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1권 5화 – 전전긍긍(戰戰兢兢)
전전긍긍(戰兢兢)
산들바람을 맞아 찰랑거리는 드넓은 홍택호를 가르며 일단의 수군 전선들이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있다. 3천에 달하는 무림인들을 호송하는 선단(船團)인 만큼, 그 규모가 작을 수는 없었다. 크고 작은 전선(戰船)들을 모두 합해 50여 척에 달하는 대선단이다. 역풍(逆風)이 불고 있었기에 썩 항해하기에 좋은 여건은 아니었지 만, 전선의 좌우에 수십 개씩 지네발처럼 달려 있는 노들이 기운차게 움직이며 전선을 앞으로 내달리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방금 전 한 상장군을 만났는데, 모든 게 예정대로라고 하오. 아마도 잠시 후면 목적지가 보일 거외다.”
황보열 장로가 다가와 전하는 말에 팽선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은 소식이구려. 그렇다면 잠시 후면 상륙할 수 있겠소이다.”
“참, 천지문에는 전령을 보냈소이까?”
팽선은 그런 사소한 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호쾌하게 대답했다.
“이르다 뿐이겠소. 출발하기 전에 전령을 보냈소. 오늘 상륙할 테니, 사흘 후에 행동을 개시하라고 말이오. 그 외에 개방으로부터 입수한 중요한 정보들까지 모두 다 전달했으니 잘 해내겠지요.”
그러면서 팽선은 슬쩍 미소지었다.
물론 복수라는 중차대한 일이 남아 있는데, 그걸 곧이곧대로 전달해 줄 팽선 장로가 아니었다. 자신의 상륙 지점부터 시작해서 적들의 움직임 등등…, 모든 것을 조금씩 틀리게 해 놨기에 천지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정보를 안고 막심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으리라.
“크흐흐흣. 전멸이라…….”
팽선의 말에 황보열은 안색을 달리하며 질책했다.
“아직 행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무슨 불길한 말씀이오?”
하지만 팽선은 태연자약하게 변명했다.
“노부의 말은 놈들을 전멸시키면 흑살마왕이나 금 황제놈의 안색이 어찌 변할까 궁금하다는 뜻이었소.”
“하하핫, 옳은 말씀이외다. 아마도 혼자 보기는 아까운 장면이겠지요. 그걸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 한스러울 뿐.” 물론 통한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망할 계집이 죽어나가는 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때, 장수 한 명이 다가와 군례를 올린 후 팽선에게 전했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으니, 상륙 준비를 하시랍니다.”
사실 그건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필요 이상의 친절이었다. 별도의 치중대(輜重)를 필요로 하는 군대와 달리 무림인들은 각자 필요한 건량(乾糧)이나 무기를 휴대 하고 있어서 이곳에 상륙하라는 통보만 해 줘도 곧바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도착한 것인가?”
팽선은 상륙 지점 근처를 꼼꼼히 살펴봤다. 역시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저 멀리 수풀 속에 숨어 있는 기마병 몇 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식 미소지으며 중 얼거렸다.
“훗, 순찰병들인가?”
순찰병들은 조용히 이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저들은 이쪽에서 상륙함과 동시에 본대에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어쩌면 저들 중에 한 둘은 벌써 이 근처에 송군의 전선이 떴음을 알리기 위해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래그래, 놈들도 제법 잘 하고 있구먼. 저 정도 준비는 해 두고 있어야 성동격서가 통하지. 놈들이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있다면 이쪽에서 무슨 짓을 해도 광대놀 음일 테니…….”
그 말에 찬성한다는 듯 황보열 장로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지만, 정작 사부의 마음을 알아줘야 할 팽조는 그렇지가 못했다. 팽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부 에게 되물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부님.”
맹한 팽조의 얼굴에 팽선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쯧. 너는 알 것 없다.”
무림맹 3천 고수들의 도하 작전은 너무나도 싱겁게 성공했다. 그들의 도하 시간이 워낙 짧은 것도 있었지만, 단 한 명의 적병도 나타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것은 금 제국의 국경 방어 방식이 송 제국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농경과 상업에 치중하고 있는 송의 경우 외적이 침입해 들어오면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국경선 안으로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한다. 그렇기에 국경
선에는 언제나 적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일정수의 방어 병력이 항시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목에 치중하는 금의 경우, 국경선은 거의 비워 두고 있었다. 영토는 넓고 인구는 적으니 그 엄청난 국경선 전체에 걸쳐 병력을 배치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적이 침공하면 그때 병력을 끌어모아 침입한 적을 확실하게 응징한다. 아니 응징하는 정도가 아니라 침입한 국가를 역으로 쳐들어가 다 시는 쳐들어올 생각조차 못하도록 아예 끝장을 내놓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평상시에 국경선을 지킨다고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을 필요가 없는 매우 경제적인 방 어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때문에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나 마을들의 피해가 크겠지만 말이다.
