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1권 13화 – 괴물(?)들의 틈바구니에서
괴물(?)들의 틈바구니에서
수석장로의 보고를 받은 초류빈은 어이가 없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을 만난지가 언제인데, 이번에는 제령문의 문주가 본교를 방문했다니. 그것도 교주의 청으로 그 괴팍스럽기 그지없는 교주의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도대체 어떤 술수를 부렸기에 패력검제가 그런 수고를 한 것이지?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초류빈이 알기에도 교주는 당금 무림에서 그 적수를 찾기 힘든 강자다. 게다가 그는 중원 최강의 문파라고 할 수 있는 마교의 교주가 아닌가. 그가 말로는 중원일 통을 할 생각이 없다고 했었지만, 언제나 그런 위험은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던 초류빈이었다.
물론 교주가 중원을 피바다로 만들 야욕(野慾)을 부린다고 해 봐야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초류빈은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고, 또 강대한 세 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림일통(武林一統)이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무림의 역사가 말해 주지 않는가. 무림일통에 도전했던 사람은 많았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무림사상 최강이라 불렸던 전설적인 고수 신검대협(神劍俠) 구(區揮)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지금 가만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번만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초류빈이었다. 어쩌면 교주는 지금 무림일통 작업을 소리 소문 없이 진행 중인지도 몰랐다.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도 모자라, 지속적으로 외부의 고수들을 포섭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교주가 의형으로 삼았다고 들은 만통음제를 비롯하여, 사제라는 현천검제. 거기에다가 이번에는 패력검제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결국 교주는 역사상 최 초로 무림일통을 이룩한 위대한 고수로서 역사에 우뚝 설 가능성이 컸다. 물론 이것이 피를 통한 정복이 아니라는 것이 조금 다르겠지만, 어찌되었건 일통은 일통이 니까.
“젠장. 입으로는 아니라고 그렇게 떠들면서, 뒷꽁무니로 그런 얄팍한 짓거리를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어쩔 수 없지. 교주의 그 시커먼 속을 알고 있는 내가 나서야 겠어. 패력검제가 완전히 교주에게 넘어간 것은 아닐 테니까, 아직은 가능성이 있겠지.”
중얼거리던 초류빈은 다시 한 번 하늘을 봤다. 수석장로의 말로는 패력검제가 휴식도 취할 겸 운공조식을 할 조용한 장소를 원했기에 그를 귀빈들이 기거하는 숙 소로 안내했다고 했다.
“지금쯤 찾아가면 되려나? 아니야. 그것보다는 내일 일찍 찾아가는 것이 좋겠어. 사람이 들어 있는 관을 등에 지고 만 리 길을 달려왔다고 했으니, 지금 찾아가 봐 야 헛것이겠지.”
초류빈은 다음날 아침 일찍 패력검제와 의문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 물론 그가 패력검제를 만나려는 이유는 수석장로의 요청대로 여인의 정체를 파악하 려는 것이 아니라, 교주의 야심찬 무림일통 계획에 훼방을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내실에서 붉은 옷으로 곱게 차려입은 예쁘장한 소녀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제법 물이 오른 몸매로 봐서 16세는 넘은 듯 보였 지만, 그녀의 앳된 얼굴로 봤을 때 절대 20살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녀였다. 초류빈은 이곳에 처음 와 보는지라 그녀가 여기에 배치되어 있는 하녀인지, 아니면 이곳에 투숙 중인 손님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실례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이곳에 배치된 시녀인가?”
갑자기 낯선 인물이 급히 다가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로 초류빈을 자세히 살펴봤다. 무기를 휴대하 지 않은 것을 보면, 무사는 아닌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이곳 마교에서 웬만큼 무공을 익힌 자라면 음산하면서도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기지 않던가. 그런데, 이 청년 에게서는 전혀 그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옷조차도 남루한데다, 무척 젊은 얼굴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진 것.
그녀는 재빨리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며 말했다.
“쉿! 조용히 하고 빨리 나를 따라와요.”
행여 누가 볼세라 재빨리 초류빈을 끌고 나온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걸었다.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당황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초류빈을 향해.
“이제 됐어요. 이봐요. 새로 온 일꾼인 모양인데 이렇게 마구 돌아다니다가 걸리면 경을 친다구요. 이곳은 본교를 방문하는 특급손님들을 위한 숙소에요. 저기 커 다랗게 마영각(魔迎閣)이라고 써져 있잖아요. 그것도 안 읽었어요? 아니면 글자도 못 읽는 거예요?”
