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1권 3화 – 차도살인(殺人)의 음모
차도살인(殺人)의 음모
총관이 물러간 후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양양성에 무리를 이끌고 파견되어 있는 거대 문파들의 대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서문길에 비해 나이뿐 아니라 배분마저도 훨씬 높은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 있는 모든 세력들 중에서 서문세가의 세력이 가장 컸고, 서문길은 그 가주였기에 그가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게 된 것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회의장에 사이좋게 들어온 것은 무림의 원로고수들인 종리영우와 제갈기였다. 종리영우는 회의장의 상석에 앉아 있는 사위를 보고 따뜻한 눈빛을 던 지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노부를 불렀는가? 아무래도 사적인 일은 아닌 듯한데…….’
“일단 앉으시지요. 장인어른.”
제갈기와 종리영우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후, 서문길은 좌중을 둘러본 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위엄에 가득 차 있어 젊은 나이에 대문파를 이끌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무림맹으로부터 긴급한 서신이 도착했기에 여러분들을 모셨습니다.”
긴급한 서신이라는 말에 좌중에 앉아 있는 수장들의 얼굴에 일순 긴장감이 어렸다.
“현재 금의 일부 병력이 본대와 떨어져 나와 회남(淮南) 인근에서 도강(渡江)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개방을 대표해서 자리에 앉아 있던 부운걸개(浮雲乞장로는 서문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개방으로부터 그런 비슷한 내용의 정보조차 들은 바가 없었기 때 문이다. 사실 장인걸이 풀어놓은 편복대와 중원무림의 첩보조직은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뜬금없는 정 보가 튀어나온 것이다.
적이 파놓은 함정일까? 아니면 연막인가? 그도 아니면 진짜? 부운걸개 장로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부운걸개 장로는 조금 미심쩍은 어조 로 질문을 던졌지만, 그의 말투는 공손했다. 자신이 서문길보다 연배가 높다고 하지만 상대는 거대방파를 이끄는 주인이었고, 자신은 개방의 장로일 뿐이었으니 그 건 어쩔 수 없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게 정확한 정보입니까? 제가 맹의 정보력을 못 믿는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것이 놈들의 농간일 수도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부운걸개의 말에 서문길은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무영문에서 보내온 정보이니 아마도 정확한 것일 겁니다.”
“무영문이라고 하셨습니까?”
무영문이라는 말에 부운걸개의 안색은 흡사 소태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중원 최고의 정보단체라는 무영문에서 보내온 정보이니 그 정확도는 증명된 것이나 다 름없다고 봐야 했다. 정보 판매를 업으로 하는 자들인 만큼, 그 진위(眞僞)를 철저하게 가렸을 것이다. 안 그러면 그것으로 먹고 살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부운걸개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도 또다시 무영문에 개방이 뒤쳐졌다는 것이 아닌가.
이때, 그의 장인인 종리영우가 끼어들었다.
“허, 그거 큰일이로구먼. 그래 놈들이 도강을 준비하고 있는 곳이 어디라고 하던가?”
그 물음에 서문길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회남 인근이라고 합니다. 대규모 조선소에서 불철주야(不撤晝夜)로 함선들을 건조 중인데, 그 정도 규모의 조선소라면 봄이 될 때쯤에는 최소한 3만 정도의 인마(人馬)를 수송하기에 충분한 숫자의 배를 건조할 수 있을 거라고 무영문은 추측했답니다.”
그 말에 부운걸개의 안색이 변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3만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무영문의 정보로는 그렇다고 합니다. 부운걸개 대협.”
“허~, 무림맹에서 긴급서신을 보낼 만도 합니다. 기실 그곳에서 도강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남경까지는 지척이 아닙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황룡무제가 입을 열었다.
“그런 중차대한 사안이라면 왜 교주를 빼고 이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인가? 노부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구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갈세가의 가주 패검천령 제갈기가 버럭 외쳤다.
“그놈을 불러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가 뭐가 있겠소? 황룡무제 대협 회하淮河)의 도강을 막기 위해 송군과 연합하여 몇몇 무림명숙들이 힘을 보태고 있소. 아무 리 놈들의 수가 많다고 하지만, 그런 방어선이 쉽사리 뚫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오.”
