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0권 4화 – 추혈광마(追血狂魔)
추혈광마(追血狂魔)
양양성에 모인 화경급 고수들을 총동원하여 마교 교주를 때려잡으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난 후, 수라도제는 비밀리에 몇몇 문파의 수장들을 소집했다. 물론 수라도제가 교주를 때려잡겠다는 야무진 꿈을 아직까지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모인 신검합일급의 고수들을 총동원할 수 있다면 교주가 아무리 현경 급에 준하는 고수라 해도 능히 처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교주 한 명만이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옆에 언제나 만통음제가 따라다닌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죽자고 싸워 준다면 어떻게 해 볼 수 도 있겠지만, 도망치려고만 작정한다면 현재 동원 가능한 수의 세 배가 넘는 신검합일급의 고수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잡을 방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 일당들은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기회는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허어, 참. 일이 고약하게 되었구먼.”
만통음제가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생각해 봤을 때, 정찰이라든지 적진 시찰 같은 임무를 주어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또, 그의 경우 휘하에 상 당한 수의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일정 구역을 책임지고 맡아 달라고 하며 보내 버릴 수도 없었다.
수라도제는 한숨만 푹푹 내쉬며 속앓이만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으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때,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기에 약간 짜증스런 어조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그 말에 오늘 경비 책임을 맡은 무사가 살짝 문을 열고 들어와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장 사령이 호위 무사를 부탁하러 왔습니다, 태상문주님.”
“호위 무사를? 무슨 일인데 그런 부탁을 한다고 하더냐?”
“예, 방금 전에 자신을 흑풍대 소속의 무사라고 소개한 자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흑풍대라…….”
그게 어떤 단체인지 잠시 생각해 보던 수라도제의 머릿속에 흑색의 갑주를 걸친 당당하기 그지없는 흑풍대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까지 함께 왔다가 자신들은 이곳에 머물렀고, 그들은 금군을 추격해서 앞서 나갔다. 아마도 그가 전령을 보내 온 모양이다.
“그래서?”
“예, 그자는 악비 대장군을 면담하기를 청하고 있다고 하더이다. 그런데 그들은 흑풍대라는 단체 자체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는 데다가, 그가 흑풍대를 사칭한 적 의 첩자일 수도 있기에 호위를 요청한 모양입니다.”
“알겠다. 노부가 직접 가 보기로 하지.”
“태상문주님께서 친히 말씀이십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속하가 무공이 뛰어난 자들로.”
수라도제는 손을 들어 상대의 말을 막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니 됐네. 그에게 가서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야.”
장사령의 안내를 받아 수라도제가 가 보니 흙먼지가 잔뜩 끼어 있어 희뿌연 회색으로 보이는 갑주를 걸친 인물이 서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초조한 듯한 시선을 보내 왔다. 수라도제는 첫눈에 상대가 상당한 수준급의 고수라는 것을 파악했다. 잔잔한 가운데 폭발적인 기도를 내뿜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먼지에 싸인 더러운 갑주만을 봤겠지만, 수라도제는 먼지 속에 감춰져 있는 핏덩이를 봤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육했는지 그의 갑주 전체가 검붉은 핏덩이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저런 살귀가 전령일 가능성은 없었다. 전령으로 보내오기에는 실력이 너무 뛰어난 자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
“흑풍대에서 왔다는 자가 자네인가?”
“예.”
안면 보호대에 가려져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사내인 줄 알았건만, 놀랍게도 여성의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데 악비 대장군을 만나자는 것인지 노부에게 알려 줄 수 있겠는가?”
상대는 수라도제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투구 사이로 나와 있는 눈동자를 예리하게 빛내며 되려 질문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파란 젊은 것이 와서 노부 어쩌구 하고 있으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귀하는 누구십니까?”
“사람들은 노부를 수라도제라고 부른다네.”
그 말에 상대는 군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대협의 존성대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악비 대장군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군사적인 문제이기에 대협께 드릴 말씀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옆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장 사령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서문 대인,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 흑풍대의 무사가 맞습니까?”
