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2권 17화 – 행방불명된 악비 대장군
행방불명된 악비 대장군
임충은 관지 장로의 명령으로 악비 대장군을 호위하고 황도에 와 있었다. 그의 휘하에 있는 1개 천인대를 몽땅 다 데리고 왔지만, 천기나 되는 중무장한 인마를 황 도 안에까지 끌고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황도 안에까지 그와 함께 한 인원은 50기뿐이었고, 나머지는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 그가 들은 대로라면, 이번 임무는 임무라기보다 오히려 유람에 가까운 것이었다. 악비 대장군이 황도에 다녀오는 데, 그가 왕복하는 동안 원거리에서 철저 히 호위하라는 것이 주된 임무다. 황도에는 3만에 달하는 황군이 치안을 유지하고 있기에, 그 안에서까지 그를 호위해 줄 필요는 없었다. 즉, 황도에 도착한 후에는 충분한 자유 시간이 보장되는 최고의 임무였던 것이다.
악비가 일을 다 마칠 때까지 현재 대송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남경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임충의 마음은 꽤나 들떠 있었다.
황도에 도착한 후, 그는 가장 먼저 50기의 인마가 묵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객잔을 확보했다. 교주의 명령에 의해 이곳에 온 것이었기에 객잔에 묵을 돈은 공금으 로 처리된다. 임충은 아주 괜찮은 객잔 하나를 통째로 빌려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수하들과 함께 거하게 술판까지 벌였다.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목에 낀 먼지를 씻 어 내기 위해서.
“대장, 손님이 오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수하의 목소리에 임충은 억지로 눈을 떴다. 새벽녘까지 퍼마신 술이 아직까지도 그의 뒷골을 울리고 있는 중이다.
“아이구, 머리야.”
임충은 머리맡에 놓인 주전자를 집어 주전자가 텅 빌 때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심한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자 그제야 겨우 좀 살 것 같다.
“무슨 일이냐?”
“소진(蘇振) 교령이 대장을 찾습니다.”
소진 교령이라면 이번에 악비 대장군을 수행하고 황도에 온 장수들 중 하나다. 양양성으로 출발하는 날이 정해지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므로, 악비가 볼일을 모 두 마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꽤 오래 있을 줄 알았더니 벌써 돌아가나?”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그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문밖에 수하와 함께 서 있는 소 교령의 모습이 보였다. 어깨가 넓은 근육질의 몸매라서 그런지 푸른색의 전포 (戰袍)가 아주 잘 어울렸다. 눈 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간 그의 사나운 눈매 때문에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황도까지 같이 오는 동안 몇 번 말을 섞어 보니 꽤 나 괜찮은 사내였다.
임충은 소 교령을 보자 히죽 웃으며 옷섶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득득 긁었다. 술이 덜 깬 건지, 잠이 덜 깬 건지 몸이 찌뿌둥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시구려, 소 교령. 같이 해장술이라도 한잔하시겠소?”
소 교령은 창백한 안색으로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큰일 났습니다, 임 대인.”
“큰일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소 교령은 주위를 둘러본 후, 임충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대장군께서 행방불명되셨소이다.”
너무나도 충격이 컸던 탓일까? 아니면 상대의 말을 믿기 힘들었던 것일까? 임충은 멍한 눈으로 소 교령을 잠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농담도 아주 과격하게 하시는구려.”
‘생긴 것만큼이나’라는 말이 생략된, 임충의 농이었다. 하지만 소 교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농담이 아니올시다. 대장군께서는 어제 오후에 10여 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입궁하신 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계시단 말이오.”
“오랜만에 친한 사람이라도 만나서 늘어지게 술이라도…….”
말을 하는 임충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흡족한 웃음을 터트리며 술을 마시고 있는 악비 대장군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절대 그럴 리 없소이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사람을 보내어 연락을 주셨을 것이오.”
창백한 소 교령과는 달리 임충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별거 아닌 일 가지고 아침부터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대송제국의 심장부인 황도다. 그리고 악비 대장군은 대송제국을 지탱하는 실세 중의 실세가 아닌가. 오랜만에 입궁한 악비 대장군에게 잘 보이려고 당연히 사 람들이 줄을 설 테고, 그러다 보면 연락을 못할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황궁에 사람을 보내 보면 알 것 아니오. 어제 대장군은 누구를 만나러 입궁하신 거요?”
