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2권 16화 – 재상 진회의 눈물
재상 진회의 눈물
묵향이 만통음제와 예정에 없던 유람을 하고 있을 때, 대송제국의 재상 진회의 처지도 그와 비슷했다. 물론 그의 경우는 유람이 아니라 지방 순시를 위해 남쪽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망해 가는 제국의 재상이라고 해도,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신분이다. 그렇기에 진회가 갑자기 지방 순시를 결정한 뒤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황도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행하는 무리들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문관들을 중심으로 잡일을 맡을 시종들, 몇십 대에 달하는 수레, 거기에다가 이들의 호위를 담당할 5백에 달하는 병사들까지. 지방 순시를 위해 움직이는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진회가 갑자기 지방 순시를 결정한 것은 바로 악비 대장군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절강성(浙江省)의 항구도시인 항주(杭州)를 둘러볼 목 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자리 잡고 있는 남경보다는 항주 쪽이 금나라의 침입으로부터 훨씬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근시일 내로 항주로 천도를 할까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악비를 피할 겸 항주를 직접 봐 두려는 것이었다.
분명 악비는 오랜 시간 양양성을 비워 둘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시간 동안 남방을 순시하며 제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훨씬 유익 할 것이다. 그게 악비의 상경 소식을 듣고 밤새워 그가 생각해 낸 가장 원만한 대처법이었다.
자신은 재상이지만 상대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병권을 쥐고 있는 장수다. 뭔가 타협의 여지라도 있다면 만나서 대화를 해 보겠지만, 서로가 원하는 것이 너무나 도 달랐다. 이런 경우 그를 없애 버리는 것이 제일 좋을 수도 있겠지만, 진회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를 없앤 후의 뒤처리도 문제였지만, 진회는 악비를 아 꼈기에 차마 그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진회가 타고 있는 마차는 행렬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그편이 그를 경호하기에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차의 창문을 통해 주변의 경치를 주의 깊게 관찰 했다. 길가에는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궁핍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관도(道) 주변에 늘어서 있는 집들의 굴뚝에는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아스라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질리지도 않고 밖을 내다보고 있던 진회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행렬 앞쪽에서 일행을 선도하고 있던 박 교령이 말을 몰아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봤 기 때문이다. 박 교령은 진회가 타고 있는 마차와 나란히 가도록 말의 고삐를 조종하며, 창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회를 향해 군례를 올린 후 말했다. “다음 마을에서 쉬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이 지방 태수가 이미 대인께서 편히 묵어가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뒀다고 하옵니다.”
“그렇게 하게.”
“옛, 대인.”
박 교령은 말에 박차를 가하며 행렬의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마을에 마련된 숙소에서 진회는 간소하게 식사를 마친 후, 박 교령을 불러들였다.
“찾으셨사옵니까?”
“들어오게.”
박 교령이 들어오자 진회는 주변을 재빨리 살펴본 다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 태수는 아주 유능한 인물인 모양이야.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일세.”
박 교령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소장도 그렇게 느꼈사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과 실제로 그런 것은 큰 차이가 있지. 귀관은 내가 비밀리에 그들의 실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방책을 강구해 보게.”
순간 박 교령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부릅떠졌다.
“암행(行)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진회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려고 할 때 어디선가 그의 귓가로 가느다란 목소리를 보내왔다.
<그건 안 됩니다, 대인.>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진회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지 않고 마치 상대가 자기 눈앞에 있는 듯 입을 열었다. “아무리 말린다고 해도 나는 할 걸세.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제대로 된 선정을 베푸는 첫 번째 태수일세. 요즘같이 어수선한 시국에 백성들을 위해 바른 길을 간다 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런 심지(心地)가 곧은 소중한 인재를 여기에서 썩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야.”
<정 그러시다면 제가 직접 태수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내가 직접 그가 백성들을 위해 행한 일들을 살펴보고, 백성들에게서 그에 대한 평가를 들은 연후에야 그를 제대로 알 수가 있을 걸세. 짧은 시간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그렇다면 제가 그 일을 대신해 드리겠습니다.>
“내 자네를 못 믿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중차대한 일을 다른 이에게 맡길 수는 없다네. 만약 제대로 된 인물이라는 판단이 서면 곧바로 황도로 불러들여 중용할 생 각이니 말일세.”
<저 혼자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니, 사형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사내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박 교령은 진회에게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이어지지 않자, 초조한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진회에게 물었다.
