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0권 15화 –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양양성 내에 위치한 객잔의 넓은 객실에서는 옥대진에 대한 신문이 진행되고 있었다. 취조관과 옥대진이 나눈 말은 옆에 앉아 있는 서기(書記)가 기록하여 증거로 남기고 있었다. 나중에 그 모든 자료는 무림맹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옥대진에 대한 신문은 말이 신문이지, 맹에서 파견되어 온 취조관에게 오히려 옥대진이 당당하게 외치고 있었고, 그런 그를 향해 취조관이 오히려 쩔쩔 매 는 기괴한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옥대진이 그 취조관을 신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저는 황실과 무림을 위해서 남양을 공격했을 뿐입니다. 운이 없어 실패했지만, 남양을 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취조관은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어허, 자네는 뭔가 오해하고 있구먼. 노부는 결코 자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네. 다만 그 결과가 안 좋았다고 하는 거야.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여러 고수들이 희생되었다네. 그리고 그중에는 자네의 약혼녀인 능비화 소저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네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순간 옥대진의 뇌리에는 금군 고수들의 공격을 받고 피를 뿜으며 죽어 가던 능비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사실 그는 그녀가 지닌 화산파라는 배경과 전 중원을 통틀어 네 명뿐인 4봉이라는 희소성을 사랑했을 뿐이니까. 이용가치가 거의 없어져 버린 그녀를 향한 옥대진의 사랑 또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죽음은 오히려 앓던 이를 뽑은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옥대진은 얼굴 가득 슬픈 표정을 지으며 발악하듯 외쳤다.

“그만 하십시오! 그녀의 죽음을 이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제 심정은 편했는 줄 아십니까? 두고 보십시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금나라 놈들 씨를 말려 버릴 겁 니다.”

취조관은 괜히 약혼자의 말을 꺼냈다고 후회하며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휴…. 자네는 아직까지도 자네 처지를 잘 모르는 모양이군. 맹에서 정예를 투입하여 남양을 치기 직전에 자네들이 들어가서 난장판을 만들었다 그 말일세. 그 덕 분에 지금 남양의 방비는 철옹성처럼 튼튼하게 되었지. 잘못하면 이적 행위를 한 자로 처벌될 수도 있음을 왜 모르는가?”

그 말에 옥대진은 핏대를 올리며 외쳤다.

“이적행위라니요!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왜 금에 이로운 행동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남양의 수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 그곳을 공격한 것이 어찌 죄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오랑캐가 국토를 유린하는 상황에서 선배님이시라면 그런 정보를 얻었는데 가만히 계셨겠습니까?”

얘기가 계속 겉돌고 있었다. 옥대진은 결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그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었다. 다만 그 시기가 안 좋았을 뿐이었고, 또 실패 했다는 것이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만약 이 일을 성공했다면 그는 영웅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한동안 옥대진을 상대로 입씨름을 하던 취조관은 떨떠름한 얼굴로 옥대진의 방을 나섰다. 사실 죄를 고백받는 것쯤이야 오랜 세월 이 직책을 맡아 왔던 그에게 있 어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주리를 틀어 대면 열에 아홉은 없는 죄도 시인했다.

물론 끝까지 죄를 시인하지 않는 자도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어 버렸다. 죽어 버린 자를 비호하는 자가 있을 리 없었으므로 대충 죄 를 뒤집어씌워 결과를 발표하면 모든 게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 직책에 오랜 세월 종사한 그인 만큼 이렇게 큰소리를 쳐 대는 죄인을 상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배알이 뒤틀리는 것을 억지로 참자니 미 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다그치자니 이번 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배경이 마음에 걸렸다. 까딱 잘못하면 되려 자신의 목이 날아갈 우려가 있는 것이 다.

취조관은 밖으로 나온 후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이래서 내가 여기에 오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 했거늘… 개새끼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있어야 조사를 하든지 신문을 하든지 할 거 아 LF!”

그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객잔을 경비하고 있는 책임자가 눈에 띄자 서둘러 그곳으로 다가갔다.

“자네 잘 만났군. 안 그래도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무슨 하명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모두들 명문의 자제들인 만큼, 감시에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결코 그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 주게.”

“물론입니다. 이미 수하들에게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해 뒀습니다.”

“잘했군. 빌어먹을! 저런 세도가의 자제들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원…….”