“복색만으로 본다면 흑풍대 소속의 무사가 맞소이다. 천마신교라고 불리는 무림의 단체에서 파견한 9천의 정예들이지요.”
“천이라고 하셨소이까?”
장사령은 기절할 듯 놀랐다. 9천이라는 수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수라도제가 이끌고 온 무림인들의 가공할 만한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본 장 사령이 었다. 그런 자들이 9천이라면 엄청난 힘이 아닌가?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코 흑풍대를 홀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장 사령은 급히 흑풍대 무사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대장군께 연락드리리다.”
장사령이 달려가고 난 후, 수라도제는 흑풍대 무사에게 은근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노부는 자신을 밝혔는데, 아직 자네의 소개를 못 들었네만. 알려 줄 수 없는 겐가?”
“저는 흑풍대 부대주를 맡고 있는 마화라고 합니다.”
“부대주라고? 허, 놀랍구먼. 자네에게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노부는 지금까지 평생을 거쳐 천마신교와 싸워 왔다네.”
“…..”
도대체 수라도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마화는 의심 가득한 눈길을 상대에게 보냈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런데 요 근래 들어 지금까지 노부가 마교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제대로 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껏 싸워 왔던 천마신교의 하부단체들과 자네들은 너무나도 다르니 말일세.”
그 말에 마화는 잔잔한 어조로 대답했다.
“서로가 추구하는 이상이 다르니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교는 힘을 숭상할 뿐, 정파에서 생각하듯 악에 물든 무리들은 아닙니다. 물론 본교에도 악질적인 인 간들이 간혹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파 쪽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건 노부도 인정하는 바일세. 정파라고 자처하는 놈들 중에서도 돼먹지 못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어쨌거나 귀교와 정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음이야.”
“……”
둘 사이에는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얘기를 주도하고 있던 수라도제가 입을 열지 않자, 마화 또한 괜히 모르는 사람과 수다를 떠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자연 침 묵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침묵이 깨진 것은 요란한 갑주 소리를 내며 다가온 송군 장수들 때문이었다.
“귀하가 흑풍대에서 파견되어 온 사람인가?”
악비 대장군은 여태껏 보아 온 무림인들의 모습과는 전혀 생소한 모습의 마화를 보며 의아스러운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렇듯 중무장을 갖춘 무림인은 처음 봤던 것이다.
마화는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악비 대장군이십니까?”
군례를 올리는 마화의 동작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악비 대장군은 상대가 어쩌면 군부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본관이 악비일세. 그래, 본관에게 급히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고 했던가?”
“예, 이틀 전까지 본대는 양양성에서 퇴각하던 금군을 추격하여 지속적인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왜 그렇게 금군 쪽에서 양양성에 대해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는지 그제서야 이해한 악비 대장군은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오오, 그랬었는가?”
“예, 그런데 50만에 달하는 금군이 남하해 오면서 지금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적의 군세가 워낙 엄청나 본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인지라 그것을 전 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새로운 적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에 악비 대장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50만의 적이 새로이 가세했다는 말인가? 그래, 놈들의 움직임은 어떤가? 언제 양양성에 도착하겠는가?”
“그들은 본대에 쫓기던 금군과 합류한 후,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방책을 치며 방어 상태를 굳건히 하는 것으로 보아 곧바로 움직일 의사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 마도 그들이 행동을 시작하는 것은 다음 해 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대주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본관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둘이 합쳤다면 물경 60만에 달하는 대군이 되니, 초목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봄이 되기 전까지는 움직이기가 쉽지 않겠지.”
잠시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악비 대장군이 마화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래, 흑풍대주는 어떻게 행동하겠다고 하시던가?”
“곧 겨울이 다가오니 조만간 양양성으로 퇴각하시겠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본관도 그게 좋을 듯하구먼.”
“그리고 흑풍대주께서 대장군께 한 가지 청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뭔가? 본관이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겠네.”
