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1권 9화 – 괴멸(壞滅), 그리고 부녀 상봉

괴멸(壞滅), 그리고 부녀 상봉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묵향. 그는 지금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기에, 자신이 지금 얼마나 빨리 달려가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오 로지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시라도 빨리 소연이 있는 곳에 도착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양양성에서 회남까지는 그 거리가 엄청나게 멀다. 더군다나 크고 작은 강이 몇 개씩이나 가로막고 있기에 단시간에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묵 향은 그것을 가능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지금 강이고 들판이고 가리지 않고 전광과도 같은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병장기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아무리 묵향의 이목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토록 먼 거리에서 싸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리는 없다. 있다면 바로 내공의 고수들이 지금 격돌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묵향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아직까 지 소연이가 살아남아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으니까.

조대삼 대장은 격전의 소용돌이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남은 대원들과 함께 수하 한 명이 연놈을 족치는 것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순식간에 회하 를 가로질러 오는 정체 모를 고수를 발견하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저게 사람이냐? 어찌 사람이 저 넓은 회하를 단숨에 건널 수 있다는 말이냐?”

조대삼의 옆에 모여 있던 여섯 명의 수하들은 상관의 중얼거림을 듣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과연 어둠을 뚫고 엄청난 속도로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낮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서로 간의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상대의 얼굴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강물 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던 20여 척의 배들 가운데 다섯 척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물 위를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신법으로 달려오는 것 도 모자라, 괴인은 강 위에 떠 있는 배들까지 공격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걸 본 조대삼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회하를 단숨에 건너는 것만 해도 도저히 믿기가 힘든 일인데,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서 그 상태에서 무공까지 사용할 수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엄청난 고수인 것 같습니다, 대장. 즉시 교주님께 연락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옆에 서 있는 부하가 건의했지만, 조대삼은 전령을 보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상대가 다가오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미 전령을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니, 전령을 보내기는 고사하고 탈출할 시간 여유조차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미 늦었다. 모두 각개 탈출하라!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즉시 이 사실을 교주님께 알려라.”

조대삼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그들은 일제히 일곱 방향으로 흩어져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신들 중 몇은 저 괴물같은 고수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몇 명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가소로운 것들! 소연이를 건드리고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하다니.”

놈들의 퇴각을 눈치 챈 묵향이 재빨리 공격에 나섰다.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나는 일곱 개의 작은 구슬처럼 생긴 것들이 거의 빛과 같은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구 슬들은 엄청난 속도로 목표물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천마혈검대의 고수들은 상대가 괴이하게 생긴 암기를 발사했음을 알고 재빨리 회피기동을 했지만, 구슬들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목표물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그들은 도저히 이 암기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반격에 나섰다. 그들은 모두 다 극마의 경지에 거의 근접한 고수들이었기에, 그 반격은 너무나도 매서 웠다. 천마혈검을 뽑아 휘두르자 수십 개의 강기들이 불을 뿜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검술에 매진한 검귀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푸르게 빛나는 구슬은 핏빛 강기를 뚫고 들어왔다.

“허억!”

경악성을 지를 틈도 없이 그들은 다음 행동을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할 듯한 강맹한 검초가 순간적으로 펼쳐졌고, 그들이 쥐고 있는 혈검은 불타오 르듯 붉은 빛으로 이글거렸다. 순식간에 극성의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을 통해 어검술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한 검법과 구슬이 부딪치는 순간 엄청난 대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크허어억!”

조대삼 대장은 비틀비틀 물러섰다. 얼마나 엄청난 폭발이었는지, 마교가 자랑하는 명검인 천마혈검(天魔血劍)은 박살이 나 버렸고, 그의 오른손까지 흔적도 없이 핏덩어리로 화한 후였다. 제8대장은 치명적인 내상까지 입었는지 무너지듯 쓰러지며 내장부스러기까지 토해 내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좀 나은 편이었다. 수하들은 모두 다 그 폭발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 버린 상태였으니까. 웬만한 상처쯤은 대법을 통해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번에 받은 충격은 치유력을 한참 넘어서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이 엄청난 폭발 때문에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투는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는 와중이었던 장인걸의 수하들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 가 하고, 뒤로 물러서며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하지만 천지문도들은 폭발 따위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그들은 뒤로 물러난 적들이 다시금 공격해 올 때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추스르고 있는 중이었 다. 그들은 얼마나 지독한 격전을 벌였는지, 멀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이때, 경악에 찬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허억!교, 교주!”