경비 책임자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마 조만간 위쪽에서 가부간에 결정을 내리시겠지. 사실 맹에서도 그 명문들과 척을 질 결심이 아닌 바에야 어찌 징죄를 할 수 있겠나? 그냥 대충 조사하는 척하 다가 모두 방면될 게 분명하지 않겠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 만큼 저들의 대접에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야. 저놈들이 나중에 문파에 돌아가서 우리들의 험담이라도 늘어놓으면 자네는 물론이고 나까 지도 박살이 나는 수가 있으니까.”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경비 책임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내는 길게 자란 턱수염을 부드러운 손짓으로 쓰다듬으며 맹주에게 말을 건넸다.

“금으로부터 밀서가 도착했습니다.”

도사들이나 입는 도복을 입고 있는 이 선풍도골형의 사내를 향해 맹주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대답했다.

“밀서라……. 무슨 일인데 그들이 노부에게 밀서를 보냈다는 말인고?”

“예, 혹시 무슨 사단을 부려 놨을 가능성도 있기에 밀서를 개봉한 후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아무런 문제점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그 내 용이…….”

독이라든지 기타 이물질 등을 발라서 밀서를 보냈을 수도 있기에 그렇게 조사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이런 말을 맹주에게 한 것일까? 그 이유는 그가 바로 맹주 직속에 있는 감찰부(監察部)의 수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맹주의 사질이었다. 사실 맹 내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그런 중요한 직책을 다른 인 물에게 맡길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는고?”

“그들에 대한 적대 행동을 즉각 중지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번에 그들이 포로로 잡은 무림인들을 처형하겠답니다.”

그러면서 감찰부주는 두툼한 서신을 맹주에게 전했다. 금제국이 포로로 잡은 인질들을 출신 문파별로 정리해 놓은 목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협박문을 냉 철한 표정으로 끝까지 다 읽은 맹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 내용이 발표된다면 무림맹은 크나큰 혼란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기에.

“그래, 사질의 생각은 어떤가?”

“예, 빈도의 의견을 물으신다면…, 이것을 그냥 밝히는 편이 실보다는 득이 많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대외에 공포하면서 대 금제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식으로 여 론을 몰아간다면 오히려 본맹으로서는 더욱 이익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맹주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숨기지 말고 그냥 드러내자…….”

“예, 사실 맹에서 그들이 보내온 서신을 비밀에 붙인다고 해도 한순간을 넘기기 위한 미봉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본맹에 서신을 보낸 이상, 여기 관련되 어 있는 많은 문파들에 개별적으로 서신을 보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각 문파들을 뒤에서 협박한다면 더욱 큰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 습니다.”

맹주는 눈을 번쩍 뜨면서 말했다.

“사질의 말이 옳은 듯하구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파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진대, 그에 대한 대책을 생각한 것이 있는가?”

“이번 인질 사건에 관련이 있는 문파와 연관이 있는 맹의 높은 직위를 지닌 자들을 모두 추려 낸 후 한직으로 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됩니다. 혹시 그들이 금 에 굴복하여 협조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으로 한다면 반발이 클 텐데…….’

“밀서를 공개하여 금에 대한 공분을 유도하는 한편,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려 있을 때 이 일을 비밀리에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호, 그렇겠구먼.”

이때,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후, 경비 책임자가 들어왔다. 그는 예를 갖춘 후 맹주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수개 장로께서 독대를 청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해야 하올지 하명해 주십시오.”

“공수개 장로가? 그가 무슨 일로 독대를 청한다는 말인가? 혹시 요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혈겁 때문인가?”

맹주의 추측도 일리가 있었다. 요즘 들어 여기저기에서 마교도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 사건이 줄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찰부주는 피식 미소를 지으 며 대답했다.

“그 일 때문이라면 굳이 맹주님께 독대를 청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번에 양양성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개방에 그 죄가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온 것이겠지요. 사실 개방에서 젊은 것들에게 정보가 새 나가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 일로 공수개 장로가 찾아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가 만약 그런 일로 찾아온 것이 맞다면 노부는 실망할 걸세. 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 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숙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감찰부주는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조언했다.

“맹주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하지만 상대에 따라 적당히 넘어가시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개방과 사이가 틀어져 봐야 본맹만 손해가 아니겠습 니까? 감찰부의 정보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점을 유념해 주십시오.”

씁쓸한 표정으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맹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질의 말이 옳은 듯하구먼.”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닐세, 그럴 필요 없네. 그냥 앉아 있게.”

그렇게 말한 후 맹주는 밖에 대고 외쳤다.

“공수개 장로에게 들어오라 이르게.”

“옛.”

