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2권 12화 – 악비 대장군
악비 대장군
양양과 무한을 거점으로 호북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대 군벌(大軍閥)의 범 같은 장수 악비. 송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금나라 오랑캐 를 맞이해 양양성에서 무한에 이르는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대단한 인물이다.
금나라 병사들에게는 수라(修羅)의 화신인 듯 두려움의 대상인 악비였지만 봄이 다가올수록 그의 안색에는 점차 수심이 깊어 갔다. 봄이 되면 수라도제가 무림인 들을 이끌고 북진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무림인들이 지닌 가공할 만한 힘을 익히 알고 있는 그였지만, 집단 전투에 취약한 무림인들만으로는 금나라에 커다란 타격 을 주기는 힘들다고 악비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접전에 능한 장졸들이 그들과 합류한다면 금나라 오랑캐를 멸망시킨다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황제로부터 절대 북진을 불허한다는 칙명이 선포되었다는 점이다. 유약한 황제였지만 칙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반역이라는 말과 다름없다. 한참 을 고민하던 악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군. 내가 직접 가서 재상과 담판을 짓는 수밖에.”
화평을 주장하는 재상 진회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황제를 움직일 수 있기에 내린 결론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곁에 있던 유광세 상장군이 반발을 하며 나 섰다.
“그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놈입니다, 대장군.”
“그게 아니라면 방법이 없지 않느냐? 칙령을 철회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군을 움직였다가는 최악의 경우 반역죄에 걸릴 수 있음이야.”
“어떤 놈이 감히 대장군을 잡아 금의위의 지하 감옥에 집어넣는다는 말입니까? 그런 놈이 있다면 소장이 직접 목을 베어 버릴 테니, 대장군께서는 염려하지 마십 시오.”
“물론 자네 말대로야. 하지만 본관이 반역죄를 뒤집어쓴 이상, 장졸들이 본관의 말에 따르겠는가?”
유광세 상장군은 입술을 질끈 깨문 뒤 악비를 바라보았다.
“대장군, 본관을 비롯한 모든 병졸들은 언제든 대장군의 명에만 따를 것입니다. 설사 목을 내놓으라고 명령을 내리신다고 해도 말입니다.”
마음 든든한 유광세 상장군의 말에 악비는 환하게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자네의 충성심은 언제나 나를 든든하게 해 주는구먼. 좋아, 귀관의 말대로 본관의 부하들은 모두 충성을 다할 거라고 믿네. 그렇다면 주위에 있는 다른 군벌 들은 본관의 요청에 응해 주겠는가? 반역자의 낙인이 찍혀 있는 본관의 요청에 말이야.”
“그, 그건…….”
유광세 상장군은 도저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악비의 요청을 들어줄 가능성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상과의 협의가 필요한 걸세. 알겠는가?”
“정히 그러시다면…, 언제 출발하시겠습니까? 대장군.”
“내일 새벽에 출발할까 생각하고 있네. 어느 정도 급한 일은 대부분 다 마무리 지어 놓은 상태니, 본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게야.”
“알겠습니다, 대장군. 호위대를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그러자 악비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황도에 들어가는 것이니 호위병이 많을 필요 없네. 놈들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판국에 쓸데없이 병사를 뺄 수는 없지 않겠나?”
“백 명 정도로 준비하겠습니다, 대장군.”
악비는 좀 더 줄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유광세 상장군의 단호한 눈빛을 보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사실 양양성에서 황도인 남경까지는 대단히 먼 거리다. 몇 날 며칠 동안 행군을 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 만큼, 혹시라도 적의 기습을 당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었다.
송을 지탱하는 거목인 악비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철저히 대비하고 싶었던 유광세 상장군에게 있어, 호위병 백 명만 해도 최대한 양 보한 숫자였던 것이다.
팽가에서 팽선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묵향은 요즘 막힌 속이 뻥 뚫린 듯 개운한 표정이었다. 일을 마무리 지어 버렸으니 더 이상 문서를 뒤지고 앉아 있을 필요 도 없어졌다. 그런 그의 유쾌한 기분은 진팔과의 비무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소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팔의 무공을 높일 필요는 있지만 전처럼 비무를 가장한 구 타를 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초식을 운용할 때의 주의점을 말해 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 줬던 것이다.