사실 황룡무제에 비해 제갈기의 연배가 훨씬 높았고, 또 지닌 바 세력도 월등하게 컸다. 하지만 황룡무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화경급 고수였기에 그 모든 것을 무시 하고 무림에서 높은 배분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갈기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대협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패검천령 대협의 말씀이 옳다고 보오. 오랑캐들은 수전(戰)에 약하지 않소? 그놈들이 몰래 도강한다면 몰라도 이미 그 의도가 들통난 이상 그곳에서 도강한다 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오.”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부운걸개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 오랑캐들이 수전에 약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그들이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놈 들의 뒤에는 흑살마왕과 그 졸개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앞서서 길을 뚫는다면 회하에 주둔 중인 송군들 만으로는 도강을 막아 내기에 역부족일 수도 있다고 사 료됩니다.”
부운걸개 장로의 지적에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과반수가 공동파 인근에서 흑살마왕이 거느린 집단과 피튀기는 접전을 벌 인 경험이 있었기에 상대가 지닌 전투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에 여기 모인 인물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종리영우가 먼저 대답해 왔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충분히 그럴듯하구먼. 그렇다면 자네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가?”
“아직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을 때, 조선소는 물론이고 놈들이 건조하고 있는 배들을 몽땅 다 불태워 없애 버려야 합니다. 이때, 배를 건조하는데 도움을 준 장인들 을 확실히 처리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려운 작전이 될지도 모르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교주에게 사람을 보내어…….”
부운걸개의 지적에 황룡무제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려했지만 혼원패권(混元覇拳) 팽선(彭)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는 황룡무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느긋한 표정으로 손을 슬쩍 들며 끼어들었다.
“뭐하려고 마교놈들과 합작을 한단 말씀이십니까? 이번 작전은 노부가 맡겠소이다.”
팽선의 자신감 넘치는 제의에 이곳에 모여 있는 다른 이들은 모두 다 반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 혼원패권 장로께서 맡아주시겠소이까?”
팽선은 하북팽가의 장로였다. 그가 나선다는 말은 양양성에 와 있는 하북팽가의 전력(全力)을 투입하겠다는 뜻이니 이곳에 모인 다른 인물들로서는 달갑지 않을 수 없었다. 흑살마왕이 도강을 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중요 거점에 휘하의 고수들을 배치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만큼, 그들을 뚫고 들어가서 불을 지르려면 상당한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 희생을 팽가가 앞서서 책임지겠다는데 그 누가 말리겠는가.
하지만 주위의 반응과 달리 얼굴색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팽선과 함께 이곳에 파견되어 온 하북팽가의 또다른 장로인 팽지량(彭志 亮)이었다. 그는 다급히 팽선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아니, 대성이를 죽인 금나라 놈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아우 마음은 내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위험이 큰일을 덜컥 떠맡겠다고 나서다니……. 지금 제 정신인가?>
아마도 팽지량은 가주의 아들 팽대성이 금군들에 의해 참살당한 일을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팽선은 뭔가 복안이 있는 듯 자신감 있게 대답해 왔다.
<형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알아서 본가에 누가되지 않도록 처리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 좋은 묘수가 있다면 한번 해 보게.>
동료의 묵인을 얻어내자 팽선은 좌중을 둘러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그곳에는 지금 3만 금군과 흑살마왕이 파견한 일부 고수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팽선은 다시 한 번 좌중을 둘러봤다. 모두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팽선은 말을 이었다.
“그런 만큼 그곳에 본가의 세력만 이끌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이 사실인데…, 그 인선을 저에게 일임해 달라는 것입니 다.”
팽선의 제안에 종리영우가 찬성했다.
“자네의 제안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네. 사지에 들어가 함께 싸울 동료들인데, 서로가 손발이 맞지 않아서는 안 되겠지.”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패도(覇刀) 대협.”
모두에게 포권을 하여 사례한 후, 팽선은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일단 계획이 실패했을 때,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차출하는 인원수에 제한을 두는 것이 좋겠지요. 본가에서 5백의 정예를 투입할 테니, 호명 된 문파에서도 5백씩의 인원을 차출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들 찬성했다. 사실 거대문파들의 경우 5백 명 정도의 피해라면 원통하기는 해도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모두가 찬성 하자 팽선은 호명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먼저 맹주를 배출한 무림의 태두, 무당에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문파가 호명당할 것을 이미 예상했는지 무당파 장로는 즉각 허락했다. 사실 자신의 문파가 가장 먼저 호명되었으며, 그 와중에 「태두」라는 명예로운 칭호 로 불려 졌기 때문인지 그의 안색은 매우 흡족해 하는 기색마저 띠고 있었다.
“허허헛, 팽선 대협의 제의는 아주 타당하다고 하겠소. 기꺼이 동참하리다.”
이렇게 말한 무당파 장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칠 일 후에 삼절군(三絶君)이 문도들을 거느리고 도착한다고 하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 수 있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되실게요.”