곧이어 공수개 장로가 들어왔다. 그는 맹주가 혼자가 아니고, 그 옆에 감찰부주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흠칫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표정을 바로잡으며 맹 주에게 인사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자, 자리에 앉으시게. 노부와 독대를 요청했는데, 무슨 일이오? 공수개 장로.”

맹주의 태도는 독대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감찰부주가 있는 이 자리에서 밝히라는 말이었기에 공수개 장로는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생각을 바꿨다. 사실 조금 지나면 맹주는 감찰부주나 몇몇 측근들과 대화를 나눌 것이 분명한데 독대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음을 정한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남양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대해 맹주님께 아뢸 말씀이 있어서 감히 독대를 청했습니다.”

“그래, 무슨 말씀이시오?”

“이번 사건을 맹주님께서는 어떻게 처리하실 요량이신지 여쭤 봐도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맹주는 슬쩍 감찰부주를 바라본 후 난감한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허~ 그것 참. 난처한 질문이구려.”

물론 맹주가 그에 대한 답을 자신에게 해 줄 리가 없음을 공수개 장로도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개방의 잘못은 아예 거론하지 않고 옥대진을 물고 늘어졌 다.

“이번 사건의 생존자들 중에서 옥진호 장로의 손자인 옥대진이 끼어 있지 않습니까?”

“보고서는 받아 봤소.”

“예, 본방에서는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인 옥대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무림맹의 사활이 걸려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무림맹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말에 맹주는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다.

“그건 무슨 말이오?”

“본방에서는 모든 생존자들과 면담을 했고, 또 이번 사건에 가담한 자들이 소속된 문파들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모두들 한결같이 옥대진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맹주님께서는 옥진호 장로의 얼굴을 봐서 그를 용서해 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며 공수개 장로는 맹주의 표정을 힐끗 훔쳐봤다. 사실 맹주로서야 옥진호가 사라져 주는 것을 바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맹주가 옥대진을 봐줄 이유 가 있겠는가. 하지만 설혹 맹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은 실례였다.

“노부가 인정에 치우쳐서 그를 용서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하지만 노부는 이번 사건을 통해 개방의 정보망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펄쩍 뛰듯 놀라며 말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문제가 있다니요.”

“젊은 것들만 가서 일을 망쳐놨다면 그들을 치죄하는 것이 옳겠지. 하지만 노부가 받은 보고로는 절파검 같은 절정고수도 거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가 죽음을 당했을 정도라면 저쪽도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나? 오히려 그 아이들 덕분에 더욱 큰 화를 모면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 지.”

맹주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맹주가 남양을 치라고 명령한 상대는 수라도제였다. 만약 이번에 금군의 촉각에 걸려든 자가 수라도제였다면, 무림맹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타격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수개 장로는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항변했다.

“그건 맹주님께서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물론 절파검이 뛰어난 고수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맹주님께서 남양을 치라고 명령한 사람은 절파검이 아닌 수라도제 대협이 아닙니까? 또, 절파검이 처음부터 침투를 목적으로 그곳에 갔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침투가 아닌 황보세가의 어린 것을 보호하 기 위해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 망할 철부지 녀석들이 금군 병사들에게 들키자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방에서는 이 계획을 맹주님께 말 씀드리며 신신당부 드렸었습니다. 정면 공격을 해서는 가능성이 없다고 말입니다. 우수한 고수가 인기척을 숨기고 몰래 침투하여 불만 지른 후 재빨리 후퇴해야 한 다. 이것이 이번 작전의 가장 중요한 점이었습니다. 제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사실 몰래 침투해도 성공했을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게 시도해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맹주는 공수개 장로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과연! 공수개 장로의 말이 옳은 듯하구려.”

“이번 사건을 젊은 것들의 객기 정도로 너그럽게 넘어가시겠다는 맹주님의 넓은 마음은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신다면 마교 쪽에서 가만히 있

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공수개 장로가 마교를 들고 나오자 맹주는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마교가 말이오?”

“예, 남양을 칠 계책은 마교에서 먼저 흘러나온 것입니다. 교주가 본방에 정보 요청을 했는데, 본방에서 철저하게 조사를 해본 결과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생각되 어져서 그것을 우리 쪽에서 가로채자고 맹주께 청을 드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성공했다면 이쪽에서도 마교 쪽에 대고 할 말은 있었을 겁니다. 그쪽에 서 하는 것보다는 이쪽에서 처리하는 것이 성공확률이 높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둘러대면서 마교 쪽 정보망이라든지 그쪽이 취약한 부분들을 물고 늘어지면 어느 정도 그들을 무마시킬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일이 실패한 이상 마교에서 수긍할 만큼 뒤처리를 해 줘야만 합니다.”