“각 곳에 주둔 중인 송군 진영에 흑풍대의 존재를 천마신교 소속이 아닌 황군 소속의 기마대로 해달라는 청이셨습니다.”
“이상한 부탁이로군.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현재 금군을 지휘하는 장수는 본교의 반역도입니다. 만약 그자가 본교에서 고수들을 이곳에 파견했음을 안다면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게 됩니다. 하루라 도 빨리 금을 정벌하기를 원하신다면 대주님의 청을 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잠시 궁리하던 악비 대장군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대주님을 대신하여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편의상 흑풍대는 대장군님의 명령을 받는 것으로 하고, 본대에 대장군님의 인장이 찍힌 공식 문서를 소지한 전령을 보내 주십시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다소 귀찮으시더라도 공식적으로 처리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기왕에 허락한 것인데 확실하게 처리해 줄 테니 염려 놓게나.”
“옛, 대주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전언을 전했으니,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그런 다음 악비 대장군은 옆에 시립하고 서 있는 장 사령에게 명령했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피곤할 텐데 편안한 자리를 주선해 주도록 하게.”
“옛, 대장군.”
철그렁거리는 갑주 소리를 울리며 대장군이 멀어진 후, 장 사령은 마화에게 말했다.
“본관을 따라오시오.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소이다.”
“아니, 그것보다 여기에 와 있는 무림인들 중에서 천마신교의 교주님이 계시지 않소?”
그 말에 장 사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무림인들의 일은 본관이 잘 모르오. 참, 여기 계시는 서문 대인께서 그들을 관장하고 계시니 이분께 물어보도록 하시오.”
마화가 의문의 눈길을 자신에게 돌렸지만, 수라도제는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교주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를 해치우기에 이번만큼 좋은 기회가 또 있었겠는가. 없애 버린 후 그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고 발뺌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을……. 하 지만 이 여인이 이곳에 도착하면서 그 가능성도 이제는 끝이었다.
“수라도제 대협, 저희 교주님께서 이곳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밖에 나가서 조금만 알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요즘 들어 천지문의 제자 하나를 매일같이 개잡듯 때려잡고 있다는 것을 성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지금 성내에는 천지문이 혹시 교주의 마음에 안 드는 무슨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풍문까지 나돌고 있는 중이었다.
“그라면 지금 천지문의 제자와 한창 비무 중일 거라네. 노부를 따라오게.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사람을 붙여 주지.”
“감사합니다, 대협.”
안내자를 소개받은 마화는 먼저 옷 가게로 가서 옷부터 구입했다. 요 근래 몇 달 동안 야지를 뒹굴며 살아온 그녀였다. 목욕은 물론이고 세탁하기도 힘든 여건이었 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서 썩은 내가 풍기고 있는 상황인데, 그런 옷을 입고 어찌 교주를 만나러 간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고 싶었지만, 자신의 몰골을 생각했을 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그다음으로 선택한 행로는 묵향이 기거하고 있는 객잔이었다. 객잔에 도착하여 방을 구한 그녀는 먼저 갑주와 장검에 묻은 피부터 정성껏 닦아 냈다. 그런 다음 기름칠을 골고루 한 후에야 목욕을 시작했다.
산뜻한 새 옷으로 단장을 한 마화는 허리에 장검을 차고 밖으로 나왔다. 교주가 있는 곳은 안내자를 돌려보내기 전에 이미 알아 둔 상태였기에 그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정말 무심하기 그지없다니까. 어떻게 몇 달이 되도록 연락 한 번 안 하실 수가 있지? 그분께서 몽고에서 돌아오셨다는 것도 부교주님께서 연락을 주셨기에 알 수 가 있었던 거잖아. 그런데, 부교주님께서 부상을 당할 정도로 강적을 만났던 모양인데, 괜찮으신 건가 모르겠네.”
낮은 목소리로 홀로 투덜거리며 길을 가던 마화는 곧이어 건강하기 그지없는 묵향을 볼 수 있었다.