삼절군이라면 과거 칠룡에 꼽혔던 무당파 속가제자 능소천(陵紹天)을 말한다. 과거 잘생긴 그의 외모 때문에 옥면공자(玉面公子)라 불렸었던 그는 검(劍), 시(詩), 음(音), 이 세 가지에 모두 능통하고, 깊다고 하여 삼절군으로 불리고 있었다. 태극검법의 달인으로서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파의 제자로서는 특이하게도 피리와 금을 이용한 음공(音攻)에도 조예가 깊은 특이한 고수였다.
물론 무당파 장로의 말대로 그가 가세해 준다면 팽선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겠지만, 팽선에게는 그것이 별로 달가운 제안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욱 명성이 뛰어 난 능소천이 합류한다면 자기는 그야말로 개털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팽선은 점잔을 빼며 그의 동참을 거절했다.
“허어, 이레라구요? 물론 삼절군 대협의 동참은 참으로 큰 힘이 되겠으나, 워낙 급박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라 이레씩이나 기다릴 수는 없을 듯하구려. 어찌되었건, 무당에서 흔쾌히 동참을 허락해 주시니 이 팽모로서는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소이다.”
무당파 장로에게 감사한 후, 팽선은 다음으로 참가할 문파를 지명했다.
“다음으로 현재 이곳 양양성을 책임지고 계신 서문세가에서도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서문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찬성의 뜻을 밝혔다.
“대협께서 저희 가문을 무당 다음에 놓아주시니 영광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당장 당할 피해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모두들 그 다음은 자신들의 문파가 불려지기를 원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노회한 팽선 이 사람들의 관심사를 그런 식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팽선이 거론한 문파는 종남파였다. 물론 종남파의 경우 본문은 금에 의해 멸문당했지만 송류 장로가 이끄는 종남의 고수들이 이곳 양양성에 모여 있었다. 금이라면 자다가도 이빨을 가는 송류 장로인 만큼 자신들의 호명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빈도를 빼셨다면 칼바람이라도 일으킬 셈이었소이다. 빈도에게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오이다, 혼원패권 대협.”
“무슨 겸양의 말씀을. 금에게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종남파를 빼면 안 되겠지요.”
그 다음 팽선은 공동파 장로에게로 슬며시 눈길을 던졌다. 종남파 이상으로 큰 피해를 당한 것이 공동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동파의 장로는 팽선의 시선을 슬 쩍 외면했다. 그는 피해가 막심할지도 모르는 이번 작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멸문당한 공동파를 새로이 창건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고수 몇 명 잃는 것을 저토록 겁내다니……. 쓰레기 같은 말코 같으니라구. 쯧쯧, 한때 무림을 휘어잡았던 공동파의 명성도 이것으로 끝이로구먼.”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팽선이 다음으로 시선을 옮긴 인물은 사천성에서 당문도들을 이끌고 와 있던 당민걸(唐玟傑) 장로였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번에 벌어질 전투는 뛰어난 실력의 고수들과 싸우는 것 보다 다수의 병사들을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 않겠소이까? 그런 만큼 소수로서 다수를 상대하는데 있어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당문에서 고수들을 보내주셨으면 감사하겠소이다.”
안 그래도 당민걸 장로는 자신들의 문파를 호명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당가의 금지옥엽인 당소진(唐素珍)이 금나라 놈들에 의해 심각한 부상을 당한 탓 이었다. 물론 수라도제의 적절한 도움으로 그녀의 목숨은 건졌지만, 여성의 몸에 상처의 흔적이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가 되겠는가. 옷에 가려진 부 분의 상흔이 어느 정도인지 숙부인 그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기 그지없던 그녀의 얼굴 위로 뱀이 기어가는 듯한 검흔이 아 로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극심한 분노를 느꼈었다. 더군다나 4봉에 뽑힐 정도로 재색을 겸비했던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변했으니, 평소 질녀 를 매우 사랑했었던 당민걸의 가슴이 찢어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호명되자마자 당민걸 장로는 희색을 띠며 사례했다.
“아무리 많은 병사들이라도 맡겨만 주시오. 당문의 독과 암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겠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지막이라는 말에 자신들을 호명해 주기를 원하는 수많은 눈들이 팽선에게로 모아졌다. 내로라하는 문파들만 거론된 만큼, 호명되는 것은 그 문파의 강성함을 자 랑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빠진다면 주위로부터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시간을 끌며 이리저리 바라보던 팽선은 뜻밖의 문파를 지명했다.