물론 그런 묵향의 호의를 진팔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팽가와의 사건이 있은 뒤 묵향이 신경 쓰고 있다는 천지문에, 그리고 진팔에 쏟아지는 눈길은 엄청났다.
서문세가와 무림맹, 개방, 무영문 할 것 없이 무림에서 정보 조직을 운영하는 어지간한 문파의 시선들이 천지문에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이제 묵향과 진 팔의 묘한 관계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철면피에 악독한 묵향이지만 이렇게 타인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전처럼 심하게 굴리기는 힘들 거라는 것이 요즘 갑자기 편해진 비무에 대한 진팔의 판단이었다.
그래도 멍이 든 곳을 또 맞으면 아프기는 하기에 비무만 하면 진팔은 몸서리를 쳐야 했다. 진팔과 비무를 끝낸 뒤 묵향은 느긋한 걸음으로 만통음제에게로 갔다. 오랜만에 같이 음률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통 밤에 찾아갔지만, 오늘은 일이 있었기에 낮에 그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그 도중에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고 있 는 유광세 상장군을 만났다. 유광세 상장군은 묵향을 보자마자 다가와서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입니다, 묵 대인.”
“오, 유 상장군이셨구려. 어딜 그리 바삐 가는 길이시오?”
“서문 대인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서문? 수라도제 말씀이오?”
“아니요, 그 아드님 말입니다.”
유광세 상장군의 말에 묵향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 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악비의 최측근인 유광세 상장군이 이렇게 바삐 서문세가를 향해 발길을 옮기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묵향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혹, 놈들의 움직임이라도 포착되었소?”
“그게 아니라 대장군께서 황도에 가시겠다고 하셔서 호위 무사를 청하려고 말입니다. 황도까지 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대장군의 지시에 의해 호위병을 백 명으로 제한받자, 유광세 상장군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서문세가에 부탁하여 무예가 뛰어난 무사들로 하여금 외곽 호위를 하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을 듣고 “오, 그러쇼? 그럼, 잘해 보쇼” 하고 느긋하게 대꾸해 줄 묵향이 아니다. 심기가 좋지 않은 듯 묵향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단일 세력으로 친다면 무림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마교 교주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서문세가 따위에게 경호를 요청하겠다고 하니 속이 뒤틀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짐짓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구려. 그렇다면 구태여 거기까지 가서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소. 본좌의 수하들을 내드리지. 서문세가의 쓰레기들보다는 훨씬 보탬이 될 거 요.”
사실 유광세 상장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파니 사파니 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구분이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마기를 풀풀 풍기는 원조(?) 무사들을 보지 않은 그였기에 흑풍단의 무사나 정파 소속의 무사나 별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경호를 요청한다고 해서 서문세가에서 흔쾌히 그 걸 받아들여 줄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관지에게 말해 일정에 맞춰 호위 무사들을 보내 주겠소. 확실하게 경호해야 할 테니, 천인대 하나 정도 보내 드리면 되겠소?”
천인대를 보내 준다는 말에 유광세 상장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포권하며 기쁨을 표시했다.
“가, 감사합니다, 묵 대인.”
“뭘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럼 대장군에게 황도에 잘 다녀오시라고 전해 주시구려.”
묵향이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급히 유광세 상장군이 불렀다.
“저, 묵 대인.”
“왜 그러시오? 다른 용건이 또 있으시오?”
“깜빡 잊었는데…, 대장군께서는 많은 수의 호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만큼, 천인대는 가급적 대장군의 눈에 띄지 않는 원거리에서 호위해 주셨으면 합니 다.”
“그렇게 지시해 두리다.”
묵향은 유광세 상장군과 헤어진 후, 곧바로 만통음제에게로 갔다. 만통음제는 아직 완벽하게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하루하루 몸조리에 힘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묵향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만통음제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반겨 맞이했다.
“어서 오게.”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형님.”
그 말에 만통음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묵향의 말이 싫지는 않은 듯 곧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허허, 하루에 한 번은 꼭 찾아오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묵향은 주위를 쓱 둘러보다 불쑥 물었다.
“그런데 질녀는 어디 갔습니까?”
만통음제는 짐짓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대답했다.
“폭풍검을 만나러 갔지.”
