은밀히 불러들였다.
“본좌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한 가지 명령을 내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에 다섯 고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하명하시옵소서.”
“이것을 읽어 보거라.”
장인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두툼한 문서 뭉치가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천천히 날아올라 부복하고 있는 고수들 앞에 놓였다. 그것은 편복 대주가 그동안 조사하여 장인걸에게 올린 무림맹에 소속된 각 문파들의 정보였다. 장인걸은 그들 중에서 별로 강하지 못한 군소문파 몇 군데를 선택해서 살생부를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는 너희들이 공격해야 할 문파들에 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 문파들을 멸문시킬 필요는 없고, 마교의 소행이라는 증거만 남겨 두면 된다. 알 겠느냐?”
“마공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물론이다. 가급적이면 정파 쪽에 많이 알려진 초식들을 사용하도록 하거라. 자, 즉시 출발하라.”
“존명”
다섯 명의 고수들은 엄청난 속도로 경공을 발하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점차 멀어지는 것을 보며 장인걸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인걸은 마교 가 본격적으로 개입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서로를 이간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크흐흐흣, 그래. 마교도의 사명은 마도천하를 이룩하는 것. 묵향 네놈은 본좌를 위해 정파 놈들과 피 터지도록 싸워야만 해. 그동안 본좌는 마도천하라는 것이 과 연 무엇인지 세인들의 머릿속 깊이 각인시켜 주도록 하마.”
장인걸은 자신이 중원의 패권을 쥐기만 하면 정파 무림을 완전히 재기불능이 되도록 짓밟아 놓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묵향이 라는 놈도 함께 말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더욱 기분이 좋아지는 장인걸이었다.
모두들 꿍꿍이속을 지니고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이다 보니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개방은 개방대로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남양의 정보를 끌어 모아 그것 을 무림맹에 전달해 주느라고 바빴고, 무림맹은 그 정보들을 취합하여 비밀리에 공격 작전을 완성하느라고 바빴다. 그리고 그사이에 끼여 있는 옥대진은 한편으로 는 개방으로부터 정보를 빼내어 마교보다 먼저 남양을 칠 계획을 짜느라고 바빴다. 그리고 덫을 놓고 있는 묵향은 느긋하게 진팔을 족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 고 그 덫의 중심에 서 있는 장인걸은 정파와 마교의 이간질에 정신을 팔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윽고 마교 교주가 통보했던 2주일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수라도제에게 무림맹주의 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태상문주님, 무림맹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전령이 도착했다고? 그런데……”
수라도제는 총관의 손을 슬며시 훑어봤다. 그런데 총관의 손에는 그 어떤 서신도 들려 있지 않았다. 총관은 수라도제의 의중을 눈치 챘는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태상문주님께 직접 전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들라고 하게.”
“옛.”
잠시 후 실내로 안내되어 온 전령은 수라도제에게 인사를 건넨 후, 품속에서 봉서를 꺼내어 바쳤다.
수라도제가 봉서에 찍힌 봉인을 보니 무림맹주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면 대단히 중요한 서신인 모양이다. 수라도제는 서신을 쭉 읽어 본 후, 그때까지도 부복하고 있던 전령에게 말했다.
“맹주님의 뜻을 받들겠다고 전하게.”
“옛, 그렇게 전하겠나이다.”
전령이 나가고 난 후, 수라도제는 총관에게 지시했다.
“자네는 빨리 가서 황룡무제와…….”
여기까지 말하던 수라도제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처음에는 패력검제와 황룡무제에게 조력을 청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들과 교주와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 던 것이다. 봉서에는 분명히 마교 교주가 눈치 채지 못하게 비밀리에 처리하라고 쓰여 있지 않았던가.
“아니지, 본문의 고수들 중 실력 있는 자를 열 명만 추려 놓게. 경공술과 은잠술이 뛰어난 자들로 말이야.”
“옛,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날 저녁, 수라도제는 10여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몰래 양양성을 떠났다. 혹여나 마교 교주가 눈치라도 챌세라 몰래 양양성의 높은 성벽을 뛰어넘는 수고까지 아끼지 않으며 말이다.
