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2권 14화 – 길흉화복을 점치는 태을복술원
길흉화복을 점치는 태을복술원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점쟁이와 사이비 도사들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민심이 워낙 흉흉한 데다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보니 사이비 도사나 점쟁이에 의지해서라도 미래를 알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금나라 병사들이 침입하여 약탈을 벌이는 바람에 크나큰 곤욕을 치룬 하남성의 대도시들 중 하나인 낙양(洛陽).
과거에 일어섰던 대 제국들의 황도였던 낙양은 시골에서 올라온 촌부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그 규모가 장대하고 화려했다. 그런 낙양의 뒷골목에는 수십, 아니 수백 군데가 넘는 점을 쳐 주는 점집이나 도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곳이 바로 태을복술원(太乙卜術院)이다.
태을복술원을 운영하는 태을진인(太乙眞人)은 화산에서 수십 년 동안 도를 닦아 천기를 읽고, 인생의 길흉화복을 빤히 알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낙양의 고위 관료들도 점을 치기 위해 줄을 설 정도라는 그는 절대로 사람들 앞에서 점괘를 뽑지 않는다는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태을복술원에 들어가면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수많은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손님들이 편안하게 기다릴 수 있도록 잘 꾸며 놓은 넓은 방에 앉아 향긋한 차 한 잔을 마시며 기다리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계집종이 다가와 자신의 차례가 되었음을 알려 준다.
태을진인의 방에 들어가면 방 한쪽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원시천존의 족자가 걸려 있고, 한 손에는 불진을 든 태을진인이 단아하게 앉아 있다. 탈속해 보이는 태을진인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주역과 산통이 놓여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산통 옆에 지필묵이 완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서 오십시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을진인이 말을 건네자 손님으로 들어온 중년 부인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일반 점집과는 너무 나도 다른 모습에 당황한 것이다. 형형색색 무서운 귀신들이 그려진 그림으로 도배된 벽에 위압적인 모습으로 지성을 보이라는 점쟁이와는 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도를 닦아서인지 탈속해 보이는 태을진인을 훔쳐보며 왠지 모를 신뢰감을 느낀 중년 부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딸아이에게 맞선 자리가 들어왔는데, 궁합이 어떤지…….”
태을진인은 붓에 먹물을 듬뿍 찍으며 다시 물었다.
“상대의 이름은 어떻게 되죠?”
태을진인은 선이 들어온 상대의 이름과 생년월일, 태어난 시각은 물론이고 상대가 거주하는 주소까지 꼼꼼하게 계속 질문하며 기록해 나갔다. 어느 정도 질문이 끝나자 기록된 종이를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따님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만큼, 길일을 택해 몸을 정갈하게 하고 점괘를 뽑아야 하기에 10일 정도 후에야 점괘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때 다시 와 주실 수 있겠 습니까?”
중년 부인은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일반 점집은 방울 몇 번 흔들고, 정성부터 보이라며 돈을 요구하는 게 관례인데 태을진인은 뭔가가 달라도 많이 달 랐다. 딸아이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며 길일까지 택해서 몸을 정갈히 하고 점을 치겠다니 그저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저, 복채는 얼마나 드려야 할지……?
불진을 흔들며 눈을 감고 있던 태을진인이 그 말에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허, 도를 깨쳐 부귀영화가 한줌의 티끌처럼 보이는 빈도에게 복채라는 말을 하시다니……. 속되고도, 속되도다. 무량수불.”
그 말에 황급히 중년 부인은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왠지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속 좁은 여인네의 말인지라 새겨듣지 마시고, 진인님의 도력에 감복하여 저의 정성을 표시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때서야 태을진인의 찌푸려졌던 안색이 조금 펴졌다.
“무량수불, 부인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밖으로 나가시면 총관이 있으니 그에게 말씀하시지요.”
중년 부인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린 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중년 부인이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태을진인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다음 자신 이 앉아 있던 의자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방금 전에 기록한 봉투를 집어넣은 후, 뚜껑을 닫고 위에 다시 걸터앉았다.
자리에 걸터앉은 태을진인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점 한 번 보는 데 얼마라고 말하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수작이다. 점집이나 도관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어디 한두 군데를 다녔겠는가. 척 봐서 돈푼 꽤나 있게 생긴 사람들은 적당히 그럴듯한 분위기만 잡아 주면 된다. 물론 날로 그냥 먹으려는 사람들도 있었 지만 그건 밖의 총관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방금 나간 중년 부인은 앞으로 자주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에 흡족한 미소를 짓던 태을진인은 밖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다음 손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호화로운 복장의 중년인이 들어섰다. 중년인이 자리에 앉자 태을진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을 했다.
“아니, 왕 대인 아니십니까? 오늘은 어쩐 일로…….”