“자, 이제부터가 시작이오. 지금부터 최대한 놈들의 눈에 띄게 행동해야만 하오.”
“알겠소.”
소연은 안으로 겨우 1장 남짓 파고들어간 비좁은 토굴 속에 앉아 이것저것 자신이 취합해 놓은 정보들을 훑어보고 있는 중이다. 매일 밤, 진팔을 보내어 강 건너편 의 적진을 살펴보기까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보가 부족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딘가에 고수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조심스런 진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저. 혼원패권 대협께서 사람을 보내오셨습니다.”
진팔의 목소리에 소연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과연 토굴 밖에는 진팔과 함께 낯선 인물이 서 있었다. 흑색무복을 입은 그는, 입구를 위장해 놓은 나뭇가지들을 치우며 토굴 속에서 기어 나오는 소연을 향해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소연은 그런 상대를 향해 전혀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고 정중히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지문의 소연이라 합니다. 워낙 사정이 이렇다보니 행색이 누추함을 용서하십시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본인은 팽소량(彭素梁)이라 하오.”
팽소량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듯 토굴 속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니, 놀랍소이다. 완벽하게 위장을 하고 있기에 여기 진 소협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주위를 계속 돌아다녔었소.”
하지만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놀라움을 담고 있다기보다, 지금껏 상대의 위치를 찾지 못해 고생하도록 만든 것에 대한 짜증이 짙게 묻어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 는 것이 팽소량도 적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살금살금 움직여야 했고, 천지문도들도 완벽히 위장한 채 숨어 있다 보니 오랜 시간 서로가 술래잡기를 한 것이나 다름 없는 꼴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지닌 진팔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팽소량은 이 근처를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느라고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 지 차있었던 것이다.
“그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혼원패권 대협께서 은밀하게 대기하라는 명을 내리셨기에…….”
물론 팽소량으로서도 상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혼원패권 장로의 명령대로 행동했다는데 그걸 어찌 야단치겠는가.
“아, 그걸 탓하자고 꺼낸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오. 다만 이렇듯 훌륭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워서 꺼낸 말이었소.”
팽소량은 품속에 넣고 온 두툼한 밀서를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장로님께서는 정확히 약속된 날짜에 움직이셔야 한다는 것을 재삼 당부하라고 전하셨소. 그리고 개방으로부터 입수된 최신정보는 물론이고 여러가지 비밀을 요 하는 정보들까지 함께 동봉되어 있는 만큼,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후에 서신을 불태우는 것을 잊지 말기 바라오.”
소연은 밀서를 품속에 넣으며 팽소량에게 말했다.
“여기서 이러실 것이 아니라 혹 저들의 눈에 띌 우려도 있으니 안에서 얘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팽 대협. 따뜻한 차라도 한잔 하시면서 몸이라도 좀 녹이시 “지요.”
팽소량은 방금 전 소연이 기어 나왔던 토굴 입구를 힐끔 바라봤다. 시커먼 구멍만 뚫려있었기에 내부가 얼마나 넓은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 록 하기 위해 입구를 아주 작게 뚫어놨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여기 서 있는 진팔이나 소연처럼 바지에 흙을 묻힐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팽소량은 옷을 버려가면서까지 그 속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빨리 돌아가서 장로님께 서신을 전달했음을 전해야만 하오. 이곳을 찾느라고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지체한 만큼, 소 소저의 친절을 사양 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구려.”
팽소량의 속도 모르고 소연은 오히려 미안해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팽 대협. 오히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잡고자 한 저의 잘못입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팽소량은 돌아서려다가 멈칫 다시 소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당부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밀서에는 저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될 내용들이 많이 있소.”
소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읽은 후, 바로 태워 버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오.”
팽소량은 혹시라도 눈을 밟아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건너뛰며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혹시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적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잠시 후, 진팔과 소연은 비좁은 토굴 속에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뭐라고 써져 있습니까? 사저.”
소연은 팽선의 서신을 진팔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초닷새니… 3일 후에 움직이라는구나.”
그런 다음 소연은 서신과 함께 동봉되어 있는 자료들을 확인했다. 봉투가 꽤 두툼했던 만큼 자료의 양도 꽤 많았다. 배를 만드는 장인들의 숙소를 포함한 조선소의 전반적인 배치도. 강 건너편에 있는 금군의 배치 상황과 그 병력 규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차후에 예상되는 적의 이동 경로를 담은 지도였다.
예상되는 적의 이동 경로를 표시해 놓은 지도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는 소연을 향해 궁금하다는 듯 진팔이 질문을 던졌다.