방금 전까지 천지문의 젊은 무사와 격돌하고 있었던 천마혈검대의 고수 한 명이 묵향을 알아보고 내지른 경악성이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쑤근거리는 소 리가 들려왔다.

“교주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여기 모여 있는 고수들의 거의 대부분은 여진족이었기에 한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이때, 묵향 또한 경악성을 지른 쪽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묵향은 그곳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진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두 명 의 천마혈검대원들과 비교했을 때, 그의 행색은 너무나도 처참한 것이었다.

‘진팔이만 있다? 그렇다면 소연이는??

재빨리 주위를 훑던 묵향의 시선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소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묵향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출혈이 심 했는지 창백하게 질려 있는 소연의 얼굴을 말이다.

그 순간, 묵향은 소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살아남아 있는 천마혈검대원들 한 명의 입에서 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금군 병사들의 표정이 확 변했다. 아마도 그것이 여진어로 된 명령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명령이 무엇인지는 곧이어 금군 병사들의 행동으로 드러났다. 금군 병사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묵향을 향해 악귀처럼 달려들었던 것이다.

묵향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는 소연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여기서 얼핏 느끼기에는 그녀의 기감이 거의 잡히지 않을 정도인 것을 보면, 소연의 상태는 대단히 위중하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소연과 자신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크합!”

순간, 묵향을 중심으로 다섯 곳에서 거대한 강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과거 묵향이 검을 이용하여 대지의 기와 자신의 기를 충돌시키던 최강의 검법. 바로 그것이 검 없이 다섯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물론 묵향이 보낸 다섯 줄기의 기가 대지의 기와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쿠콰콰쾅!

엄청난 폭발과 함께 수십, 아니 수백에 달하는 금군 병사들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른 채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그들의 시체는 엄청난 강기의 회오리 속 에서 조각조각 찢어져 분해되고 있었다.

이 단 한 수에 금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방금 전 죽음을 불사하며 묵향을 향 해 달려들던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짙은 공포 외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금군 병사들을 공격하게 만든 후 그 틈을 이용하여 도망치려고 했던 천마혈검대원은 너무나도 황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순간의 시간도 자신에게 벌어 주지 못한 것이다. 병사들을 향해 일격을 날린 묵향은 곧바로 다음 공격을 천마혈검대원을 향해 가해 왔다. 엄청난 기운이 응축되어 있는 예의 그 작고 시퍼런 강기 의 구슬. 그 밝은 빛덩어리가 자신을 향해 쏜살같이 접근해 왔을 때, 그는 자신의 운명을 파악하고 반항조차 잊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쾅!

방금 전까지 진팔과 소연을 상대로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과시하고 있던 그는 시체도 건지기 힘들 정도로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아무리 상대가 탈마급 의 고수라고 하지만, 방금 전까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던 그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허무한 최후였다.

거의 모든 옷가지들이 찢겨져 나가 나신이나 다름없는 민망한 상태로 쓰러져 있었지만, 묵향은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다급히 소연을 끌어안으며 정신없이 외 쳤다.

“소연아, 소연아! 괜찮느냐?”

그렇게 물어 보고는 있었지만, 지금 소연의 상태를 모를 리 없는 묵향이었다. 묵향도 오랜 세월 마교에 몸담았었기에 무적의 천마혈검대를 상대로 아직까지도 숨 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기적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성적인 판단일 뿐이었고, 감정적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온몸의 경혈이 가닥가닥 끊겨나가 있었고, 여기저기에 난 수많은 상처를 통해 끊임없이 그녀의 생명을 지탱해 줘야 할 피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고수들 간의 대결에서 이토록 작은 상처가 많이 날 수는 없는 법. 이것은 분명히 방금 전 묵향이 해치워 버린 그 두 놈들이 이들을 상대로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가지고 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그녀가 묵향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말이다.

