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2권 20화 – 이 남자가 살아가는 법
이 남자가 살아가는 법
교주의 아버지, 즉 아르티어스가 자기 발로 마교를 나가겠다고 하자 수석장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을 것이다. 총단 내에서 그의 골치를 아프게 만드는 유일한 존 재가 바로 아르티어스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왕지륜이라고 하는 똘똘한 부하 놈을 제공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오래오래 중원 유람을 즐기시라는 바램을 안고, 무 려 은자 만 냥이나 되는 전표를 안겨 줬다.
두둑한 돈이 있으니, 유람이 즐겁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눈치 빠른 왕지륜은 총단을 나선 지 채 며칠 지나지도 않아 아르티어스가 원하는 것이 뭔지 파악해 냈 다. 아르티어는 술을 좋아했고, 지방 고유의 색다른 음식을 먹는 것도 좋아했다. 그리고 모든 드래곤들이 다 그렇듯 아부받는 것도 아주 좋아했다. 성깔 있는 노인네 인 수석장로를 모시며 터득한 아부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왕지륜의 아부가 잘 먹혀 들어간 것은 문화적 차이가 컸다. 마치 입 안의 혀처럼 곰살맞게 구는 왕지륜의 아부는 지금까지 기사도니 뭐니 하는 인간들의 뻣뻣 한 아부와는 비교 자체를 불허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르티어스는 흡족해했고, 왕지륜은 처음과 달리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아르티어스를 모실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살얼음을 걷는 듯한 심정으로 필사적인 아부를 해야 했지만 말이다.
양양성으로 가며 왕지륜은 경치 좋다는 곳이 있으면 조금 길을 돌아가더라도 그쪽을 경유해서 갔고, 맛난 음식을 제공한다는 곳이 있다면 필히 그곳을 들렀다. 거 기다가 부드러운 그의 세치 혓바닥으로 연신 아부까지 해 대니, 아르티어스로서는 이국적인 풍취를 흠뻑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어쨌건 그 둘은 총단을 떠나 양양성을 향해 천천히 이동했다. 마교 총단에서 양양성으로 들어가는 길이야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왕지륜이 기가 막힌 풍광 을 자랑하는 장강삼협을 이동로에서 빼 놨을 리 없다.
만현에 도착한 왕지륜은 최고급 객잔을 골라 가장 훌륭한 방을 빌렸다. 그곳에서 아르티어스가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해 놓은 후, 그는 밖으로 나가 주 위를 돌아다니며 이곳에서 가장 음식 솜씨가 뛰어난 객잔이 어딘지, 그리고 특산의 명주(名酒)는 어떤 것이 있나 알아봤다.
그날 저녁, 화려한 누각에서 아르티어스가 아름다운 여인의 시중을 받으며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을 때, 이제 겨우 퍼지고 앉아서 쉴 여유를 얻게 된 왕지륜은 간 단한 안주를 시켜 놓고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젠장, 내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이제 익숙해져 아르티어스를 모시는 것이 그런대로 편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잡아먹을 듯 들볶으면서도, 마음에 들게 잘 처리했을 때는 마치 그게 당연하기라도 한 듯 아무런 치하도 없다. 아르티어스의 행태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었다. 수석장로마저도 그의 앞에서 벌벌 떠는 판에, 자신이 뭐라고 배짱을 튕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수백 장에 달하는 두툼한 전표 다발들이 만져졌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야말로 돈을 물 쓰듯 써 댔지만, 별로 줄어든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이걸 들고 확 튀어 버려?”
은자 만 냥, 평생 돈을 물 쓰듯 해도 아마 다 쓰기 힘들 것이다. 거대한 장원을 하나 구입하고, 수십 명의 하인과 하녀들을 고용한다. 그런 다음 아름다운 여인을 부 인으로 맞이해서, 아들 딸 낳아 오손도손……. 왕지륜의 머릿속에는 귀여운 아이들에게 마교의 검술을 가르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그때, 문짝이 부서지며 수석장로가 등장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왕지륜은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수석장로님. 여기는 어쩐 일로 친히……”
어디서 쥐어 터졌는지 얼굴이 떡이 되어 있는 수석장로가 악에 받쳐 외쳤다.
“어르신을 뫼시고 양양성으로 가라고 했더니, 도중에 돈을 들고 튀어? 이런 망할 새끼. 내가 네놈 때문에 어르신께 얼마나 깨졌는지 알기나 해? 태어난 걸 후회하 게 만들어 주마.”
가공할 만한 무공을 지닌 수석장로에게 애초부터 대항은 불가능. 그렇게 자신의 부인과 아들과 딸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여기까지 상상하던 왕지륜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돈 들고 튀어 봐야 마교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면, 아무리 중원이 넓다 해도 숨어 들어갈 곳이 없었다. 마교의 의뢰를 받은 중원의 청부 단체라는 청부 단체들은 몽땅 다 자신을 쫓을 테니,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젠장, 양양성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 시중을 들라고 하면 어쩌지?”
