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1권 1화 – 깨어나는 드래곤

깨어나는 드래곤

여기는 교주 전용의 연공실.

이곳에는 언제부터인가 그 큰 연공실이 비좁을 정도로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 낮잠을 자고 있는 중이다. 조용하던 연공실이 지진이라도 난 듯 부르르 갑자기 진동 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드르르릉!

거대한 드래곤답게 코고는 소리도 박진감이 넘친다. 코 한 번 골 때마다 연공실이 흔들거릴 정도였다. 드래곤이 코를 골기 시작한 것은 깊은 수면 상태가 이제 끝 났음을 의미하는 것. 드디어 그가 깨어날 때가 거의 다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이어졌던 코골이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아르티어스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그 큰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한바탕 한 후에 중얼거렸다.

‘젠장. 이렇게 좁은 데서 자다 보니 온몸이 다 찌뿌두둥하구먼.’

이때, 갑자기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어?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곧이어 여기가 어딘지 떠오른다. 이곳은 바로 마교의 가장 최하층부에 위치한 교주 전용의 연공실이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이 들어온 이유는….

‘이런 빌어먹을! 그것 때문에 내가 잠이 들었던 거였지.’

화가 나서 머리를 들자마자 머리통은 즉각 연공실의 천장과 부딪쳤다.

쿵!

으갹! 이런 빌어먹을!’

굉음을 울릴 정도의 엄청난 충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공실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기야 이곳은 교주 전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연공실이다. 역대 교주들이 패도적 인 마공을 연성하면서 애용했던 곳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강대한 충격을 받아도 무너지지 않도록 특별히 튼튼하게 제작된 곳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즉시 주문을 외워 이곳 세계의 토종 호비트로 변신했다. 바로 자신이 드래곤으로 변신하기 직전의 모습으로 말이다. 거대한 황금색 드래곤이 빛과 함께 사라진 후, 그 자리에 초로의 노인으로 변한 아르티어스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가 잘못된 거지? 나는 분명히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는 만큼 또다시 위험을 감수하며 수련을 감행할 수도 없었다. 아니, 현재 아르티어스의 몸 상태로 그것은 거 의 자살 행위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오랜 시간 잠을 자며 몸을 추슬렀다고 하지만, 그의 몸은 아직까지도 완벽한 상태를 되찾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젠장, 아무래도 잘 모르겠군. 어쩔 수 없지. 자존심은 상하지만 그놈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빠를지도 모르겠어.”

「그놈」이란 바로 자신의 수행을 하나도 도와주지 않고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그의 양아들 놈을 말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아르티어스가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있을 때, 수석장로가 허둥지둥 달려 들어와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어르신.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곳의 수석장로를 맡고 있는 북궁뇌(北宮)라고 합니다.”

하지만 수석장로를 바라보는 아르티어스의 시선은 결코 곱지 못했다. 그는 아들놈을 호출한 것이지 수석장로를 호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르티어 스는 수석장로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짜증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수석장로를 덮쳐 왔다. 수석장로는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러 교주들을 섬겨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압박감을 받아 본 것은 맹세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네놈이 누군지 내가 알 바가 아니고, 나는 아들놈을 오라고 했는데 왜 네가 왔느냐?”

수석장로는 간신히 대답했다.

“예. 교, 교주님께서는 지금 바쁜 일이 있으셔서 밖에 출타 중이십니다.”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 갔나?”

“아뇨. 금이라는 나라와의 전쟁 때문에 가셨습니다.”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금이라고? 그놈들 참. 이름 한번 간단해서 좋군. 젠장, 그런 소꿉장난 같은거나 하지 말고 나한테 부탁하지. 왕이건 황제건 말만하면 뭐든지 다 되게 해 줄 건데, 뭐하려고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쯧쯧.”

저런 광오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다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수석장로의 머릿속에는 전혀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르티어스의 존재감에 짓눌리고 있던 그는 그 말이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쯧, 그럼 언제쯤 돌아오느냐?”

“예. 속하가 알기로는 아마 몇 달은 족히 걸리시지 않을까 예측하고 있습니다.”

수석장로의 입에서는 어느새 「속하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강자지존(强者之尊)의 율법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그가 아르티어스를 상전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몇 달? 그렇게 길게? 이놈이 애비를 뭐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어쩔 수 없군.”