“정말 암행을 하실 생각이시옵니까?”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소중한 인재일세.”
박 교령은 진회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걸 느꼈는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정 그러시다면 암행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밤, 진회는 박 교령이 차출한 20여 명의 날랜 병사들과 함께 몰래 숙소를 빠져나왔다. 박 교령은 자신이 직접 진회의 호위를 맡고 싶었지만, 그는 호위대의 대 장이었기에 오히려 타인들의 눈에 잘 띄게 행동해야 했다. 만약 그가 빠져나간다면 진회의 암행이 곧바로 들통 날 게 틀림없다.
그에 비해 진회는 신분이 워낙 높았던 터라 감히 그를 만나겠다고 찾아올 만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 진회가 만나기 싫다고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그 에게 접근해 올 수 있는 인물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자 정도다. 진회는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순시 행렬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암행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이다.
숙소에서 진회 일행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는 의문의 그림자들. 몸에 착 감기는 흑색 암행복으로 전신을 감싸고, 두건까지 쓰고 있 는 괴한들이다.
“사형, 왜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저자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다. 정말 실력 있는 자가 재상의 목숨을 노린다면, 겨우 5백밖에 안 되는 허접한 병사들을 염두에나 두겠느냐?”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오히려 이건 기회라고 할 수도 있다. 그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갈 기회를 잡은 건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는 한 복면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시를 내렸다.
“너는 지금 당장 현청(縣廳)으로 가서 동정을 살펴라. 과연 그가 기대한 대로 청렴한 관리인지 자세히 확인하란 말이다.”
“옛, 사형.”
지시를 받은 복면인은 현청 쪽으로 달려가 버렸고, 남은 자들은 은밀하게 진회의 뒤를 밟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암살자에 대비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진회가 20여 명의 날랜 병사들을 이끌고 몰래 암행을 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강서성(江西省)은 중원에서는 비교적 남쪽에 위치하고 있기에 한겨울 이 돼도 그리 춥지 않다. 그 덕분인지 거리에 굶어죽은 시체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았지만, 고된 삶에 지친 굶주린 백성들은 어디를 가도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그들 은 산으로 들로 나다니며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무껍질을 뜯어 집 안 여기저기에 말려 두고 있었다.
진회가 한 농가 안으로 쓱 들어서자 아낙은 어린 아이들을 재빨리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두려움에 질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진회가 아니라 진회 뒤에 서 있는 검을 든 두 명의 병사들을 쳐다본 것이다.
진회는 20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이끌고 이 집에 들이닥치면 농민들이 놀랄 것 같아서 그중 두 명만을 이끌고 들어온 것이었는데, 시골 아낙에게는 그들만으로도 마음속 깊은 곳까지 두려움을 안겨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요?”
병사들은 군복을 벗은 상태였고, 진회 역시 호사스런 관복 대신 누구나 입고 다님직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진회의 호위가 자신들의 주 임무인 지라 진회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검을 휴대한 채 긴장감에 딱딱한 표정이었다. 그 위압적인 모습이 아낙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고 있었던 것이다.
진회는 어찌 보면 당연한 아낙의 반응에 내심 한숨을 내쉬며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보시게, 예서 하룻밤만 이슬을 피해 갈 수 있겠는가?”
아낙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회의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이 두 눈을 부릅뜨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탐탁치 않았지만 마지못해 승낙한다는 표 정이 역력했다. 칼을 든 장정 둘이 뒤에 서 있다. 만약 거절했다가 무슨 봉변이라도 당할지 몰라 내심 두려웠을 것이다.
“드, 들어오시우. 자실 건 별로 없지만, 방 한 칸 내드리는 건 어렵지 않수.”
그녀가 일행을 데리고 간 곳은 농가 한쪽 구석의 작은 방이다. 침상이 한 개뿐이라 세 명이 잠을 청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처음 그들의 요구대로 밤이슬을 피하 는 데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병사들이 방 안을 치우는 동안, 진회는 아낙과 그 아이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볼이 홀쭉한 것이 영양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손님들이 방 안으로 들어 가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아이들은 또다시 이리저리 뛰놀기 시작했고, 아낙은 분주히 움직이며 궁색하기는 하지만 먹을 것들을 준비하느라 두 손을 바쁘게 놀려 댔
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그녀의 남편이 돌아왔다. 남편은 밭에서 일을 하다 간혹 그 주변을 돌아다니며 혹 먹을 만한 것이 있는지 돌아다니느라 늦은 것이다. 불빛에 비친 그녀의 남편 역시 얼마나 못 먹었는지 몸은 깡말랐으며, 볼이 홀쭉했다. 집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자 남편은 불안한 눈빛으로 부인을 쳐다보았다.
