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1권 2화 – 수라도제의 침묵
수라도제의 침묵
가주(家主)가 소수의 호위대를 거느리고 양양성을 향해 출발했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 양양성에 있던 서문세가의 원로들은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자신들이 보고서를 보내면서 가장 우려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보고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태상가주가 이곳에 서문세가의 주력 고수 대부분을 이끌고 와 있는 지금, 가주마저도 다수의 호위무사들을 거느리고 온다면 세가가 텅텅 비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또 가주가 그것을 염려하여 극소수의 호위만을 거느리고 출발했다면, 가주의 무공을 못 믿는 바는 아니지만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행여 불상사라도 일어날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서문세가의 원로들은 그 모든 걱정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가주가 단 두 명의 호위만 거느린 채 무사히 양양성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님 오시는 길에 불편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원로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길(西門佶)은 황급히 질문을 던졌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왔기 때문 이었다.
“괜찮았네. 그건 그렇고 아버님께서 어찌되신 일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서문길의 눈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원로들은 그의 눈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 모습을 보고 서문길은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된 일이오? 속 시원하게 말해 보시오!”
서문길의 채근에 원로들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대장로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대장로는 허옇게 색이 바란 기다란 수염을 매만지며 난처한 듯 말했다.
“가주님, 일단 진정하시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들어가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성문 앞이 아닌가. 아마도 그 때문에 대답을 하기 힘들다는 말일 것이다. 그 점에 생각이 미친 서문길은 낮게 헛기침을 하 며 대답했다.
“험험, 내가 좀 성급했었던 듯하오. 자 안으로 듭시다.”
“예, 가주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장로님.”
밀실에 둘만 남게 되자 서문길은 서둘러 대장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공적인 자리에서야 가주의 권위라는 것이 있다 보니 하대를 사용했지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는 존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장로는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대장로는 안 그래도 주름살투성이인 얼굴에 더욱 주름을 깊게 잡으며 한동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말없이 버티고 있기도 힘들다고 여겼는지 힘겹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선, 가주님께 자세한 전갈을 보내드리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한 것이라 서신을 통해 전하기에는 무 리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아버지께서 그리되셨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일의 시작은 한 달 전이었습니다. 무림맹으로부터 남양을 기습 공격하라는 명령이 갑작스럽게 전달되었지요.”
그 말에 서문길은 인상을 약간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이미 보고서를 통해 알고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말씀 안 하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장로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가주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작전을 마교에서 계획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말에 서문길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마교에서… 말입니까?”
“예. 마교에서 계획한 일을 이쪽에서 새치기해서 그 공을 가로채려고 했었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아시는 대로, 작전은 실패. 자신들이 계획한 일이 무림맹 때문에 완전히 틀어져 버렸으니, 격분한 마교 교주가 이곳으로 난입해 들어온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순서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 말에 서문길은 탄식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어, 그렇다면 교주가 이곳으로 난입해 들어왔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격노한 그를 막는다고 본문의 고수 30여명이 중경상을 당했습니다. 그때, 태상가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대장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일을 가주에게 제대로 설명하는 게 조금 난해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뭇거림을 서문길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받아들였다. 대장로의 말은 교주와 아버지가 어떤 형식으로든 부딪쳤다는 말이고, 용과 호랑이가 결코 좋은
뜻으로 만나지 않았으니 뭔가 다툼이 벌어졌을 것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한 것이 아닐까? 상대는 탈마의 고수. 결단코 화경급 고수가 넘볼 상 대가 아니었다.
현실을 너무 직시한 탓인지 질문을 던지는 서문길의 어조는 너무나도 담담했다.
“충격을 크게 받으셨습니까?”
대장로는 머뭇머뭇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러신 모양입니다.”
이제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서문길은 밀실을 나서며 대장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버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대장로는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 만나셔도 도움이 안 되실 텐데,
“그건 아버님을 만나 본 후에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오는 경비무사를 향해 서문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기별을 넣게.”
“옛.”
무사는 굳게 닫혀져 있는 문을 향해 외쳤다.
“태상가주님. 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후 무사가 몇 번 더 기별을 넣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혹시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서문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고 황급히 달려 들어갔지만, 예상외로 그의 아버지 수라도제는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버님, 이게 어찌 된 일이십니까?”
수라도제는 자신의 앞에서 눈물짓고 있는 사내를 못 알아본 듯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곧이어 상대가 누군지 떠올랐는지 멍하던 눈빛이 약간이나마 되돌 아왔다. 그는 힘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냐?”
“교주와 한 수 겨루셨다고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걱정할 필요 없었는데…….”
힘없는 수라도제의 말에 서문길은 언성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걱정을 안 하게 생겼습니까? 양양성에 모인 모든 무림인들을 지휘하셔야 할 아버지께서 이러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이제야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는 듯 수라도제는 멍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 그랬었지… 그랬었어.”