초류빈은 얼떨결에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로 현판을 다시 한 번 봤다.
“빨리 가 봐요. 그나마 나한테 발견된 게 다행인줄 알라구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일꾼들의 숙소는 저쪽이에요.”
하녀는 심각하게 말해 주고 있었지만, 그것을 듣는 초류빈의 표정은 이제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 딴에는 도와준다고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켜 보는 초류빈은 순진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렇게 귀엽고, 재미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저쪽 길을 가리키며 연이어 조잘댔다.
“다음부터 이쪽으로 오지 말아요. 알았죠? 아무리 길을 잃었다고 해도 이쪽으로 오면 절대로 안돼요. 운이 없어서 각주님한테라도 들켰었다면 길을 잃었다는 변명 으로 넘어갈 수 없었을 거예요. 곧바로 뇌옥에 갇혀 고문까지 당한다구요. 알았어요?”
“알려줘서 고맙구려, 소저. 나는 마영각이라는 곳이 그토록 흉험한 곳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설마 들어오는 사람을 모두 다 불문곡직하고 물고를 내다니. 정말 이지 지옥과 같은 곳이외다.”
자기는 생각해서 말해 준 것이었는데, 상대가 장난기 어린 어조로 응대하자 하녀는 바짝 약이 오른 모양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말투까지 노인처럼 하는 것이, 꼭 자신을 어린애라고 놀리는 듯했던 것이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 거예요? 무조건 물고를 낸다는 말이 아니었잖아요. 수상한 사람 말이에요. 수상한!”
“그렇다면 나는 괜찮겠구려. 나는 누가 봐도 신분이 확실한 사람인데.”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인이 무슨 신분이 확실하다는 거예요? 당신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곳은 바로 저쪽 근처라구요. 만약 그곳을 벗어난 것을 들키면 곤장 몇 대 맞 E…….”
이때, 갑자기 싸늘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그 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초류빈 또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초류빈의 앞에 서 있는 소녀와 똑같은 옷을 입은 여 자가 냉엄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어, 언니.”
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 새로 나타난 여인은 각주는 아니고, 조금 계급이 높은 하녀인 듯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언니라는 하녀의 질책에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이, 이 사람이 길을 잃어서 가르쳐 준다고 그만…….”
“너는 그만 들어가 보거라.”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자 언니라는 하녀는 더욱 냉엄한 어조로 꾸짖었다.
“아니, 들어가라는데도 그러는구나. 네 죄는 나중에 묻기로 하겠다. 그동안 너는 네 방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거라. 알겠느냐?”
“네.”
소녀가 눈물을 훔치며 마영각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초류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 같은 하급고수가 지고하신 부교주의 얼굴을 알리 없었지만, 그녀는 여유만만한 상대의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벌벌 떨고 있어야 옳은데, 그는 싱긋이 미소지으며 아직까지도 소녀가 들어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녀는 아무래도 뭔가 기분이 찜찜했다. 자신이 혈화궁에서 약간 지위가 높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마교의 총타였다. 그녀보다 월등하게 높은 지위를 지닌 인물들 이 널리고 널린 곳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사내가 보여주는 것 같은 여유는 그런 지위가 높은 인물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조심스런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우선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물고를 내는 것은 그 후라도 늦지 않 았다.
“길을 잃으셨다고 들었는데, 어디를 가는 중이신지요?”
“마영각에 가는 길이었네. 어제 본교를 방문한 남녀가 있을 텐데, 알고 있는가?”
상대의 점잖은 대답에,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느꼈다. 상대는 허름한 겉모습과는 달리 교에서 상당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 인물임이 분명해 보였던 것이 다. 그렇기에 하녀는 고개를 조금 더 깊게 조아리며 말했다.
“예. 손님들께 어느 분께서 찾아오셨다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자네가 전할 필요까지는 없네. 그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안내하게.”
“…..”
이대로 이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고 안내해도 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안내할 것인가. 잠시 고민한 끝에 그녀는 안내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이 사람이 누 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손님들이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어쩐 일인지 호법원에서 파견된 엄청나게 막강한 고수들 에 의해 호위되고 있었다. 뒷일은 호법원의 고수들이 해결해 줄 것이 분명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하녀는 초류빈을 안내하며 말했다.