“크하하핫! 좀 더 제대로 해 봐!”
“이런 빌어먹을!”
뻑!
“크윽!”
“여기도 비었잖아.”
빡!
“으악!”
매우 즐거운 것 같은 묵향의 모습을 보며 마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도 언젠가 저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옛날에 초 부교주님을 저렇게 신나게 두들겨 패셨었지. 그걸 보면 교주님께서는 저 사내가 마음에 쏙 드신 모양이야. 참, 내. 언제나 애정 표현을 저따위 로밖에 할 줄 모르다니, 언제 철이 드실지 원…, 쯧쯧. 당하는 사람 입장도 생각하셔야지.”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본 묵향이 활달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 마화 아냐. 지겹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더 다져 놓고 그리로 갈게.”
그 말에 마화는 황당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다져 놓다니? 저 양반은 눈앞의 사내가 고깃덩이로 보인단 말인가?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 쉬엄쉬엄 하세요. 당하는 사람 입장도 좀 생각하셔야죠.”
“무슨 그런 말을, 쇠도 두들겨야 단단해지는 거야.”
그 말에 마화는 기가 막히다는 듯 대꾸했다.
“그자는 쇠가 아니라 사람인데요.”
“이거나 그거나 둘 다 똑같은 거야. 잘 연마해 놔야 날카로운 무기가 되지.”
한눈을 팔며 마화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진팔을 열심히 쥐어 패는 것을 보면 역시 묵향의 실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때 옆에서 소연이 다가오며 마화에게 말을 걸었다.
“기다리시기 지루하실 텐데 차라도 한잔 드시겠어요?”
마화는 활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안 그래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죠? 옷차림으로 보아하니 시비는 아닌 듯한데…..
그 말에 소연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천지문도들을 이끌고 있는 소연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화는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까? 소연이라면 교주의 양녀가 아닌가. 하지만 교주는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 그렇다면 결 론은 정해진 것.
마음을 정한 마화는 필요 이상으로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천지문이라고? 그 낙양에 있는 천지문 말이냐?”
물론 마화는 성격적으로 아무리 하찮은 인물이라도 이렇듯 다짜고짜 하대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이 상대가 누군지 안다는 사실을 숨겨 야만 했다. 그러자면 누가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법한 보편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화 정도의 지위를 지닌 사람이라면 천지문의 문주라고 해도 그녀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하물며 그 문도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기 에 마화는 상대가 누군지 잘 알면서 일부러 하대를 사용했다. 그편이 누가 봐도 자연스러우니까.
그 말에 소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천지문이라면 본교와 약간의 내왕이 있는 관계니, 본녀가 누군지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본녀는 흑풍대 부대주를 맡고 있는 마화라고 한다.”
소연이 이곳에 오기 전 흑풍대와 무림 연합의 고수들은 연합 작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때 소연은 흑풍대라는 것이 마교의 여섯 개 무력 세력들 중의 하나라는 말을 수라도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각 무력 세력의 수장들인 대주가 모두 다 마교의 장로들일 정도니, 그보다 한 단계밖에 떨어지지 않는 부대주의 직위는 얼마 나 높겠는가.
천지문의 문도인 자신과 마화라는 이 여인이 지니고 있는 무림에서의 배분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다. 그렇기에 그 말에 소연은 상대 의 얼굴조차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더욱 고개를 깊게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차를 올리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소연은 차를 가져와 마화에게 권했다. 잠시 관전을 하며 차를 마시던 마화는 소연에게 말을 걸었다. 교주의 양녀인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여자기에 교주가 아직까지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교주님과 비무하는 사람도 천지문도인가?”
별로 할 일도 없는 상태였기에 상대가 심심해서 말을 건 것이었다고 해도, 소연으로서는 상대의 질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 사제인 진팔이라고 합니다, 부대주님.”
“제법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아니야. 저 정도 나이에 저만한 실력을 지니기는 어려운 것이지.”