“여기에는 참석하지 않은 모양인데, 마지막으로 천지문이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모두들 아주 뜻밖이었던지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여기저기에서 쑤근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쑤근거림 정도로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한 장년 사내가 자 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혼원패권 대협의 결정을 노부는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소이다. 이곳에는 오랑캐들에 의해 막심한 피해를 당한 문파들이 많이 있소. 그런데 유독 몇몇 문파에게 만 복수의 기회를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노부는 생각하오.”
이렇게 말을 꺼낸 인물은 얼마 전 묵향의 계략 때문에 가문의 자랑인 황보청 장로를 잃은 황보세가의 장로 황보열(皇甫熱)이었다.
물론 이것은 노회하기 그지없는 팽선이 기다리던 제안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황보세가를 끼워 넣으려고 했다가는 무림에서 쓴맛 단맛 다 본 이 노고수가 곧바로 이의를 제기해 올 가능성이 컸다. 현재 팽가에서는 이번 작전에 고수를 투입할 여유가 없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팽선은 일부러 금에 큰 피해를 당했으면서 도 그 힘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파들을 거의 다 지명했으면서도 유독 황보세가만을 무시함으로써 상대의 성질을 긁어놨던 것이다.
그렇다고 팽선이 덥썩 상대의 제안을 수락할 리 없었다. 그렇게 빨리 허락하면 너무 속보이는 행동이 될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내색을 숨기고 난감한 척 우물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잠시 상대의 속을 태우던 그가 황보열을 향해 다시 한 번 경고하며 그를 좀 더 덫을 향해 끌어당겼다.
“이번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외다. 흑살마왕도 그곳이 송을 침공하기 위한 비장의 거점인 만큼 상당한 대비를 갖춰 놨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외다.”
그토록 위험한 곳에 딴사람들은 다 가는데 황보세가만 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다는 것인가? 매우 자존심이 상한 황보열은 더욱 인상을 굳히며 딱딱한 어조로 대꾸 했다.
“본가는 복수를 함에 있어 결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소.”
팽모는 짐짓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휴~,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이번에 귀 가문에서는 절파검 황보청 대협을 잃지 않으셨소이까? 가문의 자랑인 절대고수를 잃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 는지 노부는 잘 알고 있소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이 팽모가 어찌 귀 가문에 다시 한 번 출혈을 부탁드릴 용기가 나겠소이까.”
그 말에 황보열은 완전히 넘어갔다. 그 증거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안색이 눈 녹듯 풀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황보열은 상대가 자신을, 아니 황보세 가를 이렇듯 끔찍하게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에 감격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팽선을 향해 포권하며 치하했다.
“본가를 그토록 생각해 주시니 가주님을 대신하여 혼원패권 대협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겠구려. 하지만 본가에서는 아무리 희생이 크더라도 절파검 장로의 복 수를 포기할 마음은 없소. 그런 만큼 대협께서도 본가에서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정말이지 감사하겠소이다.”
“그토록 말씀하시는데 어찌 허락하지 않겠소이까? 아니, 황보세가에서 이토록 복수를 원하시는 줄 알았었다면 내 처음부터 황보열 대협께 청했을 거외다.” 서로 간에 어느 정도 타협이 된 것 같자 상석에 앉아 있던 서문길이 낮게 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험험, 황보세가에서 참가를 허락하신 만큼 천지문은 빼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른 분들께서도 천지문과 함께 동행하고 싶어 하지 않으실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에 팽선은 이미 생각을 굳혔는지 완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노부가 보기에 천지문은 맹에서 하는 일에 전폭적 지지를 보냄으로써 자신들의 명예 회복에 나서고 있소이다. 그 작은 문파에서 5백이나 되는 고수를 양양성에 투입한 것만 봐도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 일이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수라도제 대협도 천지문을 좋게 보고 계신 듯했소이다. 그렇기에 노부는 그들에게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소이다.”
팽선의 설득에 모두들 조금씩은 수긍하는 듯했다. 사실 수라도제가 천지문을 이끄는 소연에게 약간의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그들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으 니 말이다.
서문세가 가주 이하 무림명숙들로부터 자신의 계획을 허락받은 팽선은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팽선은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제자를 불러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 줬다.
“이삼 일 내로 출발할 예정이니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 맡겨만 주십시오, 사부님.”
사부의 지시에 팽조는 고개를 조아리며 장담했다. 하지만 사부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음흉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번 일이 그토록 위험하다면? 그렇기에 팽조는 슬쩍 자신의 속셈을 사부에게 말해 그 속을 떠봤다.