“여기 있는 자료들은 모두 다 금군 쪽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것을 태워 버리라고 몇 번씩이나 당부했을까요?”
“당연하지 않겠느냐. 적의 예상 이동 경로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겠니? 혼원패권 대협의 이동을 적이 포착하고 그에 따른 대응을 해 올 움직임이니, 이것을 뒤 바꿔서 생각한다면 혼원패권 대협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겠지. 아마도 그것을 그분께서는 우려하시는 것일 게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중얼거리던 진팔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또다시 소연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저쪽에서 이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이쪽만 박살나는 거 아닙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모든 것을 그렇게 따지고 들자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안목이 그렇게 높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혼원패권 대협의 작전에는 크게 무리한 점이 없다고 생각되는구나.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넉넉잡고 1시진(2시간).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반시진은 되지 않겠니?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는데 충분한 시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그보다 여유가 적다면 어떻게 합니까?”
“계속 안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미 우리들에게 선택의 여지 같은 것은 없어. 모든 것이 예측한 대로 되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방책을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군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토굴 한쪽 구석에서 늙은 하인이 작은 화톳불을 피워 차를 끓이고 있었다. 특이하게 화톳불은 불빛도 거의 나오지 않으면서도 한겨 울의 토굴 속을 따뜻하게 덥힐 수 있는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차가 다 되자, 늙은 하인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오는 찻잔을 소연과 진팔에게 건네며 말했 다.
“아가씨, 날이 찹니다. 따뜻한 차로 몸이라도 좀 녹이시면서 말씀들 나누시지요.”
“고마워요, 왕노(王老).”
“뭘요. 이게 다 소인이 해야 할 일인뎁쇼.”
왕노는 아주 오랫동안 천지문에서 일해 온 늙은 하인들 중의 하나였다. 양양성에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 소연이 지원하자 그도 덩달아서 지원해 왔다. 소연의 말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물론, 소연 외에도 말을 가져온 사람은 여럿 있었고, 또 그런 일을 처리할 하인도 꽤 있었다. 그렇기에 양양성에 도착한 뒤 왕노는 꼭 말을 돌보는 일뿐 아니라, 하녀를 데려오지 않은 소연의 뒷바라지도 함께 해 줬었다.
이번 작전에도 남아서 말이나 돌봐 달라는 소연의 요청을 거절하고 왕노는 그녀를 따라왔다. 자신이 없으면 소연의 식사를 누가 돌봐줄 것이냐는 것이 그가 내세 운 이유였다. 얼마나 노인의 고집이 지독스러운지 소연은 어쩔 수 없이 왕노의 청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토굴에서 대기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소연은 왕노를 데려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토굴 속에 마른 짚을 깔아 그녀의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 준 것 도 왕노였다. 그리고 적의 이목을 피해 숨어 지내야 하는 만큼, 불의 사용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불빛이야 어떻게든 감출 수 있겠지만, 연기까지 숨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노는 어디서 배웠는지 싸리나무 가지들을 주워다가 그 껍질을 벗긴 후 잘게 찢어 연기가 나지 않도록 불을 피우는 기발한 방법을 알고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건량이 아닌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진팔은 왕노가 피워 놓은 화톳불을 힐끔 바라봤다. 이것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불이 이렇게 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불빛도 거의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연기조차 없었다.
“왕노, 이렇게 불 피우는 건 어디서 배웠어요?”
왕노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흐릿한 시선으로 대답했다.
“소인이 아주 어렸을 때였습죠. 동네에 살고 있는 파락호 형님에게서 배웠었는데, 훔친 닭을 몰래 숨어서 잡아먹는 데는 이것 이상 없더구먼요.”
“참 묘한 재주로군요.”
“소인도 그렇게 생각합니다요. 어쨌건 소인이 소싯적에 배워 둔 재주가 이렇게 보탬이 될 수 있다니, 그 형님께 감사할 따름입죠.”
왕노의 대답에 진팔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사실 이것은 살수들만이 익히는 기본적인 기술들 중 하나였다. 최대한 자신의 존재가 남에게 발각되지 않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적인 특성상, 살수라면 응당 이런 특이한 기술 몇 가지는 필수적으로 익혀야만 했던 것이다.
천지문에 주어진 임무는 두 가지다. 하나는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배들을 불태우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조선소에서 일하는 장인들을 죽이든지, 아니면 구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전을 추진함에 있어서 천지문을 두 개의 조로 나누는 것이 한 가지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불 지르는 패거리. 또 하나는 조선공들을 처리하는 패거리. 물론 상황이 허락한다면 구출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없애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편이 시간이 훨씬 절약될 것은 분명하니 말 이다.