“손님이 있어요.”
“손님?”
“예, 길손인 모양인데, 하룻밤 이슬이나 피하게 해 달라고 해서…….”
내외는 속닥속닥 뭔가 얘기를 주고받으며 남편은 그날의 수확물을 아내에게 건넸고, 아내는 부엌 안으로 분주히 들락거리며 뭔가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부엌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가지고 나왔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일부를 건네준 후, 나머지를 가지고 진회가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변변치는 않지만 좀 드시구려. 시장기는 면할 수 있을 테니.”
그녀가 건네준 것은 따뜻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국이었다. 국에는 곡물 같은 것도 조금 보였지만, 그 재료의 대부분은 뭔지 알 수 없는 풀들이다. 일부는 싱 싱한 것들, 그리고 일부는 말려서 저장해 뒀던 풀들. 먹을 만하기에 국을 끓여 먹겠지만 진회처럼 궁핍한 삶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생소 한 음식이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국은 맛이 없었다. 그리고 척 봐도 영양가도 거의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젓가락으로 박박 긁으며 하나도 남김 없이 국물을 들이켰다. 국물이 생각보다 뜨거웠던 탓일까?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슬쩍 손등으로 자신의 눈가를 훔치며 병사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허어, 국물이 너무 뜨겁구먼. 그래도 주린 속에 이거라도 먹으니 한결 든든한걸. 자네들도 어서 들게.”
“존명.”
하늘과도 같은 상관이 깨끗이 그릇을 비운 마당에, 그들이 국을 남길 수는 없었다. 이때, 병사들 중 하나가 재빨리 자신이 가져온 짐을 뒤져 건량을 꺼내 왔다. 하인 들조차 먹지 않을 정도로 부실한 국이었기에 재상 진회가 시장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것도 같이 드시지요.”
“아니, 나는 됐네. 이것만 먹어도 뱃속이 그득한 것 같구먼.”
뱃속이 그득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안타까운 백성들의 삶 때문에 그의 식욕이 사라진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 진회는 집의 주인을 청했다. 서로 간에 인사를 나눈 후, 진회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은근슬쩍 던졌다.
“저녁에 건넨 식사를 보니 식량이 모자라는 것 같던데. 수확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일세 그려.”
진회의 질문에 농부의 눈에 의아함이 짙게 어렸다. 하지만 곧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의 손에 들린 검을 보자 두려움이 짙게 배인 눈으로 진회를 살펴보며 물었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요?”
“내 궁금해서 묻는 걸세. 이 일대에 기근이 들었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본 적도 없었거든.”
그 말에 농부는 퉁명스럽다 싶을 만큼 짧게 대꾸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수.”
진회는 밖으로 나가려는 농부의 손을 잡아 억지로 다시 앉게 한 뒤 다시금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농부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이다. 그런 농부의 응대에 병사 중 한 명이 화가 치밀어 그의 멱살을 틀어쥐며 윽박질렀다.
“이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계속 거짓말을 늘어놓는 게냐! 주리를 틀어야 이실직고할테냐?”
얼핏 들어 봐도 관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조요, 단어들이다. 그걸 느낀 농부의 입은 더욱 고집스럽게 꽉 다물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진회는 뭔가가 있다고 생 각했다. 사내가 이토록 고집스럽게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말이다.
“이보게, 왜 대답을 안 하는가? 설마 하니 우리가 자네를 해칠까 두려워서 그런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묻고 싶은 게 있을 뿐이니 안심하게.”
하지만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살그머니 자신을 훔쳐볼 뿐,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사내를 보며 진회는 사내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당했기에 항변조차 못할 정도로까지 길들여진 것인지.
“말을 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가 없지.”
병사들을 시켜 입을 열게 할 수도 있었지만 진회는 그러지 않고 답답한 듯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는 있지만 농부의 온몸이 두려움에 덜덜 떨 리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잠시 애처로운 눈빛으로 농부를 바라보던 진회는 밖으로 나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때 갑자기 아낙이 방 안으로 내달려 들어와서는 남편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이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그러시우? 관에서 나왔다고 사람을 이렇게 핍박해도 되는 거요?”