“그런데 사부님. 이번 일이 그토록 위험한 것이라면 그 망할 계집도 함께 끌어들여 사지(死地)로 밀어 넣는 것이 좋지 않았겠사옵니까?”
그 말에 팽선은 참지 못하고 음흉스런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크흐흐흣. 네 생각을 어찌 노부가 모르겠느냐? 노부의 생각도 그러하다.”
팽조는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 그러시다면?”
“천지문도 함께 갈 것이야. 그렇지만 너는 절대로 이 일에 대해 내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부님.”
팽선은 진중한 어조로 제자에게 말했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을 하려면 기밀 유지가 최대의 관건이다. 천지문은 마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만큼, 절대로 그 혐의가 본가에 돌아와서는 안 된다. 그 점 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팽조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사부님.”
그의 목소리에는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담뿍 담겨 있었다.
팽선과 팽조, 두 사제 간이 음흉스런 미소를 주고받으며 속셈을 토로하고 있을 때,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길은 대장로를 불러들여 이번 일을 상의하고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가주님.”
“예. 번번히 대장로님께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가주님. 늙은 노신이 아직까지도 가주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문길은 당치않다는 표정으로 대장로를 질책했다.
“아직도 정정하시면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건 그렇고, 대장로님을 청한 것은, 이번 회의에서 혼원패권 장로가 각 문파에서 5백씩, 총 3천5백의 정 예를 거느리고 금이 회하를 건너기 위해 전선(戰船)을 제작하고 있는 곳을 기습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본가에서도 5백을 지원해야 하는데, 대장로님께 그들의 인선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대장로는 가주가 자신에게 조언을 청해 온 것을 매우 기뻐하며 대답했다. 원래 뒷방 신세를 져야 할 늙은이가 뭔가 일을 맡으면 자신이 아직까지도 쓸모 있구나 하 며 기뻐하지 않던가. 그것을 잘 알기에 서문길은 웬만한 일은 원로들과 상의해서 처리하고 있었다.
“혼원패권이 그들을 지휘하게 되는 만큼, 그보다는 한 급 떨어지는 인물을 보내는 것이 다툼이 없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만큼 무공은 다소 떨어지겠지만 속 천(粟闡)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의 성격이 순후하여 혼원패권과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노회한 혼원패권은 어떻게 끌어들이 신 겁니까?”
예상외의 질문에 서문길은 잠시 당황했다.
“예?”
대장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능력이 제법 쓸 만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노신이 판단하기로는 남의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가만히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서문길은 떨떠름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가 직접 자원했습니다.”
“자원했다구요? 흐음…, 그렇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말인데…….?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생각에 잠기는 대장로를 향해 서문길은 무릎을 탁 치며 다급히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이해하기 힘든 제안을 했습니다. 천지문을 데려가야겠다고 말입니다. 천지문이 오명을 지울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그런 것까지 신경써 줄 만큼 천지문과 팽가의 사이가 가까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대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호오, 그것 때문이었군요. 가주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천지문도들이 저희들과 합류하고자 도착했을 때 혼원패권과 충돌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예. 태상가주님께서 도중에 끼어들었기에 그 둘의 대결이 끝을 맺었지만, 그때 그 일로 혼원패권은 크게 위신을 상했다고 봐야겠지요. 이름도 없는 여아와 2백초 에 달하는 드잡이질을 벌이고도 제압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그때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고 노신은 생각합니다.”
“허어, 그런 일이라면 말려야겠군요.”
“가주님께서 마음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혼원패권 장로의 말에 따르면 아버님께서도 천지문을 꽤 좋게 보고 계신 모양이던데……. 그것이 조금 걸리는군요.”
“물론입니다. 어쩌면 태상가주님의 생각도 그 팽가 늙은이의 생각과 똑같을지도 모릅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주의 의문에 대장로는 예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처음, 태상가주님께서 천지문의 합류를 허락하셨을 때, 그분께서도 쓰레기 같은 천지문을 그런 용도에 쓰시겠다고 말씀하셨었지요. 그 뒤에 천지문도들 중의 일 부와 친밀한 것처럼 행동하셨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뒤에 마교가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하신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야만 그들을 사지에 몰아넣었을 때, 뒤 탈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사실 그때 일은 소연을 좋게 본 수라도제가 그들의 참여를 거부하는 원로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떠든 것이었지만, 대장로는 그것이 수라도제의 본심으로 착각한 것 이다.