진팔이 천지문도들 중에서 제법 윗줄에 놓이는 제자들을 모두 다 불러 모아 소연과 함께 이런저런 계책들을 상의하고 있을 때, 묵향은 자신을 찾아 양양성에서 급 히 달려온 마화를 만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왔느냐? 내일이면 안 그래도 돌아갈 텐데.
마화에게 질문하는 묵향의 어조에는 궁금증이 묻어 있었다.
마화는 철영 부교주의 눈치를 슬쩍 살핀 다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묵향에게 양녀가 있다는 사실을 철영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철영은 이미 교주에게 양녀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흑월야사라고 불리던 전설적인 살수에게 딸의 호위를 부탁했을 때, 우연히도 바로 그 옆에 있었 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을 철영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교주가 흑월야사에게 한 말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딸을 보호하라. 하지만 능력이 안 된다고 느껴지면 딸의 생사에 연연하지 말고 곧바로 탈출하여 흉수가 누군지만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지켜주지는 못하더라도 복수라면 확실히 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철영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딸의 존재는 결코 그의 약점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을 모르고 교 주의 딸을 건드린 자는 필사(必死)!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안 이후 철영은 교주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려고 노력 했다. 괜히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내세워 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번에 장인걸을 상대로 비밀 작전이 시작된다는 보고를 드렸었지 않습니까?”
마화의 말에 묵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아, 난 또 무슨 일이라고. 그건 전에 내가 별일 아니라고 말했었잖아.”
“교주님의 명을 거역한 것은 송구스럽습니다만, 속하는 그 작전에 대해 좀 더 조사를 해 봤습니다.”
“쓸데없는 일을 했군.”
마화를 탓하는 듯 했지만, 묵향의 표정은 궁금증을 안고 있었다. 그로서도 사랑하는 소연의 안위가 걸려 있는 일이었기에 결코 냉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쓸데없지는 않았습니다. 정보를 취합해 본 결과 인선에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그 말에 묵향은 급히 되물었다. 이제 더 이상 냉담함을 가장하고 있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어떤 문제가?”
마화는 지금까지 취합된 정보를 보고하고, 관지 장로가 지적한 문제점들을 알려 줬다. 물론 바로 옆에서 흥미롭다는 듯 철영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구체적인 문파명은 물론이고 소연의 이름까지 제외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묵향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뭣이! 수라도제가 빠졌다고? 그렇다면 다른 놈들은? 하다못해 황룡무제나 패력검제 쯤은 거기에 동참했을 것 아닌가?”
“이번 작전의 책임자는 하북팽가의 팽선 장로라고 합니다.”
묵향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팽선이라고? 이런 빌어먹을. 그따위 미끼로 장인걸을 속이려고 들다니.”
지금껏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철영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속사정까지야 말을 안 해주니 알 수가 없었지만, 옆에서 들어 보니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심각 하게 대화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교주님, 그런 것에 마음 쓰실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요는 조선소를 초토화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속하가 수하들을 이끌고 박살내 버릴까 요?”
철영으로서는 기껏 생각해서 꺼낸 제안이었는데, 묵향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밖으로 나설 때는 장인걸의 숨통을 조일 때 외에는 없어. 만약 이쪽이 모습을 드러내면 장인걸이 빈틈을 드러낼 것 같으냐?”
“그, 그것도 그렇군요.”
마화는 묵향의 말이 지당하다고 여기며 덧붙였다.
“마공을 익힌 고수들은 마기가 너무 두드러지기에 그 근처에 매복조차 시킬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흑풍대를 투입하자니, 회하가 큰 장애물입니다. 어떻게 하 면 좋겠습니까?”
교주와 부교주 간의 대화에 그녀가 끼어들어 부교주가 어떤 부분을 놓치고 있는지 꼬집어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목숨까지도 위태로운 행위였다. 하지만 교주와 마 화 간의 묘한 분위기를 이미 알고 있었던 철영이었기에 그는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묵향은 마화에게 외쳤다.
“당장 작전을 중지시켜라.”
“예? 하지만 그들이 작전을 중지하려고 할까요? 당장 조선소를 파괴해야만 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젠장. 일이 꼬이는군.”
묵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철영에게 지시했다.
“본좌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자네는 이곳에서 꼼짝도 하지 말게. 알겠나?”
“예, 교주님.”
묵향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위치를 알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마화가 대별산맥까지 자신을 찾아오는데 소요한 시간을 계산한다면 지금 묵향에게 주어 진 여유는 거의 없었다. 묵향은 철영 일행으로부터 충분히 거리가 멀어진 후에야 점점 더 속도를 올리며 마화에게 명령했다.
“본좌는 먼저 갈 테니 너는 천천히 와도 돼.”
