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0권 16화 – 북쪽이 심상치 않다 (20권 끝)

북쪽이 심상치 않다

묵향은 자신이 깔아 놓은 미끼를 옥대진이 덥석 물었음을 알고는 능청스럽게도 무림맹에 공식 항의서까지 보내어 옥씨 일족의 몰락을 부채질해 놓은 상태였다. 물 론 자신의 간접적인 위협이 무림맹에 먹혀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대로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관지 장로.”

묵향의 부름에 관지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아마 며칠 내로 양양성에서 철수해야 할지도 모르니 미리 준비를 해 두도록 하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갑작스러운 명령이었기에 관지는 잠시 어리둥절한 듯했다.

“철수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쩌면 무림맹과 동맹을 파기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라.”

놀란 관지 장로가 뭐라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전에 묵향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그가 이번에 하는 말은 어기전성을 통한 것이었다.

《그리 놀랄 필요는 없네. 사실 이건 무림맹에 대한 위협용일 뿐이야. 금에 대한 전쟁을 계속 유지한다는 기본 계획에는 변함이 없으니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어. 다 만 동맹 파기를 한 상태에서 흑풍대를 계속 양양성에 주둔시킬 수는 없지 않겠나? 그렇기에 자네에게 미리 언질을 주는 거야.》

상관의 뜻을 파악한 관지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수하들에게 지시해 두겠습니다.”

“흠… 문제는 동맹 파기 선언을 언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냐 하는 것인데……. 지금쯤 무림맹에서 뭔가 회답이 올 때도 되었는데, 안 오고 있다는 말씀이야?” 이러고 있을 때 밖에서 경비 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을 뵙기를 청하는 자가 있사옵니다.”

“호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들라고 해라.”

“옛.”

곧 문이 열리고 청수한 인상의 도인이 실내로 들어왔다. 그는 교주를 오늘 처음 만났기에,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교주를 보고 약간 의외인 듯했다. 사실 교주의 모습은 그가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마교도들과는 달리 전혀 마교도같이 생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여 공손하 게 묵향에게 인사를 건넸다.

“빈도는 무림맹 장로인 만수(滿水)라고 하외다.”

무림맹에서 공식적으로 마교 교주에게 보내는 사신이다. 그런 만큼 무림맹 장로급은 되어야 하기에 이번에 옥진호를 대신하여 새로이 장로가 된 만수진인이 이곳 으로 파견되어 온 것이다.

“맹에서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했군. 자, 이리로 앉지.”

만수진인은 묵향이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소이다.”

“그래, 무슨 일로 본좌를 만나러 왔나?”

만수진인은 단단하게 봉인된 제법 두툼한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이것을 전해 드리라는 맹주님의 지시를 받고 왔소이다.”

묵향이 봉인을 뜯어 보니 그 안에는 문서 뭉치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남양 사건에 대한 조사와 그에 연관된 자들에 대한 처리 결과를 기록해 놓은 문서외다.”

묵향은 최종 처리가 어떻게 끝났는지 궁금했기에 재빨리 문서를 집어 들어 뒷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을 읽으며 묵향은 하마터면 광소를 터뜨릴 뻔했다. 하지 만 무림맹 장로가 앞에 앉아 있기에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일부러 표정을 더욱 딱딱하게 굳히며 읽고 있었다.

무림맹은 교활하게도 이 기록에서 자신들이 수라도제 등을 투입하여 마교의 공적을 가로채려 했다는 부분은 빼 버렸다. 개방에서 들어온 보고서를 옥진호 장로가 빼돌려 자신의 손자에게 일을 맡긴 것으로만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마교가 행하려 했던 일이 완전히 틀어진 것에 대해 사과한다는 내용과 함께 말이다.

모든 죄를 옥진호 장로 개인에게만 뒤집어씌운 것에 묵향은 내심 기가 막혔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허어, 이런 나쁜 녀석들을 봤나. 본교에서 세운 계책을 자신들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이용하려 들다니……. 그야말로 인두겁을 쓴 놈들이로구먼.”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일에 연루된 자들은 모두 다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았소이다.”

“옥대진이라는 젊은이도 말인가?”

“물론이오. 단 한 명도 예외는 없었소이다.”