“손님들은 지금 안전상의 이유로 2층에서 묵고 계십니다.”
마영각 안으로 들어선 후, 그녀는 상대를 계단 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녀가 그를 손님들이 묵고 있는 객실로 안내했을 때, 그녀는 자연스럽게 상대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객실의 문 앞에 서 있던 호법원 소속 고수들의 행동을 통해서. 객실 문 앞에서 엄청난 마기를 뿜어내며 서 있던 호법원 고수들은 사내를 보자마자 부복하며 외쳤다.
“부교주님을 뵈옵니다.”
하녀는 경악했다. 그녀는 초류빈의 행색으로 봤을 때 누군가 지위가 높은 인물의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 그가 부교주일 줄이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호법원 고수들처럼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부교주님을 뵈옵니다」하고 외치고 있었다.
“손님들은 일어나셨느냐?”
“예.”
하녀는 원래 그들 중 한 명이 일어나서 차를 달라고 했다는 말을 해야 했음에도 그녀 자신의 걱정 때문에 다른 말을 건네 버렸다. 잘못하면 그 소녀는 물론이고 자 신의 목숨까지 날아갈 우려가 있기에.
“몰라 뵙고 크나큰 실례를 저질렀나이다, 부교주님. 혹, 진진이가 부교주님께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아이가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초류빈은 빙긋 미소지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진진이라고 하느냐?”
“예. 왕진진(珍珍)이라고 하옵니다.”
“본좌에게 실례를 저지른 것은 없었으니 안심하거라. 그리고 그 아이에게 본좌의 신분에 대해 말하여 괜한 걱정을 안기지 않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예.”
“그럼 가 보거라.”
그렇게 말하는 부교주의 안색이 매우 평온했기에 하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일단 목숨은 건진 셈이었으니까.
마영각의 각 객실은 특급손님들을 위한 것인 만큼, 여러 개의 방들을 가지고 있다. 중앙에 커다란 응접실이 나오고, 그곳을 통해서 6개의 좀 더 작은 방들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는 구조다. 방이 너무 많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 이곳에 묵을 손님들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그 수가 너무 적다고 봐야 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자신들이 거느리고 온 하인, 하녀들과 가족 정도밖에 묵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곳을 방문할 때 거느리고 오는 그 많은 호위무사들은 다 어디에다 투숙하게 하느냐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마교는 이것을 위해 총단의 외 곽 부분에 그들을 위한 숙소를 따로 마련해 두고 있었다. 사실 마교쪽에서도 수많은 외부 무사들이 중무장을 갖춘 채 들어온다는 것이 탐탁치 않았기에 취해 놓은 조치였던 것이다.
초류빈이 객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눈이 거실에 앉아 있던 여인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때, 초류빈은 자신이 시간을 잘못 골라서 왔음을 직감했다. 왜 냐하면 그녀는 울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무, 무슨 일인가요?”
초류빈은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패력검제 대협을 만나러 왔는데, 아무래도 시간을 잘못 택한 듯하구려. 본의 아니게 실례를 끼쳐 죄송하오이다.”
“실례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못난 꼴을 보여드려 오히려 죄송하군요.”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초류빈은 아무래도 분위기가 껄끄러운 듯하여 분위기 전환 겸 입을 열었다.
“패력검제 대협은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소?”
“아마 운기조식 중이실 거에요.”
“그럼 나중에 다시 오겠소.”
초류빈이 되돌아 나가려고 하자, 그 여인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조식에 들어가신지 꽤 시간이 흘렀으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그, 그렇소? 그럼 잠시 실례하겠소.”
초류빈을 잠시 관찰하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흑풍단에 소속되신 분이신가요?”
초류빈에게서는 전혀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인은 아마도 그가 흑풍단 소속이지 않을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초류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 다.
“흑풍단 소속은 아니외다. 흑풍단을 알고계신 것을 보니, 양양성에서 오신 모양이구려.”
“예.”
“치열한 전투라도 벌어졌었소? 듣기로는 관에 실려서 이곳에 오셨다고 들었는데…….”
“예.”
그렇게 대답하는 여인의 얼굴에는 짙은 슬픔이 떠올랐다. 눈언저리에 다시금 옅은 물기가 차오르는 것을 본 초류빈은 황급히 말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교주께서는 잘 계시오?”