“소 소저에게 직접 가실 겁니까?”
순간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말도 안 된다는 듯 내뱉었다.
“자네 그렇게 생각이 없나? 만약 거기에 장인걸이 와 있다면 목을 따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쩔 건가? 본좌가, 아니 본교가 이번 전쟁에 개입했 다는 것을 그놈에게 알려주는 꼴이 될 건데, 그건 생각해 보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속하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젠장. 그래서 내가 빨리 가 봐야 하는 거라구. 너는 이번 일에 별 필요 없으니 천천히 와도 돼. 그럼 나는 먼저 간다.”
“예.”
묵향은 마화의 대답을 채 듣지도 않고 전속력으로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엄청난 속도에 마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넋 놓고 있 을 수만은 없었다.
““나도 빨리 움직여야겠군.”
마화는 더욱 속도를 내어 아래쪽에 매어 놓은 말을 찾아 달려갔다.
묵향은 양양성에 도착하자마자 관지를 찾아갔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너는 빨리 준비해서 팽 뭐시기라는 놈에게 가 봐라.”
뜬금없는 교주의 명령에 관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묵향은 답답하다는 듯 다시 명령했다.
“이대로는 꼼짝도 못하고 장인걸에게 당하게 생겼다며? 그러니까 자네가 흑풍대를 이끌고 가서 도우란 말이다. 출동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화경급 고수 두어 명 붙여줄 테니까, 그 정도 전력이라면 조선소를 박살내는데 모자람이 없을거야.”
“예. 곧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관지가 달려 나간 후, 묵향은 곧장 만통음제의 숙소로 달려갔다.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오는 묵향을 보고 만통음제는 활짝 미소지으며 환대했다.
“오, 이제 오는가? 어때? 선물은 마음에 들던가?”
그런 말에 대꾸해 줄 정신이 없었던 묵향은 단도직입적으로 외쳤다.
“지금 선물타령 할 때가 아닙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아우가 이렇게 허둥대는 건 처음 보는데…….”
“쓸데없는 말씀 마시고, 지금 당장 가서 팽 뭐시기라는 놈 좀 도와주십쇼.”
뜬금없는 요청에 만통음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팽 뭐였더라? 그 하북팽가의 장로라는 놈 말입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답을 얻을 수 없었던 만통음제는 맹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묵향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우형이 알기로는 팽가의 장로는 모두 다 팽씨들인데……. 그중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젠장. 설명을 하려면 좀 기니까 제 수하놈에게 들으십쇼. 지금 한창 출동 준비를 갖추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알겠네. 하지만 자네가 그 팽 뭐시기라는 자를 도와달라는 이유를 모르겠군. 우형이 좀 알기 쉽게 설명해 주면 안되겠나?”
“제 양녀의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이제 되셨습니까?”
만통음제는 흔쾌히 대답했다.
“이런, 진작에 그렇게 말했으면 더 이상 군말이 필요 없지 않았나. 내 속히 가 볼 테니 염려 말게.”
“그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따로 가 볼 데가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묵향은 대충 인사를 갖춘 다음 전속력으로 사라져 버렸다.
“허어, 역시 겉은 무뚝뚝하게 행동하지만, 내 짐작대로 속정은 참으로 깊구먼.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음이야. 참, 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만통음제는 금(琴) 속에 숨겨져 있던 혈영비(血影比)를 꺼내어 품속에 집어넣으며 밖을 향해 외쳤다.
“설취야. 거기 있느냐?”
곧이어 부드러운 음성이 답해 왔다.
“예, 사부님.”
설취는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찾으셨습니까? 사부님.”
“보관해 둔 술이 있으면 한 병만 가져다 다오.”
“예, 사부님.”
설취는 재빨리 달려가 몇 병 사뒀던 술들 중에서 한 병을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사부님.”
만통음제는 술병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설취에게 말했다.
“나는 일이 있어 급히 가 볼 데가 있으니 그리 알거라. 한 며칠 걸릴지도 모르겠구나.”
“예. 사부님.”
만통음제는 더 이상의 얘기는 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홀로 남은 설취는 지금껏 없었던 사부의 돌발적인 행동에 고개 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숙 어르신을 만나러 가시는 건가? 아니야. 그렇다면 저리 서두르실 이유가 없지. 그렇다면 무슨 일이지?”
흑풍대는 갑작스런 출동 준비 때문인지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 중에서 관지를 찾는 것은 조금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만통음제는 이놈 저 놈 붙잡고 물어서 결국은 관지를 찾아냈다.
자신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팽선의 위치를 물어보는 만통음제에게 관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저희들도 그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가 모실 테니 함께 움직이시면 편리하실 겁니다. 어르신.”