“그,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서문길의 안색에는 약간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과연,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속과 겉이 다를 수가 있다니……. 더군 다나, 아버지의 그런 노회한 속셈을 곧바로 눈치 챈 것을 보면 대장로도 보통은 넘는 너구리라고 서문길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그런 만큼 가주님께서는 그냥 모른 척하고 가만히 지켜만 보시면 됩니다. 만약 일이 잘못 틀어져도 그 잘못을 팽가에 뒤집어씌우면 그만일 테니 말입니다. 그 보다는 가주님께서는 황룡무제 대협과 친분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만.”
서문길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 한때 같은 칠룡(七龍)에 들어있었으니까요.”
“먼저 그분을 만나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도의 안내를 받고 들어오는 서문길을 본 황룡무제는 급히 일어서서 그를 마중했다.
“오오, 어서 오게나. 낮에 봤을 때는 회의 석상이라 인사도 제대로 못했구먼.”
황룡무제의 환대에 서문길은 활짝 미소지으며 응대했다.
“아닙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형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어야 하는데, 우선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이렇게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래, 이게 얼마 만인가? 그러고 보니 한 10년 정도 되었나?”
서문길은 과거를 회상하며 대답했다.
“예. 형님 결혼식 때 뵙고, 그 후에는 저도 일이 많다 보니…….”
“그렇겠지. 자네가 가주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네. 집안에 일이 많다보니 내가 직접 찾아가지 못해 미안하구먼.”
“아닙니다. 한때 서운하다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저도 가주가 되어 보니 알겠더군요. 틈틈이 무공 수련할 시간을 내기도 빠듯할 정도인데, 일일이 인사치레 하러 다니기는 더욱 힘들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들을 낳으셨다는 말은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만……..”
아들 얘기가 나오자 황룡무제의 얼굴에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동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들 하나만 낳았겠나? 아들 딸 합해서 넷일세.”
“한참 재미있으…….?”
서문길은 말을 시작했다가, 곧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다. 지금 여기에는 그의 부인도, 자식들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황룡무제 씁쓸한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뭐, 나라가 어려운데 어쩔 수 있는가? 참,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한잔 해야지?”
황룡무제의 명령에 잠시 후 술상이 들어왔다. 전시 중이라 그런지 뛰어난 명주(名酒)는 없었지만, 급히 마련한 것 치고는 꽤나 정갈한 상차림이었다. 뱃속에 술이 조금 들어가자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한동안 한담이 이어지다가 서문길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며칠 후에 삼절군이 온다고 하더군요.”
“나도 오늘에야 알았네. 뭐, 썩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 한잔은 나눠야겠지.”
과거 그가 아무리 실력을 인정받아 칠룡에 꼽혔었다고 하지만, 강호상에도 엄연히 신분의 차이라는 것이 있었다. 같은 칠룡이라고 해도, 황룡문이라는 작은 문파 의 제자와 9파1방으로 대표되는 거대문파 무당파 제자의 신분과 같을 수는 절대로 없었다. 그렇다 보니 신분을 떠나 소탈하게 어울렸던 서문길에 비했을 때, 능소 천은 황룡무제와 그렇게 친하지 못했다.
“참, 패력검제와는 친분이 좀 있으십니까?”
“패력검제? 그와는 여기 있으면서 좀 얘기를 나눴었지. 서로 간에 인연도 좀 있었고 말일세.”
“그렇다면 한번 자리를 좀 마련해 주시죠.”
“왜?”
“아버지께서 일이 좀 있으셔서 한동안은 제가 여기를 맡아야 할 듯합니다. 그런 만큼..”
아마도 이곳 양양성에서 일 처리를 매끄럽게 해 나가려면 이곳에 있는 화경급 고수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물어 온 것이었 건만 황룡무제는 호탕하게 대답했다.
“뭐 그 사람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아주 진중한 인물이라, 쓸데없이 중간에 나서서 초 치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도 여기서 생사를 같이 해야 할 사이인데, 통성명은 해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뭐, 여(呂) 형이 살아계셨다면 통성명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죠.”
여 형이라면 과거 제령문의 대제자 여정(呂靜)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칠룡에 꼽혔었지만, 묵향의 칼아래 목숨을 잃은 비운의 고수였다. 서문길은 바로 그 여정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뭐 과거 칠룡에 꼽혔었다가 죽은 이가 어디 그 하나뿐이던가? 내가 칠룡으로 꼽혔었을 때, 만났던 이들 중에서 지금까지 공식적인 사망자만 셋에 행방불명이 둘 일세.”