물론 그 인간이 잘 있을 것임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초류빈이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교주를 들고 나온 것이다. 수석장로에게 들으니 이 여인이 교주의 정인쯤 되는 모양인데, 정인 얘기를 꺼내면 그래도 상대의 마음이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말이 상대의 감정을 더 뒤흔들어 놓은 듯하여 초 류빈은 당황했다.
‘젠장.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아예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하다니. 혹시 교주한테 차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어렵다. 상대는 교주와 관계되어 있는 여인이다. 뭐라고 잘못 말했다가 그걸 그대로 교주에게 고자질하면 자신만 박살난다는 치명적인 위험 성을 안고 있었다. 더군다나 초류빈의 경우 그렇게 여자와 깊게 사귀어 본 적이 없었고, 특히나 요 근래 몇십 년간은 아예 마교 안에 틀어박혀서 무공만 수련한 상태 였다. 그런 만큼 이런 황당한 경우 어떤 식으로 상대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혹은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때, 응접실과 연결되어 있는 여러 문들 중에서 하나가 열리더니 패력검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충분한 휴식과 수면, 그리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한 덕분인지 그의 눈은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패력검제는 눈앞에 보이는 남자가 탈마급에 달하는 엄청난 고수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런데 그런 자가 왜 여기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며, 또 소연은 왜 저렇게 울고 있는 것인가?
“무슨 일이냐? 혹시 저자가 네게…….?”
패력검제의 등장이 이 난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손길인 듯하여 내심 기뻐하고 있던 초류빈은 갑작스럽게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화들짝 놀라 양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변명했다.
“그, 그건 오해요. 나,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소.”
상대의 과잉 반응이 오히려 더 의심스러운지 패력검제는 눈을 실쭉하게 뜨며 중얼거렸다.
“오해라고?”
“나는 그저 교주님께서는 안녕하시냐고 물어봤을 뿐이외다. 정말이오.”
이때, 흐느끼고 있던 소연이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저분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제가 추태를 보여……. 저분께서는 대협을 뵙고자 이곳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소연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녀가 들어간 방에서 다시금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 안에서도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패력검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사과했다.
“요 근래 저 아이에게 좀 일이 있어서 정신적 충격이 컸었던 모양이니, 그대가 이해하시구려. 방금 전에 그대를 오해했던 것, 미안하오.”
“뭐…,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나라도 그런 상황을 본다면, 틀림없이 그런 오해를 했을지도 모르니 말이오. 그건 그렇고 귀하가 패력검제시오?”
“그렇소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귀하는?”
“나는 이곳에서 부교주를 맡고 있소.”
초류빈은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괜히 초씨세가가 자신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처음 상대를 봤을 때 가졌던 느낌이 옳았음을 알고 패력검제는 내심 아주 기분이 좋았다.
“아, 부교주셨구려. 마교의 부교주들은 모두 극마급에 오른 초고수라 들었는데,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외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하마터면 초류빈은 「도대체 저 여자는 누구요? 교주의 정인이오? 아니면 또 다른 뭐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뻔 했다. 하지만 그도 지금껏 수많은 세월을 살아오며, 그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를 정파인 패력검제가 알고 있는데, 정작 그의 수하들이 모 르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렇기에 그는 슬슬 유도심문을 통해 상대가 알고 있는 것을 캐내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정신적 충격이라고 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왜 저분께서 관에 실려서 온 것이냐 이 말이외다.”
초류빈은 자신도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는 척 하기 위해 소연을 「저분」이라고 칭했다.
“하기야 내가 워낙 급히 여기까지 달려왔으니 이곳에는 아직 연락이 안 왔을 수도 있겠구려. 흑살마왕쪽과 대규모 혈전이 있었소. 거기에서 천지문은 괴멸적인 타 격을 받았고 말이오.”
천지문이 어디에 있는 문파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우선 초류빈이 아는 사람이 하나 등장했다. 흑살마왕 장인걸 말이다. 그에 대한 소문이라면 여기서도 많이 들 었었으니, 아무리 초류빈이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해도 그와 교주와의 악연을 모를 리 없었다.
“드디어 그와 정면 대결을 시작한 것이오?”