“아니, 노부는 위치를 알아야겠네.”
꼭 알아야겠다는 데야 어쩔 것인가? 관지는 무영문으로부터 통보받은 팽선의 마지막 위치를 만통음제에게 알려줬다.
“남양 방면으로 서서히 진격하며 금 세력을 압박할 것이 분명한 만큼, 그들이 그곳에 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대답한 후 관지는 만통음제의 표정을 살피며 덧붙였다. 어찌 보면 이번에 할 말이 만통음제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저들에게도 대단히 수준 있는 고수들이 존재하는 만큼, 단독 행동을 하시는 것 보다는 저희들과 함께 움직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그런 염려까지 해줄 필요는 없네. 노부의 안전이 위험할 정도로 놈들의 세력이 강하다면, 질녀의 생명 또한 위험할 터.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노 부는 먼저 갈 테니, 그리 알게.”
만통음제는 말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돌아서며 경공을 전개해 버렸다. 만통음제는 점점 더 가속하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전속력으로 성문 쪽으로 달려갔다. 성문이 점차 가까워지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냥 성벽 위로 뛰어오를 작정인 모양이다.
“질녀라니…, 질녀가 누구지?”
곧이어 관지는 만통음제의 질녀가 누군지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교주님께서 만통음제 대협과 의형제를 맺으셨다고 마화에게 들었으니, 소 소저가 질녀가 되겠군. 그런데 소 소저의 생명이 위험하다면서 왜 혼 원패권에게로 달려가시는 거지?”
관지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연이 팽선 일행과 행동을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관지로서는 만통음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묵향이 다가오자 서문세가의 호위무사들은 긴장하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교주님.”
“수라도제를 만나러 왔다.”
“태상문주님께서는 교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순간 묵향은 이놈을 박살내 버릴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수라도제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그런 만큼 이 앞에서 다 툼을 벌일 수는 없었다. 묵향은 성질을 참으며 호위무사에게 말했다.
“일단 기별이나 넣거라. 쓸데없는 잡소리 하지 말고.”
하지만 호위무사의 말은 전과 똑같았다.
“태상문주님께서는 교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드디어 성질이 나기 시작한 묵향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며 호위무사를 다그쳤다.
“뭣이? 이놈이 정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다는 말인가? 쓸데없는 잡소리 하지 말고 기별이나 넣어 보라는데, 왜 네놈 따위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이냐?”
호위무사는 묵향의 살기에 압도당해 다리가 후들거리는데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여, 연락을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태상문주님께서는 교주님을…….”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묵향은 호위무사의 멱살을 틀어쥐고 으르렁거렸다.
“정녕 네놈이 죽고 싶다는 것이냐?”
“하,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때, 뒤쪽에서 호위무사보다는 조금 더 높은 신분을 지닌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그러다가 그는 호위무사의 머리통에 가려져 있던 교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헉! 교, 교주?”
묵향은 더 이상 하급 무사에게는 볼일이 없다는 듯 그놈을 놔준 다음, 경악감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는 상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수라도제를 만나러 왔다는데, 저놈이 안 된다고 해서 말이야. 자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대답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 무사도 방금 전의 그놈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태, 태상문주님을 만날 수 없소.”
묵향은 이빨을 뿌드득 갈며 외쳤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안 그러려고 했는데……. 몇 놈 잡아 죽여야 그놈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태, 태상문주님을 만나 보실 수는 어, 없을 거요.”
이쯤 되자 묵향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떻게 모두들 한결같이 만날 수 없다는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소란을 일으킨다면 수라도제가 곧바로 튀어나온다 는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도 안 된다고 하지 않는가.
‘수라도제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묵향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무사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수라도제가 있기는 있는 거냐?”
“무, 물론 계십니다. 하지만 교주를 만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묵향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런 제기랄!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떤 놈이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묵향은 수라도제가 있는 저 내실 안쪽으로 강렬한 투기(鬪氣)를 쏘아 보냈다. 만약 수라도제가 저 안에 있다면 무슨 일인가 하여 튀어나올 정도로 지독한. 곧이어 넓은 장원의 여기저기에서 서문세가의 무사들이 저마다 중도(重刀)를 뽑아들고 달려 나왔다. 하지만 그들 중에 수라도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서문길은 갑자기 느껴지는 엄청난 투기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야 말았다.
“허억!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마시고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지만, 서문길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순식간에 그 투기는 씻은 듯 사라졌지만, 서문길은 진저리 쳐지는 그 강렬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서문세가가 자리 잡고 있는 이 장원에 이토록 어마어마한 투기를 뿌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혹시 아버님이??