공수개 장로는 맹주와 감찰부주의 눈치를 힐끗 살펴본 후 말을 이었다.

“양양성에서 온 정보에 따르면 교주는 이번 일이 실패하자마자 수라도제 대협의 숙소에까지 쳐들어가서 난동을 부린 모양이더군요.”

교주는 그날 수라도제의 숙소는 물론이고 양양성에 있는 개방도들까지 묵사발을 만들어 놨다. 하지만 공수개 장로는 개방에서 있었던 일은 쏙 빼놓고 수라도제의 일만을 말하는 것이다.

맹주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는 듯 혀를 끌끌 찬 후 감찰부주에게 말했다.

“쯧쯧, 그런 일이 있었나?”

그 말은 감찰부주도 처음 듣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도 그런 말은 처음 듣는지라…….’

“아아, 모두들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하기야 수라도제 대협처럼 속이 깊으신 분이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맹주님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는 연락을 했을 리 없겠지요. 하여튼 부상자가 30여 명에 이른다는 것을 보면 교주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은 속이 깊다고 했지만 수라도제의 성질이 개 같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죽하면 신경질 난다고 소림사 정문을 박살 냈겠는가. 그런 인 물이 그걸 쉬쉬하며 감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마도 마교 교주에게 줘 터진 것이 쪽팔려서 입을 다물었겠지.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서로 모르는 척 넘 어갔다.

“그것 큰일이구려.”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 마교와의 연합이 파기될 가능성까지 있다고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맹주도 예측하지 못했는지 불신 어린 어조로 물었다.

“흑살마왕이 금에 있는데 설마 그럴 리가… .?”

“아닙니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들이 정파와 손을 잡은 이유는 흑살마왕을 잡는 데 그편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 건으로 연합 작전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지금까지 마교에서 거둔 전과는 엄청난 것이 아닙니까? 3만에 달하는 정파의 고수들에 비해 겨우 1만 남짓한 마교도들이 세운 전과가 더 크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거기에다가 아직까지도 마교는 주력을 투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맹주는 감찰부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감찰부주의 안색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무림맹 내 정보 조직의 수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그쪽으로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문득 감찰부주의 뇌리를 스치는 문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마교에서 공식적으로 보내온 항의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는데 공수개 장로의 말을 들으니 마교의 행동 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맹주님, 공수개 장로님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감찰부주까지 찬성해 주자 공수개 장로는 더욱 힘을 얻어 맹주에게 말했다.

“맹주님께서는 이번 사건의 사후 처리를 마교 쪽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음을 잊지 않으셔야만 합니다. 인정에 치우쳐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신다면 마교와의 동맹 이 파기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동맹을 파기한다고 했는가? 허어, 그렇다면 요 근래 몇몇 문파에서 일어난 마교도 소행으로 보이는 혈겁도 그들이 본맹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한 짓거리라는 말 인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맹주님. 교주는 지금 양양성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흑풍대도 현재까지는 대단히 협조적이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천마혈검대의 고수 들이 저질러 놓은 소행이 아닐까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공수개 장로의 말에 감찰부주도 찬성했다.

“저희 쪽도 그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사실 마교 쪽의 첫 번째 목표는 흑살마왕입니다. 흑살마왕이 제거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교가 본맹과 전면전을 벌 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건 아마도 흑살마왕이 꾸민 짓거리임에 분명하다고 판단됩니다.”

맹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사실 자신도 그것이 마교 쪽의 소행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 외에도 공수개 장로는 이런저런 말을 나눈 후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공수개 장로가 물러가고 난 후 맹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사질, 과연 이런 일로 마교가 동맹을 파기할까?”

“개방의 추측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마교에서 항의문이 도착했었는데,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노부도 그걸 읽어 봤네. 자신들이 계획한 일을 무림맹이 가로채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점잖은 어조로 질책하고, 더불어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의 조속 한 처리와 그 처리 과정을 자신들에게 상세하게 보고해 달라고 쓰여 있었지 않은가? 사실 그쪽에서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 데…….”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공수개 장로의 지적을 받은 후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뭐가 말인가?”

“예, 공수개 장로는 마교 교주가 그 사실을 알자마자 수라도제 대협을 찾아가서 행패를 부렸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성질이 급한 인물이 공식적인 통로를 밟아 항 의서를 보내다니요. 너무나도 이성적인 행동이 아닙니까? 양양성에서 직접 항의문을 작성하여 수라도제를 통해 무림맹에 보내도 되었을 텐데, 왜 굳이 마교 총타로 연락을 보내고 또 그곳에서 무림맹으로 공식 서한을 보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까지 치밀한 처리를 한 것을 보면 교주는 만약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동맹 파기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허어…, 하지만 그는 흑살마왕을 없애기 위해 본맹의 힘이 필요할 텐데,

“어쩌면 그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본맹이 별 필요 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맹주를 향해 감찰부주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조목조목 말했다.