상대와 말을 나눈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이리저리 대화를 나누다 보니 소연은 조금씩 상대와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상대가 조금씩 마음에 들 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지위에 비했을 때, 상대의 성격이 매우 소탈하고 시원스러웠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간 후.
“하하핫, 아주 재미있군. 그래 자네 결혼은 했는가?”
왜 마교도인 상대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던 터라 소연은 순순히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혼기를 놓쳤습니다.”
“그래? 많이 서운해하셨겠군.”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소연의 동그란 두 눈이 자신을 향한 후에야 마화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말이 잘못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 지만 급히 머리를 굴려 보니 수습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말은 천지문의 문주, 그러니까 자네의 사부가 서운해했을 거라는 말이야. 자네의 아이들도 자네를 닮아 무예에 뛰어날 것이 아닌가? 그들이 장차 다음 세대의 천지문을 떠받칠 텐데, 서운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
소연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무슨 그런 말씀을…, 제가 무공이 뛰어나 봐야 얼마나 뛰어나다고요.”
“본녀가 그 정도도 못 알아본다고 생각했나? 본녀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어. 그러다 보니 강한 자를 알아보는 감각이 짐승처럼 예민해지게 되었 지. 지금까지 내 감각은 틀린 적이 없었어. 단 한 번만 빼고.”
말만이라도 상대가 자신을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니 소연의 기분은 아주 좋아졌다. 그렇다 보니 그녀는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그때가 언제인지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말을 꺼내 놓고 난 후에 소연은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체 높은 상대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화는 전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활달한 어조로 대답했다.
“뭐 감출 일은 아니니 못 알려 줄 것도 없지. 오래전에 본녀가 관부에서 일하고 있을 때,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상관으로 부임해 온 적이 있었어. 목에 힘을 주고 있 었지만, 어리숙해 보이는 것이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같았거든.”
흥미로운 주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감히 대꾸는 못하고 소연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그자가 지금껏 세상 구경은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죽자고 처박혀서 무공만 익힌 무공광인 줄 내가 알았겠나? 그것도 모르고 대련을 신청했다가 단숨에 묵사발이 난 적이 있었지.”
마화의 말에 소연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탄식했다.
“저런….”
하지만 마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사정을 많이 봐줬기에 아무런 상처 없이 끝났었어. 정말 대단하신 분이셨지.”
“분이셨다고 하시는 걸 보니, 혹시?”
그 말에 마화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마화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실상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 사람은 지금의 묵향이 아닌, 과거 몽고 벌판을 질타하던 자애로운 묵향이었으니까. “전사(戰死)… 하셨나요?”
“전사라고도 할 수 없어. 찬황흑풍단이 해체되던 날, 옥영진 대장군 등 대부분의 고위급 장교들이 모두 그날 죽임을 당했어. 살아서 도망간 자들은 반역자의 오명 을 뒤집어써야만 했고 말이야.”
몽고 원정 때의 각종 고생담, 찬황흑풍단의 몰락, 마교에 입교하게 된 경위, 그리고 지금 현재 그녀가 있기까지의 여러 가지 일들을 마화는 재미있게 들려줬다. 그 녀는 교주의 딸인 소연과 조금 더 가깝게 지내보고 싶었던 것이다. 과연 소연이 알고 있는 묵향은 또 어떤 사람인지 그것도 궁금했고 말이다.
소연도 어느덧 마화의 화술에 끌려 들어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게 되어 버렸다. 두 여자는 진팔이 무자비하게 두들겨터지는 장면을 감상하며 서로의 과거를 나눴 다. 그 대부분은 추억거리 정도로 치부될 만한 쓸모없는 대화들이었지만, 그녀들 간의 친분을 두텁게 만드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서로 간에 이런저런 많은 대화가 오고간 상태였던 탓인지, 소연은 잠시 주저주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외람된 부탁이기는 하지만, 사람 하나를 알아 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왜 그런 부탁을 본녀에게 하는 것이지? 무영문이나 개방 쪽이 빠를 건데……..”