패력검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기에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정면 대결은 아닌 듯 했소. 교주가 거기까지 아무리 미친 듯이 달려갔 었다고 하지만, 거리가 거리인 만큼 도착하는데 1시진은 족히 걸렸소. 그동안 놈들의 포위 공격을 천지문이 버텨낸 것만 봐도, 저들도 그렇게 큰 전력을 그곳에 투 입하지 않았음이 분명하지 않겠소?”
“그렇겠구려.”
“일의 경과야 어찌되었건, 천지문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 사실이오. 내가 자세히 파악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아마도 30명도 살 아남지 못한 듯했기 때문이오. 지금껏 함께 생활해 왔던 동문들이 눈앞에서 그토록 무참한 죽임을 당했는데, 그녀가 충격을 받지 않았을 리가 있겠소? 더군다나 그 녀 또한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났을 정도였으니.
초류빈은 짐짓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터뜨렸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구려. 교주님의 부탁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저분을 이곳까지 데려와 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오. 덕분에 저분의 목숨을 건졌소이다.” 상대의 칭찬에 패력검제는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무슨 말씀을. 교주의 부탁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냥 죽게 놔두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아이였소.”
패력검제가 「너무나도 아까운 아이」라고 칭찬하자, 초류빈은 재빨리 장단을 맞춰줬다. 그가 그렇게까지 칭찬하는 것을 보면 무공적인 측면만 보고 얘기하는 것을 아닐 것이다.
“무공도 그렇지만, 인성 또한 훌륭한 분이시지요. 안 그렇소이까?”
“물론이오. 저런 아이도 보기 드물지요. 그 사제라는 녀석도 그렇기는 했지만…….”
여기서 말을 끊은 패력검제는 너무나도 궁금하다는 듯 초류빈에게 질문을 던졌다. 상대는 소연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듯 했으니까.
“그런데 내 한 가지만 좀 물어봅시다. 교주의 딸이 왜 천지문에 있었던 거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묻는 말이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초류빈은 경악했다.
“허억! 따, 딸이라고 했소?”
“…..”
서로 간에 긴 침묵이 흘렀다.
패력검제는 자신이 이렇게 간단하게 이놈의 함정에 빠진 것을 내심 한탄하고 있었다. 교주가 저자에게 소연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안 알려줬다는 것은, 그것을 비밀로 할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입으로 나불나불 알려줘 버렸다니……. 어쩌면 이 일로 인하여 소연의 신상에 위험이 닥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패력검제가 자신의 실언을 자책하고 있을 때, 초류빈은 지금 그 말이 안겨준 신선한 충격에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교주에게 숨겨둔 딸이 있었다니. 그 말은 곧 그가 과거 사랑에 빠졌었던 여인이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실수(?)를 통해 애를 낳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경우 이렇게 지속적인 사후관리가 이뤄질 가능 성이 없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그런 인간이 여자와 사랑에 빠졌었다니. 정말 이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교주와 사랑에 빠진 여인이 도대체 누구요?”
“…..?”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런 괴팍한 인간을 사랑하는 골빈 여자가 있었다니 정말 어떻게 생긴 계집…, 어어… 방금 한 말은 실수였소. 천하의 교주님을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여인이 얼 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이었으니 행여 오해하지 말아주시기 바라오.”
패력검제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조금 수상쩍다고 느끼자, 초류빈은 급히 말을 이었다. 어쨌건 이자는 교주를 좋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인간의 본성이 얼마 나 사악하고, 또 잔인무도한지도 모르고 말이다. 초류빈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좋소. 내 까놓고 말하리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소?”
마교의 최고위 고수들은 그리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묵향이 장기간 행방불명되었을 때, 마교는 아예 무림에서의 활동 자체를 중단했었다. 그런 만큼 상대가 철영이었다고 해도 패력검제가 알아볼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상대는 깊은 한숨을 토해낸 후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후우~. 나도 한때는 잘나가던 정파의 후기지수였소. 칠룡에 들었을 정도니,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소.”
마교 부교주가 예전에 정파의 후기지수였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상대가 아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노려보자, 초류빈은 자기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말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의심스러우신 모양인데, 내가 무림에서 활동할 때 사람들은 나를 탈명도(脫命刀)라고 불렀었소.”
“헉! 귀하가 탈명도 초류빈이라고요? 그게 사실이오?”