묵향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소연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먼저 급한 대로 혈도를 짚어 지혈부터 시킨 후, 강제적으로 기를 돌려 그녀의 막힌 혈도를 뚫기 시작했 다. 그러는 한편으로, 묵향은 옆에 망연히 서 있는 진팔을 향해 살기어린 시선을 보냈다. 묵향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진팔이 자신에게 특훈을 받았다고 하지만, 아직 까지는 소연이 그보다는 한 수 위였다. 그런데 어찌 저놈은 아직 무사한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연이만 이 지경이란 말인가. 그것은 소연이 진팔을 보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다가 이 모양이 되었음이 틀림없었다.

“이런 찢어죽일 놈! 사내놈이 되어가지고 내 딸을 방패로 삼아?”

묵향의 살기어린 눈길을 온몸으로 받은 진팔은 필사적으로 변명하려고 했다. 이 순간 그에게는 그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뿐. 

“저… 그…. 그건…….?”

“내 딸이 죽기만 해봐. 내 네놈을 결코 가만히 놔두지 않을…….?

묵향의 말은 갑자기 끊겼다. 피묻은 소연의 손이 천천히 힘겹게 올라오며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왔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소연아. 애비다. 애비야.”

묵향의 격렬한 외침에 소연은 힘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거친 숨을 연신 내쉬며 말을 이었기에 그녀의 말은 알아듣기조차 힘들었다.

“저, 정말 아빠셨… 군요. 설마 아빠가… 교주셨을 줄은……. •정말 하나도…,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가로 쉼없이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쿨럭하고 기침을 하자, 작은 내장부스러기까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상처에도 불구하고 소연의 정신은 너무나도 또렷했다. 아무리 묵향의 치료가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고 해도 이건 너무 갑자기 상태가 좋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로 회광반조(?光返照)임이 틀림없었다. 바야흐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순간적으로나마 약간의 기운이 돌아오는 현상. 그렇다면 지금 묵향에게 남은 시간 여유는 찰나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출혈 과다에다가 극심한 내상과 외상. 아무리 묵향의 공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공력을 나눠준다고 해서 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을 확인한 묵향은 더 이상 소연의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다급히 손을 썼다. 그의 장심(心)이 소연의 심장 부근에 놓여지는 순간, 놀랍게도 그의 손이 투명하게 빛을 뿜기 시작했 다. 극성에 달하는 소수마공(素手魔功)이 발현되는 듯한 형상이었다. 아예 치료를 포기하고 소연을 냉동시켜 버리기로 작심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투명한 빛을 뿜는 것을 진팔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교주의 아버지가 쟈타르의 떨어져나간 손을 이어줬을 때다. 빛의 느낌이 그때 와는 달리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교주가 사저를 치료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진팔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 방금 전 교주가 자신에게 따졌던 말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맞아. 사저를 보고 딸이라고 했지. 딸? 설마…….’

이때, 진팔의 뇌리에 과거 묵향이 처음 사저와 대면하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맞아. 그래서 그때 사저를 보는 교주의 눈빛이 그랬었던 거로구나.’

소연을 치료하는 묵향의 표정에서 진팔은 소연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치료가 끝난 후 교주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얼굴에 올라와 있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소연의 손을 이끌어 얌전히 누워 있는 자세로 만들었다. 차근차근 소연의 매무 새를 정리하는 교주의 손길은 너무나도 섬세하기 그지없었다. 흡사 소연의 몸이 유리로 만든 것이라도 되는 듯…….

부녀간의 애틋한 사랑에 진팔이 깊은 감동을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교주가 벌떡 일어서더니 하늘을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내 딸이 죽는다면 그에 관계된 놈은 단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설혹 그것이 무림 전체라 해도!”