그렇게 말은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오히려 이것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자신의 망가진 몸이나 추스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들놈처럼 강제적으로 주위의 마나를 확 끌어들여 몸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귀찮게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티어스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꼭 그놈의 무공이라는 것을 익혀야겠다고 다시 한 번 속으로 다짐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무공을 익히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러면 나는 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드래곤이 될 수 있겠지. 암, 그렇고 말고. 으흐흐 흣.”

아르티어스가 키득거리기 시작하면서 수석장로에게 가해졌던 그 엄청난 존재감이 갑자기 사라졌다. 더 이상 수석장로를 상대로 화풀이할 마음이 없어졌던 것이 다.

“너는 그만 가 보고, 그 마화라는 아이를 불러오너라. 그 애가 제법 싹싹하니 마음에 드니까 말이다.”

압박감이 사라지자 수석장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뢰기 송구스럽습니다만, 마 부대주도 교주님과 함께 갔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르티어스는 음료수를 깨끗하게 비운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다시 연공실로 돌아가 볼까나?”

압박감이 사라져서 그런지, 수석장로의 머릿속에 갑자기 묵향이 떠날 때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기에 수석장로는 재빨리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저…, 어르신. 어르신께서 연공실에서 나오시면, 꼭 전해 달라고 교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나를 보고 자기 있는 곳으로 오라는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퉁명스레 물었다.

“뭐냐?”

“교주님의 동생분을 치료해 달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부상당한 초류빈 부교주도 함께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뭣이? 이놈이 나를 뭐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와 동시에 또다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수석장로를 덮쳤다. 이제서야 수석장로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영감이 기분 나쁠 때마다 자신에게 장난치고 있다는 것 을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힘없는 자기가 참아야지.

수석장로는 이제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항변했다.

“저…, 꼭 치료를 해 달라고 간청드린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간청했다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뭐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어디 한번 봐줄까나?”

아르티어스의 기분이 약간 좋아진 듯하자, 수석장로는 상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옛 즉시 이리로 그분들을 데려오라 전하겠습니다, 어르신.”

* * *

북쪽의 야만족들에 의해 광활한 대지를 뺏겼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대송제국의 저력은 바닥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양양성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여 금 의 대군이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서서히 바뀌려고 하고 있었다.

재상 진회는 심각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서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신의 내용대로라면 친구들과 명승지를 유람하겠다며 나갔던 아들놈의 목숨이 위태 로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직한 선비인 진회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들의 목숨 따위가 아니었다. 아들의 목숨이 아무리 중하다고 하지만, 나라와 황 실의 안위보다 중할 수가 있겠는가?

이때, 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대인을 뵙겠다고 온 자가 있사옵니다.”

사색을 방해받은 진회는 약간의 짜증을 담은 헛기침을 터뜨리며 외쳤다.

“커흠, 누군데 그러느냐?”

하인은 재빨리 실내로 들어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것을 드리면 아실 것이라고 했사옵니다.”

그러면서 하인이 조심스럽게 진회에게 건넨 것은 얇고 자그마한 어떤 토막이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쳐다보는 사이 진회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잣거리에 나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을 듯한 싸구려 옥 노리개. 거기에 새겨진 문양 또한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진회는 그것을 받아든 순간 품속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진회의 품속에서는 그것과 똑같은 조각이 하나 더 튀어나왔다.

“흐음…….”

두 개의 옥 조각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그것을 확인하며 진회는 신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품속에서 나온 또 다른 조각은 아들의 납치범들이 보 낸 서신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었기에.

“너는 빨리 가서 박 교령(僑)을 불러오너라.”

“옛, 대인.”

잠시 후, 박 교령이 달려왔다. 군부의 무장다운 장대한 체구를 지닌 그를 보자 적잖게 마음이 놓이는 진회였다.

“찾으셨습니까? 대인.”

진회는 박 교령에게 지시를 내려 잘 무장한 병사들을 매복시킨 후, 하인에게 자신을 찾아온 괴한을 이리로 안내하라고 일렀다.