수라도제 같은 엄청난 실력을 지닌 고수마저도 몰래 이동하는 판에, 묵향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문 철부지들은 태평스럽게도 모닥불까지 활활 피워 놓고 야영을 즐 기고 있었다. 벌써 금의 영토에 들어선 지 며칠이 흘렀건만, 그들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이렇듯 조심성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어둠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으면 그 불빛은 아주 먼 곳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그 불빛을 보며 왕정(王晶)은 무심결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설풍검(雪風劍)왕정은 공동파가 자랑하는 이름 있는 고수들 중 하나였다. 정파의 명숙들 중의 한 명인 그가 마치 3류문파의 살수라도 되는 듯 시커먼 야행복에 복 면까지 뒤집어쓰고는 모닥불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신세가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강호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 너무나도 미숙해! 출발하기 전에 단단히 주의를 줬어야 했는데……..
그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저 멀리에서 철없이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놈들 중에 옥대진이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림맹 장로인 옥진호의 손자이 기도 했지만, 공동파의 제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배경이 아무리 화려하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왕정 같은 고수가 봤을 때 그는 아직까지도 미숙한 철부지나 다름없었다.
옥대진은 남양을 기습할 계획을 은밀하게 왕정에게 말했고, 그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료들에게는 큰소리를 쳤지만, 위험도가 높은 일인 만큼 조 금 겁이 났던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목숨이 날아갈 것이 아닌가?
그런 청을 해 온 인물이 자신의 동문사제기도 했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옥진호의 얼굴을 봐서라도 왕정은 그 청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되어 왕정이 옥대진 의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게 된 것이다.
“참자, 참아. 몇 년 더 지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왕정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은밀하게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어제도 이렇게 둘러보다가 한 놈 잡았지 않은가. 오늘 또 하나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 장은 없었다.
은밀히 자리를 옮기던 왕정은 뭔가 섬뜩한 기척을 느꼈다.
‘헛!’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가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리자, 방금 전까지 그가 숨어 있던 지점 근처에 서 있던 나무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박혀 들어갔다. 그것만 으로도 왕정으로서는 상대의 방향과 위치를 파악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화살이라면 모를까, 암기를 던질 수 있는 거리라면 뻔하니까.
왕정은 기쾌한 신법을 사용하여 미지의 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헛! 추귀보(追鬼步)? 자, 잠깐!”
공동파가가 자랑하는 보법이 추귀보다. 아마 상대가 그것을 알아본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놈의 요구대로 멈춰 줄 왕정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왕정의 허리에서 뽑혀 나온 그의 애검은 괴한의 목숨을 끊기 위해 파고 들어갔다. 상대방 또한 자신과 같이 시커먼 복색을 하고 있는 놈이었다. 떨리는 상대의 눈이 극도로 당황한 듯한 그의 심경을 나타내 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정을 봐줄 왕정이 아니었다.
‘제법 실력은 있는 모양인데, 네놈은 사람을 잘못 택한 거야.’
하지만 그 순간 위기를 느낀 상대방이 재빨리 보법을 전개하여 왕정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상대가 방금 전에 사용한 현란한 보법은 왕정도 잘 아는 것이 었다. 오늘날 명문들 중의 하나인 황보세가가 있게 해 준 보법이었으니까.
“어엇! 천왕보(天王步)? 어떻게…….”
멍청하게 서 있는 왕정을 향해 상대는 소리 죽여 웃으며 복면을 벗었다.
“크흐흐흣, 여기에 온 것이 노부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군.”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왕정은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왕정이 절파검(切破劍) 장로님을 뵙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를..
그 말에 절파검황보청(淸)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무례는 무슨 무례. 그래도 서로 간에 큰 사고가 안 일어나서 다행이구먼. 첫 일격에 최선을 다했었다면, 자네 시체를 볼 뻔했어. 오늘 낮에 본 놈 생각하고 그저 그 러려니 하고 대충 공격한 덕분에 목숨 건진 줄 알게.”
절파검 황보청이 이런 말을 할 만도 했다. 황보청은 왕정에 비하면 격이 다를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던 것이다. 황보청 같은 뛰어난 고수가 이런 곳에서 어슬렁거리 는 것을 보면 아마도 황보룡도 목숨이 아까워 위쪽에 살짝 도움을 청한 모양이다.