“우리가 관에서 나왔다고 누가 그러던가?”
“누가 모를 줄 아우! 저 아랫마을에 사는 김 씨네도 길손을 집에 묵게 해 준 다음 날 관에 잡혀가서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수. 괜히 이리저리 찔러 이쪽에서 말실수 하도록 유도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시란 말이우. 따뜻한 방에서 주무실 수 있도록 방까지 내드렸지 않수! 왜 은혜를 이렇게 웬수로 갚으려고 하시느냐는 말이우.”
남편을 보호하려는 일념에 여인은 두려움에 눈물까지 글썽이면서도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후에야 진회는 복잡한 사정이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마도 이쪽에 있는 관부에 있는 놈이 먼저 선수를 친 듯했다. 길손으로 분장시킨 밀정을 보내 주민들을 슬슬 찔러 본 다음, 이 고을 관리들의 폭정에 대해 사실대로 고해바친 인물들을 잡아 들여 묵사발을 내놓은 모양이다.
처음에 좀 묵어가자는 말을 꺼냈을 때 당혹스러워 하던 그녀의 모습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녀로서는 당연히 모르는 길손들을 집 안에 들이고 싶지 않았으리 라. 진회의 경우 부하 둘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차마 묵어가자는 말을 거절하지 못해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찌 된 일인지는 대충 알겠으니 마음을 진정하시구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인을 달래며 진회는 품속을 뒤져 은자 두 냥을 꺼내 그녀의 손에 꼭 쥐어 줬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다 건네주고 싶지만, 갈 길이 먼 데다가 앞으로도 당신들 같은 처지의 인물들을 계속 만나게 될 테니 그들에게도 뭔가를 줘야 하지 않겠소. 적은 돈이지만 그걸로 곡식을 추수할 때까지 버티도록 하시오.”
진회의 말에 아낙은 잔뜩 고조되었던 긴장이 풀려서인지 울음을 터뜨리며 진회에게 감사의 말을 연발했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남편은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추수하면 뭐 합니까? 황충이 떼라도 나타난 듯 집 안을 이 잡듯 뒤져 다 털어갈 텐데…….”
진회는 믿기 힘들다는 듯 급하게 물었다.
“이 고을 관리들의 폭정이 그토록 심하다는 것이냐?”
남편은 넋이라도 나간 듯 멍하니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입지요.”
한 번 말문이 터지자 참을 수 없다는 듯 남편은 이 마을 관리들의 폭정이 얼마나 지독한지 진회에게 낱낱이 얘기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듣던 진회의 얼굴이 점차 새하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그의 꽉 움켜진 손은 얼마나 그가 분노하고 있는지 핏줄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백성을 수탈하는 탐욕스런 관리일수록 의심이 많다. 관리들에게 있어 백성은 하찮은 무지렁이였고, 자신들의 돈주머니를 채워 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관리들 은 이들 무지렁이들이 수확물을 속여 자신에게 내야 할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거나, 이 지방을 지나는 길손에게 이런저런 불만을 말해 괜히 높은 곳에 있는 관리의 귀에 정확한 정보가 들어가 자신들이 상납해야 할 뇌물의 양이 많아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좀 더 효율적으로 백성들을 쥐어짜기 위해 ‘밀정’이라는 놈들을 애용했다.
왕적삼(王積三) 포두 또한 바로 이 밀정이라는 놈들을 이용하여 톡톡히 재미를 보고 계시는 나으리들 중 한 명이다.
“그러니까 서가 놈 집에 웬 길손이 묵고 있더라는 말이냐?”
“예, 그날 같이 논일을 하기로 약조를 했었기에 제가 서가네 집으로 갔었지 않았겠습니까요. 그런데 서가네 집에서 장정 둘과 서생 하나가 묵고 있더라 이겁니다.” “그자들의 용모는 어떻던가?”
“멀리서 얼핏 봤기에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장정 둘은 기골이 아주 장대해 보였습니다요. 그리고 그중 하나는 장검을 들고 있던뎁쇼.”
순간 왕적삼의 눈이 번쩍 빛났다.
“장검이라고? 확실하냐?”
“예, 틀림없습니다요.”
밀정이 돌아가고 난 후, 왕적삼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어디서 보낸 놈들이지?”