“병참감 왕천(王) 장군을 만나러 가셨소. 봄에 공급해 줄 보급품 문제 때문에 상의할 것이 있으니, 양양성 사정에 밝은 고위급 장교를 보내 달라고 왕 장군에게 서 연락이 왔었기 때문이오. 대장군께서는 그런 일이라면 당신께서 직접 왕 장군과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며 입궁하셨소.”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냐는 듯 임충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병참감? 그렇다면 그자에게 가서 문의해 보면 알 수 있겠구려. 대장군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고.”
“본관은 방금 전에 왕 장군과 만나고 오는 길이외다. 괴이하게도 왕 장군은 대장군을 만난 적도 없을 뿐더러, 대장군께 사람을 보낸 적도 없다고 말씀하셨소.” 임충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참,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군. 그렇다면 왕천이라는 자가 보냈다는 심부름꾼은 어디에 있소?”
“알아보고 있는 중이지만 행방이 묘연하오.”
그제야 임충은 사태가 상당히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뭘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젠장, 이런 귀찮은 일이 벌어질 줄 알았으면 인심 쓰는 척하면서 마화에게 양보하는 거였는데…….”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다. 한동안 끙끙댔지만,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책임자는 자신이다. 할 수 없이 벌떡 일어서서 방문을 열자 방금 전에 소 교령을 안내 해 온 수하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봐, 백인장보고 이리 오라고 해.”
“존명!”
얼마 지나지 않아 제11백인대장 왕덕(德)이 달려왔다.
“찾으셨습니까, 천인장님.”
임충은 왕덕에게 사건의 전말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빨리 대장군을 찾아보라고 명령했다.
“누군가 대장군을 접대한다고 거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남경 안의 제법 이름 있다는 술집은 몽땅 다 샅샅이 뒤져 보란 말이다.”
“옛.”
“대신 대장군이 행방불명되었다는 내색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 알겠나?”
“수하들에게 주의시키겠습니다.”
“그리고 혹 사람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 성 밖에 대기하고 있는 녀석들에게 연락을 보내 자네 백인대의 남은 인원 50명도 이리로 합류하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왕덕을 내보낸 후, 임충은 소 교령에게 말했다.
“자네는 그 심부름꾼을 찾아보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을 찾아내야 해. 알겠는가?”
“최선을 다하겠소이다, 임 대인.”
소 교령까지 황급히 떠나고 난 후, 홀로 남은 임충은 물부터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마름은 이제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그의 속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대장군 은 과연 납치된 것인가? 아니면 어딘가에서 술에 취해 골아 떨어져 있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누군가 고위급의 인사와 은밀한 곳에서 만나 밀담을 나누고 있을까? ‘하루! 하루 동안 전력을 다해서 찾는 거야. 그래도 나타나지 않으면 교주님께 연락을 넣는 수밖에.’
내심 그렇게 결심했지만, 아무래도 뭔가 찝찝했다. 괜히 실종되었다고 보고를 올렸는데, 악비 대장군이 어디선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타나면 자기만 교주에게 왕창 깨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젠장, 아주 재수 더럽게 걸렸어.”