잠시 후, 남루한 흑의를 입은 괴한이 하인의 안내를 받고 들어왔다. 손질도 안한 수염이 사방으로 숭숭 뻗쳐있는 강직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런데 사내가 실내로 들어서자 진회는 뭔가 기분 나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마교의 무리들과 몇 번 조우해 본 무림인들이라면 이것이 마공을 연성한 자들이 뿜어내는 독특한 기운인 마기(魔氣)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겠지만, 불행하게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무림인들이 아니었다.

진회는 자신의 기분이 슬그머니 나빠지는 것이, 아들을 납치해 간 놈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넘겨짚으며 탐탁치 않은 어조로 외쳤다.

“그래, 무슨 일로 노부를 보자고 한 것이냐?”

사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대꾸했다.

“소인과의 대면을 허락하신 것을 보면 대인께서도 이미 짐작하고 계실 것이 아니겠소이까?”

진회는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으며 퉁명스럽게 외쳤다.

“네놈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진회가 이렇게 물은 것은 단독 범행을 저지른 자가 직접 이곳에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내는 진회의 좌우에 시립하고 서 있는 병사들을 힐끗 바라 본 후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선 좌우를 물리쳐 주셨으면 좋겠소이다. 그리고 저 안에 숨어 있는 쓰레기들도 말이오.”

그러면서 괴한은 진회가 박 교령에게 명하여 병사들을 매복시킨 곳들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인의 침실 서탁에 서신을 올려놓은 것만으로는 본인의 실력을 믿지 못하시겠는 모양이지요?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마시고 좌우를 물리치는 것이 어떻겠소이 까?”

순간 진회의 안색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잘 훈련된 황병들에 의해 엄중하게 경비되고 있는 자신의 처소에 숨어들 정도로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춘 자였다. 더군 다나 상대는 여기저기에 황병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잘 알면서도 저토록 태연자약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던 진회는 자신의 뒤에 시립하고 서 있던 박 교령에게 명령했다.

“좌우를 물려라.”

박 교령은 시국이 워낙 어수선했기에 재상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황실에서 직접 파견한 인물이었다. 물론 무림의 고수처럼 고강한 무예를 지니고 있지는 못했지 만, 소림 속가 출신으로서 어느 정도 무공의 겉은 핥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저토록 위험한, 괴이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수상쩍은 놈을 상대로 상관을 무방비 상태 로 노출시킬 리 없었다.

“결단코 그렇게는 할 수 없사옵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 좌우를 물리치라고 했다.”

“재상께서는 저자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모르시는.

하지만 박 교령의 항변은 진회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건 노부도 잘 알고 있다. 이쪽이 대비가 확실히 되어 있음을 잘 알고 들어온 놈이 아니더냐. 저자의 목적은 노부의 목숨 따위가 아니다. 그러니 염려 말고 병사 들을 물리거라.”

박 교령은 또다시 뭐라고 항변해 보려 했지만 진회의 눈동자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옛, 명을 따르겠나이다.”

괴한이 돌아간 후, 진회는 하녀에게 명하여 뜨거운 차를 내오라고 일렀다. 향긋한 다향을 맡으면서도 진회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방금 전에 물러간 사내가 한 말 때문이었다.

“허어, 말을 듣지 않는다면 희야의 목숨을 끊어버리겠다?”

물론 그러고도 통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은 비밀 유지를 위해 자신의 목도 따버리겠다는 추가적인 협박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밤중에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와서 서신을 놔두고 간 놈이다. 진회의 목숨 정도는 언제든지 취할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행동이었다.

“어찌 아들놈의 목숨 따위가 대송제국의 앞날과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말하며 지그시 눈을 감는 진회였다.

둘만 남게 되자 사내는 예상외로 공손한 어조로 제의했었다.

과거 귀하는 매우 청렴한, 백성들에게 존경받던 관리라고 들었소이다. 뇌물을 받지도 않았지만, 바치지도 않았기에 미관말직(微官末職)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 었지 않았소이까? 만약 귀하가 정녕 백성들을 위하는 관리라면 그들을 위해 어느 쪽이 좋은지를 생각해 보시구려.」

사내의 말은 언뜻 무례하기 그지없다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은 진회의 가슴을 들쑤시고 있었다.

“백성들을 위하는 길이라…….”