지금까지 그의 옆에 말없이 앉아 있던 장 포두가 끼어들었다.
“이봐, 생각할 게 뭐 있어. 그냥 해치워 버리면 그만이지.”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허, 쥐새끼 세 마리 해치우는 게 어려울 게 뭐가 있나?”
이들은 지금까지 수상쩍어 보이는 외지인들은 몽땅 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렸다. 물론 그중에는 상부에서 보낸 밀정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뒤가 구린 그들은 수상쩍은 사람도 없앨 겸, 그자들이 지니고 있는 돈도 털어먹을 겸 일석이조의 사냥을 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세 마리가 아니니까 문제지. 그냥 토끼 사냥하듯 때려잡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아.”
“무슨 소리야? 좀 전에 세 놈이라고 그놈이 말한 걸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그러자 왕적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놈들 말고 뒤따르는 또 다른 놈들이 있기에 하는 말이야.”
“뭘 복잡하게 생각해. 그렇다면 대규모 상단인가 보지.”
장 포두는 예전에 상단을 털어 짭짤한 재미를 본 기억을 떠올리며 갑자기 왕적삼이 왜 이렇게 소심하게 구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단이면 내가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아. 사실 오늘 아침 조가 놈이 찾아와서 말하더군. 어제 저녁 산에서 나물을 캐고 있는데, 산 아래쪽에 20명 남짓한 장정들이 숨어서 서가 놈 집 쪽을 관찰하고 있더라고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모두들 무장을 하고 있는 데다 꽤나 덩치가 있는 놈들이라고 하더라구.”
“어라, 그렇다면 상단이 아니라 그거 산적 놈들 아냐?”
왕적삼은 그 말에 찬동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절이 어수선하다 보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 중 칼을 움켜쥐고 산적으로 직업을 바꾸는 이가 부지 기수였다.
“흠, 산적이라. 그럴 수도 있겠네.”
장 포두는 왕적삼이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더욱 침을 튀기며 입을 놀렸다.
“내 생각에는 그 산적 놈들이 서가 놈의 집에 묵고 있다는 놈들을 쫓아온 거 같아.”
왕적삼은 장 포두의 말이 그럴듯한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몸을 들썩이며 장포두가 말했다.
“좋아, 우리도 빨리 움직이자구. 산적들이 그놈들을 노리는 걸 보면 꽤나 큰 건수임에 틀림없어. 보아하니 장정 둘은 서생을 호위하는 보표인 듯한데 그 정도야 문 제없잖아.”
신이 난 장 포두와는 달리 왕적삼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장사치 몇 명 죽이고 돈을 뺏는 거야 병사들을 우르르 몰고 가면 되지만, 덩치 좋은 산적들이라면 얘기 가 달랐다. 자칫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산적하고 맞붙어야 하는데, 그건 좀 찝찝하군.”
“산적 놈들이 서가 놈 집 근처에 숨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며? 언제 털어먹고 튀어도 이상할 게 없다구. 어쨌거나 돈을 만지려면 어쩔 수 없이 산적 놈들과 맞 붙을 수밖에 없잖아. 혹, 그놈들이 우리가 출동한 걸 알면 알아서 도망칠 수도 있으니 거기에 희망을 걸자구. 무엇보다 그 정도의 산적이 쫓아올 정도라면 우리가 만 져 보지도 못할 정도의 거금을 지니고 있을지도 몰라.”
장 포두의 말에 왕적삼은 귀가 솔깃했다. 생각해 보니 20명이나 되는 산적들이 몰려올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지니고 있을까? 어쩌면 돈이 아닌 희대 의 보물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보표를 고용해 돌아다닐 정도라면 돈푼깨나 가진 놈이 분명했다.
산적이라는 말에 잠시 고개를 숙였던 탐욕의 마음이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왕적삼은 마을에 소속된 병사들을 모두 불러들인다면 산적들이 쉽게 덤벼들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혼자 챙겨먹는 것보다 자신에게 떨어지는 양은 적겠지만 산적들이 횡재를 하는 것을 손가락만 빨며 지켜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다면 병사들의 숫자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게 좋겠군.”
“물론이지. 내가 이 포두에게도 연락을 넣을게.”