그렇게 말하는 임충의 안색은 마치 소태라도 씹은 듯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
순시 행렬이 강서성의 성도(省都) 남창(南昌)을 이틀거리쯤 남겨 놓았을 때 진회는 행렬에 합류했다. 몰래 빠져나간 것이었기에 다시 합류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박 교령에게 연락을 넣자, 그는 인근에서 가장 큰 주루(酒樓)의 이름을 알려 주며 그곳에 준비를 해 두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곧이어 가짜 재상의 화려한 행차가 원청루(園淸樓)를 향했다. 재상께서 인근에서 가장 유명한 원청루에 들러 가벼운 다과를 즐기며 경치를 감상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병사들이 원청루 주변을 완벽하게 에워싼 후, 잡인의 출입을 금했다. 그런 다음 원청루 안을 샅샅이 뒤져 그곳에 있던 손님들까지 모두 내보냈다. 그런 소란 통에 가짜가 진짜로 교체되었고, 재상을 따라 밖으로 나가 개고생을 하고 돌아온 20여 명의 병졸들도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호화로운 관복으로 갈아입은 진회의 안색은 밝지 못했다. 암행 순시를 해 본 결과 백성들의 참담한 현실에 할 말을 잃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굶주려서 뼈만 남은 유랑민, 식량이 없어 자식들을 팔아 버린 부모, 어떤 곳은 심지어 서로 자식을 바꿔 잡아먹기까지 했다. 전쟁의 와중이라 어느 정도 혼란스러울 것이라 짐작은 했지 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진회가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시종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섭 대인이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섭평(平)이라면 중서(中書)에서 재상 다음가는 지위에 있는 존재다. 즉, 재상 진회가 황성을 비운 지금, 그가 가장 강력한 실권자라는 말이 다.
“섭평이? 그래, 무슨 일이라고 하더냐?”
“대인께 독대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독대를? 이상한 일이군. 심부름을 온 자가 독대를 청하다니…….”
무슨 일인가 하여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숙소로 돌아갈 수도 없다. 경치 구경을 핑계로 여기 와 있으니 그만큼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자에게 이리 오라고 일러라.”
“예, 곧바로 사람을 보내겠사옵니다.”
원청루는 3층으로 이뤄진 큰 규모의 주루였다. 진회는 3층에 자리를 잡은 뒤 간단한 요리와 술을 들었고, 1층과 2층은 병사들이 자리 잡고 일절 잡인의 출입을 막 고 있는 상태다. 그런 만큼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누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나이 지긋한 문관이 올라왔다. 진회는 한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자는 바로 섭평의 총관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진회는 눈짓 을 하여 병사에게 나가 보라고 지시한 후, 총관을 반겨 맞이했다.
“자네는 이 총관이 아닌가. 그래, 무슨 일로 독대를 청했느냐?”
“예, 섭 대인께서 이 서신을 재상께 급히 전하라고 하셨사옵니다.”
이 총관은 품속에 소중하게 간직해 온 봉서를 꺼내어 진회에게 바쳤다. 서신을 전하는 데 자신의 가장 충복이라고 할 수 있는 총관을 보낸 것을 보면 대단히 중요 한 서신인 모양이다. 진회는 봉서를 뜯은 후, 재빨리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이게 사실이냐?”
하지만 이 총관은 고개만 더욱 깊게 숙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봉서 안의 내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너는 지금 즉시 돌아가서 섭평에게…….”
진회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총관을 통해 구두로 전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밖에 대고 외쳤다.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시종이 지필묵을 가져오자 그는 섭평에게 전할 내용을 단숨에 써 내려갔다. 그런 다음 서찰을 단단하게 봉인한 후, 이 총관에게 건네주며 신신당부했다. “자네는 지금 즉시 달려가서 이것을 섭평에게 전하게. 최대한 빨리 전해야 하네. 알겠는가?”
“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서라도 최대한 빨리 전하겠사옵니다.”
이 총관이 서둘러 밖으로 나간 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인.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대인을 모시면서 지금처럼 동요하고 계신 모습은 처음 뵙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황도에서 보내온 급전일세.”
<양양성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라도 했습니까?>
양양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말은 곧 금군이 재차 군사를 일으켜 쳐 내려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악비 대장군이 투옥당했다고 하더군.”
이 말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는지, 상대방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마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내 소문을 들으니 무림에 적을 둔 인물들은 경공술이라는 독특한 기술을 익혀 말보다도 빨리 달린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인가?”
<단거리만을 달린다면 말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겠지만, 장거리를 달리면서 말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휴~ 그렇다면 이 총관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만 하는가?”
<대인께서 방금 전에 경공술에 대해 물으신 것이 혹시 서신을 얼마나 빨리 전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그런 것입니까?>
“그 이유였네.”
<그것이라면 이 총관보다 최소한 4일 먼저 황도에 서신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회는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일을 벌 수 있다니…….
“그게 사실인가?”