“왜냐하면 그분은 천마신교에 소속되어 계셨거든요. 아주 오래전에 그곳에 갔다가 만난 적이 있었죠. 그때 그분이 선물하셨던 장신구를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걸요.”
소연이 마화에게 이런 말을 꺼낸 것은 교주가 진짜로 자신의 양부인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 만약 진짜 그가 양부라면 어떤 형태로든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테 니까 말이다.
“호, 정파의 고수인 자네가 본교 고수와 친분이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군. 그래, 본녀가 알아 봐 주도록 하지. 그래, 그 사람의 이름은 뭐지?”
소연은 추억 어린 어조로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유향(柳香)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무인의 이름 같지 않으니 오히려 찾기 쉬우실 거예요.”
마화가 마교 내에 있은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유향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기억도 없었다. 하지만 마교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있으니 그런 인물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향이라고? 남자 이름인 것 같은데……. 혹시 한때 사모했던 남자인가?”
그 말에 소연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 제 양부셨어요.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그분을 기다리셨는데, 결국은 나타나지 않으셨지요. 어떻게든 그분께 연락을 넣어 보려고 해 봤 지만, 천마신교라는 단체가 워낙 비밀에 싸인 곳이라 알아 볼 방법이 없었죠.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부대주님이시라면 혹시 알아 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서 염치없지만 용기를 내어 부탁드리는 겁니다.”
양부라는 말에 마화는 유향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소연을 만났을 때 교주는 유향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아무리 오랜 세월 이 리저리 알아 봐도 유향이라는 고수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걸 말을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화는 내심 난처했지만 겉모습만은 시원스럽게 승낙했다.
“좋아. 본녀가 총타에 기별을 넣어 알아 보도록 하지. 그러자면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
총타가 아니라 저기에서 진팔을 때려잡느라 광분하고 있는 교주에게 물어본 후 그의 결정을 기다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저들 부녀간의 일이니까 말이다.
마화는 슬쩍 만통음제를 훔쳐본 후, 묵향을 향해 말했다.
“교주님, 잠시 따로 얘기를 드리고 싶은데요.”
그 말에 묵향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본좌의 의형이시니, 외인이라고 할 수 없지. 말해 봐.”
“소 소저의 일은 계속 이런 식으로 끌고 가실 겁니까?”
설마 마화가 양녀 얘기를 꺼내고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해 본 터였기에 묵향은 난감했다. 이 일은 최대한 기밀을 지키는 것이 좋았는데 말이다. 만통음제를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연에 대한 것이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묵향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난처한 듯 대꾸했다.
“어흠! 그건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지.”
하지만 마화의 대응은 단호했다.
“아뇨, 지금 하는 것이 좋겠어요. 소 소저가 유향이라는 사람이 마교에 있을 텐데, 그에 대해 좀 알아 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오래전에 자신이 사용한 가명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유향이라고? 그게 누구지?”
마화는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자기가 사용한 가명도 잊어버리셨나요?”
그 말에 묵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화의 말은 그녀가 지금 자신에 대해서 수소문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뭐?”
묵향은 예상치 못한 마화의 말에 적잖이 놀란 듯했고, 만통음제는 옆에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눈을 빛내며 듣고 있었다. 그리고 저 옆에서 차를 장만하고 있는 설취 또한 숨소리마저 죽이고 엿듣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묵향이 마화를 제지하기도 전에, 마화의 말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또, 다른 일도 아니고 소연에 대한 것이었기에 묵향도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 다.
“교주님께서 그녀를 끔찍이도 아끼신다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기회를 빌려 그녀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알아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어.”
딱 잘라 말하는 묵향을 향해 마화는 다시 한 번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교주님의 단 하나뿐인 양녀가 아닌가요? 그녀를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시면서도 그녀를 위해 끊임없이 참고 계신다는 것을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그녀 도 교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니 이 기회에.”
소연이 묵향의 양녀라는 사실에 만통음제와 설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만통음제의 놀라움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그는 그것도 모르고 월하노인을 자 처하여 소연에게 다리까지 놓으려고 했었으니 말이다.