칠룡이라는 단체 자체가 빈자리가 나오면 재빨리 채워지기에 한 시대의 7룡이라고 해서 꼭 7명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빈자리가 나오는 형태는 두 가지였 다. 하나는 결혼해서 빠지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죽어 버린 경우다. 물론 행방불명은 조금 경우가 틀린데, 10년 동안 기다렸다가 그래도 행방이 묘연하면 사망한 것 으로 판정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그러고 보니 탈명도(脫命刀)형 소식은 못 들으셨습니까?”
황룡무제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조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자네도 그때 백씨세가에서 함께 있지 않았던가? 아마 지금 마교에 있을게 분명한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서문길은 술 한 잔을 입속에 털어 넣은 후 말했다.
“여기에 교주도 와 있다면서요. 그에게 안 물어보셨습니까?”
“글쎄……. 아무래도 대하기 쉬운 인물이 아니다 보니, 그런 걸 물어본다는 것이 조금 그렇더군.”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요? 그 형 마교도라면 이빨을 갈았었잖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황룡무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싫었던지 술잔을 입속에 털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뭐, 그런대로 잘 있겠지. 어디서 그놈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까.”
아마도 그 때문에 교주에게 물어보지 못했으리라. 초류빈의 사망소식을 듣기 싫었기에…….
3일 후, 해질 무렵 팽선이 지휘하는 일단의 무림인들이 금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양양성을 출발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팽선의 요구대로 천지문도들도 포함되 어 있었다. 물론 천지문은 이번 작전의 참가를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지문주가 이만큼 큰 출혈을 감수하며 무림에서 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는 마 당에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소연으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팽선이 거느린 3천5백의 고수들은 작전의 성격이 워낙 기밀을 요하는 만큼, 아주 은밀하게 이동해야만 했다. 밤에는 이동하고 낮에는 그늘에 숨어 휴식을 취하며 이동하자니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이 목표 지점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 후 4일이 지나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몇몇 노고수들의 눈앞에 드넓은 강이 펼쳐져 있었고, 그 강 너머로 까마득히 떨어져 있는 넓은 평야와 산들이 보였다.
“맹에서 보내온 정보가 맞다면, 놈들의 조선소는 이 강 맞은편에 있을 거외다.”
팽선의 손짓에 따라 공격대로 차출되어 온 각 문파 수장들의 눈길이 일제히 강 건너편으로 돌려졌다. 그들 중에는 천지문의 소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하들은 모 두들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각 지파의 수장들만이 이곳에 모여 적진을 정찰하며 앞으로의 작전을 토의하게 된 것이다.
모두들 강 건너편을 주의 깊게 살필 수 있는 여유를 준 다음, 팽선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개방에서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저 일대는 적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이 펼쳐져 있다고 하오. 거기다가 여기에서 3일 거리에 3만에 달하는 금의 대부대가 주둔 중 인 만큼, 혹 생존자가 있어 원병을 청한다면 곧장 이리로 대군이 달려올 거라는 말이오. 그런 만큼 육로로 저곳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 까 하고 노부는 생각하고 있소이다.”
그 말에 황보세가의 황보열 장로가 토를 달았다.
“그렇다면 강을 건너 기습할 수밖에 없겠는데…, 이 많은 인원을 태울 만한 배를 어디서 구하시겠소?”
팽선은 고개를 끄덕여 인정한 후 자신이 생각해 둔 계책을 말했다.
“물론 그렇소. 그런 만큼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병법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면서 팽선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그는 강 건너편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작전을 설명했다.
“우선 노부가 일단의 세력을 거느리고 저 멀리 우회하여 이 지점을 공략하겠소. 그렇게 되면 자연 이 일대를 수비하고 있는 금군들의 이목은 그곳으로 집중될 것 이 아니겠소? 그때, 이곳에 매복하여 기다리던 매복조가 야음(夜陰)을 틈타 도강하여 배를 불태우고, 조선공들을 해치우든지 아니면 구출하여 탈출하는 것이오. 매 복조로 5백 정도만을 남겨둔다면 그들이 사용할 배를 구하기도 손쉬울 것이라는 것이 노부의 생각이외다.”
팽선은 주위를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혹시 이보다 더 나은 계책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인 만큼, 최대한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 말에 황보열 장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노부가 생각하기에는 그 작전이 매우 좋을 듯하외다. 하지만 누가 매복조를 이끌 것인지…….”
그 말에 팽선은 좌중을 쓱 훑어봤다. 그러자 모두들 팽선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매복조가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겠지만, 뒤집어 서 생각한다면 가장 막심한 피해를 당하는 곳도 매복조일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최악의 경우 몰살당할 가능성마저 있는 상태에서, 사지에 스스로 걸어 들어갈 만 큼 어리숙한 인물은 여기에 없었던 것이다.