“물론이오. 믿지 못하겠다면 내 초씨세가의 비전도법(秘傳刀法)인 72식 광풍도법(狂風刀法)을 이 자리에서 보여드리겠소.”
초류빈이 벌떡 일어서자, 패력검제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말렸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까지는 없소이다. 광풍도법이 초씨세가의 비전도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도 초씨세가의 인물과 겨뤄 본 적이 없어서 그 초식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니 말이오.”
“크으, 이 자리에 혁련운 형님만 계셨어도, 내가 누군지 알아 보실텐데…. 참으로 안타깝구려.”
혁련운이라면 황룡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양양성에 있을 때 황룡무제한테서 과거 초씨세가의 초류빈에 대한 얘기를 조금 들은 기억이 났다.
“황룡무제를 거론하시는 것을 보니 정말 귀하가 초류빈 대협이 맞는가 보오.”
“황룡무제라고요? 무제라니, 형님께서 화경을 깨달으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패력검제의 대답에 초류빈은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크으윽! 젠장. 누구는 무제소리를 들으며 떵떵거리고 있고, 누구는 여기에 처박혀서 교주한테 허구헌날 두들겨 맞고 살아야 하고….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다 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교주가 그대를 핍박한다는 말씀이오?”
상대가 흥미를 보이자, 초류빈은 기회가 왔다는 듯 주위를 재빨리 둘러봤다. 문앞에 있는 두 놈 외에도, 윗층에 다섯 놈. 아래층에 다섯 놈의 기척이 느껴졌다. ‘쓰벌, 많이도 깔아놨군.’
내심 투덜거리며 초류빈은 행여 그놈들이 엿들을 새라 어기전성으로 말했다. 혹여 호법원 놈들이 이걸 엿듣고 소문이라도 퍼뜨린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 사실 안 그래도 이단자로 낙인찍힌 몸이었고, 교주 욕을 해 댄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놈들이 들어봤자 별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이 교주에게 전해진다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또다시 죽도록 얻어터질 테니까.
《내 말 좀 들어보시구려.》
한참 동안 이어지는 초류빈의 넋두리. 지금까지 교주에게 그가 당한 억울하기 그지없는 사연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악의에 가득 찬 비방(誇)까 지 덧붙여져 있었기에,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듣는다면 교주는 심각한 정신이상자이면서도 상당한 수준의 가학성 변태성욕자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악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왜 모두들 그 사내다운 겉모습에 속아서 교에 들어오는지 알 수가 없소. 내가 그걸 사전에 알기만 했다면 내 꼴이 이렇게까 지 되지는 않았을 것을…….》
《허어, 정말 형장의 말을 듣고 보니 모골이 다 송연하구려. 내 교주가 그런 악질적인 인물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었는데…….》
《내 말이 그 말이오.》
《교주도 그렇지만, 형장은 저 천마동에 살고 있는 괴물을 알고 계시오?》
《천마동에 살고 있는 괴물? 교주의 아버지 말이오?》
상대가 제대로 알아들은 듯하자 패력검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내 어제 천마동에 살고 있는 그 괴물에게 걸려서 혼찌검이 났었소. 내가 화경의 벽을 깬 이후 그토록 무참하게 두들겨 터지기는 그것이 처음인 듯하오.》 초류빈은 교주의 아버지가 과거 철영을 묵사발내 버렸던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극마의 경지를 깬 무시무시한 고수인 그를 아주 간단하게 박살내 놨다는 것은 정 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사람 같지도 않은 자를 괴물이 아니고 또 뭐라고 부른단 말인가? 그렇기에 초류빈은 상대가 말한 「괴물」이라는 단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양반도 확실히 괴물이지. 허어, 형장은 그래도 상태가 괜찮으신 것 같은데, 정말 운 좋았다고 생각하시구려. 그때 철영 부교주는 몇 달은 족히 간병해야 할 정 도로 중상을 당했었으니 말이오.>
상대가 호응해 오자 패력검제는 자신이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을 은근슬쩍 물어봤다.