“점괘를 받으러 왔습니다.”
“아차, 얼마 전에 친 점괘를 받으러 오셨군요. 오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던 자리 옆쪽에 위치한 서랍을 열자 그 안에는 수백 통이 넘는 봉서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태을진인은 빠르게 봉서들을 뒤져 왕대인의 것을 찾아냈다. 물 론 왕대인이라 불린 중년인은 볼 수 없는 위치에 놓여진 서랍 안이었다.
“허허, 점괘가 아주 잘 나왔습니다. 왕대인의 운이 이제야 상승세를 타는가 봅니다. 무량수불.”
점괘가 잘 나왔다는 말에 왕대인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봉서를 받아 든 왕대인은 말없이 품속에서 전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낙양 인근에서 가장 신용도가 뛰어나다나는 낙양전장에서 발행한 은자 50냥짜리 전표였다.
“이건 약소하지만.”
“허허, 뭘 이런 것을…….”
“태을진인께서 애써 점괘를 잘 뽑아 주신 것에 대한 작은 성의일 뿐입니다.”
점잖게 사양하는 듯한 말과는 달리 태을진인은 어느샌가 탁자 위에 놓인 전표를 집어 품속에 밀어 넣고 있었다. 왕대인은 다시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봉서 하나 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이것에 대해 점을 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태을진인은 봉서를 뜯어 내용을 읽어 본 후,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 경우는 길일이 언제일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일단 오늘 밤 천기를 짚어 본 후, 점괘가 나오면 그때 댁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복채(債)는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허허, 이 바닥의 가격이라는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점괘가 잘 맞는다는 것을 잘 아시는 분이…….”
그 말에 왕대인은 다시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전표 다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점괘의 선금 은자 천 냥이오. 점괘가 흡족하게 잘 나온다면 잔금으로 은자 천 냥을 더 드리겠소.”
은자 천 냥이면 동전으로 따졌을 때 무려 19만2천 냥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다. 태을진인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왕대인이 바로 앞에 앉아 있기에 그 정도 감정 표현에 그쳤던 것이다.
“호오, 잘 알겠습니다. 왕대인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확실하게 점괘가 나오도록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오.”
용건이 다 끝나자 왕대인은 지체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태을진인은 봉서에 왕 대인의 이름을 기록한 후 앉아 있던 의자 뚜껑을 열어 그 안에 집어넣었다. 오 랜만에 큰 건이 걸렸기에 태을진인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기분 좋게 자리에 앉아 밖을 향해 다음 손님을 모시라고 외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문이 벌컥 열리며 새파랗게 질린 시종 하나가 뛰어 들어와 다급하게 말했다.
“웬 손님께서 진인을 뵙겠다며 막무가내로, 큭!”
이때, 웬 커다란 손이 나타나 시종의 머리통을 붙잡고 뒤로 잡아당겼다.
우당탕탕.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곧 장대한 체구를 지닌 장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한의 얼굴을 본 태을진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재빨리 밖을 향해 소리쳤다.
“총관!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손님을 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와 주십사 하고 말씀드리게. 오늘 영업은 끝이야. 알겠나?”
그렇게 말한 태을진인은 문밖으로 나가 나뒹굴고 있는 시종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곧 차를 내오고, 총관에게 말해 주위에 사람들이 얼씬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단속을 하라 전하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종은 태을진인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듯 후다닥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예, 나으리.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태을진인이 방 안으로 돌아와 보니 장한은 거대한 도(刀)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살짝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라도제 대협.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어떻게 왕림하셨는지……?”
질문을 던지는 태을진인의 목소리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이 알고 있기로 수라도제는 양양성에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 있는 수라도제는 또 누구란 말인가?
무엇보다 중원 무림을 움직이는 거물과 마주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태을진인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 낙양에 들렀을 때, 무영문에서 파견 나와 있던 인물이 혹시 연락할 사항이 있으면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면 된다고 했기에 찾아왔네.”
“아, 예. 그렇다면 무슨 점을 치시…, 죄송합니다. 무슨 정보를 원하십니까?”
태을복술원은 무영문이 정보를 사고팔기 위해 천하에 깔아 둔 지부 중 하나였다. 물론 점을 치는 시늉을 하며 점괘를 뽑아 주는 것도 무영문의 정보를 바탕으로 분
석해 주는 것이다.
“노부는 소림사 내부의 정확한 건물 배치도를 원하네. 그리고 가장 쉽게 참회동까지 들어갈 수 있는 침입로도 알려 주면 고맙겠군.”
여기까지 말한 수라도제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을진인을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래 이 정도를 알아보려면 복채는 얼마나 주면 되겠나?”