중얼거리는 수라도제를 바라보며 서문길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현경에 준하는 탈마급 고수. 아버지와 싸웠다면 상대가 이겼을 것이 뻔했다. 등 급에서 차이가 너무 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겨우 패배 한 번 당했다고 저렇듯 정신을 못 차리시는 것까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는 더 이상 아버지와의 대화는 포기하고 대장로에게 일의 전말을 물어보기로 생각을 굳혔다. 일단 생각을 정한 서문길은 공손한 어조로 아버지에게 말 했다.
“아직 몸이 편찮으신 모양인데 일단 푹 쉬시면서 몸조리 잘 하십시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해 둘 테니 염려 놓으시구요. 큰 일이 벌어지면 아버 지께 곧장 연락드리겠습니다.”
서둘러 수라도제의 방에서 빠져나온 서문길은 다시금 대장로를 찾아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서두를 던졌으니, 서문길이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대장로의 잘못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예?”
“그러니까 교주와 아버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저러시느냐 이겁니다.”
“그,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대장로는 대답하기 난처한지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날 있었던 일을.
* * *
“이 망할 새끼! 본좌에게 물을 먹여?”
“왜 이러십니까? 교주.”
자신을 말리는 경호무사의 멱살을 그러쥔 다음 묵향은 으르렁거렸다.
“본좌가 왜 이러는지는 네놈들이 더 잘 알 것이 아니냐?”
잠시 살기 띈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던 묵향은 무사를 옆쪽으로 내던지며 외쳤다. 목소리에는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말해 주듯 엄청난 공력이 실려 있어 웬만 한 고수들은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수라도 이 새끼! 빨리나왓!”
상대가 아무리 마교의 지존이라고 하지만, 계속 육두문자를 써대자 경호무사들의 표정도 점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계속 이러시면 저희들로서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교주.”
“뭣이? 참지 않으면 네놈들이 어쩔 건데?”
그와 동시에 벌어진 난타전. 사실 이걸 난타전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것이 묵향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던 모든 호위무사들이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은 것이었으 니…….
이때, 수라도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교 교주가 왜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인지 그는 알지 못했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중, 밖에 서 싸움이 벌어진 것 같자 급히 자신의 애도를 집어 들고 달려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여기저기에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는 휘하 고수들을 보고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민에 빠졌던 시간은 정말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그 순간에 수십 명이 묵사발이 나서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서문세가 에서 골라 뽑은 정예 고수들이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이런 망할 새끼. 잡아뗀다고 본좌가 모를 줄 알아?”
수라도제가 봤을 때, 교주는 분노 때문에 이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것은 묵향 자신이 벌여 놓은 일을 은폐시키기 위해 일부러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 이었지만, 수라도제로서는 상대의 음흉한 속셈을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수라도제도 거대 문파를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상대에게 이런 막말을 듣고 참고 있을 리 가 없었다.
“주둥이에서 튀어나오면 다 말인 줄 아시오? 어디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행패…, 흡!”
그 순간 수라도제는 엄청난 살기를 느꼈다. 사실 그도 지금껏 무인으로서 사지를 헤치고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살기 따위에 마음이 동요될 그 가 아니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수라도제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그리고 묵향은 한 발 한 발 수라도제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고.
“이, 이런…….?”
갑자기 상대의 겉모습에 겁먹은 듯 움직여 버린 자신의 실태(失態)를 깨달은 수라도제는 황급히 멈춰 섰다. 하지만 방금 전 자신의 모습을 본 가솔들의 이목을 생 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솔들에게 있어서 그 가주는 최고여야만 했다.
‘오냐, 네놈이 이렇게 노부를 핍박한다면……. 좋아! 이판사판이다.’
수라도제는 오른손에 힘을 주어 거도를 꽉 움켜쥐었다.
“호오, 치고 나올 기세구먼.”
묵향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오르는 순간, 그때 수라도제로서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괴변이 일어났다. 자신을 향해 덮쳐드는 폭풍과도 같은 엄청난 기운을 느낀 것이다.
“이… 이것은 뭐냐? 살기인가? 기세인가? 그도 아니면…….”
너무나도 엄청난 기운에 수라도제 같은 백전의 노고수라도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어느샌가 수라도제의 마음속에는 수십 년 만에 불안과 공포라는 것이 마구마구 용솟음치고 있었다. 머리털이 쭈뼛 일어서며, 죽음이라는 단어까지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한 순간이라도 정신을 잃으면 그것은 바로 죽음. 순간, 수라도제는 주위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검을 뽑아들고 교주를 노려보며 옆의 누군가에게 뭐라고 외치는 서문세가 가솔들의 움직임이 마치 한순간 정지되는 듯, 아니면 순차적으로 조금씩 연결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지는 시간이 너무도 길게만 느껴진다.
‘시, 시간조차 정지되었단 말인가? 아니면 순전히 이건 나만의 느낌이라는 것인가?”
수준 높은 적과 대결하며 한순간 시간이 멈추는 것 같은 현상은 지금껏 살아오며 수없이 느껴봤던 수라도제다. 순간을 무한히 쪼개어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고수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다. 옆에서 구경하던 인물들이 차마 보지도, 아니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 상대의 움직임을 마 치느린동작처럼 지켜볼 수 있는 자. 곧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지배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고수인 것이다.
고오오오…….