그 말을 들은 묵향은 내심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도 감옥에 수감해 뒀다고 했다면 이쪽에서 처리할 테니 넘겨 달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일단 일을 시작 하자마자 옥씨 일족을 몰살시켜 버린 것을 보면 현 맹주도 참 냉정하기 그지없는 인물인 모양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맹주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전 무림맹주 옥청학으로부터 시작된 옥씨 일족의 권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인정을 봐줬다가는 되려 큰 우환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한 번 시작을 했으면 아예 끝장을 봐야만 하는 것이다.

묵향은 슬쩍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족감이 깃든 한숨을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현직 장로를 단죄하다니, 무림맹주의 과단성 있는 결단과 그 공명정대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구먼.”

“과찬이시오.”

“하지만… 이런 종잇조각만으로는 믿기가 힘들지. 최소한 딴 건 몰라도 주모자인 옥진호 장로의 목이라도 소금에 절여 보내 주는 것이 서로 간의 신뢰 구축을 위 해 필요한 절차가 아닐까?”

묵향의 제안에 만수진인의 표정은 조금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물론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문제가 있소이다. 귀교와 본맹은 오랜 세월 반목과 투쟁을 벌여온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소이까? 그런 만큼 아무리 잘못이 있는 자라고 해도 그가 무림맹의 장로였던 이상 그 목을 잘라서 귀교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외다. 이 점 교주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소이다.”

“딴은 그럴 수도 있겠구먼.”

묵향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 준 것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은 후, 앞으로도 금나라를 박살 내는 데 서로가 최대한 협력하자고 다짐한 다음 만수진인을 돌려보냈다. 그런 다음에야 묵향은 혼자서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옆에서 듣기라도 할까 봐 조심하는 악동처럼 말이다.

묵향이 한참 신이 나 있을 때, 장인걸의 심정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무림맹과 마교를 이간시켰는데도 도무지 그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양양성에서 이탈하는 무림인들은 아직도 없느냐?”

편복대주는 더욱 깊이 부복하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하들의 보고로는 양양성에서의 인원 변동은 아직도 없다고 하옵니다.”

“허, 참, 이상한 일이로다. 지금쯤 뭔가 결론이 날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실패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아직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실패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장인걸로서는 작금의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교와 정파는 이토록 서로를 신뢰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이것을 눈치 챌 수 있었을까?

이때, 편복대주가 장인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양양성에서 무한에 이르는 방어선을 책임지고 있는 송군 장수는 악비라는 대장군이옵니다.”

“그런데?”

“그자가 이번에 30만에 달하는 방대한 병력을 훈련시키고 있사옵니다.”

“그건 전에 자네가 본좌에게 보고했지 않은가? 그들이 모병하는 것을 기회로 첩자들을 그 속에 침투시켰다고 말이야.”

편복대주는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교주님. 그들로부터 전해진 정보를 종합해 본 결과 아마도 그들의 훈련이 대충 끝마쳐지는 내년쯤이면 송군 쪽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오지 않 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었사옵니다.”

그 보고에 장인걸은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렸다.

“헛, 그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겨우 그 정도 병력으로 공세를 가해 올 리가 없지 않은가. 현재 송군이 보유한 병력이라고 해 봐야 10만 남짓인데, 거기에 오합지 졸 30만을 보태 봤자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들겠다는 꼴이 아닌가? 증원병은 자기들만 준비하고 있는 줄 알다니 한심한 놈들이로고.”

장인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송군이 30만의 신병을 모집한 것을 알고, 자신도 황제에게 주청을 드려 여진족과 거란족의 병사 30만을 모집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년이 되면 양쪽 다 30만씩이 준비되는 것이겠지만, 그 질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장인걸이 모집하는 것은 척박한 대지에서 사냥과 전쟁으로 단련된 용사들 이었으니 말이다.

장인걸의 지적에 편복대주는 깊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물론 송군의 전력만이라면 그렇사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무림맹의 고수들이 가세한다면 상당한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 말에 장인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허긴, 필요 이상으로 모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 자네가 생각해 둔 것이라도 있는가?”

“악비라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송군의 중추인 그자만 없애 버린다면 송군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는 오합지졸로 전락할 테니 말이옵니다.”