현재 송의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 전란으로 인해 재정은 파탄나기 일보 직전이었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결코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진회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강한 금 제국이 코앞에서 위협해 대는 지금, 그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다. 다른 방법은 그 결과가 나오려면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중앙이 어수선한 틈을 악용하여 변방의 관리들까지 온갖 못된 짓을 다 벌이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아는 진회는 관리들을 파견하여 그것을 뿌리 뽑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괴한의 요구대로 나라를 망하도록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송이 망한다면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올 나라는 십중팔구 금일 것이다. 과연 오 랑캐들이 세운 금나라가 백성들을 위해 제대로 된 정치를 펼 수 있을 것인가?

진회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금 찻잔을 들어올렸다. 바로 이때, 총관이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대인! 대인! 큰일 났사옵니다.”

사색을 방해받은 진회는 못마땅한 어조로 총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황궁에서 태공공(泰公公)께서 오셨사옵니다.”

“태공공이? 무슨 일인데..

진회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태공공 같은 높은 직위를 지닌 내시(內侍)가 여기까지 왔을까? 안 그래도 내일 아침이 되면 또다시 등청(登 廳)할 텐데 말이다.

진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총관이 외쳤다.

“민란이 일어났다 하옵니다.”

“뭣이?”

민란이라는 말에 진회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민심이 흉흉했기에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터질 것이라고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놀 라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금이 압박해 오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을 지경인데, 거기에 민란까지 겹친다면 송은 무너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속히 준비를 갖추라 일러라. 입궁할 것이다.”

민란을 어떻게 진압하고, 또 그 후속 조치는 어떻게 취할 것인지에 대해 중신(重臣)들과 오랜 시간 토의한 진회는 밤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민란이라 니……. 이제 망해 가는 제국의 말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듯하여 그의 마음은 더없이 착잡했다.

그렇기에 그는 하인들에게 일러 간소하게 술상을 봐 오게 이른 다음, 박 교령을 술자리에 청했다. 사실 이 집에서 그와 함께 대작을 할 만한 이가 그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자, 자네도 한잔 들지.”

그렇게 말하면서 진회가 술병을 집어 들자 박 교령은 황송하다는 듯 재빨리 잔을 비우고 빈 잔을 받들었다. 진회는 박 교령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며 은근한 어조 로 말했다.

“박 교령. 자네 또한 그렇게 우둔한 사람이 아니니 작금의 상황을 결코 모르지는 않을 터. 그래, 자네가 보는 송의 미래는 어떠하리라 생각하는가?”

“어찌 소인같이 무지한 무관에게 그런 혜안(慧眼)이 있겠사옵니까?”

진회는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공허하게만 들렸다.

“허허헛, 이 사람. 술이 모자랐던 모양이구먼.”

진회는 뒤에 시립하고 있던 하녀에게 말했다.

“가서 커다란 사발을 가져오너라.”

하녀가 사발을 가져오자 진회는 그 사발 가득 독한 술을 따르며 술을 권했다.

“자, 이걸 한잔 쭉 들고 대답해 보게. 오랫동안 자네를 곁에 두고 지켜보고 있었네. 노부는 그렇게 둔한 사람이 아닐세. 자,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게나. 만약 대답 하지 않는다면 벌주를 더 마셔야 할 것이야.”

말도 안 되는 위협에 박 교령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물으시니 얕은 소견이지만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 먹으면 죽는 것과 같은 이치로, 나라에도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다고 배웠사 옵니다. 유사(有史) 이래 수많은 강성한 제국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사옵니다만 그중 4백년을 넘긴 제국은 단 하나도 없었음을 고금(今)의 역사서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소장의 얕은 생각으로는 한 번 꺾여진 국운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아니올런지요.”

그 말에 진회는 슬쩍 심술이 나서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국운이 무너지던 제국들 중에서도 현명한 군주와 신하들이 나타나 나라를 부흥시킨 예도 있지 않은가?”

“물론 드물기는 하오나 있사옵니다. 하지만 그건 외침이 없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않사옵니까? 하물며 군 조직이 완전히 붕괴되고, 각지에서 군벌(軍閥)들이 일어 나 그 세를 확장하는 최악의 상태에 직면하여 다시금 부흥에 성공했던 제국은 단 하나도 없었사옵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결국 송도 그런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인가?”