“먼저 지금껏 금과 전쟁을 벌이면서 마교에서 투입한 흑풍대의 전과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사실, 마교의 정예들을 몽땅 투입한다면 본맹이 필요 없다 는 생각을 할 법도 한 일입니다. 거기에다가 이번에 남양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마교는 본맹이 오히려 도움이 되기는커녕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훼방 놓는 훼방꾼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믿지 못할 동료는 없는 편이 더욱 편하다는 사실을 맹주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허어, 그럴 수도 있겠구먼.”

“지금까지 맹주님께서는 옥진호 장로의 처결을 미뤄 오셨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결단을 내리셔야 할 듯합니다.”

여태껏 맹주는 옥진호 장로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맹주파로 꼽히는 몇몇 장로들이 그의 제거를 비밀리에 거론해 온 적이 있었지만, 맹 주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무당산에서 심신을 청결하게 닦아오던 그에게 있어서 권력욕에 물든 그러한 행동들이 다 헛되게만 느껴졌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거론된 옥진호 장로의 제거 안은 조금 다른 면모를 띄고 있었다. 옥대진을 처리하려면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옥진호 장로도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무량수불…, 이런 식으로 그를 보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는데……. 이것도 다 원시천존님의 뜻인 게지.”

장로회의 소집을 명받은 옥진호 장로는 여섯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회의장으로 향하는 옥진호 장로의 두 눈은 언제나 그러하듯 주의 깊게 주 위를 살피고 있었다. 경비 무사들의 수와 질에서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주위에 낯선 인물들이 눈에 띄지도 않았다. 안면이 있는 문사복 차림의 사내 몇 이 두툼한 문서 뭉치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옥진호 장로는 허리에 찬 검을 끌러 호위 무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회의장 안에까지 호위 무사를 거느리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게.”

“옛. “

옥진호 장로는 여러 장로들에게 인사하며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모든 장로들이 다 모인 후, 맹주는 근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러 장로님들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남양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 때문이외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맹주는 옥진호 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옥진호 장로도 그 사건에 대한 보고서는 받아 봤을 줄로 알고 있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자네의 손자가 연루되어 있는 만큼 자네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군.” 이미 맹주가 그 말을 할 줄 예상이라도 한 듯 옥진호 장로는 열기 띈 어조로 옥대진을 변호했다.

“남양에서의 사건에 대한 보고는 저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아이들이 맹의 일을 망쳐 놓기는 했지만, 그들이 그 일을 추진한 것이 결코 나쁜 뜻이 있어서 그 런 것이 아님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 황실과 무림을 위해 한 일이니 이번 한 번만 관용을 베푸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맹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아이들은 중대한 범죄를 행했네.”

옥진호 장로는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범죄라니요? 무슨 범죄 말씀이십니까?”

“자네의 이름을 이용하여 개방에 압력을 가해 정보를 빼냈네. 새파란 젊은 것들이 무림맹의 이름을 이용하여 못된 짓을 했다는 말일세.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말에 옥진호 장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물론 그것이 큰 죄임을 알기는 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 을 끄집어낸 것을 보면 맹주는 이 일을 결코 대충 넘어가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손자 교육을 잘못시킨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것을 아니 다행이로구먼.”

빈정거리는 맹주의 말에 옥진호 장로의 안색이 노기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지만 감히 발작하지는 못했다. 이곳은 회의장인 데다가, 맹주는 여기 모인 그 누구보다 도 막강한 권력과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대들어 봐야 자신만 손해인 것이다.

“감찰부에서는 이것이 각 문파의 후배 밀어 주기가 아닌가 하고 조심스런 의견을 내놓았다네. 각 문파의 고수 여럿이 그 아이들을 호위해 준 것이 그 증거라고 말 일세.”

“제가 알기로는 그 아이들끼리.”

옥진호 장로는 재빨리 맹주의 말을 반박했다. 하지만 맹주는 냉정한 어조로 옥진호 장로의 말을 끊었다.

“노부의 말을 다 들어 보고 자네의 의견을 말해 주게.”

맹주의 말에 옥진호 장로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예.”