큰 건수라고 생각했는지 병사들을 모으고, 출동 준비를 갖추는 포두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
산적들이 언제 행동을 개시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포두들은 병사들이 어느 정도 모이자 즉시 출동했다. 그들은 각자 부하들을 거느리고 세 방향에서 외곽 부터 시작해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왕적삼은 자신이 맡은 방향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이동하며, 요소요소의 길목에 활로 무장한 포졸들을 배치했다.
“너는 저쪽에 숨어 있어.”
“옛”
왕적삼은 자신의 지시대로 숲 속으로 달려가는 포졸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만약 이쪽으로 도망치는 놈이 있으면 무조건 쏴 죽여!”
왕 포두의 지시를 받은 포졸이 히죽 웃으며 자신 있게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왕 포두 나으리. 이런 일 어디 한두 번 합니까.”
부하들을 이끌고 왕 포두가 가 버린 후, 그곳에 홀로 남겨진 포졸은 길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자리를 잡자마자 등에 메고 온 활을 내려놓은 다음, 화살을 하나 꺼내 시위에 걸어 두었다. 언제라도 신속하게 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놈들이 빠져나가지 않았어야 할 텐데…….”
포졸의 바램은 그것뿐이었다. 만약 저들이 포위망이 구축되기 전에 이미 도망치고 없다면? 그렇다면 자신들은 그들을 쫓아 산길을 달려 또다시 이동해야만 했다. 될 수 있으면 그런 수고는 안 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램인 것이다.
“오늘은 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군.”
중얼거리며 산길을 관찰하고 있는 그의 뒤편에 놀랍게도 시커먼 그림자가 얼핏 보였다. 사람의 움직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갑자기 쑥 튀 어나왔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우드드득!
포졸은 자신의 뒤편에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손쉽게 목이 꺾여 버렸다. 포졸의 목을 붙잡고 뒤틀어 버린 것은 검은
색 야행복과 복면으로 전신을 감싼 괴한이었다. 괴한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포졸의 몸을 살며시 땅바닥에 내려놓는 한편,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잠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주위에서 어떠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자, 그는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크흐흐, 식은 죽 먹기겠군.”
적당한 곳에 한 명씩 포졸들을 배치하던 왕 포두는 잠시 후면 거금을 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몹시 좋았다. 사실 산적이 있다고는 해도 지금껏 몇 번씩이나 해 왔던 일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자기 외에도 다른 포두 두 명이 더 병력을 이끌고 오지 않았는가. 동원된 병사만 해도 56명이다. 그럭저럭 무예에 능한 자들은 채 20명이 되지 않지만, 농사만 짓다 칼을 든 산적들 쯤이야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들의 모습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 며 줄행랑을 칠지도 모른다.
자신감에 충만한 왕적삼의 관심은 이제 산적들보다 거금을 지니고 있을 서생 놈에게 쏠려 있었다. 사방에 궁수들을 매복시켜 놨기에 놈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왕적삼의 머릿속에는 벌써 서가네 집에 묵고 있는 놈들을 잡아 거금을 챙기면 다른 두 명의 포두에게 어느 정도 나눠 줘야 할지 주판을 열심히 튕기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의 뒤를 따르면서 부하를 한 명씩 매복시킬 때마다 죽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 모두들 잠시 휴식.”
고개 하나만 더 넘으면 서가 놈의 집이다. 그렇기에 왕 포두는 부하들을 그곳에 대기시킨 후, 두 명의 포졸만 데리고 고개 위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고개 위 에 올라가면 사방을 폭넓게 관찰할 수 있는 만큼, 다른 포두들이 목적지에 도착해 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에 신호에 맞춰 동시에 돌진 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시간이 어긋나면 놈들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개 위에 도착한 왕 포두는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서가네 집을 관찰했다. 순간 왕 포두의 눈이 번쩍 빛났다. 서가네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장정 하나를 보 았기 때문이다. 밀정의 보고대로 놈의 기골은 꽤나 장대했다. 제법 검술을 익힌 자인지도 모른다.
“흐흐흐, 산적 놈들이 아직 습격을 하지 않은 모양이군. 우리가 먼저 행동을 시작해도 되겠어.”
왕 포두는 품속에서 작은 동경 하나를 꺼내 햇빛을 반사시켜 다른 두 포두들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위치로 신호를 보냈다. 잠시 그렇게 신호를 보냈지만 두 포두 들이 있는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왕 포두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군. 그나저나 산적 놈들보다 먼저 움직여야 할 텐데…, 어쩌지?”