<예, 저희들은 말이 달리지 못하는 지름길을 달려갈 수 있으니까요.>
“그럼 내 자네에게도 서신을 부탁해야겠구먼.”
진회가 서둘러 밀서를 한 통 작성하자마자, 어디선가 흑의복면을 한 인물 하나가 흡사 바닥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하듯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참지정사 섭평에게 전하게.”
“예.”
흑의복면인은 밀서를 조심스럽게 품속에 집어넣은 후 진회에게 물었다.
“이걸 섭 대인에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최대한 빨리 전해 주기만 하면 되네.”
“예,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진회를 경호하기 위해 이곳에 배치된 인물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경호대주가 직접 그 밀서를 품에 지니고 황도를 향해 달려갔다. 그의 경공 실력이 가장 뛰 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직접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섭평에게 밀서를 보낸 후, 진회는 박 교령을 불러올렸다. 박 교령은 재빨리 달려와 예를 갖췄다.
“찾으셨사옵니까? 대인.”
“지금 바로 황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게. 남은 모든 일정은 취소하도록 하고.”
“예? 황도로 말씀이시옵니까?”
갑작스런 진회의 명령에 박 교령은 당황한 듯 물었다. 하지만 곧이어 냉정을 되찾은 그는 진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바로 돌아가시는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옵소서.”
평소의 박 교령답지 않게 간곡하게 청해 오니, 진회로서도 그걸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왜?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남창이 바로 코앞이옵니다. 여기까지 오셔서 성주(省主)님을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간다면, 예가 아닐 것이옵니다.”
그 말을 듣자 진회는 난감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각 성(省)을 맡고 있는 성주들은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이다. 특히 강서성주 (江西省主) 조권(趙權)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세를 지닌 황족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얼굴도 보이지 않고 그냥 돌아가기에는 뭔가 찜찜한 인물인 것이다. 더군다나 조권은 재상이 순행 온다는 통지를 받고 지금쯤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뒀을 것이다. 그 준비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연회인데, 거기에 참석할 수많은 손님들 에게 이미 초청장을 다 돌려놨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연회에 초청한 사람들 앞에서 재상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권세를 뽐낼 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성주를 보지도 않고 황도로 돌아가 버린다면, 연회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마도 조권의 권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깔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런 치욕적인 일을 당한 조성주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광분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떠올린 진회는 박 교령의 조언이 적절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회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지시를 내렸다.
“자네 말이 옳아. 예정대로 남창을 방문하는 것이 좋겠군. 하지만 그 뒤의 일정은 모두 취소하고, 곧바로 황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게.”
“옛, 명대로 조치해 두겠사옵니다.”
박 교령은 절도 있게 대답한 후, 조심스럽게 재상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는 재상이 갑자기 황도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외적이라도 쳐들어왔다면, 자신의 조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창에 가는 것을 허락한 것으로 보아 정말 화급을 다투는 그런 중대사는 아닌 듯하 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슨 일일까?
“황도에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이옵니까?”
진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악비 대장군이 투옥당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박 교령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예? 어떻게 그럴 수가…….”
“섭평의 보고에 따르면, 추밀사 류태청이 그를 체포한 모양이야. 황상께 대한 항명죄로 말일세.”
추밀사라면 군부의 최고 기관인 추밀원의 우두머리다. 내각이라고 할 수 있는 중서와 더불어 2부(二府)라 불릴 정도니 추밀사의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 인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전의 이야기다.
장수들은 자신들의 병사를 사병화시켜 버린 후, 마치 자기들이 지방의 호족이나 되는 듯 행세하고 있다. 이른바 군벌(軍閥)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추밀원의 지시 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상황이다. 하지만 추밀원은 그들을 징계할 방법이 없었다. 휘하의 모든 장수들이 다 말을 듣지 않는데 그들 을 무슨 방법으로 징죄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이 상황을 더욱 장기화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금나라 오랑캐들이다. 군벌들은 모두 다 금과의 접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 만큼 그들은 금과의 전 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만 했고, 추밀원으로부터 보급물자를 얻어 내기 위해 그들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추밀원은 추밀원대로 군벌들을 혁파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방어선의 중심축을 담담하고 있는 군벌들 중 일부가 수틀린다고 금나라에 투항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송나라가 쫄딱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추밀원은 말 안 듣는 군벌들을 살살 달래 가면서 뒤에서 지원만 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 다.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듯한데, 일정을 계속 유지하실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대인. 이런 중차대한 사유라면 성주님께 잘 아뢰면 그냥 넘어가 주실 지도 모를 일
이 아니옵니까?”