마치 폭풍에 휩싸인 듯한 엄청난 기운의 흐름. 기세인 듯, 아니면 살기인 듯도 했지만, 이건 뭔가 지금껏 수라도제가 알고 있던 그런 무형(無形)의 형질이 아니었 다. 마치 깊은 물속에라도 빠진 듯 뼈마디가 뭉그러질 정도로 직접적인 압력을 가하고 있으면서도, 두터운 아교질 속에 빠진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가 힘들었 다.
수라도제는 지체치 않고 단전의 기운을 개방해 그 힘에 저항했다. 하지만 깊은 물속에 조약돌 하나 던진 듯 상대의 기세를 도저히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 순간 수라도제의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이 있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이 차마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로 띄엄띄엄 천천히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이것 만은 이상하게도 현재 수라도제가 느끼는 시간과 그 흐름을 같이하고 있었다.
《제법이야. 입만 산 것은 아니었군. 어떠냐? 천외천(天外天)의 무공을 경험해 본 감상은?》
그것을 듣는 수라도제는 충격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이것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지금 이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고 바로 저자. 마교 교주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지금 강제적으로 상대의 시간까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술(邪術) 따위가 아니라 무공이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서, 설마 이것이 어기상인(御氣傷人)이란 말인가?”
수라도제가 필요 이상의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자신도 세인들이 말하는 소위 어기상인이라는 무공을 쓸 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는 내공을 끌어올려 자신보다 하수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줌은 물론이고, 3류 정도쯤 되는 녀석들은 그것만으로도 격살시킬 수 있었다. 그는 이것이 바로 어기상인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당해 보는 이것은? 지금껏 그가 생각해 오던 어기상인과 그 차원 자체가 달랐다.
“크어억!”
갑작스럽게 선혈을 뿜어내며 무너지는 수라도제. 아마도 상대의 무공이 자신이 상상한 것과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정신적 충격이 너무나도 컸 던 모양이었다.
***
대장로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실질적으로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뭔가 그자가 손을 썼던 것은 분명합니다. 안 그러면 태상문주님께서 그때 그토록 큰 내상을 입으실 이유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대장로의 말을 들은 서문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두 분이 그냥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는 말이지요.”
“흠, 그렇다면 그 시간은 어느 정도였지요?”
서문길의 예리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주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대장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노신(老臣)이 대결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시간을 잰 것이 아니니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노신이 기억하기로는 천천히 숫자를 셌을 때, 하나에서부터 시작해 서 오십 정도를 셀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가주님께서도 서로 간에 뭔가 내력 대결이 있었지 않았나 하고 의심하시는 모양이신데…, 그 짧 은 시간에 내력 대결을 펼쳤고, 그 결론이 났다는 것은 너무 심한 억측이 아니겠습니까?”
「께서도」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 봐서 대장로도 그런 의심을 해 봤었던 모양이었다. 서문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그렇다면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서문길과 대장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문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리고 대장로는 그때의 일 을 가주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해야 했기에 그때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자신이 뭔가 빠뜨린 것이 없는지 회상하고 있었다.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대장로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참, 태상가주님께서 정신을 차리신 후 노신을 불러 질문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교주와 태상가주님께서 대치하고 계실 때, 뭔가 기파(氣波) 같은 것이 느껴지더냐 하는 것이었지요. 노신이 그런 것은 못 느꼈다고 말씀 올렸더니, 그렇다면 옷소 매가 떨리는 것 같은 지극히 작은 외형적 변화라도 없었느냐고 물으셨죠.”
“그래서요?”
“그 어떤 이상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대답해 드렸습니다. 사실 두 분은 잠시 서로 노려보고 계셨을 뿐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표정을 일그리시며 그만 나가보라고 하시더군요.”
“흠, 그렇다면 아버님은 그때 그자와 뭔가 내력 대결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내력 대결을 하셨었다고 생각하고 계셨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고 봐야 하겠지만, 태상가주님께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입을 다물고 계시는데 노신이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서문길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어찌되었건, 갑자기 태상가주님께서 쓰러지시는 바람에 그 일은 그냥 묻혀졌습니다. 태상가주님을 치료하고 간호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교주 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지요.”
이때, 똑똑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총관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총관은 대장로와 가주의 눈치를 살피며 황급히 용건을 밝혔다.
“가주님께서 대장로님과 사적인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데 이렇듯 방해를 하게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라서…….”
“무슨 일인가?”
“예, 무림맹에서 급전(急傳)을 보내왔습니다.”
“급전이라고?”
총관이 건넨 서신을 읽은 서문길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
여기까지 말한 서문길은 대장로를 힐끗 바라보더니 말을 멈췄다. 현재 그의 아버지인 수라도제는 충격을 해소할 시간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면서 아버 지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까지 안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대장로가 조언했다.
“그렇게 급박한 일이라면, 각 단체의 원로들과 상의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찌되었건 그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니, 그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게 좋겠군요.”
서문길은 대장로에게 치하한 후, 총관에게 명령했다.
“각 문파의 수장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가 뵙기를 청한다고 전하게.”
“옛, 가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