“폭풍검이요?”
그가 누군지 생각하느라 잠시 말을 멈춘 묵향은 곧 패력검제의 아들인 서량을 말하는 것임을 기억해 냈다. 그런데 그 녀석을 설취가 만나러 갈 이유가 없지 않은 가.
“그놈을 왜 만나요?”
“요즘 몸도 찌뿌드드할 텐데 한판 뜨자고 놈이 취아를 꼬셨거든.”
만통음제의 말에 묵향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아니, 그놈이 질녀에게 그딴 소리를 지껄였단 말씀이십니까? 내 그놈의 주둥아리를 확 찢어 놔야…….”
씨근거리며 벌떡 일어서서 나가려는 묵향의 손을 만통음제가 급히 붙잡았다.
“허, 사람 성질하고는 녀석이 한 말은 좀 더 완곡한 표현이었는데, 옆에서 내가 들어 보니 대충 그런 뜻이었다는 말일세.”
묵향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흐음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놈이 질녀와 대련을 해 주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혹시 뭔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닐까요?”
묵향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설취보다 그놈이 훨씬 더 윗줄에 놓이는 고수였기 때문이다. 배울 것도 없는데 왜 자신보다 하수와 수고스럽게 대련을 해 준단 말인가? 뭔가 흑심이라도 품고 있지 않고서야.
만통음제는 음흉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걸 이제야 눈치 채다니, 자네도 참 둔감하기 이를 데 없구먼. 내가 보니, 오래전부터 놈이 취아를 살펴보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었거든.”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렇다면.
“그렇다면은 뭐가 그렇다면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그냥 가만히 놔둬도 뻘 짓만 하다 끝날게 뻔하거든. 첫째 놈도 취아를 마음에 두고 그렇게 공을 들였지 않은 가.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하물며 취아보다 훨씬 더 어린 녀석이 까불어 봐야 그 아이가 눈썹 하나 까딱하겠나?”
“그래도 사람의 일은 모르지 않습니까? 질녀의 취향이 연하일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보니 그 녀석 꽤 괜찮은 놈인 것 같던데…….”
“흠,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겠지. 첫째 놈이야 상심하겠지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오늘은 일찍 왔군. 나는 동생이 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올 줄 알았는데 말일 세.”
묵향은 요즘 저녁쯤에 문병을 핑계로 술병을 들고 찾아왔다. 함께 가볍게 한잔 마시고, 만통음제의 금에 맞춰 피리로 합주(合奏)를 즐기는 것이 요 며칠간 그들이 해 온 저녁 일과였다.
“아, 형님하고 함께 가 볼 데가 있어서요. 요즘 방에만 계셔서 엉덩이가 근질근질하실 거 아닙니까? 그런대로 몸도 쾌차하신 것 같은데, 저하고 같이 바람이나 쐬 러 나가시죠.”
만통음제는 묵향의 제안이 솔깃한 모양이다.
“그럴까?”
마음이 동한 만통음제는 금(琴)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객잔 문을 나선 그가 어딘가로 가려고 하자 묵향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끌며 물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저하고 바람 쐬러 가자니까요.”
“갈 때 가더라도 취아에게 말해 놓고 가야 할 거 아닌가?”
설취에게 행선지를 얘기하고 오겠다는 말에 묵향은 한심하다는 듯 이죽거렸다.
“아니,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면서 제자한테 그런 보고까지 올려야 합니까?”
묵향이 ‘보고를 한다’는 식으로 비꼬자, 만통음제는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사라지면 걱정할 텐데…….”
“걱정은 무슨 걱정이요.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지혜라구요. 그래야 사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만큼 긴장을 늦추지 않고 생활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사라져서 언제 돌아오겠다” 이렇게 말해 놓으면 “해방이다!” 하면서 열심히 놀 게 당연하죠. 안 그래요?”
“흠,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조금 억지스런 주장임에도 만통음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괜히 쓸데없는 것으로 입씨름을 해 봤자 입만 아프다. 사실 묵향이 한 번 억지를 부리기 시작 하면 어떤 식으로든 궤변을 늘어놓으면서까지 이기려고 들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우기는 것이 언제나 보면 별 볼일 없는 사안이었기에 그냥 져 주는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