《그 아버지를 보니 정말 무시무시한 괴물이던데, 교주도 그런 괴물이오?》
그 말에 초류빈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귓등으로 들으셨소? 내 살다살다 그렇게 지독한 괴물은 또 처음 봤소.》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서로 간에 말하는 것이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하지만 제각각 생각이 달랐던 그 둘은 그것을 못 느끼고 있었다. 패력검제는 이미 교주를 괴물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그런 차에 상대가 괴물이 맞다고 하니,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내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초류빈을 향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형장도 참 괴롭겠소이다. 그런 괴물들 뒤치다꺼리나 해 줘야 하다니……. 여기 있어 봐야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정파로 전향하는 게 좋지 않겠소?》 초류빈은 뼛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쉰 후 한탄했다.
《에휴~, 내 그 생각을 골백번도 더했지만, 나는 평생을 쫓겨 다니며 살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여 패력검제는 어기전성으로 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쫓겨 다니다니요?”
《내가 나가면 교주가 그냥 잘먹고 잘살거라 하며 눈감아 줄 것 같소? 그날부터 나를 잡으려고 사방을 뒤지기 시작할 텐데, 그것을 피해서 도망다녀야 할 것이 아니 겠소? 그러다가 붙잡히면 개 맞듯이 맞고 다시 끌려 들어올게 분명하오. 그걸 뻔히 알면서 내가 왜 나가겠소?》
《그도 그렇겠구려.》
《아무리 제령문이 망했다고 해도 들어갈 곳이 있고, 못 들어갈 곳이 있소. 나처럼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하지 말고, 마교에는 절대로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시오.》
패력검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형장의 뜻은 잘 알겠는데, 본문이 망했다니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제령문이 망한 것이 아니오?>
《제령문은 멀쩡하오. 적어도 내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멀쩡했었소.》
《그렇소이까? 아, 오해하지는 마시구려. 내가 제령문이 망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은 며칠 전 이곳에서 현천검제를 만났었기 때문이라오.》
너무 놀란 패력검제는 또다시 어기전성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뭐요? 멸문당한 화산파의 문주, 현천검제 말이오?”
그 말에 초류빈은 살짝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어기전성을 통해 상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쉿! 중요한 부분은 제발 좀 어기전성으로 해 주시오. 이 근처에 호법원 놈들이 쭉 깔려 있음을 모르는 거요? 그놈들은 교주의 딸을 보호하라는 명령도 받았지만, 당신이 딴 짓을 못하도록 감시하라는 명령도 받고 있소.》
《미, 미안하오. 너무 놀라서 그만…….》
《현천검제가 둘씩이나 있겠소? 바로 그 현천검제요. 화산파가 쫄딱 망한 후 교주한테 무슨 협박을 당했는지 본교에 입교한 모양이었소.》
명문정파의 문주가 마교에 입교했다니. 패력검제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초류빈에게 말했다.
《지금 그를 만날 수 있겠소?》
초류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힘들 거요. 일이 있다면서 교 밖으로 나갔으니 말이오. 그런데 내가 왜 제령문이 망했는지 물었는가 하면, 그게 아니라면 그대 같은 정파의 명숙이 왜 마교 내에 들어와 계시느냐 하는 거외다.》
만날 수 없다는 말에 패력검제는 상대가 자신을 떠보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판단했다. 사실 현천검제라면 화산파의 장문인인데, 그가 어찌 화산파를 멸문시킨 원수의 밑에 들어올 수가 있겠는가. 모두 다 거짓말일 것이 분명했다. 기분이 나빠진 패력검제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건 내 이미 말하지 않았소? 교주의 부탁 때문에 왔다고 말이오. 이제 그것이 끝났으니 양양성으로 돌아갈 거외다.”
《생각 잘하셨소. 오히려 그것이 좋을 거요. 괜히 마교와 친하게 지내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계속 듣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패력검제였다. 원래가 마교에서 은근슬쩍 자신보고 들어오라고 꼬드기고, 자신은 거절을 해야 옳거늘. 이건 거꾸로 되어 자기보고 절대로 입교하지 말라고 사정을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상대가 초류빈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뭔가 수상쩍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초류빈을 대충 상대한 후, 오후에 떠나겠다고 통고했다. 그 말을 들은 초류빈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풀린다고 생각한 것인지 미소를 머금 고 대꾸했다.
《생각 잘하셨소. 예로부터 까마귀가 노는 곳에는 백로가 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마의 소굴에서 한시바삐 떠나는 것이 최선의 길이지요.》
정파쪽 입장에서 봤을 때, 골백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인물이 누군가? 마교의 부교주가 아닌가?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그를 바라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