“이런! 양녀라고?”
만통음제의 외침에 묵향의 고개가 그쪽으로 획 돌아갔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객식구들이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분에 대한 대화를 훔쳐듣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던 것이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묵향과 눈길이 마주치자 만통음제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우형은 그런지도 모르고 중신을 선다고 나섰었구먼. 이런 실수가 있나…….”
묵향으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중신을 선다고요? 설마 벌써 그런 말을 꺼내신 거는 아니겠죠?”
그 말에 만통음제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벌써 했는데… 당사자에게 직접 말일세. 어쩐지 너무 당황하는 것 같더라니……. 어쩌면 그녀도 조금은 자네에 대해 눈치 채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젠장, 약간은 눈치 챈 것 같더라구요?”
“우형이 보기에는 그랬다네.”
옆에서 듣고 있던 마화가 마침 잘되었다는 듯 끼어들었다.
“소 소저도 벌써 눈치 챘다면 잘되었네요. 이 기회에 교주님께서 양부라고 당당하게 그녀에게 밝히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정과 사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집단임을 잘 알지 않느냐? 아비가 모든 정파인들이 치를 떠는 극악무도한 암흑마제라는 사실을 그 애가 제 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그 애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손 치더라도, 주위에 있는 자들은 결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녀가 본교에 들어온다면 그 누구도 그녀를 손가락질하지 못할 거예요.”
“그 아이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돼.”
“만통음제 어르신도 그녀가 어느 정도 눈치 채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신다잖아요.”
잠시 머리를 굴리던 묵향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오히려 그게 더 잘되었군. 한 가지 얘기를 지어내는 거야. 형님도 조금 도와주셔야 되고 말입니다. 형님은 한 번 더 가서 중신에 대해 얘기를 꺼내 주세요. 교주가 너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다시 왔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화 너는 가서 유향이라는 인물이 전사했다고 전하는 거야.”
“예? 전사했다고요?”
묵향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이 방금 생각해 낸 줄거리를 말해 줬다. 그런 다음 그는 만통음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뭔가 얘기에 허점이 있습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만통음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제법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만약 그토록 뛰어난 인물이라면 그 이름을 꺼내자마자 마화가 알아들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묵향은 아차 싶은지 탄성을 지르며 대답했다.
“헛,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군! 명호가 있었어. 명호를 하나 지어서… 그러니까 추혈광마(追血狂魔)가 좋겠군. 척 들어 봐도 마교 냄새가 물씬 풍기니까 말이야.”
추혈광마. 피를 좇는 미친 마귀라는 말이 아닌가.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것 같았기에 마화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도 그녀가 사랑하는 양부인데 너무 심한 거 아닐까요?”
하지만 묵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별로 심할 것도 없어. 오히려 충격적인 명호를 쓰면 정신이 산란해져서 쓸데없는 잡생각을 못하게 되지. 그래, 그 명호로만 말했다면 금방 알아들었을 텐데, 본명 을 밝혀서 네가 못 알아들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총타에 연락을 넣어 답을 받느라고 늦었다고 말이야. 그러면 충분한 대답이 되잖아.”
옆에서 듣고 있던 만통음제는 감탄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그런데 오늘 동생을 다시 봤는걸? 담백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이토록 책략을 잘 세울 줄은 미처 몰랐네, 그려.” 뻔뻔스럽게도 묵향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 보통이죠. 제가 그런 데는 머리 회전이 좀 빠르거든요.”
자화자찬을 한 후, 묵향은 마화를 향해 말했다.
“가서 그렇게 말해. 말할 때 표정 관리만 잘하면 믿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마화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좋아요. 하명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리죠. 하지만 이 얘기는 꼭 해야겠어요.” “뭔데?”
“그녀에게 상승의 도법을 가르치시고 싶다는 교주님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거기에다가 진 공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너무할 것까지야 있겠느냐? 그놈도 뭔가 얻는 게 있을 테니 서로가 좋은 것이겠지.”