박 교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있어 왔던 제국들의 흥망만을 얘기했을 뿐이다. 혹 송이 그 모든 악조건을 깨고 새로운 중흥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전무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그걸 윗사람에게 노골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진회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쭉 비운 후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쇠퇴하는 국운을 되돌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절대로 아니지.”

그날 진회는 대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그날처럼 자신의 능력이 미약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만 봐도 송의 국운은 반쯤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상황에서 안으로는 민란을 진압하며, 밖으로는 강성한 금 제국을 상대한다? 아무리 자신이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건 송의 명줄을 몇 년 더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그만큼 백성들은 더 많은 고생을 하게 될 것이고…….

* * *

초류빈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자신과 동급인 상대를 만났다. 물론 마공을 익힌 자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은 현천검제의 존재를 아주 극소수의 인물들만 알고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초류빈이 그런 것에 무신경했던 이유도 있었다. 그의 경호를 호법원에서 책임지고 있었던 만큼, 초류빈이 알고자 했다면 금방 알 수 있었으 니까.

아르티어스는 그 둘을 치료한 후 다시금 연공을 한답시고 연공실로 가 버렸고, 그곳에 남은 둘은 서로의 존재에 경외감을 느끼며 통성명을 주고받았다.

“나는 고천(古闡)이라고 하오. 설마 이곳에서 정파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힌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소.”

초류빈도 마주 포권하며 대답했다.

“아, 고천 대협이셨구려. 나는 초류빈이라고 하오. 외람되게도 이곳의 부교주직을 맡고 있소이다.”

정파의 무공을 익힌 자가 부교주라는 말에 현천검제의 안색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젠장. 그러고 보니 남의 일이 아니구먼. 나도 곧 있으면 부교주 노릇을 해야 하는 거 아냐?”

한동안 초류빈의 안색을 살피던 현천검제는 마음을 정했는지 슬쩍 상대의 속을 떠봤다.

“혹시…, 그 극악무도한 교주에게 붙잡혀 마음에도 없는 부교주 노릇을 하고 계신 것 아니오?”

물론 현천검제는 사형을 극악무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상대의 속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극악무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너무나 도 확실하게 나타났다.

초류빈은 너무 놀랐는지 흡’하고 숨을 멈추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엿듣는 자는 없었다. 「극악무도」라는 그 한마디에 초류빈은 오랜 지기(知己)를 만난 듯 들떠 버렸다.

“그, 그럼 당신도?”

다시 한 번 더 엿듣는 자가 없는지 살핀 후 초류빈은 안심하고 속내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그놈이 당신의 손발을 그렇게 만들었단 말이오? 나중에 치료해 줬다고 하지만 정말 하는 짓이 왜 그리 잔인무도한지 모르겠소.”

본격적으로 사형의 욕이 시작될 것 같았기에 현천검제는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뭐, 그 얘기는 그만합시다. 그때 생각을 하면 나도 속이 쓰리니 말이오. 그런데, 초씨라면…. 혹시 초씨세가의?”

초류빈은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왜 아니겠소. 휴우~,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으니 망정이지, 지금의 내 꼴을 보셨으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생각만 해도 두렵소이다.”

잠시 우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던 초류빈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형씨는 여기에 어떻게 오셨소? 나야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속아가지고 들어왔소만.”

“뭐 그렇게까지 터놓고 얘기하시는데, 거짓을 말할 수는 없고……. 죄송하오. 교주는 나의 사형(師兄)이시라오.”

“…..”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초류빈은 지금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놈이 사형이라고? 이런 젠장. 저놈에게 속아서 별의 별 소리를 다 늘어 놨는데……. 그걸 저놈이 교주에게 일러 바치면 그날이 바로 내 제삿날이구나.

초류빈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현천검제는 활짝 미소지으며 활달하게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소. 그런 말을 사형한테 나불거릴 사람은 아니니 말이오.”

그래도 초류빈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듯하자 현천검제는 한숨을 쉬며 뒷말을 덧붙였다.

“사실, 내 처지도 그대와 다를 것이 없소. 대화산파의 장문인이었던 내가 마교의 부교주 노릇을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던 참이었소. 그렇기에 당신을 만난 것이, 헤어졌던 친지를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듯하여 말을 건네 본 것 뿐이었소.”