그의 음성에는 너무나도 짙은 살기를 내포하고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과연 탈마에 이른 무적의 고수다운 엄청난 신위(神威)였다. 신검합 일에 이르렀다는 진팔조차 두려움에 질려 주저앉았을 정도이니 다른 생존자들이야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었다.

두려움에 떨던 진팔은 묵향에게서 뿜어 나오던 짙은 살기가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옅어지자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묵향을 바라봤다. 성질 더러운 고수쯤으로 생각될 뿐, 지금껏 진팔은 묵향의 진면목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방금 전에 펼쳐졌던 경천동지할 무공에다가, 기세만으로 도 진팔 정도의 고수를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의 압도적인 무위. 남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던 악동(惡童) 같은 인상이 사라지며 무림 최강의 고수로서의 존재감이 진 팔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1각 정도나 흘렀을까? 치밀어 오르던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묵향은 통나무처럼 굳어 있는 소연을 안아들었다. 응급조치도 끝났겠다, 이제 총타로 그녀를 옮 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때, 갑자기 철푸덩하는 소리가 묵향의 귀에 들려왔다. 재빨리 묵향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곳에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보였다.

‘화경급 고수?”

이곳까지 달려오며, 양양성에서부터 시작해서 누군가가 줄기차게 뒤따라온다는 것은 묵향도 알고 있었다. 다만 상대가 정확히 누군지를 모르고 있었을 뿐. 처음에 는 워낙 소연의 일이 위급했기에 그의 존재를 무시해 버렸고, 나중에는 너무나도 분노가 치밀어 그를 잊어 버렸었다. 그런데 지금 상대가 내는 기척을 보고 그의 존 재를 다시 기억해 낸 것이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묵향은 소연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 지체하지 않고 상대를 향해 달려갔다. 통통 튀듯 물 위를 달려간 묵향은 이제 막 힘이 다해 익사하려는 상대의 멱살을 잡 아 들어올렸다.

“어? 패력검제였군. 경공술이 제법인데? 양양성에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을 보면 말이야.”

진팔은 묵향이 패력검제의 멱살을 붙잡고는 질질 끌면서 물가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물 위를 달리는 것이야 등평도수라고 하여 그것 이 짧은 거리라면 웬만한 고수라도 시도해 볼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경신술을 이용하여 몸의 무게를 최대한 줄인 다음, 최대한 빨리 내달리기만 하면 이론적으로 가능하니까.

하지만 지금 묵향이 보여주는 것은 그런 얄팍한 차원이 아니었다.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무력답수(無力踏水).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고난이도의 경 신술을 동원해야만이 그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런 허황된 경공술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인물들도 있을 정도로 지금껏 그 존재 자체가 의심되던 경공술이었다. 사실 물 위를 달리는 것보다 천천히 걷거나, 아니면 서 있는 것이 월등히 힘들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묵향은 물 위에 가만 히 서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웬 사람을 하나 물속에서 꺼내가지고는 마치 탄탄한 대지 위를 걷듯 질질 끌고나오고 있는 것이다.

강가에 도착한 묵향은 주위에 떠도는 기를 흡수하여 패력검제쪽으로 유도하여 그의 몸속에 방대한 양의 기를 채워 넣어줬다. 안 그래도 공력의 고갈로 인해 한동 안 운기조식이라도 하며 기를 보충해야 할 패력검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가 보충되자 그의 몸은 순식간에 어느 정도 평상수준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패력검제는 교주가 자신에게 기를 나눠주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놀랐다. 그 먼 거리를 전력 질주 해 오고도 이자는 아직 나에게 나눠줄 정도의 공력이 남아 있었다는 말인가? 허어, 탈마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로구나.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군. 저자는 마공을 익혔을 텐데, 어찌하여 그의 내공이 내 것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지?”

하지만 마냥 그런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교주에게 포권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고, 고맙소이다. 교주.”

몸속에 다시금 내공이 차오르자 거칠었던 그의 호흡이 점차 정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장판이 된 주위의 광경도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는 순간 패력검 제는 경악했다.