“서로가 좋다구요? 그건 순전히 교주님 생각이시겠죠. 뭔가 얻는 게 있기 전에 미쳐 버리거나 아니면 자살해 버릴지도 모른다구요. 만약 뒤가 그렇게 끝난다면 소 소저는 교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묵향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극악무도한 마두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겠지. 소문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말이야. 지금껏 본좌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은 망 설임 없이 처리해 왔다. 그놈이 죽어도 할 수 없는 것이겠고, 그놈이 뭔가를 얻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본좌가 원한 것은 그 비무를 보고 소연이가 한 차원 높은 무예 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잡아 주는 것. 더 이상은 기대도 하지 않아.”
“그렇다면 그렇게 간접적으로 하지 마시고 소 소저와 직접 비무하시는 것이 빠르지 않겠어요? 엉뚱한 사람 골병들이지 마시고 말이에요.”
“그녀석이 남자였다면 그렇게 했겠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 한 군데라도 팰 데가 있어야 말이지.”
묵향의 황당스런 대답에는 마화도 두 손 들어 버렸다. 언제는 상대를 두들겨 패는 데 있어서 남녀를 가렸던 사람이었나? 그걸 뻔히 아는데, 저딴 소리를 하다니 말 이다.
“정말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요.”
“알았으면 이제 그 얘기는 끝내자구.”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묵향은 슬쩍 뒤돌아서서 방문을 열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술 마시러 간다.”
옆에서 묵향과 마화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만통음제나 설취는 뭔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관과 부하 간에 비밀스런 얘기를 엿들은 기분이 아닌, 꼭 뭔 가 부부 싸움 하는 장면을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한바탕 언쟁이 끝난 후, 실내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뒤숭숭했다. 묵향이 나가고 난 후 마화의 표정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그녀에게 뭐라 고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묵향이 나가고 나자 마화는 장검을 꺼내어 닦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티끌 한 점 없어 보이는 장검을 비단 천으로 닦고 또 닦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기분 해소 방법인 모양이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기에 장검을 닦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사부님께서도 사숙 어른과 함께 술이나 드시고 오시면 어떻겠어요?”
실내의 분위기가 너무 칙칙하여 난감하던 터에 제자가 그런 부탁을 해 오자 만통음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노부가 제자 하나는 정말 잘 뒀지. 어쩌면 저렇게 총명한지……. 마침 술 생각도 나는데 잘되었군, 흐흐훗.’
만통음제는 점잔을 빼며 중후한 어조로 제자에게 대답했다.
“허어, 노부가 그 생각을 못 했구나. 동생이 쓸쓸하게 혼자 마시고 있을 텐데, 노부는 동생의 기분이나 풀어 주러 가 볼까?”
사부가 나가고 난 후 이제 여자들만 남게 되자 설취는 시원스런 어조로 마화에게 말을 걸었다.
“마 소저, 당신이 한 제안이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교주님도 잘 아실 거예요. 그만 기분을 풀어요.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요?” 마화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교주님이 제 말을 안 듣는다고 기분 나빠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는 예전부터 남의 말은 잘 안 듣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여자들끼리 남아 있다 보니 훨씬 대화하기가 편했다. 더군다나 점소이가 술과 간단한 안주거리까지 가져오자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그분은 겉보기와 달리 너무도 마음이 여리시거든요. 자신의 여린 마음을 숨기기 위해 언제나 괴팍스럽게 행동하시죠. 퉁명스럽게 말하고, 못된 행동을 하시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해요. 그분이 그런 행동을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죠. 소 소저 일로 얼마나 슬퍼하고 계시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마음이 아프군요.”
마화와 대화를 나누면서 설취는 마교 교주로서의 묵향이 아닌, 아주 인간적인 묵향을 만날 수 있었다. 과거 그녀의 풋사랑이었던 묵향을 말이다. 설취는 마화의 말 을 들으며 과연 그 남자에게 자신이 빠져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