“그러니까 감찰부에서는 자네의 손자가 자네의 이름과 맹의 권위를 사칭하여 이 일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자네가 직접 주도하여 손자를 움직여 이 일을 추진한 것은 아닌가 보고 있네.”

그 말에 옥진호 장로는 경악해서 외쳤다. 그것은 손자는 물론이고 자신까지 파멸시키고자 하는 소리가 아닌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옥진호 장로야 경악하건 말건 맹주는 냉정한 어조로 대꾸했다.

“노부로서는 그걸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하기 어려웠다네. 그 아이들이 움직인 것은 맹에서 남양을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뒷조사를 한창 하던 시점이었네. 그 아이들이 맹에서 비밀리에 추진하던 그 일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사실 손자 녀석이 일을 어떻게 꾸민 것인지 옥진호 장로는 알지 못했다. 그 사건에 대해 손자 녀석으로부터 그 어떤 언질도 받은 적이 없었고, 또 그 사건 이후로도 손자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양양성으로 파견한 취조관이 보내온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은 그 정보를 마교 교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말했다고 하네. 매우 그럴듯하지. 하지만 남양을 치는 비 밀 작전을 전개함에 있어서 새파란 젊은 것에게 왜 그런 말을 교주가 했겠는가? 또 그 말을 들었다는 팽대성이 마교 교주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팽대성에게 그런 비밀 정보를 말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맹주의 질책에 옥진호 장로는 마지못해 대꾸했다. 스스로도 자신의 대꾸가 가능성이 희박함을 알면서도.

“교주가 일부러 흘렸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무림맹주는 언성을 높이며 질책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수라도제 쪽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봤네. 마교 교주는 개방으로부터 남양에 대한 정보를 받자마자 무공이 뛰어난 수하들을 골라 은밀 하게 남양으로 보냈네. 만약 자네 말대로 그게 일부러 흘린 것이라면, 그는 처음부터 남양을 칠 생각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그 시점에서 조사한 개방의 정보 로는 남양을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었다고 하네. 마교로서는 성공만 한다면 엄청난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을 게야.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일처리를 해서 교주가 얻는 게 뭔가?”

설마 교주의 목표가 처음부터 옥대진이었을 거라고는 예상도 할 수 없었기에 옥진호 장로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그런 만큼 그 정보를 마교 교주로부터 들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봐야 할 것일세. 그렇다면 그 아이들에게 마교가 남양을 치려한다는 정보를 누가 전해 줬겠는가? 맹에서도 1급 기밀로 처리되고 있었던 그 정보를 말일세. 그 작전을 진두지휘할 수라도제조차도 그 명령을 받기 직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네. 안 그런 가?”

“맹주께서는 저를 모함하고 계시는 겁니다. 저는 결단코 그런 짓은 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조사해 보면 알게 될 일.”

퉁명스런 어조로 옥진호 장로에게 대답한 맹주는 여러 장로들을 향해서 말했다.

“장로들의 생각은 어떻소? 그대들도 옥진호 장로처럼 노부의 의심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노부도 처음 감찰부에서 보고를 받았을 때, 보고서를 집 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네. 그만큼 그 보고서가 노부에게 안겨 준 충격은 컸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 그렇기에 노부는 감찰부의 청을 받아들여 옥진호 장로에 대한 치밀한 조사를 명령하고자 하네. 물론 그의 신분이 현직 장로인 만큼, 노부 독단으로 그를 구속 하라고 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기에 그대들을 소집한 것이니 선택은 그대들이 하게.”

맹주의 말을 가만히 들어 보니 매우 그럴듯해서 옥진호를 지지하던 장로들로서도 뭐라고 나서기가 곤란했다. 더군다나 맹주는 옥진호 장로가 결백하기를 원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모두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서로 쑤군거리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공수개 장로가 선뜻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공수개 장로는 옥진호 장로 가 잡혀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맹주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과연 감찰부에서 옥진호 장로를 의심하실 만하군요. 저는 맹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공수개 장로가 앞장서서 바람을 잡자 다른 장로들도 그 의견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조사한 후 잘못이 밝혀지면 치죄하자는데 뭐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인가.