이렇게 생각한 서문길은 지체치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투기가 느껴졌던 정문 쪽으로 다가간 서문길은 자신이 무기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잠시 한탄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아니라 누군가 딴 사람이 서문세가 식솔들
과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허참, 아버지 말고 그 누가 있어 그토록 엄청난 투기를 발(發)한단 말인가?”
확실히 상대의 투기가 엄청나긴 엄청났던 모양이다. 서문세가에서도 제법 실력 있는 고수로 통하는 사촌 형 서문료(西門)가 두려움에 질려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자세히 보면 그의 다리까지 후들거리고 있을 정도니 상대가 준 위압감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문길은 짐짓 목소리를 엄중히 하여 외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 말에 서문료가 대답했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의 사촌 동생이라고 하지만, 문주였다. 그렇기에 그는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마교 교주가 태상문주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하여…
상대가 마교 교주라는 말에 서문길은 흠칫 놀랐다. 탈마의 고수라고 하더니 과연 엄청난 기세였다. 칠룡의 동기들과 오래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자신이 상대를 기억하고 있지 못하듯, 상대 또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서문길은 슬쩍 포권하여 예를 갖추며 자기를 소개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본인은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길이라고 합니다. 그래, 무슨 일로 아버지를 뵙자고 하셨소이까?”
그 즉시 상대에게서 반응이 왔다. 교주는 서문길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중얼거렸다.
“가주라고?”
순간 상대의 표정이 변했다. 냉막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어찌나 부드럽게 바뀌던지 그 변화를 지켜보는 서문길이 다 무안해질 지경이었다.
“호오, 수라도제에게 이런 훌륭한 아들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구먼. 크흐흣. 내 사실은 한 가지 긴히 부탁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말씀이야.”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속 보인다고 해야 하나.
상대의 반응으로 살펴 보건데,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하러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속 보이게 행동을 하다니. 서문길은 그것을 보고 상대의 속셈이 너무나도 얄 팍한 듯하여 기가 막힐 지경이었지만, 상대는 자신의 표정 변화에 스스로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서문길은 자신이 그렇게도 만만하게 보이나 싶어 내심 씁쓸함을 감 추기 어려웠다.
“무슨 일이신데 그러십니까?”
교주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이목이 좀 많은 듯하니, 어디 조용한 곳이 없을까?”
아닌 게 아니라, 방금 전의 그 투기로 인해 정문 근처에는 서문세가의 무사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것도 단단히 무장을 갖춘 상태로 말이다.
“예. 여기는 좀 어수선 하니 안으로 드시죠.”
서문길은 교주를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그는 하녀를 불러 차를 가져오라고 이른 후, 교주를 향해 말했다.
“부탁이 있어서 오셨다니…,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이번에 팽모(彭某)라고 하는 자가 금을 치기 위해 고수들을 이끌고 움직였다고 들었네.”
“예.”
“그런데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본좌가 찾아온 것이지.”
일단 상대가 왜 찾아온 것인지 파악해야 하는 것이 선결 과제다. 그래야만 뭔가 협상을 해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서문길은 침착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점이 미심쩍으신 겁니까?”
“자네도 생각해 보게나. 장인걸이 바보도 아닌 바에야 지금 그가 양동작전을 쓰려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나?”
이번 작전에 대해 마교 쪽에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교주가 꽤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에 서문길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을 도대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하지만 교주는 그런 것을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 어디서 들었는지는 상관없지 않은가? 쓸모도 없는 것을 괜스럽게 따지고 들어봐야 양쪽이 서로 피곤하기만 한 것을. 그러니 그건 그냥 넘어가고, 사실인지 아 닌지만 말해 주게.”
“방금 하신 말씀이 맞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기에 본좌가 한 팔 힘을 보태고자 하네.”
“힘을 보태준다고?”
하지만 서문길은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는 오랜 세월 무림에서 최강의 위치를 유지한 절대적인 고수였다. 수많은 음모와 귀계가 판치는 무림에서 그런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힘만 강해가지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임을 서문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문길은 슬쩍 상대의 속을 떠봤다.
“힘을 보태신다 하심은?”
“흑풍대에게 일러 팽모를 도와주라고 일렀네. 그리고 형님도…, 아니 만통음제 대협도 도와주기로 했어. 그런 만큼 굳이 모험을 하면서까지 양동작전을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말일세.” 서문길은 교주를 빤히 바라봤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그걸 교주도 눈치 챘는지 곧바로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었다.