“아닐세, 이미 섭평에게 지시를 내려놨네. 류태청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를 풀어 주도록 하라고 말일세. 나는 나중에 돌아가서 둘을 화해시키기만 하면 될 게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 일이 결코 말처럼 쉬운 게 아님을 박 교령은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송에서 가장 강대한 병권을 쥐고 있는 대 군벌이다. 그런 자를 감 옥에 처박아 놨으니 그게 보통 일이겠는가.
“대인, 이왕에 이렇게 된 것, 그자를 없애 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하지만 진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얕은 소견이라 탓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대인께서도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한 번 틀어져 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말이옵니다. 더 군다나 그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 시에는 대인께 크나큰 위해가 가해질 수도 있음이옵니다. 그가 병사를 이끌고 황도로 진격한다면…….”
하지만 진회는 박 교령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노부는 그를 믿는다. 그는 그렇게 속 좁은 인물이 아니야.”
생각하고 있는 바는 다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송제국에 대한 충성심이다. 비록 사사건건 부딪치고는 있어도 진회에게 있어 이런 혼란한 시국에 악비만큼 듬직한 장수가 없었다. 그런 유능한 장수의 목을 벤다니……. 인재를 아끼는 그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오랜만에 바람을 쐬러 나온 묵향은 풍광이 수려한 만현에 자리 잡고, 모든 일을 잊은 듯 만통음제와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만통음제의 몸이 썩 좋지 못한 상황이라 그와 마음 편히 유람을 다닐 형편은 아니었기에, 이곳 만현 주위의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술과 음(音)을 즐기면서 의형제 간의 정을 흠뻑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묵향의 앞에 갑자기 마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온몸에 먼지투성이인 그녀는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어? 마화가 여기는 어쩐 일이야?”
마화는 묵향에게 인사한 뒤, 그의 뒤편에 서 있는 만통음제에게도 인사했다. 만통음제는 건강을 많이 회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은 듯 약간 핼쑥해 보였다.
“본교에서 온 급전입니다, 교주님.”
마화는 만통음제라는 존재 때문에 직접 보고를 올리는 대신, 서찰을 통해 소식을 전했다. 만통음제는 화경급의 고수, 그가 자신의 보고를 엿들으려고 마음만 먹는 다면 설혹 전음을 사용했다손 치더라도 도청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아무 말 없이 서찰을 받아든 묵향은 서찰의 내용을 읽자마자 삼매진화로 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만통음제를 바라봤 다. 그도 황도에 만통음제를 데려갈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동생. 표정이 많이 굳었구먼.”
묵향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교에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십만대산에 말인가?”
“예, 이렇게 헤어지는 건 썩 내키지 않지만, 지금 당장 떠나야겠습니다.”
십만대산까지는 만 리도 넘는 너무나도 먼 거리다.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아는 만통음제는 십만대산이라는 말 한마디에 따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급한 일이라면 내 걱정은 말고 빨리 가 보게. 아직 몸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동생을 걱정시킬 정도는 아니라네.”
“죄송합니다, 형님.”
만통음제를 속인 것이 조금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마화로 하여금 양양성까지 형님을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닐세. 오랜만에 경치 좋은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야 없지 않겠나. 한동안 이곳에서 유유자적 지내다 돌아갈 생각이네.”
“제가 모시고 왔는데, 급하게 일이 생기다 보니 너무 죄송해서…….”
만통음제는 이럴 때 도움이 되지 못해 더 미안한 모양이다. 그는 묵향이 부담을 가지고 떠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허허, 별말을 다 하네 그려. 그보다 내 제자에게 내가 이곳에 있다고 전해 주게나. 말을 안 하고 와서 걱정할 게야.”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일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달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묵향은 만통음제와 헤어진 후 마화와 함께 최대한 빨리 황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