“저희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옥진호 장로는 맹주의 눈치를 살피며 암암리에 공력을 돋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탈출할 결 심이었던 것이다. 사실 맹주의 말처럼 일이 공정하게 이뤄질 것이라면 그가 구태여 탈출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무림맹의 높은 직위에 오래 있으면서 모든 일이 그렇게 공평하게만 처리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상대를 정해 일을 시작했으면 그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철저히 짓밟는 것이 정석이었

다. 옥진호 장로도 지금껏 몇 번인가 해 왔듯,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옥진호 장로를 맹주는 가소롭다는 듯 슬며시 노려보고 있었다. 화경급에 이른 그가 옥진호 장로가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 는 것이다.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옥진호 장로는 공력을 풀면서 중얼거렸다. 이미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물론 저에게 죄가 있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맹세코 저는 손자에게 그런 일을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맹주는 냉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감찰부에서 공정하게 조사해 본 후 결론을 내릴 것이니 그대에게 죄가 없다면 염려하지 말게.”

이렇게 해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옥진호 장로는 투옥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연금 중인 옥대진 등을 무림맹으로 이송하라는 지시가 양양성으로 날아갔다.

옥대진이 무림맹에 도착했을 때, 그에 대한 대접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옥대진 앞에서 쩔쩔매던 취조관은 서릿발을 휘날리며 옥대진을 추궁하고 있었다. 사람이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야, 이 새끼야. 빨리 안 불어? 네놈은 옥진호 장로의 지시를 받고 남양에 침투했지?”

모진 고문을 당한 옥대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있었기에.

“크흐윽, 네, 네놈이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을 줄 아느냐? 두고 보거라. 할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하지만 취조관은 더 이상 옥대진의 협박을 들을 마음이 없었는지 콧방귀를 뀌더니 싸늘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흥! 아직까지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군. 내가 너를 이렇게 족칠 수 있다는 것은 네놈의 할아비가 끝장났기 때문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냐?” 하지만 옥대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완강하게 외쳤다.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할아버지를 뵙게 해 다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 주마.”

“이제 그만 버티고 순순히 시인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지 않겠나? 자, 말해 봐. 네놈은 옥영진 장로의 명을 받고 남양에 침투했지?”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한 일이다.”

취조관은 이를 갈며 외쳤다.

“독한 새끼! 하지만 네놈이 개겨 봤자야. 이봐.”

취조관의 부름에 옆에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좀 더 조져. 내일까지 불지 않으면 네놈도 저 꼴이 될 줄 알아.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후, 그 사내는 몇 가지 새로운 고문 기구들을 더 꺼내더니 옥대진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길고 긴 옥대진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취조관은 점점 더 처참한 몰골로 변해 가는 옥대진을 냉소 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옥대진에 대한 대접이 이렇게 바뀐 것은 위쪽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상관은 옥대진의 행동이 옥진호 장로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증 거를 내놓으라고 지시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취조관이 너무나도 원하고 있었던 명령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에게 큰소리를 치던 놈이 역으로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니 이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고문하는 재미가 쏠쏠하 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취조관은 이 새파란 애송이에게 당했었던 갖은 수모를 떠올리며 더욱 그를 닦달하는 중이었다.

며칠 후, 전 무림맹주 옥청학의 아들이자, 무림맹 장로였던 옥진호 장로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공정성을 기한다는 명목 하에 진행된 공개 재판이었기에 많은 무림 의 고수들이 재판을 참관할 수 있었다. 물론 죄인의 신분이 무림맹의 현직 장로인 만큼 명망 있는 고수들에게만 참관할 자격이 주어졌다.

피고석에 앉아 있는 옥진호 장로는 현직 장로인 점을 고려하여 산공분이 든 차만을 마셨을 뿐, 그 어떤 제제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재판석에 앉아 있는 그의 신색은 수감되기 며칠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재판이 진행되자 옥진호 장로의 죄상에 대한 가지각색의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어느 정도 심증은 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정확히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었다. 만약 이런 식으로 재판이 계속 진행된다면 그는 무혐의로 풀려날 가능성이 매우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감찰부에서 꺼낸 증거품은 장내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렸다.

““바로 이것이 옥대진의 친필 자술서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옥진호 장로에게서 언제, 어떤 식으로 지시를 받았는지 모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자술서는 옥대진이 고문에 못 이겨 기록한 것이었다. 자술서의 뼈대는 감찰부에서 직접 만들었고, 그것을 불러 주는 대로 옥대진이 직접 쓴 것이었기에 모 든 내용은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자술서가 튀어나오자 지금까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옥진호 장로는 노성을 터뜨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짓거리! 네놈들이 손자를 고문해서 그것을 쓰게 한 모양인데…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이런 못된 놈들!”

“그런 망발로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가문의 영광도 중요하지만, 구태여 이런 추태까지 부릴 필요가 있었습니까?”

“추태를 부리기는 누가 부렸다는 것이냐? 그따위로 증거를 날조하다니…….”