“본좌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일세. 자네가 사람을 보내 알아보면 곧바로 알 수 있는 일을 본좌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여기 오기 직전에 명령을 내려놨으니 1시진 도 안되어 모두들 출발할거야. 그리고 자네와 얘기가 끝난 후에는 황룡무제한테도 찾아가서 한 팔 거들라고 청할 생각일세. 자네는 젊어서 잘 모르겠지만, 장인걸 같은 자를 상대하는 데는 괜히 이런저런 꼼수를 쓰는 것 보다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한방에 끝내버리는 것이 훨씬 좋거든.”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신의 노회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문길도 그 나름대로 일문을 이끌 체계적인 교육을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람이었다. 그리 호락호락 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곳이 텅텅 비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것을 이용하여 저들이 역으로 양양성으로 치고 들어온다면 그 일을 어찌 처리하시겠습니까?”
“지금은 대군을 움직이기에 적기가 아니야.”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일이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내 그것도 생각해 봤네. 저들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움직여 온다면 이곳에 남아 있는 고수들만으로도 충분히 며칠 정도는 버텨낼 수 있지 않 겠나?”
“하지만 장인걸이 직접 온다면..
“여기에는 본좌도 있을 거고, 패력검제와 수라도제도 남아 있을 텐데 그게 무슨 걱정이겠는가?”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서문길의 흥미는 급격히 떨어졌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사람하고 얘기하기가 심히 껄끄러워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서문길은 손 을 내저으며 말했다.
“뭐, 그 얘기는 됐습니다. 교주님께서 혼원패권을 돕겠다고 하시는 점은 감사드립니다. 하실 얘기는 그것뿐이십니까?”
서문길의 시큰둥한 대꾸에 교주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본좌가 하고자 하는 말은 양동작전이 필요 없어진 만큼, 그에 따른 후속조치도 취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일세.”
반쯤 폐인이 되어 있는 아버지 생각에 서문길은 교주를 상대로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작전의 책임자는 혼원패권입니다. 제가 그의 작전에 간섭할 이유가 없고, 또 그럴 권한도 없습니다.”
서문길이 그렇게 나오자, 교주는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자네 정말 이러긴가? 서문세가는 양양성에 파견되어 있는 전체 무림인들의 지휘권을 쥐고 있다고 알고 있네. 그런데 천지문 따위를 뒤로 돌리는 것이 뭐가 그렇 게 힘들다는 말인가?”
“저로서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버지라면 혹 모를까, 저에게는 양양성의 지휘권은 없으니까요. 그럼 이만…….?
서문길은 더 이상 묵향과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때, 교주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치솟는 분노를 한껏 억누르고 있는 모 양이었다.
“정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참인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에는 전폭적으로 돕겠다고 장담하시더니, 이제는 이유 없는 협박이라니요. 뭔가 감추고 계시는 것이 있는 듯한데, 그걸 속 시 원하게 말씀해 주셔야 제가 돕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주는 처음에는 「어쭈? 제법인데?」하는 듯한 표정으로 서문길을 바라봤다. 하지만 곧이어 그 표정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감히 이딴 것이 내 말에 토를 달 아?」라고 말하는 듯 분노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매서운 표정에 찔끔한 서문길은 감히 눈을 마주보지도 못했다.
교주는 살기어린 어조로 외쳤다.
“더 이상 해 줄 말은 없다. 그 망할 놈의 금나라 오랑캐 새끼들보다 먼저 네놈이 저세상에 가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해라.”
교주는 자신이 할 말은 다했다는 듯, 더 이상 아무런 말도하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참내, 이건 아버지보다 더 지랄 같은 사람이로구먼.”
서문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어떤 일이 교주같은 냉철한 인물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일까?
서문길은 대장로를 불러들여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상의했다. 일단 서문길로부터 방금 전에 있었던 모든 일을 다 듣고 난 대장로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뭔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노신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열쇠는 천지문이 쥐고 있는 듯 하군요.”
“천지문이라구요?”
“예.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교주가 여기에 발 벗고 나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교주는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천지문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 합니다. 그게 천지문인지, 아니면 그 문도들 중의 일부만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여기 와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천지문의 진팔이라는 청년과 교주가 매일 같이 비무를 해 줬다는 것 말입니다.”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청년을?”
“노신은 그리 생각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제가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양쪽의 권위를 다 세워주면 되는 것이겠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혼원패권에게 서신을 보내어 마교에서 제안한 작전은 이러이러하고, 또 그쪽에서 막대한 전력을 투입하여 동참하기로 했으니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먼저겠지요. 그런 다음 혼원패권에게 천지문에 퇴각 명령을 내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는 겁니다. 혼원패권도 그리 멍청한 인물은 아닌 만큼, 즉각 천지문에 퇴각 명령을 내릴 겁니다.”
대장로의 말은 제법 타당성이 있었다. 아무리 혼원패권이 복수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거대문파인 서문세가 가주의 청(淸)이 경우에는 요청을 빙자한 명령이나 다름없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빨리 서신을 작성하여 혼원패권에게 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