황보청은 다시금 복면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자네가 온 줄 알았다면 노부는 오지 않았을 텐데…….”
그만큼 자신을 띄워 주는 말이었기에 왕정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오히려 장로님과 동행하게 되어 든든할 따름입니다.”
“그런가? 어찌 되었건 자네까지 여기 와 있는 것을 보면, 잘하면 다른 녀석들도 누군가 조력자를 불렀는지도 모르겠군. 다음부터 손 쓸 때 좀 더 주의해야겠어.”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황보청과 왕정은 그때부터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함께 행동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니까 말이다.
수라도제가 양양성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난 다음에야 묵향에게 개방에서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묵향은 그날 관지 그리고 마화와 함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의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수석장로님께서 선물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철영 부교주가 거느린 주력(主力)이 출발했다는 의미였다. 총단에서 날린 전서가 호북분타에 도착하고, 그것을 또다시 양양성으로 가져오는 데 걸린 시간을 고려 한다면 부교주가 거느린 주력은 넉넉잡아도 5일 전에 출발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늦어도 3주 후면 도착하겠군.”
아무래도 야밤에 몰래몰래 이동하려면 시간이 두 배는 필요로 하기 때문이기에 하는 말이었다.
“예, 그럴 것 같습니다.”
이때, 밖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개방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 말이 들려옴과 동시에 마화는 묵향을 슬쩍 바라봤다. 묵향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녀는 재빨리 넓은 탁자 위에 놓여져 있던 커다란 지도를 접어 구석에다가 치웠다.
마화가 어느 정도 실내를 정리한 후에야 묵향은 문밖에 대고 말했다.
“들어오라 일러라.”
“옛.”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땟국물이 흐르는 거지 하나가 들어왔다. 비공식적인 자리라서 매듭이 지어진 허리띠를 차지 않고 있었지만, 상대가 내뿜는 전체적인 기도로 판단했을 때 아마도 4결이나 5결 제자쯤이 아닐까 생각되는 거지였다.
“부운걸개 장로님께서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거지가 내미는 것은 두툼한 봉서(封書)였다. 묵향은 그것을 받아 들자마자 서둘러 봉인을 뜯어 내고 내용물을 정신없이 읽으며 거지에게 손짓을 했다. 그 손짓이 나가라는 뜻임을 눈치 챘지만 거지는 잠시 시간을 끌며 교주가 그 봉서를 정신없이 읽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런 다음 그는 교주가 자신을 보고 있지도 않은데 정중 히 인사를 건넨 후 밖으로 나갔다.
거지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묵향은 봉서의 내용물은 이제 더 이상 읽을 가치도 없다는 듯 획 집어던지고 오히려 봉인이 뜯겨 나간 겉봉만을 세밀히 관찰하기 시작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관지 장로는 도저히 상관의 의중을 알 수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화급을 요하는 서신이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묵향은 겉봉만을 살피며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다.
“전혀! 미끼를 던졌는데 어떤 놈이 걸려들지 그게 궁금하단 말이야. 무림맹일지, 아니면 옥대진 그 새끼일지……. 생각 같아서는 그놈이 걸렸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지만…,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욕심은 버려야겠지. 허, 참. 그놈이 도중에 봉서를 가로채서 읽었다면 뭔가 표시가 있을 줄 알았는데, 재주가 좋은 건지… 아니면 안 읽었는지 겉봉만 살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구먼.”
““미끼라니요?”
“먹음직한 걸 던졌거든. 참, 자네는 오늘 밤 쓸 만한 놈 열댓 명 정도 데리고 몰래 성을 빠져나가게.”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히 알 거는 없고 은밀히 남양 인근에 갔다가 오면 돼.”
“적정을 살피고 오라는 말씀이십니까?”
“정찰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은밀히 갔다 오란 말이야. 이런 봉서까지 받았는데 거기 갔다 오지도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거거든. 그냥 갔다가 한 이틀 정도 숨 어 있다가 돌아와. 그러면 돼. 그렇게 해야지 이쪽에서 계략을 썼다는 게 드러나지 않지.”
그 정도 말만으로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관지 장로는 고개를 깊숙이 조아리며 대답했다.
“존명.”