“허억!”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수많은 시체들이 아니었다. 양양성 공방전에서 수많은 금군 병사들을 죽였었던 패력검제인 만큼, 이곳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좀 본다고 해서 경악할 이유는 없었다.

패력검제가 놀란 것은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에 달하는 사람이 흔적도 없이 파괴된 듯 보이는, 살점들과 핏물의 흔적 때문이었다. 그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 있는 곳 중심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다섯 개나 파여져 있었다. 물론 그 구덩이 부근에는 아예 핏물 따위의 흔적조차 없었다. 강력한 파괴력 덕분에 한 방울의 핏물도 남기 지 않고 날아가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 어찌 저것이 인간의 무공이 남긴 흔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패력검제는 주춤주춤 걸어가 커다란 웅덩이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묵향은 이런 식의 시간 낭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봐. 쓸데없는 데 신경쓰지 말고 내 부탁이나 한 가지 들어주는 것이 어때?”

패력검제는 멍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부탁이라고 하심은?”

“저 아이를 총타로 보내줘야겠어. 본좌는 지금 급히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어때?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묵향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로 보아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사실 묵향은 상대가 거절하면 적당히 다져놓은 후 다시 한 번 더 「부탁」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패력검제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누군가. 정파의 기둥으로 추앙받는 3황5제 중의 한 명이 아닌가. 그런 자신을 보고 마 교로 심부름을 가 달라니. 그것이 말이 되는가?

“그게… 말이외다. 교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저도 정파의 일원이고.”

젊잖게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의 말은 곧바로 묵향에 의해 가로막혔다.

“허어~, 거참. 세상사 모든 일을 그렇게 딱딱하게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탁 터놓고 부탁함세. 내 딸아이를 총타로 데려다 주게.”

“딸이라구요?”

“만약 형님의 신상에 위급한 일이 있지만 않았다면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야. 물론 자네에게 있어서 거절은 용납되지 않는 것 알지? 내가 부탁 할 사람은 아쉽게도 지금 자네밖에 없어. 만약 거절한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심부름을 보내야 한단 말일세.”

자신을 깔보는 말에 패력검제는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 외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면 솔직히 사정을 설명하고 간곡하게 청해오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꼭 말을 저렇게 삐딱하게 해야만 할까?

하지만 패력검제가 어떻게 생각하건 묵향의 말은 계속되었다.

“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빨리 대답하게.”

그러면서 파락호들이 행인들을 위협하듯 주먹을 꽉 쥐고 뼈마디를 뚜둑거리는 행동을 해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이제는 허탈한 느낌마저 드는 패력검제였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위협을 하시는 거요?」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려던 패력검제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방금 전에는 그냥 흘려들었던 것인데, 그것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교주의 형님이라면 바로 만통음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형님이라면… 만통음제 대협 말씀이오?”

묵향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패력검제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분이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묵향이 패력검제가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고 「하늘이 나를 돕는다」는 말을 한 이유는 바로 그 덕분에 만통음제라는 존재가 그의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천지문이 함정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묵향은 이곳에 장인걸의 주력이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장인걸은 없었다. 소수의 천마혈검대원들만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장인걸은 어디로 간 것일까?

깊게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그가 천마혈검대원들을 이끌고 움직일 이유는 단 한 가지 뿐이었으니까. 그는 뭔가 굵직한 먹잇감을 찾아내고 그쪽으로 간 것이 틀림 없었다. 팽선 따위는 결코 장인걸이 탐내는 먹잇감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장인걸은 만통음제의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말일 것이다.

만약 이곳에 패력검제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묵향은 만통음제가 어찌되건 생각도 안 해보고 그냥 총타로 내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만통음제가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한 지금, 묵향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소연을 총타로 보내는 일은 패력검제에게 맡기고, 자신은 만통음제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본다면, 분명히 장인걸은 이곳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어. 하지만 그는 여기에 없었지. 그렇다는 말은 뭔가 아주 굵직한 먹 잇감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갔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그 먹잇감이 만통음제 대협이시라는 말씀이오?”