초류빈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화산파의 장문인이셨단 말씀이오?”

“그렇소.”

“이런 일이……. 정말 그대를 본 순간 지기를 만난 듯하더니, 그 느낌이 틀림이 없었는가 보오.”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형씨에게 말을 건 것이외다.”

역시 마교 내의 외톨이 정파들이라 그런지 둘은 말이 잘 통했다.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한없이 주고받았다.

초류빈과 대화를 주고받던 현천검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나는 사형한테 가 봐야 할 듯하오. 치료까지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몰라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사형이 그 성질머리에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 확실하니 말이오.”

“확실히 교주와 사형제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구려. 교주의 음흉한 속셈을 그리도 잘 꿰뚫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오. 생각 잘하셨소. 하지만 나 같으면 그냥 두들겨 맞고 말지. 무림에 나가 그 망신을 당할 엄두도 못 낼 텐데…. 참으로 대단하시오.”

망신이라는 말에 가슴이 쑤시는 현천검제였다. 자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산파의 장문인으로 활동한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널려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밖에서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사형에게 줘 터지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을 테니까.

“대단할 것은 없소. 지금 생각해 봤는데 말이오. 그, 사형의 아버지라는 사람, 정말 화타 정도 되는 신의(神醫)이신 듯했소.”

그 말에 초류빈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치료를 받아 봤으니 말이다.

“그건 동감이오. 무슨 요사스러운 술법을 쓰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한순간에 상처가 쓱싹 낫는 것을 보고 나는 놀라서 기절할 뻔 했소.”

“그런 사람이 옆에 없는 상태에서도 사형은 곤죽이 되도록 마음껏 두들기는데…, 으유~ 그때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오. 몇 날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맸으니 말이오.” 잠시 공포감에 부르르 떨던 현천검제는 말을 이었다.

“든든하게 뒤처리를 해 줄 사람까지 있다면, 이번에는 사형이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하기 싫소. 내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그 말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초류빈이었다. 하지만 초류빈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도망갈 구멍이 생각났던 것이다.

“흐흐흐, 나는 여기에 남아 있을 명분이 있다오. 교주가 나를 보고 본교를 지키라고 했으니, 이곳을 지켜야지 별수 있겠소? 안 된 얘기지만, 형씨 혼자만 가봐야겠구려.”

“…..”

잠시 말이 없던 현천검제는 심각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거 혹시 내가 대신해 주면 안되겠소? 형씨는 비교적 오랫동안 행방불명이 되어 있었으니, 알아볼 사람도 별로 없을 것 아니오?”

초류빈은 빙긋 미소지으며 야멸차게 대꾸했다.

“거절하겠소.”

둘 사이에는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문득 현천검제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흣, 좋소. 정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형씨가 사형을 어떤 식으로 욕 했는지 모두 다 일러바치겠소. 그래도 괜찮겠소?”

그 말은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초류빈의 안색이 허옇게 바뀌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초류빈은 세차게 머리를 휘젓더니 이를 악 물고 대꾸했다.

“좋을대로 해 보시구려. 몇 대 맞고 말지, 가문의 이름에 똥칠하는 것은 사양이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교주한테 걸려서 몇 번 쥐어 터진 적이 있으니, 아마 교주도 그런 일 가지고 나를 죽이지는 않을게요. 에휴~, 내 팔자야.”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는 초류빈. 그의 뒷모습을 보고 현천검제가 재빨리 말을 걸었다.

“걱정하지 마시구려. 내 답답해서 잠시 농을 해 본 것 뿐이오.”

하지만 초류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내저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됐소. 말하건 말건 마음대로 하시오.”

초류빈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현천검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휴~, 나도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점점 사형을 닮아가나? 뭐, 어쨌건 농담 한마디에 그토록 완벽하게 걸려드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런대로 농담이란 것도 재 미는 있구먼.”

다음날 아침 일찍 현천검제는 십만대산을 떠났다. 물론 양양성에 있을 묵향을 찾아가는 것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나게 될 사형을 찾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색은 전혀 밝지 못했으며 발걸음 역시 굼벵이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마치 억지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