남양 인근에 도착한 수라도제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금군 병사들이 성난 벌 떼라도 된 듯 사방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고, 개중에는 제법
무공을 익힌 듯한 금군 병사들까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이다.
수라도제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남양에는 장인걸이 그의 정예 무사들과 함께 와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남양의 경비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엄중해져 있는 상 태였다.
“이런 젠장, 어떤 놈이 벌써 벌집을 쑤신 모양이군.”
“이대로 침투하시겠습니까? 태상문주님.”
“지금 들어가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아쉬운 일이지만 돌아갈 수밖에.”
수라도제는 발길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떤 놈이 먼저 여기에 다녀갔을까? 금군이 군량을 야적해 놓은 곳에서 불길이 치솟지 않는 것을 보면 먼저 온 놈은 실패한 모양이었다.
“마교인가?”
수라도제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교 교주를 옆에서 지켜본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 않은가. 그런 실력자가 일을 처리하면서 이렇게 어리숙하게 끝내 놓지 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수라도제는 너무나도 궁금했다. 이토록 큰 대사를 엉망진창으로 망쳐 놓은 놈들이 과연 어떤 놈들인지 말이다. 하지만 수라도제의 그 궁금증은 오래지 않아 풀렸 다.
《잠깐!>
수라도제가 어기전성을 발하자 모두들 멈춰선 후 이곳저곳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지만 그 어떤 이상한 점도 감지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라도제의 귀에는 뚜 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련히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말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저쪽이다!>
수라도제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네 명의 무사들이 금군들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라 언뜻 봐서는 누가 누 군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을 보고 수라도제는 이들이 누군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황보세가, 사천당문, 공동파인가? 이들이 왜 이곳에?’
하지만 수라도제로서는 한가하게 생각이나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황보세가의 무공을 사용하던 복면인이 허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 기 때문이다.
“이런 제기랄!”
욕설을 내뱉으며 수라도제가 도착했을 때, 꿈틀거리고 있는 복면인의 몸에서는 아직까지도 시뻘건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빨랐었다 면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수라도제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멈춰랏!”
수라도제는 공력을 잔뜩 돋워 노성을 터뜨렸지만 금군 장병들이 수라도제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황보세가의 진산절기라고 할 수 있는 뇌진검법을 극성까지 익힌 자를 없애는 데 성공했지 않은가. 만약 상대가 조금 빨리 도착하여 이 둘이 연합을 했다면 매우 까 다로웠을지 모르지만, 저놈 또한 짝 잃은 기러기 신세. 지금은 제법 번듯한 신위를 과시하고 있지만 숫자로 밀어붙인다면 저놈 또한 시체로 만들 수 있을 것이 분명 했다. 그렇기에 금군 장수는 그 여세를 몰아 곧바로 수라도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흥! 어리석은 것!”
순간, 수라도제의 등에서 거대한 도가 뽑혀 나왔다.
쿠쿵!
검과 도가 부딪쳤을 뿐인데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오며 사방으로 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을 뿐인데, 호기롭게 달려들었던 금군 장수는 검이 부 서져 나간 채 뒤로 튕겨 나가서 땅바닥에 처박힌 후 잠시 부들부들 떨다가 축 늘어져 버렸다. 아마도 절명한 듯했다. 이 한 번의 격돌만으로도 서로 간의 실력이 어 느 정도로 차이가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한 수를 보자마자 엄청난 마기를 뿜고 있는 금군 장수 한 명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아마도 그가 이 무리의 지휘자인 듯 병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처, 철수해랏!”
금군 장수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상대가 사용한 도법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뇌전도법. 뇌 전도법은 서문세가의 고수들이라면 누구나 다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천마혈검대의 고수를 한 방에 걸레로 만들 정도의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상대가 수라 도제임을 알면서도 이곳에 남아 있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늦은 감이 있었다. 수라도제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도망쳤어야만 했다. 황보세가의 고수를 죽인다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것이 아니 라.
도망치는 적들을 쫓아 수하들이 움직이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은 수라도제는 재빨리 자신의 도를 날렸다. 수라도제의 손을 떠난 애도는 엄청난 파공성을 흘리며 금 군 장수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 고수는 그것을 눈치 채고 재빨리 방향을 틀었지만, 애도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뒤따르며 더욱 거리를 좁혔다.