“물론. 장인걸 하나만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는데, 그 녀석에게는 천마혈검대가 있어. 그렇기에 본좌는 지금 당장 형님을 구하러 가야 한단 말이야. 안 그래도 시간이 없는데 쓸데없는 질문으로 시간 보내지 말고 빨리 대답해. 바로 해 줄 거냐? 아니면 몇 대 맞고 해 줄 거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정파의 원로고수인 만통음제를 위한 것이라는 데야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좋소. 만통음제 대협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수고는 해 드리기로 하겠소. 물론 귀하의 무력이 겁나서 해 드리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라오.”

허락이 떨어지자 묵향은 그에게 몇가지 당부 사항을 전달한 후, 부랴부랴 한 가지 대법(法)까지 전수한 다음 서둘러서 만통음제를 구출하기 위해 동쪽으로 달려 가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남은 패력검제는 나무토막처럼 꼿꼿하게 얼어붙어 있는 소연을 어떻게 들고 갈 것인지 궁리해야만 했다. 업고 갈 도리는 없으니, 안고 가 야하나? 아니면 들고 가야하나?

패력검제가 어떻게 운반할지 궁리하고 있을때, 갑자기 묵향이 되돌아왔다. 그는 아직까지 패력검제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게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여기 있었군.”

“가신게 아니었소이까?”

“가다 보니 한 가지 잊은 게 있어서 급히 되돌아왔지.”

가다가 되돌아온 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궁금증을 안고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천마동에 내려가서 혹시 생명의 위협을 당할 우려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라니. 패력검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달려와 준 상대의 정성이 있기에 뭐라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들 었다.

“그때는 암호를 하나 말하면 돼. 다크가 아빠에게 부탁하더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하더라고 말해. 잊어버리지 마. 알겠어?”

다크가 아빠에게 부탁한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거참 희한한 암호도 다 있군. 어떤 멍청이가 그런 낯간지러운 암호를 생각해 놨는지 모르지만 참 웃기는 녀석 이었다. 하기야 그토록 중요한 암호라면 상대가 전혀 예상하기 힘든 암호를 만드는 것이 좋기는 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제대로 만든 암호일지도 모른다.

“알겠소. 꼭 기억하도록 하리다.”

그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묵향은 다시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남겨진 패력검제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자기가 탈마급이라서 화경인 나는 아예 물로 보이는 모양이지? 참 내. 어이가 없어서.’

이때, 진팔이 비틀비틀 다가와 패력검제에게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어르신.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마교 총타에 가시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시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거기에 가면 사저를 살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하 지 않습니까?”

진팔은 패력검제가 뭔가 탐탁치 않은 뚱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노파심에서 다시 한 번 부탁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패력검제의 성질을 긁는 말이었다.

‘이놈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딴 부탁을 해? 나를 일구이언(二言) 하는 소인배로 생각했다는 말인가? 나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책임을 지는 사람이야.’

화가나서 진팔에게 호통을 치려던 패력검제는 문득 과거에 있었던 일이 한 가지 떠올랐다. 자신이 이리저리 진팔을 긁어댔을 때, 유일하게 반응을 보였던 진팔의 약점. 그것은 바로 소연이었다.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패력검제의 분노는 눈 녹듯 풀려 버렸다.

‘뭐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존심을 굽히고 부탁할 수도 있겠지.’

이런 생각이 들자, 패력검제는 호통을 치는 대신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자네가 그런 부탁하지 않아도 갈 걸세.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찌 할 건가?”

“어쩔 것이나 있겠습니까? 먼저 임무를 완수한 후, 생존자를 수습하여 양양성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 임무가 도대체 뭔가?”

“바로 저기에 있는 배들을 모두 불사르는 겁니다. 그리고 장인들도 구출해야 하구요.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금군 병졸들은 한 명도 없으니, 그럭저럭 해 낼 수 있 을 겁니다.”

“그런가? 그럼 수고하게. 나도 가 봐야겠군.”

“예, 어르신.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