산적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만큼 왕 포두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산적들이 먼저 털어 먹고 도망쳐 버린다면, 그들을 잡기 위해 산적들과 싸 워야 할 것이다. 물론 병력의 차가 있으니 산적들을 잡는 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다 눈먼 칼에 다치면 자신만 손해 아닌가. 가장 좋은 방법은 산적보다 저 들을 먼저 털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산적들도 포졸들과 싸우느니 그냥 물러날 게 틀림없다.
“젠장,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아직까지도 도착하지 않고 말이야.”
투덜거리며 왕 포두가 뒤로 돌아섰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이끌고 온 두 명의 포졸들이 어느새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검은색 야행복을 입은 괴한 하나 가 자신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이 아래쪽을 관찰한다고 뒤쪽에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어떻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부하들을 해치울 수 있었을까?
살기를 뿜어내며 괴한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을 암습하려 한 죄, 죽어 마땅하다.”
순간 왕적삼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장사치나 산적이 아니다.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왕적삼은 잽싸게 칼을 뽑아 들었다. “산적들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포졸들에게 손을 쓰다니 당신은 국법이 무섭지도 않소?”
대기하고 있는 포졸들이 들을 수 있도록 왕적삼은 큰 소리로 말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목소리는 가늘게 떨려 나왔다.
“큭큭, 국법? 감히 네가 국법을 논한단 말이냐?”
괴한의 비아냥거림에 왕적삼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애써 입을 놀렸다.
“보아하니 서로 간에 오해가 있는 듯한데 이 정도에서 물러간다면 죄를 묻지 않겠소.”
“오호, 죄를 묻지 않는다? 그건 좀 곤란하지. 그리고 네놈이 아니라 내가 너의 죄를 물을 생각이거든.”
“다, 당신이 뭔데 포두인 내게 죄를?”
“감히 진 대인을 암습하려는 행동 하나만으로도 넌 죽을죄를 지었다.”
순간 왕적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진 대인이라는 말 한마디에 재상 진회가 지방 순시를 나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씨불, 좆됐다. 그냥 주는 거나 챙겨 먹고 돌아가지, 웬 암행??
잽싸게 땅바닥에 엎드린 왕적삼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을 했다. 그동안 열심히 모아 놓은 돈도 써 보지 못하고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했던 것이다.
“제, 제발 살려 주시오. 집에는 팔십 먹은 노모가…….”
퍽!
물론 집에 노모가 있지도 않았지만 상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위해 떠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통하지 않았다. 괴한의 매서운 손에 그는 뒤통수가 함몰 되어 저세상으로 가 버렸다.
“쓰레기 같은 놈. 이런 것들이 관리랍시고 설치고 있으니, 나라가 이 모양이지.”
괴한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주위의 상황을 점검했다.
“이쪽은 얼추 끝났는데 혹시 놓친 놈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군.”
괴한은 진회를 암중에서 호위하고 있는 복면인들 중 한 명이었다.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포졸들은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다. 그럼에도 이렇게 가차 없이 죽 이는 이유는 진회의 암행 순시가 밖에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괴한의 모습은 고개 위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난 진회는 짐을 꾸린 후, 농가의 아낙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남편은 일을 하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만 가 봐야겠네. 어려운 형편에 찾아온 길손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어 고마울 따름이야.”
진회의 말에 아낙은 코가 땅에 닿도록 연신 절을 하며 감사해 했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들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요.”
어제저녁 생각지도 않은 은자 두 냥을 얻게 된 것이 그녀 가족에게는 너무나도 큰 축복이었다. 은자 두 냥으로 식량을 사서, 산에서 캔 나물과 나무껍질을 함께 먹 는다면 내년 가을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녀에게 있어서 진회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은인들을 이리 보낼 수는 없으니, 제발 애들 아버지가 올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진회로서는 난감한 부탁이기는 했지만, 여인의 말을 들어 보니 남편은 새벽녘에 손님들께 대접할 음식 재료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아마 늦어도 점 심나절이면 도착할 테니, 제발 제대로 된 음식이나마 대접하여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그녀는 간청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청했기에 진회는 할 수 없이 떠나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 아낙의 청을 차마 뿌리치고 떠나지 못한 진회 일행은 그날 점심나절이 다 되어 푹 삶 은 닭국을 한 사발 먹은 후에야 그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비록 물을 잔뜩 넣어 끓인 멀건 닭국이었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먹어 본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다고 생 각한 진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