그 말에 장인걸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제거한다? 그자가 있는 양양성은 지금 첩자 한 명 침투시키기가 힘들 정도인데, 어떻게 제거하자는 말인가?”

이것이 지금껏 무인으로 살아왔던 장인걸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편복대주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교활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의외로 간단하옵니다, 교주님. 몇몇 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들을 매수하거나 협박하여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옵니다. 멍청한 황제만 설득하면 되는 데 무엇이 힘들겠사옵니까?”

“호오, 그런 기발한 계책을 생각해 내다니……. 좋은 계획이로다. 빨리 시행하라.”

“옛, 교주님. 곧장 시행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보고로는 아무래도 북쪽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북쪽이 심상치 않다? 그건 무슨 말인가?”

“몽고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말이옵니다.”

“북쪽에는 양지에 장군의 10만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몽고 놈들의 세력이 커졌다고 해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게야.”

“아무리 양지에 장군이 뛰어난 용장이라고 하지만 10만으로는 역부족인 듯하옵니다. 몽고족들은 정면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들이닥쳐 병사들을 살해한 후 노략질을 하옵니다. 그러다가 병사들이 출동하면 순식간에 도망쳐 버리는지라..”

“젠장, 그런 식이라면 어려울 수도 있겠구먼. 저 망할 놈의 무림맹 놈들만 아니라면 본좌가 정예를 이끌고 가서 싹 쓸어버렸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장인걸은 이윽고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장인걸은 이빨을 뿌드득 갈며 외쳤다.

“어쩔 수 없구나. 후방에 대기 중인 병력을 돌리는 수밖에……. 편복대주!”

“옛.”

“지금까지 모병한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예, 현재까지 모병한 것은 20만 남짓이옵니다만, 내년 봄이면 교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30만을 다 모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좋다. 그렇다면 우선, 그 20만을 북쪽으로 돌려라. 그 정도 병력을 준다면 아무리 바보 멍청이라도 송을 끝장낼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장인걸은 송을 멸한 후,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자신의 일을 훼방 놓은 몽고 놈들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고 속으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양쪽은 별다른 움직임 없이 서로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었을 뿐, 그 내 면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송군은 30만의 신병 훈련에 국운을 걸고 있었다. 수라도제와 약조한 대로 봄에 공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전력을 보유하는 것은 필수 사항이었으니 말이다. 금군은 금군대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인걸이 봄이 되면 사용하기 위해 새로이 모병해 놨던 20만은 몽고족을 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고, 60만의 정예들 은 현 위치를 고수하며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편복대주는 송군과 무림맹의 동태도 살피랴, 조정의 중신들도 포섭하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림 연합의 고수들은 봄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겉모습은 그랬지만 가급적이면 고수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실력 있는 고수들은 문파로 불러들이고, 급수가 떨어지는 자들로 대체하고 있었다. 장인걸의 밀명을 받은 다섯 명의 고수들이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집안을 튼튼히 해 놓 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묵향은 조용히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장인걸이 언젠가는 허점을 보여 주기를 기다리며. 하지만 묵향이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작은 이 변이 십만대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어엇? 이게 무슨 조화지?”

수석장로는 불안한 듯 탁자 위를 바라봤다.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은 마치 약한 지진이라도 난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석장로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던 군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염려 놓으십시오, 수석장로님. 혹시나 해서 본교의 모든 기록을 이미 조사해 봤습니다만, 지금껏 십만대산에서 화산 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아마 며칠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질 겁니다.”

하지만 군사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사실 그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허어, 이러다가 그치면 좋으련만. 그런데 요즘 들어 점차 주기적으로 바뀌는 것 같아 아주 불안하단 말씀이야. 혹시 이러다가 쾅하고 터지는 거 아냐?”

혹시 부하들이 들었을까 봐 군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수석장로에게 사정했다.

“제발, 불길한 말씀 좀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군사의 예상과 달리 불안에 떠는 것은 수뇌부만이 아니었다. 마교 내의 모든 하급 고수들까지도 이 알 수 없는 지진 현상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이 다. 삼삼오오 모여서 여기저기서 쑤군거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인 현 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묵향>21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