수라도제의 짓궂은 질문에 태을진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참회동까지 들어가기 위한 침입로라니……. 설마 소림사의 담이라도 넘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점쟁이를 상대로 하니 확실히 말하기 편하군. 내 의중을 그렇게 빨리 알아채는 것을 보니 말일세. 그래, 언제까지 알려 줄 수 있겠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는데.” 그 말을 듣자 뭘 떠올렸는지 태을진인의 안색이 조금 더 창백해졌다.
“직접… 가실 겁니까?”
“물론.”
“월담하지 않으셔도 대협의 신분이시라면 충분히…….”
“전에 월담을 했다가 붙잡힌 경험이 있으니, 그런 조언은 해 줄 필요가 없네.”
덤덤한 수라도제의 말에 태을진인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천하의 수라도제가 소림사의 담을 넘었다가 붙잡혔다니 누가 그걸 정말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 가? 문제는 자신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일을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는 수라도제의 태도였다. 이렇게까지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수라도제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아 무래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태을진인은 생각했다.
“아무리 소림사라고 하지만, 대협께서 월담하시는 것을 알아채다니……. 정말 놀랍군요.”
수라도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알고 보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닐세. 방장실 근처를 통과하는 침입로를 택한 노부의 멍청함 때문이었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방장실 근처가 소림사 내에서도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이니 말이다.
태을진인은 잠시 망설였다. 정보를 제공해야 하나? 아니면 정중하게 거절해야 하나? 만약 소림사 내의 침입로를 자신이 가르쳐 줬다는 것을 소림사에서 알게 되는 날에는, 천하 무학의 종주라고 할 수 있는 소림사와 척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수라도제가 어떤 의도로 소림사의 담을 넘느냐 하는 것이다. 좋게 끝날 일이면 상관없지만, 만약 피를 부르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무영문 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태을진인은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의자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의자 뚜껑 안에다가 머리통을 집어넣기라도 할 듯 가 까이 가져다 대며 외쳤다.
“이봐! 소림사 내부 배치도 한 장 올려 보내 줘. 대충 그려 놓은 걸로 말이야.”
그러자 놀랍게도 의자 안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부 배치도는 뭐 하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올려 보내!”
잠시 후, 의자 안쪽에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이 튀어 올라왔다. 아마 의자 밑의 구멍을 통해 지하 밑쪽과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태을진인은 그 종이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쭉 펼쳤다. 소림사 내의 건물들이 어떤 식으로 배치되어 있는지 제법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배치도였다. 태을진인은 손 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어떤 방향으로 침입하면 가장 쉽게 참회동까지 갈 수 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기 때문인지 수라도제는 만족스런 웃음을 흘리며 지도를 잘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을진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신 신당부했다.
“한 가지 꼭 지켜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드린 정보가 무영문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발설치 말아 주십시오.”
“염려하지 말게, 노부도 그 정도는 잘 아니까. 그나저나 복채는 얼마나 주면 되는가?”
태을진인은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소림사 건물 배치도 한 장을 나눠 준 것이 그렇게 큰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원본도 아니고 사본 한 장인데, 뭐가 그리 소중하 겠는가. 이런 거물을 상대로 어설프게 돈을 요구하기보다는 차라리 빚으로 만들어 두는 게 훨씬 좋겠다고 태을진인은 생각했다.
“정보료는 주실 필요 없습니다. 금나라를 상대로 분투하고 계신 대협께 저희 무영문에서 드리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고맙게 받겠네. 선물에 대한 보답은 다음에 꼭 하도록 하지.”
용건이 끝나자 수라도제는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시야에서 수라도제의 모습이 사라지자 태을진인은 긴장감이 풀 리는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만큼 수라도제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튕기듯 일어난 태을진인은 의자 뚜껑을 열어젖히고 밑을 향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봐, 문주님께 전할 특급 정보다. 수라도제가 소림사로 향했다!”
“뭐? 수라도제가 소림사에는 왜?”
“나도 몰라. 월담을 한대.”
더 이상 밑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모두들 너무나도 기가 막혀 말도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어수선해진 실내를 치운 시종이 문짝을 새 걸로 다시 바꿔 달았다. 태을진인은 수라도제가 소림사로 향했다는 정보를 급하게 무영문 총단으로 보낸 뒤 차분히 차 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흠, 양양성을 책임져야 할 수라도제가 왜 이곳에 나타나 소림사의 담을 넘는 침투로를 물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금나라와의 일전이 목전에 다가왔음은 낙양에 있는 자신도 아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수라도제가 누구인가. 양양성에 운집한 정파인들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나타나 소림사의 담을 타 넘는 방법을 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수라도제와 마교 교주가 부딪칠 뻔했다는 정보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저 서로 노려보다 끝나긴 했지만 그 뒤로 수라도제가 칩거에 들 어갔다는 정보였었다. 서문세가가 철저히 입단속을 시킨 탓인지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갑자기 태을진인이 무릎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어쩌면 그때 치열한 기 싸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들은 둘 다 범인이 상상하기도 힘든 경지 를 개척한 초절정의 고수들이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봐서는 안 된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수라도제는 그때의 싸움에서 큰 내상을 입 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칩거에 들어간 것은 내상을 치료하기 위함이고, 소림사의 담을 타 넘으려 하는 것은 영약으로 유명한 대환단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맞다, 대환단!”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추리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소림사에서 그 귀한 대환단을 순순히 내줄 리 없다. 그러니 그는 담을 넘어가 대환단을 훔치려는 속셈인 모 양이다.