“크아악!”
금군 장수를 선두로 그를 뒤쫓던 금군 병사들의 허리가 양단되며 피보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초목은 그들이 뿜어낸 핏물에 붉게 물들었다. 휘리리릭!
20여 명의 금군 장졸들을 양단해 버린 자신의 애도가 돌아오자 수라도제는 무표정한 안색으로 그것을 잡아들었다. 그런 다음 그는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려 탈진한 채 여기저기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젊은이들을 노려봤다.
그제서야 젊은이들 중의 하나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인사를 건넸다.
“목숨을 살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라도제 대협.”
수라도제가 보니 얼굴에 긴 검상과 함께 핏물에 뒤덮여 있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옥대진이 분명했다. 그를 알아본 수라도제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 젊 은이의 앞날이 어찌 될지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목숨을 살려 줬다? 허…, 과연 이것이 살려 준 것인지 노부로서는 알 수가 없구나.”
잠시 탄식한 수라도제는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여 양양성으로 돌아가자.”
“옛.”
수라도제의 수하들에게 둘러싸여 양양성으로 향하는 옥대진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처음에는 금군으로부터 살아남기에 바빠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 만, 수라도제의 탄식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절망감까지는 느끼지 않고 있었다. 무림맹 장로인 할아버지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자 남양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모가 서서히 파악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을 제일 먼저 파악한 쪽은 정파 무림의 정보통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방이었다. “무림맹의 허락을 얻어 살아남은 자들을 면담해 본 결과 그들의 단독 범행이라고 합니다.”
“단독 범행이라고요? 그럴 리가…, 절파검 같은 절정고수가 죽었소이다. 이건 각 문파에서 후기지수들을 키워 주기 위해…….”
“아아, 그건 아닌 것 같소. 노부가 관련된 각 파에 사람을 보내어 직접 확인해 봤소. 이건 문파 차원에서 벌인 일이 아니고, 그 어린 것들이 만약을 대비하여 몇몇 고수들에게 호신을 부탁한 정도인 모양이오.”
“허어, 그렇다면 일이 아주 고약하게 꼬이겠소이다. 무림맹은 물론이고 마교 교주마저도 본방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텐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마교 교주야 그렇다고 치고, 왜 무림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말이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오? 이번 일을 입안한 것이 본방이 아니오? 그리고 그 어린 것들에게 정보가 새 나간 곳도 본방이고 말이오.”
“허,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래, 그놈들에게 정보를 흘린 멍청한 놈들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하셨소?”
“아직까지도 조사 중이외다. 혐의가 입증된 놈들을 모두 다 잡아들여서 신문하고 있소이다. 하지만 옥대진 그 영악한 놈이 옥진호 장로의 이름을 팔면서 은근히 협박을 했다고 하니……. 그 녀석들로서도 협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분타주에게 보고를 했어야지 슬쩍 정보를 넘기다니 그게 말이나 되오? 그런 놈들은 몽땅 다 잡아들여서 박살을 내놔야 하오.”
“어쩔 수 없지 않소? 다 힘없는 자의 서러움인 것을……. 그건 그렇고 모두들 이 사태를 타개해 나갈 좋은 방법이나 생각해 보시구려. 언제까지 이미 지나간 일을 잡고 씨름할 수는 없는 일이잖소?”
이때,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취선개 장로가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은 있소.”
“취선개 장로는 뭔가 고견이 있으시오?”
“그걸 모두 다 옥대진의 단독 범행으로 몰아붙이는 거요. 그러면서 무림맹 장로인 옥진호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소이다.”
“옥진호 장로는 맹 내에서 우호 세력을 많이 거느린 거물이오. 그렇게 손쉽게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외다.”
“물론 그렇소. 하지만 그의 뒤를 떠받치고 있던 공동파가 무너져 버린 지금, 그것도 많이 약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오.”
“취선개 장로의 말이 맞소이다. 사실 옥진호 장로는 맹 내에서 너무 큰 세력을 지니고 있소. 맹주 쪽에서 봤을 때도 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 틀림없소이다. 넌지시 빌미만 안겨주면 그쪽이 알아서 처리해 주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