어쩔 수 있나? 아르티어스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어야지. 신경질적으로 술을 단번에 들이켠 왕지륜은 기루의 총관을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손님.”
엄청난 돈을 써대는 특급 손님이다. 그런 만큼 총관의 얼굴에는 비굴한 미소가 연신 떠오른다.
“어르신께서 흡족해하시던가? 만약 그분께 내가 나중에 잔소리를 듣게 된다면, 자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게 될 게야.”
그렇게 말하며 왕지륜은 술잔을 꽉 쥐었다 놨다. 그의 손이 펴지자 술잔이 마치 곱게 갈아놓은 모래처럼 가루가 되어 탁자 위에 떨어졌다. 그걸 본 총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보고 이미 느꼈었지만, 이 손님은 무림인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본루 최고의 기녀들인 매향과 월아가 시중을 들어 드리고 있습니다. 절대 대접이 소홀했다는 말씀은 하시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채찍을 가했으면 이제 당근도 줘야 했다. 왕지륜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잘 모시면 자네에게도 은자 열 냥을 주겠네. 그러니 잘해 주기 바라네. 알겠는가?”
자신에게까지 떨어질 몫이 있다는데, 총관은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염려 놓으십시오. 아예 뼈가 흐물흐물 녹아 버리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헤헤헤.”
“자, 빨리 가서 최선을 다해 봐.”
“옛.”
오늘도 무사히 끝날 수 있을 것 같다. 왕지륜은 밖에 대고 술상을 좀 더 봐 오고, 예쁜 아가씨 한 명을 들이라고 일렀다. 여자에 둘러싸인 아르티어스는 내일 아침이 될 때까지 자신을 찾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도 좀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순간부터 간덩이가 조금씩 커지고 있는 왕지륜이었다.
양 옆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는 아르티어스, 드래곤이 변신한 몸인 만큼 아무리 먹고 마셔도 살찔 염려가 없으니 얼 마나 좋은가. 한참 기분 좋게 즐기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률(音律)이 그의 귀에 흘러 들어왔다. 홀린 듯 그 소리에 취해 있을 때, 옆에 앉아 있는 계집이 콧 소리를 울리며 살짝 안겨 왔다.
“대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소첩들이 뭐 잘못한게 있나요?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모처럼 음악에 취해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계집이 옆에서 방해를 하자 아르티어스의 눈이 분노로 번쩍 뜨였다.
“이런 멍청한 년, 잘 안 들리잖아!”
아르티어스가 벌떡 일어서자, 계집들이 그의 몸을 재빨리 붙잡았다. 자신들의 시중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엄청난 돈을 지닌 봉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놓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하룻밤 잘만 하면 팔자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상공, 제발 불만이 있으시면…….?”
실랑이 할 시간도 아까웠기에 그냥 가려 했는데, 감히 엉겨 붙어? 아르티어스의 손이 모질게 움직였다.
짝!
“아악!”
갑자기 손찌검을 하자, 그녀들은 놀란 모양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위대한 종족인 드래곤인 자신에게, 저 계집들은 비천한 호비트의 아종일 뿐이었으니까.
이때 잔잔하게 들려오던 음률이 끊어질 듯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음률을 좀 더 들어 보고 싶었다. 계집과 실랑이를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정신을 집중해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팟 하고 그의 몸이 꺼지듯 사라졌다. 공간 이동을 한 것이다.
산 정상 근처 바위 위에 앉아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금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신선이라도 현세에 내려온 듯, 탈속한 분위기를 풍긴다. “호오, 정말 그럴듯하군.”
이렇게 감탄하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몸은 지금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다. 아무런 자료도 없는 위치로 공간 이동을 하자니, 당연히 가급적 높은 허공 위쪽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게 가장 안전하니 말이다.
감탄성 때문에 아르티어스의 위치가 상대방에게 들켜 버렸다. 바위 위에 앉아 금을 타던 사람의 시선이 빠른 속도로 주위를 훑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의 기척 이 없다. 이때 그는 허공 위에 떠 있는 기척을 읽었다. 당황한 그의 시선이 하늘 위를 향했다.
아르티어스와 상대의 눈이 마주쳤다. 이제 겨우 20대 후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탱탱한 얼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아름다운 수염을 늘 어뜨리고 있다. 얼굴이 너무 젊게 보이다 보니 마치 가짜 수염을 단 듯한 느낌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아르티어스로서는 이놈이 장난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모습은 괴이하기만 했다.
달빛 아래 천하의 사고뭉치 아르티어스가 만통음제라는 기인을 만나 얻은 첫인상이었다.
<묵향>23권에 계속』