“젠장, 괜히 지도를 준 것 같군. 그걸 들고 대환단을 훔친 게 밝혀지면 나는 끝장이잖아.”
태을진인은 거칠게 의자 뚜껑을 열고 밑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양양성의 서문세가에 대한 최근 정보들 좀 올려 보내!”
와장창.
그때 갑자기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의자 뚜껑에 머리를 박고 소리치던 태을진인은 흠칫 굳은 채 어정쩡한 자세로 문 쪽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새하얗게 굳었다. 또 한 명의 거물이 출현한 것이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패력검제 대협.”
“흠, 여기에 오면 노부가 알고 싶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패력검제는 뭔가 근심이라도 있는지 안색이 초췌했다. 현천검제와 헤어져 근방의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신수(神獸)에 정통한 학자들을 탐문해 보았지만 다 그 나 물에 그 밥이었다. 그렇기에 중원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낙양까지 단숨에 달려온 것이다.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지요?”
패력검제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괴이지(怪異誌)에 정통한 학자가 누구인지 알려 주게.”
“괴, 괴이지요?”
천하에 산재한 신기하고 괴기로운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책이 바로 괴이지다. 잡학으로 치부되다 보니 괴이지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학자는 없다. 더군다나 화경급 고수가 괴이지에 정통한 학자를 찾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태을진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학자를 왜 찾으십니까? 어느 정도 내용을 알아야 그에 알맞은 정보를 드릴 것이 아닙니까?”
잠시 주저하던 패력검제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이든 이무기든 신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자가 필요한 걸세. 그 이유는…….”
여기까지 말하던 패력검제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괜히 황금색 괴물을 만났다는 말을 꺼냈다가 미친놈 취급당할 우려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유는…, 더 이상 묻지 말게.”
아르티어스를 만난 이후, 패력검제의 내심은 복잡하기만 했다. 전설로만 치부되던 용을 직접 목격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청룡이니, 백호, 주작이니, 현무니 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로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괴물이 사람으로 변신 하기도 하고,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을 한순간에 살려 내는 것을 직접 보기까지 했지 않은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쌓아 왔던 관념의 틀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부처니 태상도군이니 하는 것도 사실일 수 있지 않을까? 패력검제는 전설로 내 려오는 것들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만약 전설이 사실이라면…. 무예의 끝을 보는 것보다 더 큰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쪽으로 정 통한 학자를 찾아 자문을 구하려는 것이다.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패력검제를 본 태을진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뚜껑을 열었다.
“이봐! 지금 당장 괴이지에 정통한 학자들을 찾아 명단을 올려줘!”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별걸 다 찾는다며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 한 장이 튀어 올라왔다. 명단이 적힌 종이를 받아 든 패력검제는 태을진인을 보며 물었다. “정보료는 얼마나 주면 되겠나?”
태을진인이 패력검제를 힐끗 보니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달라고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한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돈을 달라 고 하겠는가.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마자 빠르게 태을진인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정보료는 주실 필요 없습니다. 금나라를 상대로 분투하고 계신 대협께 저희 무영문에서 드리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흠, 자네 제법 마음에 드는군. 자주 찾아오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으로 신형을 날린 패력검제는 순식간에 그 모습을 감춰 버렸다. 태을진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록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좀 전에 훔쳐본 패력검제의 싸늘한 눈빛에 그의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세차게 뛰고 있었던 것이다.
“미치겠군. 갑자기 이런 거물들이 연달아 찾아오다니.”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종이 부서진 문짝을 치우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놔두게. 또 어떤 놈이 찾아올지 모르니 말이야.”
거칠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던 태을진인은 문득 자신의 신상에 뭔가 변화가 찾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평생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두 거물이 연달아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자신이 도무지 이해하기도 힘든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젠장, 용한 점쟁이라도 찾아가서 점이라도 쳐 볼까? 아무래도 이러다가는 명대로 살기 힘들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알지만 태을진인의 머릿속은 벌써 낙양에서 소문난 점집을 찾아 영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