한 순간 팽선은 한 여인에게로 시선을 집중시키며 입을 열었다.
“천지문에서 맡아주겠느냐?”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송류 장로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그건 불가하오.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어찌 천지문 따위에게 맡긴다는 말씀이시오?”
그 말에 팽선은 비꼬듯 대꾸했다.
“호오, 그렇다면 도장께서 가시겠소이까?”
팽선의 그 말 한마디에 송류 장로는 입을 꽉 다물었다. 천지문을 대신해서 그곳에 죽으러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네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가고 싶지 않다면 솔직히 의견을 밝혀도 무방하다. 워낙 위험한 임무인 만큼 누구도 천지문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야.”
물론 이 질문은 팽선이 던진 미끼였다. 강제적인 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면서 상대를 꼬시는 것이다. 이렇게 해 놔야 자신도 나중에 일이 잘못되었을 때 발뺌하 기 편하고, 또 상대에게 자신이 무슨 악의가 있어서 사지에 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악의적인 의도에서 보내는 것이기는 했지만, 상 대에게는 그걸 숨겨야만 했다.
팽선이 던진 미끼를 소연은 덥썩 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임무를 성공리에 이끈다면 천지문의 위상은 엄청나게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또, 거절한다면 지금까지 행해져 왔던 천지문에 대한 비난에다가 ‘비겁자’라는 조항이 하나 더 덧붙여질 우려까지 있었다. 그것을 뻔히 알기에 소연은 상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소연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언제 공격을 시작하는 것입니까?”
“노부는 전 세력을 이끌고 홍택호 쪽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송군(宋軍)의 도움을 받아 적들의 대비가 약한 곳에 도강할 생각이다. 도강과 동시에 회남을 향해 최대한 속도를 내어 진격해 들어가며 놈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야.”
팽선은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작전을 설명했다.
“아마도 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금군과 그들을 돕는 마교놈들이 그 보고를 받고 이동을 시작하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들이 노부가 거느린 세력 과 충돌했을 때쯤, 자네가 움직이면 될게야. 그러니까… 노부가 도강한 다음 삼 일 후 밤에 움직이는 것이 최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네.”
팽선은 지도에서 시선을 거둬 소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노부는 이제부터 홍택호로 이동하여 그 일대를 책임지고 있는 한세충(韓世忠) 상장군과 접촉할걸세. 만약 그가 전폭적인 협조를 해 준다면 빨리 도강할 수 있겠 지만…, 어쩌면 그를 설득하는데 조금 시일이 걸릴 수도 있을 게야. 그리하여 구체적인 도강 날짜가 잡히면 곧장 자네에게 전령을 보내어 통고할 것이니, 이쪽이 도 강한 날부터 시작해서 삼일이 지난 후 야음을 이용하여 행동을 개시하면 될 게야. 그때까지 자네는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하게 매복하는 한편, 도강할 수 있도 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기다리게나. 알겠는가?”
소연은 포권하며 대답했다.
“예.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혼원패권 대협.”
혼원패권 팽선이 거느린 세력과 분리되어 천지문도들만 남게 되자, 모두들 소연에게 의문어린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문도들을 대표하여 진팔이 소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희들은 저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 질문에 소연은 팽선에게 지시받은 작전을 설명했다. 그 말에 진팔은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만약 놈들이 이쪽에 충분한 세력을 남겨둔다면 사지를 향해 스스로 걸어서 들어가는 꼴이 되는 게 아닙니까?”
“혼원패권 대협의 말씀에 따르면 흑살마왕을 추종하여 함께 행동하는 세력은 예상외로 많지 않다고 하셨다. 쓸 만한 고수들의 수는 2천 정도. 양양성 인근이나 남 양에 배치해 놓은 수를 감안한다면 이곳에는 많아 봐야 1백이 안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 이상의 고수들이 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혼원패권 대협이 행동을 개 시하여 그들의 시선을 끈다면 다급히 그쪽으로 이동해 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말거라. 이번 일이 성공하건 혹은 실패하건, 가장 중요한 일을 떠맡았던 본문이 더 이상 멸시받는 일은 앞으로 없어질 것이다. 우리들은 본문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게야. 알겠느냐?”
확신에 찬 소연의 말에 진팔은 고개를 숙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예.”
“문도들에게 내일부터 이 부근을 돌면서 쓸 만한 배가 있으면 끌어 모으도록 하거라. 큰 배는 필요 없고 작은 배가 좋겠구나. 그편이 눈에 띄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바로 강 건너편이 적진인 만큼 이쪽의 움직임이 저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할 것이야.”
“예, 사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