이때 지금까지 조용히 재판을 참관하고 있던 하북팽가의 가주가 드디어 분노를 터뜨렸다.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옥진호 장로가 범인임에 틀림없었다. 모든 증거가 명명백백한데도 아직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뻔뻔스럽게 오리발을 내밀다니……. 그것을 보면서 그는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망할 녀석! 네놈 때문에 노부의 아들이 죽었거늘, 아직까지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말이냐?”

그와 동시에 하북팽가주의 손에서는 매서운 권풍이 쏘아져 나갔다. 누가 봐도 일격에 옥진호 장로를 없애 버리겠다는 뜻임을 알았지만, 너무나도 강맹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주위에 있는 고수들은 감히 그것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 무표정하게 장로석에 앉아 있던 맹호검군(猛虎劍君) 백량(諒)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지금 그는 재판에 참석한다고 무기도 지니지 않은 상태였기 에 감히 하북팽가주와 접전을 벌일 수는 없었지만, 그의 한 수 정도는 막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펑!

백량 장로는 강맹한 권풍의 반동을 줄이기 위해 재빨리 뒤로 서너 걸음이나 물러서야만 했다. 자신의 일격을 백량 장로가 막아 버리자 하북팽가주는 더욱 분기탱 천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까지 백량 장로는 옥진호 장로파로 분류되던 인물이었다. 계속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한다면 백량 장로를 해치우는 한 이 있더라도 아들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때, 백량 장로는 몸을 빙 돌려 피고석에 앉아 있는 옥진호 장로를 바라보며 싸늘한 어조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매화문검 장로, 감찰부에서 제시한 증거가 참이오?”

믿고 있던 백량 장로마저 이런 식으로 묻자 옥진호 장로는 벌컥 화를 내며 외쳤다.

“자네까지 그런 걸 묻다니……. 저것들 모두가 다 새빨간 거짓임을 자네는 모르겠는가? 정말 답답하구먼. 증거 따위야 얼마든지 조작해서 만들 수 있음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옥진호 장로의 대답에 백량 장로는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헛, 아직까지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다니. 노부가 저런 소인배를 믿고 함께 일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허탈하구나.”

백량 장로는 그대로 자신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백량 장로라는 걸림돌을 공격하려던 하북팽가주만 우스운 꼴로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어 버렸다. 이때, 하북팽가주 옆에 앉아 있던 황보세가주가 그의 손을 슬쩍 잡아끌어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지금 저놈을 죽인다는 것은 안락한 죽음을 선물하는 것과 같소이다. 저런 놈에게 그런 호사를 안겨 줄 필요가 있소이까?”

황보세가주는 아들의 목숨은 건졌는지 몰라도 가문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들 중의 한 명이었던 절파검 황보청을 잃었다. 그것이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면 모 르겠지만, 지금 가만히 되어 가는 꼴을 보니 완전히 개죽음을 당한 것이 아닌가? 황보세가주가 이빨을 갈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 그렇구려. 저런 놈에게는 안락한 죽음도 사치지.”

이번 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황보세가주와 하북팽가주가 옥진호 장로의 유죄를 인정한 것만으로도 장내의 분위기는 그쪽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만큼 그 두 가 문의 위세는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었는가?”

무림맹주의 물음에 감찰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상대로 재판은 순조롭게 끝났습니다.”

그 말에 맹주는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크흠, 그런 거목을 이런 식으로 보내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씁쓸하구먼.”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너무 자숙할 줄 몰랐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참, 사질은 그를 언제 처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요. 참, 황보세가주나 하북팽가주가 가장 지독한 고통을 수반하는 죽음을 내리라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가능한 한 지독한 통증 을 유발시키면서 차츰차츰 죽여 나가는…….?

하지만 맹주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감찰부주의 말을 끊었다.

“잠깐! 그건 너무 잔혹한 듯하구먼. 그보다는…, 결론적으로 그는 이적 행위를 한 셈이니 오마분시(五馬分屍)를 하기로 하세.”

오마분시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목과 양손, 양발을 각기 말 한 필씩에 연결한 후, 일시에 말들을 출발시켜 토막 내어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황실에서 반역도를 처형하는 데 애용되고 있는 무시무시한 처형 방법이었다.

하지만 감찰부주는 난감하다는 듯 대꾸했다.

“보기에는 끔찍할지 모르지만 순간적인 죽음입니다. 황보세가나 하북팽가에서 이의를 제기해 오지 않겠습니까?”

“그건 노부가 무마시키지. 오마분시로 하게.”

맹주의 명령에 감찰부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맹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